2000-10-11
너무나 역설적이지만 주고 받는 것이 원칙인 협상에서 양보는 최대의 적이자 금기사항이다. 협상 전문가들은 당신의 교과서에서 '선의의 양보'란 항목을 아예 빼어버리라고 극언할 정도다. 선의의 양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이유를 댄다. 첫째, 내가 몇가지 먼저 양보함으로써 상대방을 부드럽게 만든다. 둘째, 협상은 진전되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양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선의의 양보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경하게 만든다. 최초의 요구를 너무 적게 하고 양보를 지나치게 빨리 하면 외려 합의도달 가능성이 적어지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는 사실은 협상학의 상식이다. 이는 상대방이 상응하는 양보를 하기는커녕 더 많은 양보를 기대하는 추적현상 때문이다. 양보가 나쁜 또다른 이유는 선례를 만드는 탓이다. 그래서 협상학에서는 성 프란체스코가 되기보다는 구두쇠 스크루지가 되라고 주저없이 단언한다.협상의 제1 계명은 상대방의 첫 제안은 절대로 수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능한 협상가일수록 협상이 깨질까봐 두려워한다.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보가 협상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전략전술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최근 들어 대우자동차.한보철강 매각, 남북회담 등의 협상대표들과 정부가 국민적 동네북이 되고 있는 것은 협상수칙 1조부터 지키지 않은 아마추어인 탓이다. 협상력과 복잡한 전략전술은 그 다음의 문제다. 이런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순진무구하다'는 말밖에 더 할수 없다는 게 협상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지난 6월초 방한했던 하버드대의 저명한 협상학자 데이비스 스미스 교수는 지난해 한.일 어업협상에서 쌍끌이 어로문제를 누락시킨 우를 범한 것을 통탄하면서 이렇게 촌평했다. "한국 공무원들이 6개월만 교육을 받았다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부 고문으로 있는 한 동남아국가에 한국기업이 합작투자할 때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판단, 협상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우리의 협상능력이 비판의 도마위에 오른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자칫 국제사회에서 협상무능력 국가로 낙인 찍혀 국제적인 봉(鳳)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협상에 관한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사회주의국가 대부분이 협상의 명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은 이미 미국이 혀를 내두르는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돼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6.25 전쟁 휴전협상 당시 첫 유엔측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의 회고록을 보면 북한은 소홀히 해도 괜찮을 부분까지 꼼꼼히 챙긴다. 이 회고록은 미국의 협상학 교재에 사례연구로 등장할 정도다. 실제로 전문가들이 곳곳에 포진한 북한은 강대국들과의 협상은 더할 나위 없고 남북대화에서도 거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세계에서 맨처음 독립학문으로 연구하는 하버드대가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협상학을 중시한다. 이웃 일본만 해도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협상학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93년부터 경력직 외교관 채용에 협상시험을 도입했다. 심지어 경력 10개월짜리 신참 외교관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훈련에도 협상을 정식과목으로 채택했다.

우리 나라도 지난 95년 협상학회가 만들어진 이후 학문적 관심이 일기 시작했으나 정부차원이나 사회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현장을 보면 알고도 남는다. 협상력 강화는 더욱 거세질 세계화시대의 국제통상협상은 물론 남북통일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들과 수없이 많은 막전.막후 협상을 불가피하게 진행해야 할 우리가 풀지 않으면 안될 숙제다.

