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13
냉전의 막바지 숨이 끊기던 무렵인 11년 전,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기자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악관 전세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출장가는 행운을 얻었다. 1991년 7월3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조인하는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두 나라의 장거리 핵무기를 30%씩 줄이기로 한 이 협정은 역사적 의미가 자못 심장(深長)했다. 초강대국이었던 양국이 군부 강경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동결 수준을 넘어 사상 처음으로 감축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핵미사일을 녹여 만든 펜으로 서명하면서 "다시는 냉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던 두 정상의 모습은 정치적인 제스처를 감안하더라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런 아버지 부시의 핵무기감축 노력과는 달리 아들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역사를 거꾸로 쓰는 핵정책을 추진하지 않느냐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져 전세계인들을 적이 실망시키고 있다. 미국 국방부가 최근 의회에 제출했다는 '핵태세검토'(NPR) 비밀보고서는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보고서에는 북한, 이란, 이라크 등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일컬었던 나라를 포함해 7개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비상대책이 담겼다.

보고서의 핵심은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안보환경에 맞는 소형 핵무기 개발을 주문하고 핵무기 사용 대상국과 사용범위를 확대하도록 권고하는 부분이다. 지난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면서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을 언급해 세계를 경악시키고 엄청난 반핵운동을 불러왔던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파장이 커지자 미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의회에 제출하는 통상적인 보고서일 뿐 새로운 핵무기정책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잇달아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쉽사리 파문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표적이 된 당사국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다. 핵목표가 북한과 중국 등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와 더욱 우려스럽게 한다. 사실 중국은 지난 64년 이후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핵무기로 선제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 보고서를 9.11 테러 이후 미국정부의 전략개념 변화 조짐의 하나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내용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데다 새로운 지침이 부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토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보면 미 행정부쪽의 해명은 비밀보고서가 공개돼 당황한 데서 나온 듯하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핵정책이 보복공격에서 선제공격으로 바뀌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의 의도는 '다른 나라 핵무기는 악이고 자국의 핵무기는 선'이라는 일방주의적 사고나 다름없다. 부시 대통령 자신이 공약한 일방적인 핵탄두 감축방안 정신과도 걸맞지 않다. 흔히 지적되는 미국의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이번 경우에도 숨김없이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 보고서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훼손가능성이 염려되고 있다. 핵무기개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을 억제할 명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중국 등에 군비경쟁 명분을 촉발할 가능성도 높다. 특히 미국이 우려하는 북한의 핵개발 개연성을 부채질하거나 핵사찰 문제가 한층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남북한이 91년 12월31일 합의한 비핵화공동선언에 차질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한반도의 핵전장화 우려가 그렇잖아도 심각한 반미 감정에 기름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미국은 이중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핵태세검토'의 철회를 명쾌하게 천명해야 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귀신을 다시 병 속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지난(至難)한 일이겠지만 더 나아가 지난 46년 유엔총회가 최초의 결의안으로 채택했던 핵무기의 완전제거방침과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과학과 세계문제에 관한 퍽워시회의'가 지난 57년 이후 줄기차게 추진중인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서도 아낌없이 협력해야 한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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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16
카이사르, 네로, 루이14세, 나폴레옹,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권력자들의 이상형이 된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 그는 왕위 계승자도 남겨놓지 않은 채 권좌를 섭정자에게 물려주고 20살때 동방정복 원정길에 오른다. 떠나기 전에 재산도 몽땅 친지들에게 나눠주어 버린다. 그러자 측근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가시렵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대답은 가위 영웅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걸작이었다. "난 '희망'을 가지고 간다네"'희망'을 얘기하자면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상자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제우스가 보낸 이 상자에는 노화, 질병, 악덕, 슬픔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가 상자를 열어 보는 바람에 그 속에 있던 온갖 고통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상자 속에 '희망'만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이지만 최후의 보루는 역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일화다.

새해 들어서도 우리 사회에는 지난해의 연장선상에서 희망을 구가하기보다 절망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끝모르게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해 소시민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파랑새를 포기할 순 없다.

