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 베를린에 지구상 마지막 분단의 땅인 남북한의 식물이 한데 어우러질 예술정원이 탄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2019년 5월 23일 포츠담광장의 쿨투어포룸(Kulturforum)에 조성된 한시적인 정원 ‘제3의 자연 (Das dritte Land)’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중요성을 독일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인근에 조성된 이 예술정원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착안한 백두대간으로 형상화됐다. 현무암과 흙으로 만든 축소 백두대간에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듯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로 남북을 잇는 주축이자 자연 생태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북쪽 경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을 통해 남해안으로 맥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태학적인 면을 넘어 인문사회학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무언의 기도와도 같은 이 신비한 예술정원은 40대 예술인 3명이 의기투합한 합작품이다.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의 김금화(Kim Keum-hwa 金錦和) 큐레이터와 설치미술가 한석현(Han Seok-hyun 韓碩鉉), 김승회(Kim Seung-hwoe 金承會) 두 작가가 3년여의 준비 끝에 일궈냈다. 기획과 조직은 김금화 큐레이터, 작품의 전체 비주얼은 한석현 작가, 식물 관련 부분은 김승회 작가가 나눠 맡았다.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

 

  김금화 큐레이터는 베를린에서 현대예술 독립기획사를 운영하면서 한국과 독일의 작가, 갤러리, 기업의 예술 전시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한석현 작가는 현대 미술과 생태학적 실천의 확장적 결합에 천착해왔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김승회 작가는 분단된 베를린 장벽과 통일 이후 장벽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적·도시건축학적·생태학적 변화에 주목해왔다. 미술과 조경의 소통이 가능한 공공미술을 기반으로 삼는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특성이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한석현 작가는 이 정원을 구상하면서 시각적 표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한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며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남북의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번 프로젝트에 넣으면서 비 갠 뒤 안개가 자욱한 산자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반도의 산세가 담고 있는 수묵화적 풍경을 정원 예술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탐색한 끝에 결국 검은 바위 밑에서 피어나는 흰 색깔의 야생화와 안개 분무 장치를 통해서 산수화의 정취를 표현해 냈다.

                                                                         

수묵화적 풍경

 

 그가 처음 예술 정원을 구상한 것은 2016년 베를린 베타니엔 예술가의 집(Kunstlerhaus Bethanien)에서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2016년 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독일 통일이 이런 안정감과 평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독일 통일이 양측이 서로 원하고 자유롭게 왕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정치적 결정만 기다리기보다는 남북한 사람들이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10여 년간 저 자신조차도 누군가와 통일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남북한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어졌어요”


 예술 정원의 핵심 주제는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이다. ‘제3의 자연’이란 명칭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명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했는데,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자코포 본파디오(Jacopo Bonfadio)가 정원을 인간이 만든 ‘제3의 자연(Terza Natura)’이라 정의하고 예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린 데서 착상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남북한 경계 없이 어우러진 한반도의 산수와 초목을 감상할 수 있다.


 “정원은 자연에 대한 동경,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러한 정원의 의미에 분단된 남북한의 현재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중첩시킨 제목입니다.”

                                                                           

상상과 현실

 

 그러나 작가들의 이런 구상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엄정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획 초기에 호의적이고 협조적이었던 북한 측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그 결과 현재 예술 정원에는 작가들이 처음 선별한 60종 3,000주의 남북한 식물 가운데 절반가량인 45종 1,500주만 심겨 있다. 북한에서 가져오기로 한 식물이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때문에 전달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북한 쪽 백두대간이 자생지인 야생화들은 경북 봉화군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가져와 아쉬움을 달랬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북측에서 직접 식물들을 가져올 방법을 찾고 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소속 베를린 식물원, 한국 국립수목원, 북한 조선중앙식물원 등과 접촉 중이다.