협상학자들은 선천적인 소질이 없더라도 협상의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면 누구나 훌륭한 협상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제통상협상학과정을 개설한 국제대학원도 생겨날 정도이지만 우리 정부관계자들은 비밀스런 일이 많아선지 그나마 민간 전문가들의 활용을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신문 프로필에 '협상의 명수'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한국의 고위관료가 단 몇 명이라도 탄생하는 날은 언제쯤 일까.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9-06
협상학의 기본전제가 되는 '주고 받기'에 관한 실험조사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일정기간 동안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된 'give and take'의 빈도를 측정한 것이다. 그 결과 give가 2,184번이었던 반면 take는 무려 7,000번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실험결과에 비춰보면 남북정상회담 이후 줄을 잇는 양측의 각종 협상에서 남측이 지나치게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주고 받더라도 속으론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인 게 사람들의 심리이기 때문이다.지난 주말의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전국민의 73%가 남북관계는 남한의 일방적인 양보에 기초하고 있다고 여긴다. 남측이 장소, 일정, 회담대표, 의제를 비롯한 협상 구성요소의 상당부분을 북측의 뜻에 따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 이후 일방적인 양보에 대한 비판론은 한층 거세진 듯하다. 특히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송환과 관련해 상호주의는 아니더라도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정부측에서도 모종의 방책을 세우고 있음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내비쳤다. 우리 정부측에서는 이들을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 포함시켜 해결하는 방안과 또다른 방법을 검토중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또다른 방법은 탈북형식으로 이들을 북에서 추방하고 남측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우회전략의 하나다. 정공법이 아닌 비공개, 비공식적인 해법인 셈이다. 물론 체면과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는 북한측의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보수계층에서는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편법이라고 질타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특유의 '광폭정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북측은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은 있어도 강제 납북자와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앞으로도 공개적으로는 이런 입장을 바꾸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들어 설명하는 북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남측의 가족을 위해서도 가장 현실적 방안을 찾는 것에 대해 비난 일변도로 나갈 필요는 없다.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남긴다는 이유를 들어 납득하지 못하는 국민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비극의 연장보다는 낫다. 비극의 연장은 또다른 비극이다.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도 노예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비난의 소지가 있는 편법을 썼다. 노예해방을 명시한 수정헌법 13조 표결 당시 가결정족수인 상.하 양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기 위해 2명의 의원을 매수했다. 그는 당시 공화당 의원 2명에게 특명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개헌에 의한 노예제 혁파는 지금 발이 묶여 있는 수백만명의 노예와 앞으로 태어날 또다른 수백만명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사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2표를 얻어내야 합니다". 결국 2표는 매수되어 노예제는 영구히 철폐되었다. 그는 정당한 목적이 매수라는 부정적인 수단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존경받는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여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나치 당국에 뇌물을 준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영국에 있던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빈에 살고 있던 여동생 2명이 나치 '종족법'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독일로 달려가 나치 당국과 협상끝에 뇌물을 주고 두 동생을 구한 것이다. 학자들은 학대행위를 막기 위해 그 당시에 통용되는 유효한 수단을 동원한 행위를 부당하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변호한다.

앞서 살다간 일부 성현들도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니고 굽은 길이 도리어 곧은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설파하곤 했다. 일시적인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고통받는 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귀환시키는 것이 낫다.

서독과 동독의 경우에도 정치범 석방을 위해 돈으로 비정상적인 거래를 한 전례가 있다. 원칙을 지키지 않고 우회했다고 손가락질만 받을 일은 아니다. 당장은 양보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정들이 쌓여갈 때 남북관계에서도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명제가 유용하다.