경향신문이 2002년의 주제를 '희망을 만듭시다'로 정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희망의 불꽃을 키워가는 방책의 하나로 작은 제안을 내놓고 싶다. 이름하여 '희망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희망박물관은 이를테면 '작은 영웅들의 전당'인 셈이다. 뜻에 걸맞은 작명은 중지(衆智)를 모아서 해도 늦지 않다. 거창한 무용담보다 우리에게 희망의 싹을 가꿔갈 수 있게 만든 보통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 기리자는 취지에서 문득 떠올려본 단상(斷想)이다. 언론의 1회성 보도로 끝낼 게 아니라 비록 작은 상징물들이지만 희망박물관에 한데 모아 영구히 전시하거나 자료로 남김으로써 후대에까지 널리 전승하자는 뜻이 담겼다. 작지만 뭉클한 선행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다.

우리에겐 독립운동, 참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같은 거국적이고 거시적으로 추념할 만한 일도 많지만 드러나지 않는 미담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과업도 결코 적지 않다. 불을 끄다 청춘을 사회에 바친 소방관들의 거룩한 사연, 일본 전철역에서 몸을 던져 시민을 구하고 숨져간 대학생 이수현씨 같은 희생정신의 주인공들, 목숨을 바쳐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낸 수많은 의인들, 평생 아껴 모은 전재산을 주저없이 사회에 환원한 독지가 할머니들의 갸륵한 봉사정신, 강도를 잡아주다 흉기에 찔려 다치거나 숨진 이들의 의협심에 이르기까지 숱한 미담들은 한때의 일로만 치부하기엔 귀중하기 그지없다. 작은 영웅들의 애틋하면서도 고결한 마음은 입으로만 애국과 공동체 사랑을 들먹이는 언필칭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그것보다 몇배나 값지다는 걸 날이 갈수록 절감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희망박물관에 전시하거나 보관할 '작은 영웅담'은 우선 근세 이후 언론매체에 보도된 자료를 토대로 삼으면 손쉬울 것이다.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거나 발굴된 것도 대상에 포함되면 좋을 게다. 시공(時空)을 뛰어넘으려면 사료(史料)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추가로 찾아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희망박물관이 박물관과 도서관 기능을 겸하는 형태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작은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품이나 조각작품을 만들어 곁들이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 계획은 전문가들과 각계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은 뒤 차근차근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박물관이 세워진다면 무엇보다 탁월하고 생생한 교육장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일반시민들이 관람하거나 연구자료로 쓸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재원이 문제라면 독지가들을 찾아볼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정부 차원에서도 검토해봄직하다. 민간차원에서 추진한다면 모금운동을 펼쳐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작은 정성이 모이면 뜻은 훨씬 클 것이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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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4
국악인들은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주저 없이 부른다. 거문고가 모든 국악의 으뜸이라는 것이다. 남성적 악기의 대표주자인 거문고는 그런 만큼 '천하의 고집불통'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야금이 오늘에 이르면서 다양한 개량이 가능했던 반면 거문고는 더 이상 개량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김대중 대통령을 우리나라 악기에 비유하면 거문고에 해당한다고 이색적인 주장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김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최고 수준의 지성을 갖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이는 나라 안팎에서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통령은 오기와 고집도 알아줘야 할 정도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정치행태나 정책, 인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 판단과 의지가 세워지면 꺾이지 않았다. 여론의 바로미터 가운데 하나인 언론이 뭐라하든 끄떡하지 않을 만큼 강경할 때도 적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오기는 긍정적인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은 탓에 끝내 집권당 총재직 사퇴라는 초강수(超强手)를 둘 수밖에 없는 난국을 자초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사람을 쓰는 문제에 이르면 더욱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김대통령의 의중은 흔히 지적되는 권력누수방지와 정권재창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다. 시정(市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의 판단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대통령의 오기와 고집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일정 부분 인정한다. 그의 자문역 중의 한 사람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는 이를 김대통령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체질에서 찾고 있다. 소음인인 김대통령은 단순하고 누구나 아는 뜻을 세우되 끝까지 견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북 문제와 개혁에 관한한 끈질긴 인내심과 집념을 갖고 비판세력에 맞서고 있다는 진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실 김대통령은 자신의 높은 지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웬만한 참모들이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고도(高度)의 지성이 때로는 촌부의 상식보다 못하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공자(孔子)가 어느날 아홉 구비가 구부러진 구멍이 있는 진기한 구슬을 얻었다. 공자는 그 구슬에 실을 꿰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아낙네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아 근처에서 뽕을 따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密爾思之 思之密爾). 공자는 한참 생각 끝에 그 뜻을 깨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개미 허리에 실을 맸다.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 넣고 다른 쪽 출구에 꿀(蜜)을 발라서 유인했다. 마침내 허리에 실을 맨 개미가 출구로 나왔다. 실에 꿰어진 것이다. 공자는 아낙네가 일러준 밀(密)에서 꿀(蜜)을 떠올렸던 것이다. 공자천주(孔子穿珠)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게 된 일화다.