 그 밖에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대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행정적 허가를 받아내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베를린 공원관리청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힘겨운 과정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발 벗고 나섰다. 적법한 절차를 밟고, 규격과 시공 방법도 독일 표준을 따라야 했다. 공원관리청, 식물보호관리청 등의 규정과 작가들의 예술적 아이디어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것들이 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이었다. 다행히 2019년 3월 한 달 동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3만 2,500유로를 모금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유명 배우들과 뮤지션 등 각계 인사들이 프로젝트에 공감해 응원 메시지를 보냈으며, 기획과 홍보에 힘을 보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 독일 크룰재단(Hans and Charlotte Krull Foundation) 등에서도 후원이 뒤따랐다. 아직 북한 땅에서 자란 식물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단계이지만 어렵게 이룬 성과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당초 2019년 11월 15일까지였던 개장 기간도 베를린 주민들과 베를린 미테(Mitte) 지구 문화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올해 10월 30일까지 연장됐다.
                                                                     


독일 당국의 지원

 

 2019년 5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 개장 기간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분위기를 띄웠다. 첫날 공연을 펼친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Jo Su-mi 曺秀美) 씨는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남북 교류와 평화를 기원하는 예술 정원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개장 행사에서는 가야금 연주자 주보라(Ju Bo-ra)와 퓨전 타악기 핸드팬(Handpan) 연주자 진성은(Jin Sung-eun)의 합동 연주도 있었다.


 6월 7일에는 수화(手話)를 하면서 북한 가요 <임진강>을 불러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 이랑(Lee Lang 李瀧)이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1월 8일에는 사찰 음식을 세계에 알린 정관(Jeong Kwan) 스님이 이 교회에서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화합의 만찬을 선보였다. 이어 김금화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경계와 유토피아, 정치와 예술’이라는 주제 아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쳤다. 프로젝트가 연장되면서 세 사람은 북한 식물을 확보하는 데 계속 힘을 쏟고 있다.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계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예술 정원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어떤 이야기든 나누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석현 작가의 말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김금화 큐레이터는 “남북 대화가 진척되어 이 정원에서 남북 생태학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백두대간의 식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20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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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촌으로 알려진 강원도 태백시에서 대안학교와 수련원을 통해 통일 이후를 살게 될 미래 세대를 키우고 있는 미국인 신부가 있다.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벤 토레이(Ben Torrey) 신부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Reuben Archer Torrey Ⅲ) 가 세운 수도 공동체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젊은 인재를 교육하고 있는 그에게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곧 다가올 현실이다. 벤 토레이 신부는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의 한국 이름 ‘대천덕(戴天德)’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대영복(戴永福)’으로 지었다. 그는 2005년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통일 이후 세대를 가르치고 있다.

 

 태백에 있는 삼수령은 세 물줄기가 동·서·남해로 흘러가는 출발지다. 해발 920미터인 이곳에 내리는 비가 북서쪽 경사지로 흘러내리면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가고,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동쪽으로 떨어지면 삼척의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삼수령 골짜기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 쪽으로 흘러가는 네 번째 강을 만들고 있다.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벤 토레이 신부는 북한 개방에 대비해 이곳에 ‘통일 세대’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삼수령센터(Three Seas Center)를 세워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통일 한국을 위한 인재 양성

 

 ‘네 번째 강’ 프로젝트는 ‘생명의 강 학교(The River of Life School)’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Three Seas Youth Center)’이 두 축을 이룬다. 2010년에 개교한 생명의 강 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대안 학교로 청소년들을‘화해와 통일의 일꾼(agents of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으로 키우는 데 역점을 둔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경쟁 대신 협동과 섬김의 중요성을 배운다.

                                                                           


 “지구촌의 교육은 대부분 경쟁 체제잖아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은 더욱 심하죠. 앞으로는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 뒤처진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개방된 북한이나 통일 한국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겁니다. 경쟁적 교육만 받은 세대는 이러한 과업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정신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남북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협력이니까요.”


 토레이 신부의 부인 리즈 토레이(Liz Torrey)가 교장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중고교 정규 교과목과 더불어 북한에 관한 교육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남북한의 언어 차이, 역사, 사회 제도 등을 망라한다. 그래서 도서실에는 북한 관련 책들이 빼곡하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노동도 해야 한다. “노동이 곧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트 수사의 가르침에 따라 교과 과정에 노동이 필수로 들어 있다.