김학순/편집국 부국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6-28
엊그제 실시된 일본의 총선결과를 보면서 불현듯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한 대학연구소가 주요 국가 국민들의 유전자(DNA)에 관해 연구한 결과 일본은 속된 표현으로 '튀는 사람'이 나타나기 힘든 나라라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l형과 s형이라는 유전자와 성격의 상관관계를 밝혀준다. l형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다소 특이한 타입이며, s형은 신중.성실하고 신뢰성이 높은 유형이다. 일본인을 조사해 보면 l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1.8%에 불과하다. l형과 s형을 혼합한 유형이 28%안팎이며, s형은 70%에 이른다. 압도적으로 다수인 70%정도는 선천적으로 보수적인 셈이다. 좀더 넓게 보면 약 98%에 달하는 일본인이 어느 정도 또는 매우 보수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결론에 이른다.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회장은 이같은 유전자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일본에서 벤처기업이 융성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진단한다. 때마침 '인간 유전자 지도'로 불리는 인간게놈의 판독결과가 발표된 것을 보면 국민 유전자 연구결과는 호사가들의 흥미에 그칠 일만은 아닌 듯하다.이 연구결과는 '새 천년의 가늠자'라는 거창한 의미가 부여된 첫 총선에서 일본국민이 불만스럽지만 정권교체보다 안정을 선택한 까닭을 원초적 국민성에서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일본 국민의 보수성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조심성과 외국 불신감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있긴 하다. 어쨌든 다소의 세대교체와 야당인 민주당의 약진이 있긴 했지만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국민 특유의 심리가 이번 선거에서도 작용했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같은 선거결과 잇단 국수주의적 망언으로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은 모리 요시로(森喜明) 총리가 이끄는 연립정권이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1990년대의 불과 몇년을 제외하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의 거의 전부를 보수적인 자민당에 국정을 맡겨온 게 일본 국민이다. 한국의 4.13총선을 본받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도 일본에서는 그리 먹혀들지 않았다.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실 자체는 일본 국민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사항이지만, 문제는 그 결과가 이웃나라들에 걱정을 파급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보수우익 개헌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지 않을까 주변국들은 염려하고 있다. 총선 직전 '신(神)의 나라', 천황중심의 국가운영체제를 일컫는 '국체(國體)', 제국주의 시대의 용어인 '총후(銃後)' 등 주목할 만한 발언을 일삼은 모리총리가 국민의 보수성향을 등에 업고 이웃에 우려를 심어줄 개연성이 큰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거 럭비선수였던 모리총리의 행보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러잖아도 오는 9월 도쿄에서는 대표적인 극우인물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지사의 각본아래 '방재훈련'을 빙자한 대규모 '자위대 쇼'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까지 나와 있다. 게다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일본이 안보전략을 한층 보수적으로 재검토할 것이라는 관측도 대두했다. 이미 일본정부는 방위청의 성(省)승격, 자위대의 다국적군 참가, 국기(히노마루)와 국가(기미가요)의 복원, 유사시 법제 정비,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주도면밀하게 군사대국화를 추진중이다. 그들은 이를 군사적 '보통국가'로의 복귀라고 우기고 있지만 이웃나라들이 보기엔 맹목적인 애국심과 협량(狹量)한 군국주의의 부활이나 다름없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로서는 위험하다는 차원을 넘어 차라리 안쓰런 심정이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공동개최, 대중문화개방, 합동군사훈련 실시 등으로 끊임없이 우의를 다지고 있는 두나라가 얼굴을 붉힐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일본정부와 국민이 미국의 한 연구결과처럼 그것을 생래적 한계로 돌린다면 더 할말이 없겠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변화의 에너지를 충전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지구촌'을 흔쾌히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풍요로워졌지만 행복하지 못한 일본'이라는 비아냥도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친구나라 국민의 진솔한 마음이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5-03
"살아남는 종(種)은 강한 것도,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오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 뿐이다". 찰스 다윈이 140여년 전 진화론을 제기하면서 한 얘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유연성을 가진 생물만이 오늘날 지구상에 상존한다. 덩치가 크고 힘센 종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공룡은 뼈와 화석으로만 남아 있다.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새 밀레니엄을 주도할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떠오른다. 격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유연성이 비교우위를 점한다는 학설이 21세기에는 더욱 주목받을 만한 조짐을 보여준다.

명망있는 문명사학자들은 이미 이를 예견하고 있다. 클린턴 미 행정부 1기 내각에서 국방차관보를 지낸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박사같은 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한 '경성국가'가 아니라 학문.사상.예술이 중심이 되는 '연성국가'가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어떤 이들은 부드러움과 유연성의 상징인 여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 패러다임의 시험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대표주자는 요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한창 '뜨고 있는' 3종목이다. 386세대로 표상되는 젊은 정치개혁 세력,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벤처기업, 제5의 권력으로 일컬어지는 시민운동단체(NGO)가 그것이다.

너도나도 뛰어들고 보는 벤처기업들 가운데서는 기껏해야 10% 내외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나라 안팎에서 경보음이 쏟아진다. 심지어 1%에도 못미칠 것이라는 극단론도 나온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생존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예상밖으로 낮다는 노란불 신호는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 수없이 명멸해간 생물들 못지않게 많은 벤처기업들이 거품처럼 사라져 갈 것이다. 힘과 규모의 논리만으로는 '노아의 홍수'와도 같은 벤처산업의 격랑에서 헤쳐나오기 어렵다. 궁극에는 급변하는 환경에 임기응변과 유연성으로 적응하는 극소수만 적자(適者)로 생존할 것이다. 마치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때처럼 뒤질세라 '묻지마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웹경제학자 에번 슈워츠는 '디지털 다위니즘'으로 경각심을 일깨운다. 시민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16대 총선과정의 성공에 고무돼 비 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늘어날 시민단체들에도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은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있는 시민운동이지만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지 못하면 멀지않아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가정(假定)을 뜨거운 가슴속에 새기는 게 좋을 듯하다.