스스로의 지성을 과신하는 바람에 달갑지 않은 평판을 들어야하는 김대통령이 뒤늦게나마 인사스타일에서부터 국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참모진의 입에서 '인사탕평'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그런 조짐이다. 최근 군과 경찰간부 인사에서 그 싹이 보였다. 어제 있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인사에서도 탈정치색깔을 선보였다. 하지만 특정지역 인사라는 논란은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해 아직은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는 유보적 시각도 잔존하고 있다. 뒤틀린 것은 이른 시일 안에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후속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국정쇄신 약속불이행의 상처는 치유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천과 일관성이다. 김대통령의 뿌리깊은 부정적 이미지는 말이 언제나 앞선다는 점이었다. 그의 변신에는 정치권 특유의 음모설까지 상존한다. '정치적 지혜는 실질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존 애덤스의 법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된다면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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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0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 판문점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폐부를 찌르던 대사 가운데 하나다. 총을 겨눈 적이면서도 휴전선을 넘나들며 동족의 정을 나누다 돌발사태로 인해 사상자를 내고 마는 총격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던 중립국감독위원회 장교가 한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진실조차 감출 수 있다는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들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평화가 아닌 전쟁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경구(警句)는 상징성과 더불어 또다른 아이러니를 안겨준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으레 패전국가나 그 국민, 무고하게 희생되는 양민일 수밖에 없다는 게 상식이고, 상처뿐인 영광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도 사실상 패자나 다름없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어떤 전쟁이든 소문은 무성하고 억측이 춤을 추곤 한다. 전쟁 당사자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흘리고 불리한 것은 감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역정보와 심리전, 선전술까지 동원돼 진실을 캐내기란 지난(至難)해진다. 자연 실체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워싱턴 포스트가 '회색전쟁'으로 명명한 이른바 21세기 첫번째 전쟁은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에 의해 '얼굴없는 테러전쟁'으로도 일컬어지고 있어 진실은 더욱 큰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테러참사에 공분(公憤)하는 미국 국민들의 90% 이상이 보복전쟁을 지지하고 있는데다 언론도 정부의 보도통제에 일정 부분 협조하는 '신사협정'에 동의해 진실이 베일에 가려질 개연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걸프전 당시에도 미국 주요 언론사들은 "전쟁에 대한 독립적 보도기능이 침해당할 우려가 크다. 국방부의 실질적인 보도통제가 훗날 미래의 미국에 모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전쟁에서 진실을 한층 치밀하게 감추는 모순이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상당부분 미국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언론의 고충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공습의 피해는 과연 실상이 어떤지, 선량한 민간인 희생자는 얼마나 발생했는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어느 쪽도 속시원히 얘기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테러의 주범이라는 물증 또한 공개되지 않고 있어 진실을 제대로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엊그제 미국에서 탄저병 환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생화학 테러 가능성만 제기하고 있을 뿐 궁금증을 더해주기만 한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전쟁 분위기 속에서 유언비어와 '카더라'방송이 난무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미국 테러참사 이후 한동안 이런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태인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단 한 명도 출근하지 않고 대피했으며, 그래서 유태인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유언비어는 익명성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이버공간을 휘저으면서 지구촌을 돌아다닌다. 실제로는 유태인 사망.실종자가 1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그렇다.