 

 학생들은 매주 수요일 아침 토레이 신부의 거처이자 기독교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예수원(Jesus Abbey), 생명의 강 학교, 삼수령청소년수련원, 삼수령목장(Three Seas Ranch)에서 의무적으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한다. 청소, 원예, 잡목이나 잡초 베기, 목초 파종, 외양간 청소, 세탁 같은 것들이다. 토레이 신부의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신부가 산림청으로부터 임차한 50만㎡가량의 목장과 공동체 마을 곳곳이 자연, 인간, 노동이 어우러지는 교육 현장이다. 토레이 신부도 직접 도끼를 들고 땔감 장작을 팬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고 믿는 그는 “10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예수원 건물을 지을 당시에도 장작을 팼다”고 회상했다.


 토레이 신부는 생명의 강 학교에서 여름철 1주일 동안 다른 학교 학생들을 위해 노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역시 북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북한 개방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다. 학생들은 이 기간 동안 휴대전화를 학교에 맡겨야 한다. 토레이 신부는 이 학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기숙사가 달린 교사 건물을 짓고 있다.

                                                                      

노동을 통한 협력

 

 삼수령 청소년수련원은 중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영성과 체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는 포괄적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품성 개발과 섬김으로 청년들에게 남북 통일을 준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강력한 통일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자리 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때 젊은이들을 이 나라가 요구하는 지도자로 준비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남한은 총명한 젊은 인재들의 보고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북한 청년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고 교육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통일이 되더라도 사회 통합 과정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 즉 세계관이나 가치관, 문화, 언어 등의 차이에서 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과 철의 장막 붕괴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이런 문제들은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강’ 계획은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한 것입니다.”


 삼수령목장은 통일이 되면 소 키우는 기술로 북한 주민의 경제 활동을 돕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또한 예수원에서는 이곳을 집처럼 여기는 6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매주 월~수요일에는 2박 3일 일정으로 예약한 방문객들이 머물다 갈 수도 있다. 이들은 더불어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 3번 이상 묵상을 한다. 기도도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들도 휴대전화를 예수원 측에 맡겨야 한다. 이런 방문자가 매달 150~400명에 이른다. 이곳은 전액 후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숙박비는 없다. 물론 신앙심과 형편에 따라 헌금을 할 수는 있다.

                                                                               

간절한 소명

 

 토레이 신부가 ‘네 번째 강’ 계획에 착수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2년 8월 ‘대천덕(Dae Chon-dok 戴天德)’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집사가 어머니 제인 토레이(Jane Torrey)에게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었다. “에덴동산에는 흐르는 강이 4개 있는데, 삼수령엔 강이 3개밖에 없어요.”


 토레이 신부는 즉각 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했고, 예수원에 네 번째 강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강은 북쪽을 향하는 생명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가 통일을 준비할 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원 설립을 놓고 20여 년간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 터전이 있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꾸준히 생명의 강 학교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 설립을 돕고 있었던 토레이 신부에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상생활 도중에도 문득 북한의 어려운 상황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았다. 불현듯 아버지 장례식 때 들었던 ‘네 번째 강’ 이야기가 떠올랐다. 북한 개방에 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그는 2003년 태백 예수원 공동체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명의 간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백 예수원 공동체는 곧 그를 삼수령센터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2005년 한국으로 완전히 이주해 이곳에 정착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벤 토레이 신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지만, 7살부터 19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그는 한국 청년 10명과 함께 아버지가 1965년 태백에 예수원을 건립할 당시 첫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 동안 대형 군용 텐트에서 지내며 일을 도왔다. 예수원 설립 장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던 그의 아버지는 태백 지역 성공회로부터 이곳 얘기를 듣고 땅을 구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69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76년 뉴욕 주 사라 로렌스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을 졸업한 후 2년 동안 지역 사회 봉사단체를 이끌다가 1978년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와 예수원에서 1년을 보냈다. 이때 그는 삼수령 지역의 일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없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79년부터 에트나 생명보험회사(Aetna Life and Casualty)와 앤더슨 컨설팅(Andersen Consulting)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개발자 등 IT 전문가로 일했다. 1994년 코네티컷 주에 미션스쿨인 킹스스쿨(The King’s School)을 설립해 2004년까지 이사장과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4대째 이어온 인연