엘리트적 교화보다 시민과 호흡을 함께 하며 그들 속으로 파고 드는 부드러움의 묘미가 비결일 수 있다. 만에 하나 선(善)의 경직성과 정의(正義)의 독선이 악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전통과 화끈함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의 유혹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386세대의 정치인들만 해도 그렇다.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기댓값은 잔뜩 부푼 풍선같다. 그들 스스로도 비상한 각오로 16대 국회의 개원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상한가를 치고 있는 '젊은 피' 정치인들이 앞으로 모두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행여 그들만의 또다른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무리수를 둘 경우 여망을 저버릴 개연성도 적지 않다. 정치의 세계야말로 원칙을 중시하되 신축성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무대다. 잘 나갈 때일수록 신중하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혜안을 필요로 한다. 민초들은 대쪽같은 강인함을 주문하곤 한다. 거기에 고의성없는 함정이 내재할 수 있다.

격변기에는 한 개인도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프로테우스형 인간'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처방전을 내놓는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조직에도 이 해법이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시키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바탕한 프로테우스형 인간이다. 프로테우스적 유연성은 자칫 기회주의로 비쳐지기 쉽다. 이 때문에 누구나 선택을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진정한 경쟁력을 갖는다.

김학순 / 편집국부국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3-17
자유당 정권시절 이승만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한 각료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절묘한 맞장구를 쳤다는 에피소드는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된다. 이 얘기는 윗사람, 특히 최고권력자에 대한 '아부의 극치'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얼마전 청와대 행사에서 현대판 용비어천가를 부른 고위 공직자가 구설수에 올랐을 때도 '방귀사건'이 한 술자리에서 화제의 안주로 등장했을 정도다."시원하시겠습니다" 사건의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된 이익흥 당시 내무장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매우 그럴듯한 일화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폭로했던 국회의원은 조선시대때 한 내시가 왕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다는 사실(史實)을 들었던 터라 우스갯소리로 지어냈다고 먼 훗날 번복했다는 것이다. 국회속기록에도 그의 해명이 남아 있다고 박준규 국회의장이 최근 한 사석에서 털어놨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언론에 폭로해 기정사실처럼 돼버린, '없는' 이 사건을 거의 모든 국민이 여전히 '진실'로 믿고 있다. 여기에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폭로만 보도했을 뿐 진실을 밝혀내고 전하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조작한 에피소드 때문에 이 전장관의 가족과 친척이 입은 수모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현직 고위 경찰간부인 그의 아들은 진급 때도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본인이 아무리 부인한들 먹혀들 리 없었던 게 우리 사회였던데다 자녀들이 일일이 해명하기가 구차스러웠던 적도 많았다고 한다.

정치인의 무책임한 말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낳는지를 이 사건이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 장난삼아 논에 돌을 던지지만 돌에 맞은 개구리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비유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폭로는 수십년이 지난 요즘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곳곳에서 체감하게 된다. 총선이 임박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근거가 희박한 폭로나 음해성 발언을 쏟아내듯 하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흐지부지 넘어가곤 하는 게 고질적인 우리 정치풍토지만 맹성(猛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네 탓만 있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정치인조차 사실을 입증할 만큼 구체성이 없는 내용을 폭로한 뒤 얼버무린 사례는 실망감을 더해 준다. 말로만 변화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다는 이른바 NATO(No Action Talking Only)행태가 정치인의 폭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한 야당 총재의 발언 때문에 유행어가 돼 버린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폭로공방은 투표일이 임박해지면서 더욱 난무하지 않을까 국민들은 우려한다. 사실무근임이 드러난 뒤에도 여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폭로의 속성을 정치인들이 악용하는 탓이다.

폭로는 당연히 사실이 전제돼야 하겠지만 사실무근임이 드러날 경우 스스로 정정하고 떳떳하게 사과해야 향후의 폭로 때도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1차적으로 정치인의 윤리와 도덕성의 문제다. 시대가 달라져 가고 있음을 정치인들이 자각해야 할 때도 됐다.

정치권의 자성이 없으면 폭로의 진실성 여부를 가려내야 할 책무는 현실적으로 언론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언론의 속성도 비리폭로에서 비켜나갈 수 없긴 마찬가지다. 언론의 성장사가 폭로저널리즘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처럼 여야의 공방만 중계할 게 아니라 폭로내용을 끝까지 추적해 사실 여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최근들어 힘을 얻고 있는 시민들의 닦달이 정치권과 언론의 직무유기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노력을 감안하더라도 폭로의 진실성을 가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 저항시인 예프토치엔코가 "정의와 진실은 완행열차처럼 항상 늦게야 도착한다"는 명언을 남겼듯이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공감하고 있을 법한 얘기임에 틀림없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3-03
정치는 아무런 준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설파한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론이 한국의 정치 신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며칠전 공천을 반납한 민병철 중앙대 겸임교수와 윤방부 연세대 의대 교수의 사례는 이를 처절하게 반증한다.