미국 테러참사가 일어난 직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는 TV 보도가 있었을 때였다. 얼마후 인터넷 세상에는 TV에 방영된 비디오가 몇년 전에 찍은 자료화면이었다는 주장이 확대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자료화면설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상황을 찍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각을 옹호하는 크고 작은 유언비어도 유포됐음은 물론이다. 그같은 유언비어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사례는 전쟁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려내기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장기전에다 확전 가능성까지 언급된 이번 전쟁이 아직 초기단계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감춰지는 진실의 희생은 앞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자명하다. 그러잖아도 부시 행정부가 '더러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해 놓고 있는 마당에 진실을 캐내는 일은 미국 국익이라는 명분에 주눅이 들어 한층 힘겨울 수밖에 없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롯이 세계 언론의 몫이지만 엄연한 한계에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하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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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2
우리에겐 언제부턴가 더없이 편리한 법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인 이 법은 때로는 헌법보다 무서운 지존(至尊)으로 통한다. 국민정서라는 이름의 마법(魔法)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는 실정법 위에 떼거리법이 있고 떼거리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며 냉소를 감추지 못한다. 실제로 언론에는 '국민정서'라는 말이 하루가 멀다고 할 만큼 자주 얼굴을 내민다.국민정서법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핑곗거리로 안성맞춤이기 일쑤다. 말썽많은 평양 8.15 통일축전을 둘러싸고는 너나할 것 없이 국민정서법을 들이댄다. 한 정부당국자는 엊그제 "참가자들의 행동에 대한 국민정서를 감안하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이나 행정제재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며 예의 여의봉을 들고 나섰다. 실제 적용해야할 법규는 국가보안법이나 남북교류협력법이 불가피하겠지만 이를 저울질하는 과정에서는 국민정서라는 법을 수도 없이 앞세울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여당 대변인은 어제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한 데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적정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일찌감치 한 발을 걸쳐놓았다. 방북 단체의 간부도 "이번 행사가 국민정서를 고려해 어렵게 성사시킨 의미있는 일이었는데 파행을 빚어 안타깝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통일부 당국자가 당초 방북 불허방침을 정했을 때도 관계부처간 협의를 거쳤지만 어김없이 국민정서로 포장했다.

정치인들은 국민정서라는 이름의 마법을 동원하는데 관료들 못지 않게 노회하다. 지난 주말 집권당 대표는 "국민정서가 이제는 건전한 정치를 희망하고 여야가 서로 협력해 지혜를 모으기를 바라고 있다"며 야당의 정쟁 중단요구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자신들의 자세는 막상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있다. 잘잘못과 상관없이 최고지도자 역시 예외는 아님이 쉽사리 입증된다. 최근에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를 언급하면서 국민정서를 무기로 삼았다.

추상같이 법을 집행해야할 당국은 또 어떤지 보자. 법무부는 광복절 특별사면과 가석방 조치를 취하면서 "조직폭력 등 고질적인 민생침해사범은 국민정서를 감안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애써 배경설명을 곁들였다. 누구보다 앞장서 실정법에 따라 정책 결정을 해야할 정부기관마저 굳이 국민정서법을 들이대야 안도하는 풍토다. 며칠 전 재정경제부가 세금공제확대 적용대상에서 룸살롱을 제외할 때도 다름 아닌 국민정서를 들먹였다. 국가 경쟁력을 역설하다가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때는 '국민정서상 시기상조'라는 한 마디로 난색을 표시하면 그만이다. 위화감이라는 법봉이 붙으면 금상첨화다. 외제차, 골프는 평소엔 조용하다가 현안이 발생하면 득달같이 국민정서법으로 단죄되곤 하는 단골메뉴다.