 

 토레이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토레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1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해 교회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2세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교회의 재활 운동을 위해 일했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역시 한국에서 성공회 사역자로 활약하면서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신학원을 재건립했고,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삼수령센터의 터전을 닦은 후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토레이 신부 가족은 대대로 기독교 초교파 정신을 소중히 지켜왔다. 증조할아버지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會衆敎會) 목사, 할아버지는 장로교 목사,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 토레이 신부 자신은 미국 동방교회(The Syro-Chaldean Church) 소속이다.


 올해 5월 삼수령센터 공동체 마을 증설 공사를 시작한 토레이 신부는 ‘네 번째 강’ 프로그램을 확장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주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한국 교회와 사회가 모두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이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사회부터 먼저 하나가 돼야 합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9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eo Dong-wukPhotographer

 

Training Young People for Unification


 Father Ben Torrey is preparing young South Koreans to effectively reunify with North Korea. His mission, using prayer and labor, continues a more than 100-year connection between his American family and Korea.

 

 High in the Taebaek Mountains of Gangwon Province, Samsuryeong (literally, “Three Water Pass”) feeds tributaries sloping toward the east, west and south. At ground level, a far different tributary is being created for the remaining direction, north. It is the self-appointed “Fourth River” project of Father Ben Torrey, who envisions a stream flowing from the south to hydrate the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Father Torrey is convinced that South Koreans in their 20s and 30s, or the millennial generation, will witness the 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in their lifetime. He is also convinced that they are far from prepared. Thus, since 2010, he has operated “Fourth River” to equip this generation with skills and knowledge for the rebirth of a unified Korea.

 The project is housed at the Samsuryeong Center in Taebaek, once a booming coal mining town, about 200 kilometers southeast of Seoul. The center includes the River of Life School, an alternative secondary education school, and the Three Seas Youth Center.

 

 The school, which is administered by Father Torrey’s wife, Liz, focuses on cultivating “agents of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 Students are taught the importance of cooperation and helping others, a significant departure from the all-out competition in standard schools. The youth center is for middle-school to college-age students. It aims at cultivating their spirit and building up their physical fitness.

 

 “It’s all the more important to train young people as future leaders that this country will need at a time when Korea is expected to emerg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a powerful unified country,” Father Torrey says.

 

 “Of course, South Korea is full of bright young people. But unfortunately, they lack not only interest in, but understanding of, North Korean youths,” he goes on. “Even after the two Koreas are unified, there will be various problems in the process of integrating two different societies, or risks arising from the differences between their worldviews, values, culture, and use of language. We need to make thorough preparations from now on as we’ve learned lessons from the German unific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Berlin Wall. We should carefully prepare for these problems now. Project Fourth River is just for such a mission.”

 

 Father Torrey is the fourth generation of the Torrey family connected with Korea. Reverend Reuben Archer Torrey, Sr. (1856?1928), his great-grandfather, visited Korea while working as a missionary in China. His grandfather, Reverend Reuben Archer Torrey, Jr. (1887?1970), also a missionary in China, helped restore Korean churches after the Korean War. And his father, Father Reuben Archer Torrey III, rebuilt the Saint Michael’s Theological Seminary, the predecessor of Sungkonghoe University, in southwestern Seoul, and established the Jesus Abbey, six kilometers from Taebaek, to create an ascetic community.

 

Family Legacy

 

 Father Ben Torrey belongs to the Syro-Chaldean Church of North America but his father was a priest in the Anglican Church and his great-grandfather and grandfather were pastors of the Congregational Church and the Presbyterian Church, respectively.