"정치는 준비가 된 사람이 해야하며 섣불리 뛰어들어서는 안된다". 민교수의 비감어린 경험담이다. 4월 총선 출마 제의를 받은지 하루만에 수락한 자신의 단견과 '현실의 벽'이 그의 회한 한마디에 녹아나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결짓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면역과 이해가 부족함을 절감했다". '6일간의 외도'를 한 윤교수의 경우도 표현만 다를 뿐 좌절의 이유는 흡사하다.

존 스튜어트 밀의 영국 사례는 이들과 정반대다. 그가 이른바 '젊은 피'를 지나도 한참 지난 60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할 때의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선거구 유지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를 수락할 때 그는 4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선거운동에 돈을 쓰지 않는다. 둘째 선거운동도 하지 않는다. 셋째 당선이 되어도 지방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넷째 당의 의견에 구속받지 않는다. 가히 이상주의의 극치를 보는 듯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있게 말했다. "이런 조건으로는 전지전능한 신도 당선되기 어렵다"
선거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 것과 정반대였다. 흔히 책상물림으로 여기는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밀의 당당한 승리로 나타났던 것이다. 자신이 내세웠던 조건들을 그대로 지켰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세기 초의 영국과 정치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정치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과 사정이 사뭇 딴 판인지는 모른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인 데다 특수한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밀과 흡사하게 지명도가 높은 한국의 두 교수가 겪은 좌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무대인 정치판에 멋모르고 뛰어들었던 두 지성인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준비없는 신인의 한계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계 전문가들이 자신의 특정분야에서 곁눈을 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파도록 만들어주는 분위기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이 정치로 통하도록 돼 있는 한국사회의 풍토가 전문가들의 외도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 역시 새삼스럽지 않다. 유혹의 손길에 넘어가지 않는 것은 당사자들의 1차적인 책임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지명도를 갖춰 싹수만 보이면 온갖 당의정(糖衣錠)을 동원해 끌어들인 뒤 '1회용 반창고' 신세를 만들어 버리는 정치권의 행태가 근절되지 않는 한 윤방부.민병철교수의 전철이 되풀이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윤교수를 실망시켰던 선거브로커들의 '돈요구'라는 구태를 통탄하고 꾸짖는 시람들이 훨씬 많다. 깨끗한 정치의 꿈을 펼치려다 4각의 링위에 오르기 전에 수건을 던져버리고 마는 정치 신인들이 예상밖으로 속출하고 있는 게 이번 총선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뿐만 아니다. "바꿔. 바꿔"라는 시민단체들의 외침과는 달리 현실은 기성 정치인을 대체할 신인들이 링위에 오를 자격을 얻고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다. 애초부터 규칙이 신인에게 불리하게 돼 있는 탓이다.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신인들이 문턱부터 좌절을 맛보지 않도록 선거브로커와 유권자들의 구태를 막는 것을 선거관리위원회와 사법당국에만 맡겨 놓을 수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합리한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도 화급하지만 정부와 기성 정치권에는 기대를 걸 수 없는 형편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이들을 압박해 나갈 책무를 시민단체들에 지우고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실정도 유감스럽지만 현상(現狀)이다. 시민단체들이 부담이 많지만 더욱 힘을 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김학순 정치부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01-14

엊그제 발표된 한 유명서점의 신년초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약간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김용옥 교수의 '노자와 21세기'와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인 스님 현각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와 원성 스님의 '풍경'이 나란히 4, 6위에 올라 있다.

불교철학이나 노장사상을 담은 이 책들은 언뜻 보기엔 인터넷, 정보화, 사이버사회 등 첨단주제의 담론이나 시대흐름과는 하나같이 거리감이 있는 것들이다. 나라 안팎에서 희망과 장밋빛 미래를 들먹이며 떠들썩하게 맞은 '새천년의 벽두'라는 분위기와도 어쩐지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복잡다기하고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상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심리가 독서경향에 투영되고 있음이 어렵잖게 읽혀진다. 마음은 비우는 게 낫다는 평정된 국민정서의 한 단층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뉴 밀레니엄'과 함께 새로운 정치와 새 패러다임을 운위하며 거창한 구호들을 내걸고 16대 총선에 임하는 과욕의 정치권과는 사뭇 대조를 이룬다. 우리 정치판은 변화와 개혁을 늘상 요란하게 외치지만 실제로는 달라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새해 초에도 변함없는 민심인 것 같다.

