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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일본의 자충수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1984년 10월22일 공산당 원로들의 모임인 중앙고문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이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 문제는 일본과 분쟁 중인 사항이다. 댜오위다오는 일본에서 센카쿠열도(尖閣列島)라고 부르고 있어 이름도 우리와 다르다. 우선 그대로 놓아두면 다음 세대에 가서 더 현명하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의 머릿속에서는 두 나라의 주권 다툼과 관계없이 공동개발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도서 주변의 해저 석유 등을 공동 개발해 공동이익을 얻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싸울 필요도 없고 많은 담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난사군도(南沙群島·Spratly Islands)는 오랫동안 세계지도상에 중국령으로 되어 있어 분명히 중국에 속한 곳이다. 현재는 대만이 섬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가 각각 몇 개의 섬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무력을 사용해 이 섬 모두를 회수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주권문제를 일단 보류해 두고 공동 개발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법은 다년간 누적돼온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다.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을 주장하며, 분쟁도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평화적 방식인가. ‘일국양제’(一國兩制)와 ‘공동개발’이다. 나와 이야기하던 외빈들은 모두 새롭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이 언급한 기자들과의 문답은 1978년 10월 중·일 평화우호조약 조인을 위해 방일했던 당시 기자회견에서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발언은 저우언라이 중국총리가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 회담에서 “댜오위다오 문제는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그건 두 나라가 국교를 회복하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문제에 불과하다”고 했던 말과 같은 상통한다.

 

  중국은 그때 일본의 경제원조를 받는 일이 급선무였기에 영토문제를 덮어놓은 채 후손들에게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청·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1895년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 때 일본에 넘겨준 댜오위다오 해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기 시작해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 중국의 속내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경제적으로나 국제정치·군사적으로 세계 2위의 자리에 올라서자 덩샤오핑의 후대 지도자들은 속내가 달라졌다.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센카쿠 섬들을 민간인 소유에서 국유화하겠다고 공식발표한 것은 울고 싶은 중국의 뺨을 때맞춰 때려준 꼴이다.

                                                                 

 

  지난 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정상회의 때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판단착오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다. 후진타오 주석이 “일본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노다 총리는 고의든 실수든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귀국한 바로 다음날 노다는 각료회의를 열어 센카쿠 열도의 국유화를 결정했다. 일부 외무성 간부들이 국유화를 늦추자고 건의했으나 쇠귀에 경읽기였다고 한다.

 

 중국으로서는 국가주석의 체면이 구겨진 데다, 81년 전 일본군이 중국 침략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으킨 ‘9·18 만주사변일’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 절묘했다. 게다가 중국지도체제를 바꾸는 18차 전당대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때다. 분노가 극에 달한 중국 국민은 전국 100개 도시 이상에서 격렬한 반일시위를 벌였다. 1000여 척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 어선이 댜오위다오에 모여들고 중국 해군 감시선까지 출동해 일본해군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했다.

                                                              

  시진핑 차기 국가주석까지 나서 “일본국내 일부 정치세력이 이웃 나라와 아태 지역 국가에 남긴 전쟁의 상처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한 술 더 떠 댜오위다오 국유화라는 코미디극을 연출하고 있다”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일본이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때 합의한 현상(現狀)유지방침을 저버린 채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영토문제 못지않게 그릇된 역사 인식을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드러낸 건 더 큰 실수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과 촉구발언을 핑계 삼아 극우민족주의 감정을 쏟아낸 것이 한국은 물론 중국까지 자극한 셈이다. 총선거를 앞둔 노다 정권의 국내정치 포석이 작용한 것이지만 일본이 긁어부스럼을 만든 자충수가 될 게 틀림없다. 침략 전쟁의 역사를 부인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국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생떼를 쓰는가 하면 중국 난징대학살 같은 과거사도 왜곡하는 극우현상이 짙어지는 것은 일본의 미래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중국이 평화적 해결을 시사하며 숨을 고르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인 면에서 일본의 손실은 예상을 뛰어넘을 것 같다. 당장 중국은 지난 21일부터 일본이 주최한 세계여행박람회 참가 계획을 취소해 버렸다.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의 표시로 23일 중일 수교 40주년 기념행사도 무기한 연기했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으란 법이 없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무력화하려는 일본의 온갖 행위가 자신들의 실효적 지배 아래 있는 센카쿠 문제에 부메랑이 될게 뻔하다. 강제로 빼앗았던 땅을 치사하게 미국에 매달려 다시 빼앗아보겠다는 수작도 비열하기 그지없다. 일본이 국가위상하락에 따른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꾀를 내고 있겠지만 제 꾀에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득보다 실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같은 인물의 부상은 초조감의 산물이겠지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우경화한 일본의 앞날은 더욱 어두울 게 분명하다. 제국주의 상징인 욱일승천기의 때 아닌 득세는, 반성 없이 추락하는 일본의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단면의 하나다. 한국과 중국은 이제 일본이 제멋대로 요리하던 시대의 나라가 아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