 

 Born in the U.S. state of Massachusetts in 1950, Father Torrey grew up in Korea from age seven to 19. Together with 10 young Korean men, he lived in a large military tent for six months while they assisted his father until the first building of the Jesus Abbey was dedicated in 1965. His father had purchased the land outside of Taebaek on the advice of local Anglican Church parishioners.

 

 Father Torrey went back to the United States in 1969 to attend college. Although he returned to Korea in 1978 and helped design and construct buildings in the Samsuryeong area for a year, he never intended to settle down in Korea. He had an IT career until he founded The King’s School, a missionary school, in Connecticut in 1994, and served concurrently as chairperson of the school foundation and dean of the school until 2004.

 

The Calling

 

 The inspiration for Fourth River came in 2002, at the funeral of his father, who was better known by his Korean name, Dae Chon-dok. A longtime friend of the late Father Torrey III said the Garden of Eden had four rivers but Samsuryeong only had three.

 

 Father Torrey immediately linked the remark to his father’s longtime dream of constructing a facility to train young people for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He recalls how the thought stuck with him after the funeral, and he felt a burning sense of mission to fulfill that dream. Determined to prepare for the opening of North Korea, he told the Jesus Abbey staff in 2003 that he would join the abbey community. The abbey immediately appointed him as director of the Three Seas Youth Center, and Father Torrey and his wife returned to Gangwon once again in 2005. Their two sons and one daughter live in the United States.

 

 The River of Life School’s curriculum includes North Korean studies in addition to regular secondary school subjects. It teaches the differences in language, history and social systems between the two Koreas and its library shelves are stacked with books on North Korea.

 

 Father Torrey says South Korea’s highly competitive education system is ill-suited for understanding and empathizing with conditions in North Korea. “In the future,” he says, “those who can understand and share the pain of others and who can communicate with those who fall behind will be able to become leaders. We teach how to cultivate cooperative spirit and how to cooperate rather than compete. The very basic element for Korean unification is cooperation.”

 

Classes and Chores

 

 Work is also a key curriculum component in accordance with the teachings of St. Benedict who stressed the need to “pray and work” (“ora et labora” in Latin).

 

 Every Wednesday morning, a slew of tasks await at the Jesus Abbey, which serves both as Father Torrey’s residence and an interdenominational ascetic fellowship community, as well as at the school, the youth center and the Three Seas Ranch, which aims to eventually teach North Korean farmers how to raise cattle.

 

 The work includes cleaning, gardening, weeding and pruning tree branches, pasture seeding, and washing clothes and blankets.The ranch sprawls over some 500,000 square meters of land Father Reuben Archer Torrey III borrowed from the Korea Forest Service, serving as an outdoor classroom. Nature and work blend harmoniously. Father Torrey believes that people learn how to cooperate with each other through labor. When he was a teenager, he chopped wood for four years to help his father build the Jesus Abbey, and today he still chops fire wood.

 

 He once ran a weeklong summer labor camp for students from other schools at the River of Life School. This was also part of his efforts to increase young people’s understanding of North Korea and help them prepare for its opening. During the camp, the students were not allowed to use their cellphones. The priest is now constructing a school building with a dormitory wing in order to accommodate more students.

 

 Some 60 people live together at the Jesus Abbey. Visitors can book a Monday-to-Wednesday stay, in which they will work and eat together; meditate more than three times a day; and pray for someone else, not for themselves. The visitors must also surrender their phones. The accommodation is free as the abbey is funded by donations but, of course, visitors may give as they wish.In May 2019, Father Torrey started expanding the Samsuryeong community, and he is currently collecting money to expand Fourth River. He believes that God will give him as much as he needs. He worries more about conflicts and schisms within the South Korean churches and society. He emphatically says, “We need to restore unity in South Korean society first for the sake of national unification.”
 