올해 총선정국은 여야만 바뀌었을 뿐 4년전과 매우 흡사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연극의 등장인물이 몇몇 교체되긴 했지만 무대장치나 상황전개는 닮은 점이 너무 많다.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우리네 속설을 실증하는 듯하다.

겉모양을 보면 집권당이 새 당명과 일부 인물 영입으로 신장개업을 가장하는 것이 똑같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달리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개명만 한 것이나 다름없다. YS가 이회창 현 한나라당총재를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기용한 것처럼 DJ는 득표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인제 당무위원을 선대위원장으로 사실상 내정한 단계다. 지난 1996년에는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가 민자당에서 팽(烹)당한 뒤 신당을 만들어 선거에 임했던 것과 유사하게 이번에는 DJ의 합당요청을 뿌리치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어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3당구도로 총선을 치르게 됐다. 새로운 피를 수혈한답시고 전문분야에서 그대로 키우는 게 좋을 성싶은 스타급 인물을 경쟁적으로 영입하는 것도 15대 총선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의 내용물은 변혁의 흔적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정당의 조직과 운영, 선거운동방법은 거의 그대로여서 '대망의 2000년대'를 거론할 자격조차 없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정치개혁특위라는 허울좋은 기구는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하는 기성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옛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게 만드는 직무유기를 범했다. 고비용.저효율의 정치문화를 획기적으로 뜯어 고치겠다는 숭고한(?) 목적은 '창피는 순간, 이익은 영원히'라는 속어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시민단체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저항하는 정치권의 철면피를 도리어 지탄하는 목소리가 언론사에 빗발치고 있다.

지난해 비행기사고로 세상을 등진 존 F 케네디 2세의 역설적인 '철면피론'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대로 적용되는지도 모른다. 케네디 2세는 2년전쯤 방한했을 때 정치인의 조건으로 "잘 알려진 섹스스캔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철면피가 돼야 한다"는 걸 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마라조프의 형제들'에서 오래전에 갈파했듯이 "인류와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일수록 개개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는 얘기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기 때문일까.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없이 철면피를 고수하는 한 정치권의 신뢰회복은 불가능하게 돼 있다. 누가 먼저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 오느냐가 당면한 총선의 승부도 좌우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상대방에 비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느냐는 비교우위적 해명은 먹혀들지 않는다. 그것도 정치인들의 특기인 말부터가 아니라 실천의 선수(先手)가 관건이다. 정치부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99-11-26
옷로비 의혹사건은 적어도 3가지 측면에서 반면교사가 된다. 거짓말의 확대재생산 법칙,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공직자의 문서관리수칙이 그것이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흘려들어선 안될 것들임에 틀림없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 엊그제 『 저희 부부의 처신이 반면교사가 되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간곡히 희망한다』며 국민 앞에 사죄한 성명서에도 3가지 측면은 어김없이 함축돼 있다.이번 사건은 무엇보다 공직자의 기본의무인 문서관리가 어느 정도 허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전범(典範)이다. 국가 중추기관의 기밀사항이 사인(私人)의 손을 3번이나 거쳐 온국민에게 공개되도록 만든 장본인이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수장(首長)이라는 사실에 이르면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는다.

당시 검찰총장 부인이 통일부장관 부인에게 국가기관이 작성한 기밀문건을 넘겨주는 현장에 행정자치부장관 부인이 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면서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행자부장관은 기밀문서가 담긴 정부기록보존소를 관리하는 국무위원이기 때문이다.

현장에 있었던 행자부장관 부인의 말은 한층 걸작이다. 문제의 문건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검찰총장 부인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태연스럽다. 『 묻지 않았다. 검찰총장의 부인 정도면 그런 문건은 당연히 보는 줄 알았다』
남편이 장관이나 검찰총장이면 부인도 으레 장관이나 검찰총장급 행세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을 지니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최고권력 주변 사람과 부인들의 자세와 처신이 이렇다면 아찔하다는 느낌부터 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사(公私)가 구별되지 않는 우리의 서글픈 현주소다. 「보통검사」의 총수였던 인사가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에게 조사를 받는 일로 확대된 것도 공사유별(公私有別)을 잊었거나 애써 무시한 탓이다.