민간조직이라고 별로 나은 게 없다. 1주일전쯤 서울에서 국제여자핸드볼대회를 연 조직위원회는 느닷없이 경기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외국대표들의 불필요한 불만을 샀다. 일정 변경 이유가 너무나 걸작이다.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일본총리의 신사참배로 국민들이 격앙돼 있는 분위기를 감안해 광복절날 우리 대표팀이 일본을 이겨 국민정서에 부합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뭐든지 국민정서에 고리를 걸면 또다른 민간외교와 국익에 먹칠을 하거나 말거나 아랑곳없다.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전 북한 선박이 우리 영해를 침범했을 당시 군수뇌부의 골프파문이 일자 정부 고위층은 "전체 군의 사기를 감안할 때 국민정서만 고려해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역논리를 폈다. 비슷한 사안이라도 원칙없이 편리한 대로 갖다 붙인다. 해서 국민정서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국민정서가 중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추상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잦은 국민정서가 항상 진리나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오판으로 드러나는 예가 숱하다. 게다가 국민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개인이나 소수의 정당한 권리가 설자리를 잃기 십상이다. 자칫 정치논리로 빠져들 위험성도 높다. 관성적인 국민정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논리로 대체될 때가 됐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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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3
요즘 시중에는 한때 떠돌았던 개그성 수수께끼가 다시 나돈다. '애매모호'를 각 나라말로 뭐라고 하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점잖은 자리에선 다소 머쓱할지도 모르는 인터넷 '깔깔방' 수준의 정답은 이렇다. 일본어로는 '아리까리', 프랑스어로는 '아르송다르송', 중국어로는 '갸우뚱', 아프리카말로는 '알간디모르간디'다. 마지막 순서의 독일어로는 '애매모흐'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우스개 수수께끼의 등장 배경이다. 하나의 설(說)은 올들어 부쩍 관심을 모은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국제정치학 개념에 기초한다. 전략적 모호성은 최근 외교 무대에서는 물론 국내정치에서도 남용되는 느낌마저 준다. 일반인들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연초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사일방어(MD)체제의 전신인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구축을 선언하면서부터다. 우리 정부가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을 강행하려는 미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중국.러시아 등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어느 쪽으로부터도 반발을 사지 않는 실익을 챙기려는 전략이 그것이다.이렇듯 전략적 모호성은 '뜨거운 감자'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전략 개념의 하나다. 미국은 1979년 의회에서 대만관계법이 통과된 이후 대(對)중국정책에서 전략적 모호성의 원칙을 줄곧 견지해 왔다. 탈냉전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중국의 시각도 전략적 모호성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중국은 원칙적으로 미군철수론을 세워 놓았지만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지켜오고 있다. 북한이 핵문제가 불거지자 모호성의 전략을 교과서적으로 구사해 미국으로부터 경수로건설.중유공급과 같은 알찬 과실을 따내며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사례는 학술논문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전략방정식은 '명료성이 항상 선(善)은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미묘한 현안에 대해서는 그같은 전략적 모호성을 무기로 삼는 게 유용하고 현명한 전략일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내정치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선용(善用)의 차원을 넘어설 때가 잦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상선이 우리 영해를 침범해 항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알 듯 모를 듯한 한마디만 내각에 던졌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비판적인 국민과 북한 당국을 모두 의식해 애매모호한 비답을 내린 것이다.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의 정풍운동이 일어나자 기자회견을 통해 국정쇄신방안을 밝히겠다던 김대통령이 가뭄을 이유로 무기연기 카드를 들고 나온 것도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에 속한다.

김대통령은 연초에도 획기적인 국정쇄신책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으나 '강한 정부, 강한 여당론'을 들고 나오면서 애매모호하게 넘어가고 말았다. 공동여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가 가위 전략적 모호성 정치의 귀재에 가깝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이 분야에 관한 한 노태우 전대통령에 버금가라면 서러워할지도 모른다. 가뭄을 핑계로 국가보안법 토론회를 연기한 한나라당 역시 예민한 현안은 입에 담지 않는 게 최상책이라는 전략적 모호성 논리에 함몰돼 있는 듯하다. 한나라당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새만금사업, 모성보호법 등에 대해서도 엉거주춤한 채 명확한 입장표명을 꺼리고 있다. 사실상 대선 가도에 접어든 정치권은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분위기가 팽배하자 예민한 사안은 세월에 해법을 맡기는 듯하다.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전략적 모호성은 더욱 극성을 부릴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탈리아.영국 등 유럽국가들의 최근 총선에서도 주효했던 전략적 모호성이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니다. 정치불신을 낳는 주범 가운데 하나가 전략적 모호성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국내정치에서의 전략적 모호성은 정치철학이라기보다 득표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다보니 정치는 정책대결이 아닌 지도자나 정당의 이미지 경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의도된 모호성이 도덕적 모호성으로 발전하면 지도자들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보다 전략적 모호성 남용의 폐해가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돌아오고 만다는 비극성이 더 크게 부각돼야 한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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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8
당나라 시대는 중국 역사상 불교가 가장 흥륭한 시기로 꼽힌다. 건국 시조인 고조에서부터 대부분의 황제들이 끔찍이 여긴 불교가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잔학무도한 여제 측천무후(▦天武后)까지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보'로 불린 현장법사(玄裝法師)도 당나라가 낳은 지존(至尊)같은 스님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빛이 강렬하면 그림자도 그만큼 짙은 법일까. 무종 재위 시절 사상 유례없이 극렬한 불교탄압이 자행된 것은 당나라의 어두운 역사 편린으로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악명높은 '회창 법난'(會昌 法難)이 그것이다. 무종의 연호(年號)가 '회창'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종의 폐불운동 때문에 전국에 걸쳐 4,600여 사찰이 파괴됐고 불교와 관련 있는 건축물은 40만여곳이나 파손됐다. 칙령으로 인해 환속한 승려만도 26만명에 이르렀다니 법난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회창 법난'은 모든 종교탄압이 그렇듯이 당시 정치적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무종이 도술을 편애한 탓도 있지만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승려들은 황제와 신하들에게 두통거리로 떠올랐다. 게다가 사찰 경제의 지나친 팽창과 승려들의 음란한 생활은 백성들의 원성으로 부상했다. 불교세력과 정권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사건인 셈이다.

