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국 교육전문가 루비 페인 박사는 빈곤층·중산층·부유층을 흥미로운 질문으로 분류했다. 방금 끝낸 저녁식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계급이 드러난다. “배부르게 먹었니”하고 묻는다면 빈곤층, “맛있게 먹었니”라고 물으면 중산층, “차려진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하면 부유층이라는 것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스는 중산층을 ‘소득은 먹고 살아가기에 충분하지만 퇴근길에 피자 한판을 사거나, 영화를 보거나, 국제전화를 걸기 위해 돈을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으나 작은 씀씀이라도 함부로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한국, 영국, 미국,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을 비교하는 인터넷 사이트 글이 퍼 나르기 대상이 되고 있다. 직장인 대상 설문결과를 토대로 한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다섯 가지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중형차 소유, 예금 잔액 1 억 원 이상, 1년에 한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것.
옥스퍼드대가 제시한 영국의 중산층 기준도 다섯 가지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당당히 대응할 것, 불의·불평·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네 가지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줄 알 것, 그 밖에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이 ‘삶의 질’ 향상 공약으로 천명했다는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누군가 잘못 옮겨놓았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쯤 있어야 하며,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가 있어야 하고, 자기 집 나름의 전승요리 솜씨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공분(公憤)에 의연히 참여할 줄 알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69년부터 5년가량 대통령을 지낸 퐁피두는 원래 ‘정치란 한마디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며 제시한 여덟 가지가 있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쓴 앞의 네 가지는 맞지만, 뒤의 두 가지는 아니다. 주급을 절약해 매주 이틀간 검소하게 즐길 수 있을 것,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 외식을 할 수 있을 것,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립시킬 것, 환경문제에 자기 집일 이상으로 민감할 것 등 네 가지가 대신 들어가야 한다.
중산층의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는 건 매우 어렵지만, 선진국일수록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문화적·도덕적 삶의 질까지 추구하는 여유를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한국 사회의 중산층 기준이 ‘얼마만큼 재산이 있어야 하는가’라면, 선진국에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간 내에 고도성장을 이룬 국가는 소득규모나 구체적인 데이터에 따른 삶의 수준을 구분하고, 삶의 질이 진정으로 높은 나라는 무형적인 가치로 사회적 계층을 나눈다는 사회학자들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삶의 질은 만족감, 행복감, 안정감, 성취감 같은 주관적 평가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현대경제연구원 설문조사 결과, 소득만 보면 중산층이지만 스스로 저소득층이라고 여기는 우리 국민이 늘어났다. 중산층이 희망을 잃으면 공동체가 위태로워진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다운 삶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00일가량 남겨놓은 18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는 우리 사회도 이젠 ‘품격 있는 중산층’ 강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경제적·문화적 삶의 질과는 달리 도덕적 삶의 질은 최고지도자의 힘만으로 높이기 어렵긴 하다. 그렇지만 격조 있는 공동체를 만든 데까지 정치지도자들의 의식영역을 넓힐 때가 됐다. 축구경기에서 미드필더가 강해야 경기를 지배할 수 있듯이 공동체 사회도 건강한 중산층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한다는 건 상식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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