옷로비 의혹사건은 김대중대통령이 『 언론의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해 마지 않았던 일이다. 김대통령이 이런 확신을 갖게 했던 것은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거짓말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문서유출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옷로비 의혹사건에 국민의 기억이 잠시 묻혀 버린 언론대책문건 사건때 부수적으로 드러난 파행은 이에 못지 않다. 최고의 기밀을 취급하는 국가정보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직무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를 멋대로 들고 나오는 탈법을 저질렀지만 문책은커녕 별 탈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장본인은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으면서도 익히 듣던 『 국민이 원하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내년 총선에서 심판을 받겠다)』는 말로 자기합리화만 할 뿐 자성의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다.

이들 전직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행자부장관 부인만 봐도 고위공직자들의 흐트러진 문서관리의식은 어렵잖게 읽혀진다.

사실 현 정부는 김영삼 정부의 문서관리상태를 타매하고 질책하면서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의 기밀문서 파기를 집중 비판하면서 기록관리를 문제삼은 것은 새 정부가 조선시대보다 못한 기록문화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올해 초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제정해 대통령의 통치문서까지 보존, 관리하려는 의욕을 보여줬다.

이런 노력들은 잇달아 터지고 있는 문서유출사건으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공공기관 기록과 문서의 관리는 국가수준의 척도다. 국가기관의 문건이 개인의 사유물처럼 나돌아 다니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기록문화의 선진국」은 구호로 끝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중추기관의 장이 앞장서 공적인 문서를 제멋대로 다루는 일이 관행처럼 이어진다면 나머지 공직자들에게는 할 말이 없어진다. 지나간 정부의 공문서 파기만 비판하고 국가 중요기관의 기밀이나 다름없는 문건들이 사적인 일에 쓰이는 것을 계속 용인하고 만다면 국민이 「국민의 정부」에 믿음을 줄 것인지 의문이다.   사회부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dr.xn--6ck2bwcu74pofcq24aotk.com/ pradr 財布 2013.04.03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세계를 놓고 말하면 당신은 한 사람이지만,단 한사람을 놓고 말하면 당신은 그라삼의 세계입니다


1999-08-20
이번주 신문 사회면 기사의 백미(白眉)는 단연 두 가지의 반납사건이 아닐까 싶다. 씨랜드 수련원 화재로 아들을 잃은 하키 국가대표 출신 어머니의 훈장반납과 다일복지재단의 김현철씨 기부금 5억원 반납이 그것이다.똑같은 「거부의 미학(美學)」이지만 그 성격은 사뭇 대조를 이룬다. 앞의 일이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는 극단적 감정의 표출이라면 뒷 사건에서는 폭염 속에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함이 배어난다. 옥의 티를 지적하는 이들이 없지 않으나 그들의 행동이 시선을 끌기 위한 제스처나 감정의 사치는 아닌 듯하다.

그러면서도 둘 다 국가와 정치권을 향한 분노의 공개적 표현이라는 공통분모와 적잖은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두 사례는 「향유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냉엄한 거부」를 통한 항의다.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에서 금.은메달을 딴 공로로 훈장을 받은 김순덕씨가 이를 되돌려준 것은 국민의 생명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증오와 엄혹한 규탄이다. 오죽했으면 조국을 떠나 안전을 생명같이 여기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고 했을까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남는다. 『 전직 대통령의 아들은 중죄를 저질러도 온갖 배려를 해주면서 채 피기도 전에 비참하게 숨진 아이들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질타한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큰해진다.

김순덕씨는 우리 모두에게 국가와 정부의 존재이유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의문을 일깨워준 셈이다. 「천둥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다수의 국민에겐 일정 부분의 대리만족감을 제공했다.

두 사례는 시대가 확연하게 변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한다. 따질 것은 분명히 따지는 국민의식의 변화가 어렵잖게 읽혀진다. 씨랜드 수련원 화재로 어린 생명을 「땅이 아닌 가슴」에 묻은 신세대 부모들은 과거처럼 정부의 잘못을 적당히 넘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들은 일반 국민이 모르는 눈물겨운 투쟁을 한달 이상 벌여왔다. 김종필총리 면담이 거절되자 『 총리가 골프를 칠 시간은 있으면서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을 잠깐 만날 시간은 없느냐』고 울분을 터뜨려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부는 훈장반납에 대해 여전히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도리어 김총리는 오리발로 통하는 촌지를 자민련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돌려 개혁의지 부재라며 질타하는 여론의 뭇매에 시달리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여전히 읽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관용」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나만의 성역」을 고집하는 지도자들의 행태가 지속되는 한 깨어 있는 국민들의 「위대한 거부」는 앞으로도 줄을 이을 것이다.