그로부터 1,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잇달아 겪고 있는 불교계와의 악연은 또다른 차원의 '회창 법난'인 듯하다. 공교롭게도 당나라 무종의 연호와 한문 이름까지 같은 이총재에게는 올 연초의 악몽이 지난주 재연됐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正大) 스님의 발언을 놓고 민주당이 왜곡된 발표를 한 게 발단이었다. 민주당은 이회창 총재가 집권하면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할 것이라고 연초에 말했던 정대 스님이 최근 김중권(金重權) 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그 발언이 소신이었음을 재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이에 이총재측이 즉각 반박하고, 정대 스님측이 "민주당의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한 뒤에야 파문은 일단 봉합된 상태다. 하지만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이와 유사한 휴화산이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 가톨릭교도인 이총재가 지난 대선 때부터 이런저런 법난을 겪은 뒤 다음 대선을 위해 불교계에 들이는 공은 지극정성 같다고 정가에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만큼 여당의 반작용도 만만찮다. 이총재와 불심을 갈라놓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흥글방망이를 놀고 있는 듯하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방정식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용렬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선이 1년반도 더 남은 시점에서 정치권이 종교계, 특히 불교계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가운데 불교신도가 거의 없는 탓인지 불교에 대한 구애작전은 유난스럽다. 적어도 기피인물 명단에는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 오신날'을 계기로 또다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잖아도 정치권에서는 이름난 고승들이 차기 대권의 향방을 점쳐주고 있다는 설까지 파다하다. 저마다 다음 청와대 주인에 자신이 점지됐다는 입소문을 퍼뜨리는 낯익은 전략을 쓰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심지어 한물간 거물정치인들까지 여기에 가세해 특정종교 악용은 혹세무민(惑世誣民) 수준이나 다름없다. 어느 나라나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를 이용해 입지를 넓히려는 작용과 반작용으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게 위험수위를 넘으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불교의 지나친 팽창이 법난을 불러왔고, 지나친 탄압의 주인공인 무종이 반작용으로 6년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사례는 더없는 귀감이 되는 교훈이다. 정치와 종교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가 사는 최선의 방법이다. 지역과 이념 마찰에다 다양한 종교가 저마다 일정수준의 힘을 가져 팽팽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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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21
미국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과 토머스 제퍼슨 3대 대통령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 양념같은 화젯거리는 두 사람 모두 돈많은 과부와 결혼한 사실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부인들의 이름이 마사인 것도 재미있다. 워싱턴의 부인은 마사 커티스, 제퍼슨의 아내는 마사 스켈턴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오늘을 있게 한 선견지명이다. 땅에 대한 집념이 누구보다 강했던 이들의 웅지명략(雄志明略)과 슬기는 후세 사람들이 비로소 평가한다. 이들에게서 몇가지 도덕적 흠집이 드러나고 있지만 치적을 결정적으로 뒤엎을 정도는 아닌 듯하다.워싱턴은 미국의 영토를 넓혀간 선구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기회만 닿으면 땅을 사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이런 습관은 평생동안 지속되어 훗날 그 일대에서 최대의 부동산 소유주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땅이 개인소유로 계속 남아 있지 않았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로 불리던 미국 중부 일대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땅을 몽땅 헐값에 사들인 것 하나만으로도 어떤 대통령이 이룬 업적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루이지애나는 당시엔 프랑스가 별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땅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앤드루 존슨 17대 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시워드는 알래스카를 사들인 인물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알래스카는 러시아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전략요충지이자 자원의 보고(寶庫)다. 시워드는 의회와 정부 안팎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알래스카 매입을 끝까지 주장했다. 그는 알래스카에 그치지 않고 도미니카 열도의 매입까지 역설하다가 거센 여론의 화살 때문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후보자리를 빼앗기는 불운을 맛보아야 했다. 이 일화는 영어사전의 고사성어까지 만들어낸다. '시워드의 어리석음'(Seward's Folly)이라는 말은 이제 당대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나 훗날 거시적 안목으로 재평가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미국은 원주민이나 멕시코 등과 싸워 영토를 넓힌 사실 때문에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처럼 돈을 주고 국토를 확장한 사례가 적지 않다.

