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생활 때문에 ‘구두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꿨다’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수많은 게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분노와 불굴의 의지, 학문과 불타는 열정, 민첩하고 주도적인 행동, 오랜 심사숙고, 냉정한 절제, 무한한 인내, 특수한 경우와 조화에 대한 이해.’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가 열거한 게 필요충분조건이라면 세상을 결코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잔뜩 받는다.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며 최근 절필을 선언한 작가이자 언론인 고종석의 고뇌도 어쩌면 브레히트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그처럼 어렵다는 세상 바꾸기에 대통령 후보들이 분연한 어조로 나섰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정치에 나선 것이 권력을 원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댔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도 출마 선언문에서 정치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목소리를 새롭게 가다듬었다. 심지어 집권당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도 세상을 바꾸겠다며 당명, 당헌, 당규, 로고, 당기를 비롯해 겉으로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꿨다.
이들만이 아니라 훨씬 전의 출마자들도 하나같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깃발을 내걸지 않은 이가 있었나 떠올려 보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체감온도 불변’을 토로한다.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되풀이될 뿐이라고 느껴서일까. 세상이 바뀌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컵을 보는 눈과 비슷할지 모른다. 조금씩은 바뀌고 있다는 낙관론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는 비관론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하지만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안철수 현상’은 정치가, 아니 세상이 바뀌지 않고 있음을 민심으로 방증한다. 안철수 현상은 세상 바꾸기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는 데도 정치는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사람을 계속 바꿔도 정치가 그대로라면 구조적 문제를 의심해 봐야 한다. 물론 정치 문화나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지도자 한 사람이 단칼에 베어내기도 쉽지 않다.
집권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부 야권 캠프 사람들조차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전리품인 자리 탐욕에 일을 그르친다는 내부비판이 끊임없이 새어나온다. 심하게는 지난날 먹어본 고기맛을 잊지 못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구태를 꾸짖는 내부인들도 적지 않다. 정작 주변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그들에게 세상 바꾸기는 자리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새로운 정치와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브레히트가 말한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분노와 불굴의 의지, 불타는 열정, 민첩하고 주도적인 행동 같은 덕목 정도는 끝까지 간직해야 가능하다. 안철수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는 행여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 세운 뜻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길이 험하고 길다면 브레히트가 역설한 냉정한 절제와 무한한 인내도 무기로 삼아야 한다.
안철수는 출마선언에서 “국민의 열망을 실천해내는 사람이 되려 한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 혼자 만든 게 아니다. 최소한 국민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의 열망 결정체다.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인과 부실한 정당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매개체로 삼은 것이다. 안철수 대통령이 탄생하든 그렇지 않든 안철수 현상의 여망은 반드시 분출돼야 한다. 그가 늘 강조하듯 진짜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잊지 않아야 한다. 수많은 견제구와 악의적인 화살이 날아들어도 견뎌내야 된다. 다만 애정을 담은 비판은 가려서 흔쾌하게 즐겨야 한다.
그에게 브레히트의 시 ‘의심을 찬양함’ 마지막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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