다일복지재단의 경우 비록 완곡하게 해명내용을 담았지만 국정을 농단하며 거액의 부정한 돈을 받은 김현철씨에 대한 강력한 거부 메시지를 던졌다. 나아가 그를 정략적으로 사면한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불만까지 은근히 덧붙이고 있다. 그렇다고 김현철씨의 돈을 받은 단체를 탓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빈민들을 위한 집을 짓는 다일복지재단은 오히려 김현철씨의 돈보다 몸을 파는 여성들의 돈을 더 값지게 여기고 있을 정도다. 「아름다운 거부」에 수많은 시민과 네티즌들로부터 쏟아지는 격려가 함축하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년 총선이나 의식하는 과대포장의 개혁프로그램 남발에 그칠 뿐 앵돌아진 국민의 마음을 진정으로 치유하는 반부패.개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국민의 더 큰 거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공적 1호인 부패의 척결이 선언이나 제도적 장치만으로 이뤄질 성질의 것이라면 오늘날까지 골치를 썩일 현안이 아니다.

대통령이 앞으로 사법부가 단죄한 부패 정치꾼들에 대한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겠다는 실천적 의지 하나만 제대로 지키더라도 몰라볼 만큼 진전이 올 게 틀림없다.  사회부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99-04-07
신문의 역사와 언론 자유를 얘기하자면 영국의 「3 존(John)」을 빼놓을 수 없다. 「3 존」은 「아레오파지티카」의 저자 존 밀턴, 「시민정부론」을 주창한 존 로크,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을 일컫는다.이 가운데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는 서양에서 언론의 자유를 언급한 최초의 책으로 손꼽힌다. 「실낙원」의 저자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밀턴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처음으로 언론 자유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인물인 셈이다. 17세기에 영국의회를 향해 언론검열 반대를 외친 그의 숭고한 뜻은 미국의 독립운동과 프랑스혁명 때도 자유주의의 경전(經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그가 청교도혁명 이후 언론검열관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밀턴의 역설」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밀턴의 영향을 받은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은 이제 초등학생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 정부의 기초는 인민의 의견이므로 정부의 첫째 목적은 그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라야 한다. 신문 없는 정부냐, 정부 없는 신문이냐의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다』
그랬던 제퍼슨도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된 뒤에는 말을 바꾸고 만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제퍼슨의 태도는 정권을 잡은 지 불과 1년 만에 표변한다. 신문들이 자신을 비판하고 공격했기 때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신문들이 중상모략과 거짓으로 가득 찼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김대중대통령도 과거 언론 때문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지만 줄곧 언론에 우호적인 정치지도자로 높은 점수를 얻어왔다. 그는 지난해 「신문의 날」 기념행사장에서 의미깊은 말을 남겨 감명을 줬다. 「비판 없는 찬양보다 우정 있는 비판」을 주문한 사실은 언론인은 물론 국민에게 그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김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제퍼슨의 유명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자신에 찬 말을 했다. 『 나도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1년이 지난 지금 김대통령은 제퍼슨이 취임 1년 후 그랬듯이 언론, 특히 신문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그가 소망했던 「우정 있는 비판」은 언론에서 찾아 볼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최근 들어선 동강 영월댐 건설을 둘러싸고 환경단체에 일방적으로 편을 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빌미로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일부 언론은 그의 말 한마디에 논조가 180도 달라졌다. 공보처의 부활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국정홍보처」라는 순화된 이름에다 각계의 극심한 반발을 의식해 언론정책기능을 문화관광부에 그대로 두긴 했지만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야당시절 언론장악을 그토록 비난해 마지 않던 김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걸어 폐지했던 공보처를 부활함으로써 「말바꾸기」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환경과 입장이 바뀌면 누구나 생각이 변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의 잘못은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면 비판하는 언론에 섭섭함을 느끼는 강도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데 있다. 이런 현상에 관한 한 김대통령의 바로 전임자를 비롯한 역대 집권자들이 이미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개혁의지가 곳곳에서 윤색되고 있지만 개혁에 대한 언론의 의지는 김대통령의 취임 초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김대통령의 주장대로 언론도 내부 개혁의 여지가 적지 않다. 그것과 김대통령의 언론관은 별개의 문제다. 김대통령이 올해 신문의 날인 오늘 또 어떤 멋진 말을 남길까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의 훌륭한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에게는 「일관성」이 더욱 요구된다.
사회부장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