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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소극장

입력 : 2007-11-30 18:33:19

1969년 4월 극단 자유극장 대표이던 이병복은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 골목에 아담한 소극장을 지어 문을 연다. 서양화가이던 남편 권옥연과 의기투합해 손수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객석이라야 80석이 고작이었지만 황무지에 한 그루의 소중한 묘목을 심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에 유학한 이들 부부는 비슷한 규모의 파리 소극장들이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에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A. 앙투안이 1887년 세계 최초의 소극장인 자유극장을 세운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 소극장인 ‘까페 떼아뜨르’는 이렇게 탄생한다.

개막 작품은 유진 오닐의 전위극인 ‘대머리 여가수’. 박정자, 김무생, 최지숙, 고인이 된 추송웅 등이 열연했다. 배우 추상미의 아버지인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공연이 되었던 것을 추억하는 팬들이 적지 않을 게다. ‘까페 떼아뜨르’의 관객으로 이화여대생들이 많았던 게 이채롭다.

안타깝게도 ‘까페 떼아뜨르’는 영업정지를 당하는 수난을 겪다가 75년 11월8일 끝내 문을 닫고 만다. 하지만 ‘까페 떼아뜨르’는 오늘날 대학로 소극장 운동의 씨앗이 된다. 연극평론가 김방옥은 “까페 떼아뜨르가 당시 문화적으로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내 인생에서도 도발적인 역할을 했다”고 회억한다.

‘까페 떼아뜨르’가 뿌린 씨앗들이 자라난 대학로 소극장들이 폭등하는 대관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경향신문 11월30일 23면 보도) 문화지구로 지정된 이래 저급한 상업주의와 정부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가뜩이나 힘겨운 소극장들과 공연예술인들에게는 엎친 데 덮친 셈이다.

하긴 소극장의 위기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며 한·일 소극장을 비교분석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연극평론가 니시도 고진(西堂行人)도 소극장의 침체를 염려한다. ‘소극장은 몰락하였는가’라는 비평집을 낸 그는 “순수연극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소극장”이라고 그 중요성을 일깨운다. “소극장은 골목 끝자락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맛좋고 정많은, 그래서 도란도란 정을 나누는 오래된 설렁탕집 같은 곳이어야 한다”는 한 연극애호가의 말이 가슴을 파고 드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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