다소 다른 경우지만 우리 이웃에 있는 일본인들은 제임스 쿡이 이끈 영국인들보다 무려 400년이 앞선 1,300년대에 이미 망망대해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 역시 18세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땅을 밟은 흔적이 남아 있다니 우리에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다 수많은 외침(外侵)을 당하고도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허울좋은 자존심만 내세우던 우리 조상들과 비교하면 때론 허탈감마저 느껴진다.

시계를 오늘의 한국으로 돌려 보자. 새해 들어서도 국민과 나라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기 정권다툼으로 영일(寧日)이 없는 정치권과 당파싸움만 하던 조선시대 지도층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국민의 기억 속에는 단 하루라도 앞날을 걱정하거나 생산적인 발상을 하는 지도자와 정치인이 있었는지 그저 아련할 뿐이다. 관혼상제의 사소한 형식을 둘러싸고도 피를 부르는 싸움박질을 하던 조선시대와 같은 소모전이 내년 대선 때까지 계속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하철 민심 탐방 현장이 연출이네 아니네 하며 외국인들까지 웃긴 어린아이 말꼬리잡기싸움 같은 일들이 어제도 벌어졌고 오늘도 내일도 일어날 게 뻔하다.

급기야 모든 정치인들에게 몇개월씩 세계 배낭여행을 의무화하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세상이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 강제로라도 느끼고 오면 소아병이 조금은 고쳐지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 상상을 비약시킨 것같다. 그럴 경우 당연히 해외공관과 수행원이 온갖 뒷바라지를 해주는 외유(外遊)가 아니라 혼자서 비행기표와 기차표를 사고 걸어 보기도 하는 체험여행이어야 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세상이 다 아는 중국의 상전벽해(桑田碧海)에 새삼스레 화들짝 놀랐듯이 시대를 거꾸로 사는 우리 정치인들이 그런 시늉이라도 낸다면 천만다행이리라.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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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0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아무래도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로버트 그린.주스트 엘퍼스 공저) 가운데 47번째 법칙을 위반했을 개연성이 크다. 서문에서부터 '권력은 기본적으로 도덕과 관계가 없는 게임'이라고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는 저자들의 47번째 법칙은 '목표를 달성하면 멈출줄 알아야 한다'고 강한 경고음을 발한다.이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권력게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계속되는 정부.여당의 악수(惡手)에 몰아붙이기만 하다가 기상천외한 역공을 당한 형국이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이 자민련에 '국회의원 꿔주기'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발한 잔꾀를 동원하고 DJP공조를 복원하게 된 것을 한나라당의 밀어붙이기에서 빌미를 찾고 있다. 거대 야당의 집요한 정치공세가 개혁정책을 좌초시키고 결과적으로 경제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게 양자(養子)로 가게 된 의원들과 김대통령의 강변이다. 거기다가 여권은 '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전용수사'라는 카드를 들이밀어 국정의 초점을 경제위기 극복이 아닌 여야의 진흙탕싸움으로 변질시키기에 이르렀다. 검찰이 안기부의 15대 총선자금지원 수사를 벌이는 일도 DJP공조복원카드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법하다. 이같은 권력게임은 철저하게 '현실주의'라는 정치이론에 바탕을 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은 뒷전에 두고 권력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권력경영의 47번째 법칙을 미처 깨닫지 못한 자성의 목소리들이 뒤늦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강력하게 저지한 것이 결과적으로 DJP공조복원의 근거를 제공했다. 게다가 지난 연말의 새해 예산안 통과과정에 이르기까지 여당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면서 승전가(勝戰歌)를 부른 것이 또 하나의 부담이 된 셈이다.

