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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스포일러

입력 : 2007-11-02 17:49:45

스포일러(spoiler)가 논란거리로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은 1995년 개봉된 ‘유주얼 서스펙트’로 알려져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서 있던 관객들은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이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분을 삭이지 못할 정도로 격앙됐다.

그 뒤 ‘식스 센스’ 같은 반전(反轉)이 있는 영화는 스포일러가 어김없이 등장했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곤 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나 결말을 미리 알려줘 재미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뜻하는 스포일러는 원래 비행기의 감속 하강이나 좌우 기울기 조정을 쉽게 만드는 장치를 의미한다.

소설에는 스포일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지만 스포일러로 보일 수 있는 행태가 나타날 때도 없지 않다.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최종편 출간을 앞두고 이례적인 스포일러 논쟁이 벌어졌다. 이 때는 작가가 “주요 등장인물 2명은 죽고 마지막 장의 낱말은 ‘상처(scar)’”라고 털어놓는 바람에 누리꾼들의 거센 항의가 일었다.

스포츠에선 스포일러가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상수잡이’라는 순화 용어가 상징하듯 상위팀의 발목을 잡는 팀이나 선수를 뜻한다. 94년 미국 월드컵축구대회 때 뉴스위크는 한국팀을 스포일러 그룹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선거에서도 스포일러는 다반사(茶飯事)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을 노릴 때 로스 페로 후보가 끼어드는 바람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에게 진 앨버트 고어 전 부통령에게는 랠프 네이더 후보가 방해 후보자였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97년 대선에서 이인제라는 스포일러로 인해 대권을 놓치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정몽준 후보가 사실상 ‘역(逆)스포일러’가 돼주는 행운을 얻었다. 이전총재가 공교롭게도 이번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스포일러로 부상할 개연성이 높아졌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게도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스포일러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긴 하다. 이전총재 스스로는 스포일러가 아니라 당선 유력자라고 우기겠지만 ‘민주주의 스포일러(민주주의를 망치는 사람)’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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