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 마지막 수업 입력 : 2007-12-07 18:27:45 세계의 명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마지막 수업은 색다른 전통을 이어온다. 이 시간에는 그럴 듯한 이론이나 비범한 사례 연구 같은 지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책을 펴지도 않는다. 뜨겁기 그지없는 특유의 토론도 없다. 학생들의 질문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일류대의 자긍심을 역설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혜로운 스승의 혜안만 제자들의 가슴으로 퍼져나간다. 교수는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자부심보다 ‘내가 진정 원하는 나’로 살아가라는 따뜻한 충고를 한마디씩 던진다. 일정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동창회에는 아예 나가지 말라는 작은 얘기 같은 것도 들려준다. 나무를 태워서 밭을 일구는 화전민처럼 종업원 해고로 수익을 올리는 경영자는 되지 말라고 주문하는 스승도 있다... 더보기
[여적]소극장 입력 : 2007-11-30 18:33:19 1969년 4월 극단 자유극장 대표이던 이병복은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 골목에 아담한 소극장을 지어 문을 연다. 서양화가이던 남편 권옥연과 의기투합해 손수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객석이라야 80석이 고작이었지만 황무지에 한 그루의 소중한 묘목을 심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에 유학한 이들 부부는 비슷한 규모의 파리 소극장들이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에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A. 앙투안이 1887년 세계 최초의 소극장인 자유극장을 세운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 소극장인 ‘까페 떼아뜨르’는 이렇게 탄생한다. 개막 작품은 유진 오닐의 전위극인 ‘대머리 여가수’. 박정자, 김무생, 최지숙, 고인이 된 추송웅 등이 .. 더보기
[여적] 명함 입력 : 2007-11-23 18:04:49 서양에서도 최근 들어 회사나 조직마다 명함의 크기와 디자인을 통일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여성용과 남성용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이하게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쪽에서는 남성용 명함이 여성용보다 가로 길이가 더 긴 반면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 반대였다. 뚜렷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함조차 영·미식과 대륙식이 관행화된 것으로 보인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메타포는 역설적으로 명함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대통령처럼 명함이 필요없고 실제로 지니지도 않는 요인(要人)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명함의 요긴성은 이제 차별화를 위해 디자인 특허까지 낼 상황이 된 데서 엿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명함이 등장했던 중국에서는 공자 같은 성인(聖人)도 .. 더보기
[여적] 산책 회담 입력 : 2007-11-16 18:02:51 산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베토벤은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를 더 즐겼다. 베토벤의 말년 일과는 오후 2시까지 일을 끝낸 뒤 저녁때까지 산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때로는 모두가 잠든 시간까지 산책만을 할 때도 있었다. 그가 여름마다 찾던 빈 교외의 하일리겐시타트에는 ‘베토벤의 산책로’가 운치있게 후세인들을 맞아준다. ‘전원교향곡’이 1808년 여름 이곳에서 작곡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산책에 취한 명사가 베토벤뿐이겠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로버트 프로스트, 장 자크 루소, 아르튀르 랭보, 빅토르 세갈렌, 로버트 스티븐슨, 피에르 상소…손가락으로는 다 꼽기 어려우리라. 특히 소로는 스스로 직업적 산책자라고 .. 더보기
[여적] 호돌이의 출가 입력 : 2007-11-09 18:06:41 호랑이만큼 식성이 까다로운 동물도 드물다. 야생 호랑이는 대개 스스로 잡은 야생동물의 신선한 고기만 먹는다. 썩은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 개가 풀을 뜯지 않듯이 호랑이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거나 몸을 숨겼다가 덤벼들어 먹이를 잡지만, 도망가는 동물을 쫓아가서 잡아 먹는 법도 거의 없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호랑이는 한국인들의 성격이나 행동 양태와 많이 닮았다는 견해도 그럴 듯하다. 무리지어 다니는 사자와는 달리 호랑이는 언제나 혼자서만 다니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암컷과 수컷도 홀로 지내다가 짝짓기할 때만 냄새를 맡고 합방한다. 호랑이를 한국의 상징처럼 여기는 데는 나라 모양이 닮은 까.. 더보기