지난해 6월5일 국회의장 선거때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주는 대신 자민련으로부터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약속을 받아내자는 현실론이 있었으나 이총재가 채택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그 뒤 국회법 개정문제가 한창 논란의 대상이 됐을 때 당내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주는 게 총선 민의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원칙론에 밀려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간의 밀약설이 흘러나오는 악재가 겹쳤던 게 불운일 수는 있다. 법대생들도 반대심문의 요령을 공부할 때는 "이겼다고 생각되는 순간 멈추어라"는 교수들의 법언(法諺)을 어김없이 새겨 듣는다. 프랜시스 웰먼 같은 법학자는 반대심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만두기 좋은 시점을 찾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변호사들이 증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쾌감에 몰두하고 있다가 심문이 지루해지고 말면 배심원들로부터 따놓은 점수마저 반감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법대에다 대법관 출신인 이총재가 '일단멈춤'의 중요한 시점을 놓쳤단 말인가. 정치지도자로 변신한 이총재의 약점 가운데 하나가 이상과 원칙, 모양새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이번 경우에도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권력을 경영하는 법칙'의 마지막 장인 48번째는 '모양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의 박자와 강약을 조절하는 지혜를 주문하는 마지막 법칙도 새삼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않은 게 없어 수읽기로만 따지면 누구보다 무궁무진한 정치9단 2명과 벌이는 권력게임에서 이번에는 이총재가 일단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년 가까이 남은 장기전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DJP라고 47번째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 문제는 한나라당의 권력법칙 위반 여부가 핵심이 아니다. 진정한 승부는 권력에만 집착하는 현실주의 일변도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읽는 '감동의 정치'를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는 '깨어있는 시대'가 됐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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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2
엊그제 경향닷컴에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은 과격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요즘은 혁명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제목 아래 쓴 이 글은 서민들의 마음을 가감없이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온라인의 글들이 익명성 때문에 무뢰에다 무례까지 서슴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아 때로는 오프라인에 옮겨 놓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이 글은 요즘 세태를 축약한 것 같아 논란의 여지를 감수하며 네티즌 용어까지 그대로 일부 인용해 봤다."우리 사회가 넘 엉망이다. 배부른 것들은 계속 배부르고… 아니 더 이상 가난해 질 수도 없으니. 의료계의 밥그릇 싸움에 아파도 치료도 못받았고, 정치판의 눈꼴스러운 개싸움에 나라는 엉망이고… 외국넘들 돈 빌려다가 지들 배××나 채우고, 그리고 부실해지면 돈없는 국민 허리띠나 졸라매게 하고.(중략) 그런 자들은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야할 이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쳐 먹지 못하고 버티면 강제로라도 몰아내야 한다.(중략) 아마두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같다(하략)"
혁명을 결행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까지 떠올려 본다는 자체가 범상하지 않은 민심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답답한 마음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마냥 아슬아슬하다. 이같은 위기상황이 어제 오늘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정부와 집권당의 신뢰성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며 발길에 차일 정도가 된 것이 근본 원인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정부정책집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중추기관들까지 하는 일마다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부터 국민과의 약속을 자주 어겨 적잖은 감점을 당하고 있다. 검찰수뇌부 탄핵안 국회상정을 저지한 것을 비롯한 집권당의 행태는 신뢰가 함몰된 정치의 표징으로 규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집권층은 언행일치는커녕 말을 바꾸고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읽힌다.

결정적으로 믿음을 잃은 것은 비단 정치쪽에 그치지 않는다. 신뢰의 상징이었던 금융기관의 임직원들이 고객 돈을 횡령해 도주하는 일이 지난해 이후 무려 300여건에 이를 만큼 유례가 드물다. 이들의 감독관이자 신뢰가 존재이유인 금융감독원까지 '브레이크 없는 벤츠' 꼴이 됐으니 국민이 믿을 곳이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맡은 대학입시당국의 말도 반나절이 못 가 믿을 수 없는 거짓말로 들통나는 판이다. 신뢰는 몇 가지의 실수로만 금이 가지 않는 법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사상 최대의 사정(司正)을 외쳐댄들 국민들이 감동을 받을 리 없다. 탄핵대상으로 떠오를 정도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정의 칼날을 휘두른다면 수긍할 사람이 있을지 두렵다. 이른바 4대 개혁만해도 그렇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이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신뢰의 중요성은 가장 오래된 정치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논어가 잘 가르쳐 준다.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孔子)가 이렇게 말했다. "식량을 풍족히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고 백성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느니라". 자공은 "부득이해 3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군비를 버릴 것이니라".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부득이해서 2가지 중에서 또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릴 것이니라". 자공은 의아해 했다. "예? 식량이라니요? 식량을 버리면 백성이 굶어 죽지 않겠습니까". 공자의 결론은 단호하다. "예로부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하지 못하느니라".

우리 정치현실에 이보다 더 명쾌한 해답은 없지 않을까 싶다. 단기간에 전시효과를 노리는 강수보다 하나씩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조치가 무엇보다 급선무다. 여기에는 자기 살부터 깎는 아픔이 곁들여져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번에도 문제는 수많은 다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실천이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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