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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명함

입력 : 2007-11-23 18:04:49

서양에서도 최근 들어 회사나 조직마다 명함의 크기와 디자인을 통일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여성용과 남성용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이하게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쪽에서는 남성용 명함이 여성용보다 가로 길이가 더 긴 반면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 반대였다. 뚜렷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함조차 영·미식과 대륙식이 관행화된 것으로 보인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메타포는 역설적으로 명함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대통령처럼 명함이 필요없고 실제로 지니지도 않는 요인(要人)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명함의 요긴성은 이제 차별화를 위해 디자인 특허까지 낼 상황이 된 데서 엿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명함이 등장했던 중국에서는 공자 같은 성인(聖人)도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물론 당시엔 어느 집을 방문했다가 부재중일 때 대나무 같은 것을 깎아서 만든 ‘명자(名刺)’를 놓고 와 요즘과 비교하면 주용도가 조금 다르긴 했다.

리더십 연구의 권위자인 마이크 모리슨 박사는 명함의 앞면보다 뒷면에 주목한다. 한국인들의 명함 뒷면에는 대개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쓰여 있겠지만 모리슨이 말하는 명함의 뒷면은 차원이 다르다. 그가 높이 사는 명함의 뒷면은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다.

현대 경영학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와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글로벌 리더십 개발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리슨은 ‘명함의 뒷면’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묻는다. 내가 가진 자부심의 원천이자 쟁취하기 위해 죽어라하고 달려온 이 모든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난 후에도 ‘나’는 과연 ‘나’일까? 명함 앞에 인쇄된 글씨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타이틀을 떼어버린다면 무엇을 생존의 무기로 삼을 것인가?

유력 대통령 후보의 과거 명함이 진실 게임의 광장에 들어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후보의 명함을 직접 받았다는 증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방어하는 쪽에서는 만들긴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문제의 명함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며 ‘조작’이라는 반론을 편다. 명함 하나가 지지도를 오르내리게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리라. 명함 없이도 살아보려는 한 지도자의 ‘과거 명함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겠지만 모리슨이 비중을 두는 ‘현재 명함의 뒷면’이 더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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