[여적]스포일러 입력 : 2007-11-02 17:49:45 스포일러(spoiler)가 논란거리로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은 1995년 개봉된 ‘유주얼 서스펙트’로 알려져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서 있던 관객들은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이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분을 삭이지 못할 정도로 격앙됐다. 그 뒤 ‘식스 센스’ 같은 반전(反轉)이 있는 영화는 스포일러가 어김없이 등장했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곤 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나 결말을 미리 알려줘 재미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뜻하는 스포일러는 원래 비행기의 감속 하강이나 좌우 기울기 조정을 쉽게 만드는 장치를 의미한다. 소설에는 스포일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지만 스포일러로 보일 수 있는.. 더보기
[여적] 누드 논란 입력 : 2007-10-26 18:07:00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문화의 외설성을 “눈에 띄는 것,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것,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게 외설은 과도한 표현과 맞닿아 있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논할 때 흔히 은근한 매력을 강조하는지, 대놓고 다 보여주는지를 따지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체가 반응하면 외설이고 정신이 반응하면 예술이라는 재담 섞인 분류법 역시 마찬가지다. 뻔하고 지겨울 정도가 된 예술과 외설의 한계 논란은 옷을 살짝 걸친 것은 예술과 외설의 중간지대에 자리한다는 말장난 같은 주장도 등장시켰다. 사실 누드와 나체, 알몸이라는 용어선택에 따라 어감도 달라진다. 예술성이 있는 것은 누드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 더보기
[여적] ‘神들의 여행’ 입력 : 2007-10-19 18:02:51 세상에서 가장 걸리기 쉽고 헤어나기 어려운 증세가 ‘신(神)증후군’이라는 주장은 그럴 듯해 보인다. 신증후군은 “신은 불공평하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모화하려는 현상을 일컫는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신에다 불평을 퍼부어대는 모습은 흔하디 흔한 장면이다. “작은 집 옆에 대궐 같은 큰 집을 지으면 그동안 사는 데 불편함이 없던 작은 집은 곧 오두막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상대적 박탈감을 ‘이웃효과’에 빗댄 카를 마르크스의 설파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면 공격성과 혁명적 분노를 유발한다고 진단한 ‘테드 거’의 이론으로 상승작용할 여지가 많다. ‘신이 내린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에 대한 논란도 뜯어보면 이웃효과에서 출발한다. ‘신의 직장’.. 더보기
[여적] 외톨이 증후군 입력 : 2007-04-20 17:59:03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당신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나왔다.” 한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던 일본 소설가 다키모토 다쓰히코가 지난해 난생 처음 해외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 독자가 재치있게 던진 첫 마디다. 다키모토는 히키코모리를 다룬 체험적 소설 ‘NHK에 어서 오세요’의 팬 사인회를 갖는 자리에서 동병상련의 독자를 만나 이런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 사이토 다마키는 일본 인구의 1%인 130만명이 다키모토 작가가 겪은 히키코모리라고 추산한다. 대중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숫자를 부풀렸다는 설도 없지 않으나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히키코모리는 일본에서 6개월 이상 집에 틀어박.. 더보기
[여적] 사과법 입력 : 2007-04-13 17:56:39 사과(謝過)만큼 잘하기 어려운 것도 드물다. 자존심을 꺾고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다. 그래선지 학자들은 사과를 ‘무너져가는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기 위한 고등기술’이라고 조금 유식하게 일컫는다. 사과는 ‘난 사람’이나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일수록 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진정성이 사과의 요체이기 때문이리라.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고단위 처방인 몸을 던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본에선 몸을 던지는 사과로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되곤 했다.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사죄하는 것도 몸을 던져 사과하는 범주에 포함된다. 사실 바닥에 엎드려 사과하는 것은 누구나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땅바닥에서 조아리는 모습처럼 효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