 The Jesus Abbey, a 10-minute drive from the Samsuryeong Center, is an interdenomi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community built by Father Reuben Archer Torrey III in 1965. Currently, Father Ben Torrey resides here.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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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하 굿네이버스 이사장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국제 구호 개발 지원 단체인 굿네이버스의 창립자이자 ‘한국 NGO계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오랫동안 정체 상태였던 대북 지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재개할 채비를 마쳤던 터였다. 그는 북미 관계가 풀리면 북한에 대규모 젖소 목장과 우유 가공 공장을 세운다는 목표를 세워 두고 있었다. 돼지·소·닭을 키우고, 소시지 공장을 비롯한 축산 가공 공장도 만들 예정이었다. 또 북한에서 생산한 삼계탕을 남한에 유통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북한의 낙후된 보건 의료 시스템과 의료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제약 연구소, 제약 공장, 병원 등을 설립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상도 세워 두었다. 주사제와 캡슐제를 만드는 공장을 두 군데 짓고, 한약도 생산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그의 이 같은 청사진의 실현도 또 한 번 멈추어 섰다.

 

젖소 지원 사업

 

 그동안 굿네이버스가 펼쳐온 대북 민간 지원 사업은 아동 보호 지원, 농축산 개발, 보건 의료 지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만성적 식량 부족과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념을 뛰어넘은 인도적 지원 사업을 벌여 왔다. 그 시작은 1995년이었다. 굿네이버스는 북한에 식량과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하며 인도적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997년에는 밀가루, 치과병원 설립 기자재, 작업복, 면장갑 등을 지원했다. 같은 해 이일하 이사장은 유엔에 속한 비영리기구(NPO)의 수장으로서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이후에도 1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굿네이버스 관계자들의 방북까지 합하면 그 횟수가 140여 회에 이른다.


 그러던 중 굿네이버스의 대북 지원 패러다임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트럭에 1,001마리의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이른바 ‘소떼 방북’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굿네이버스도 같은 해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젖소 200마리를 싣고 가 목장을 조성했다. 당시 북측은 정 회장 때와는 달리 비공개를 요청했고, 굿네이버스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 200마리를 북한에 보내는데 비밀이 지켜질 리 없었다. 100마리씩 인천에 가서 한 달 동안이나 검역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젖소를 실은 트럭 10여 대가 검역소를 거쳐 인천항으로 향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혀 보도되는 바람에 북측 담당자가 언짢은 반응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총 510마리의 소가 북한으로 보내져 목장이 네 군데 생기게 되었다.


 사실 젖소를 북한에 지원하는 굿네이버스의 계획은 그보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이 이사장은 중국 단둥(丹東)에 갔다가 북한 해주에 한우 200마리를 보냈다는 호주 교민을 만나 “한우보다 젖소를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를 들었고, 낙농업을 키워야 북한 주민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듬해 이 이사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 낙농연구소 수석연구원을 만나 모든 절차적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 정부의 불허로 계획은 무산됐다. 그는 이 사연을 굿네이버스 회지에 실었는데, 당시 서울우유에 근무하던 회원이 그 글을 보고는 새끼를 밴 젖소 200마리를 마리당 150만 원이라는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굿네이버스가 젖소 지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까닭은 복합적 효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젖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수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에 젖소를 전달한 후에도 남북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젖소 사육 농민들과 남한의 수의사, 낙농업 관계자, 굿네이버스 직원들이 다각적인 소통을 이어갔다.

 

주민 소득 증대

 

 이후 북측에서는 우유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유 가공 설비 지원을 희망했다. 치즈 가공 공장을 지어준 굿네이버스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이익금 절반을 마을 사람들이 나눠 갖되, 나머지 절반은 궁핍한 아이들을 먹이는 데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성과는 주민들은 물론 굿네이버스 측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평양시 변두리의 시골 마을이던 강동군 구빈리의 지역 소득은 5년 만에 10배로 급증했다. 주민 숫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자랑스러운 발전상을 마을 어귀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 붙여놓을 정도였다.


 낙농 사업의 성과가 커지자 이번에는 북한 농업성에서 양계 사업 지원을 부탁해 왔다. 이는 각종 장비뿐 아니라 종자 개량을 위한 값비싼 달걀을 외국에서 사와야 하는 일이었다. 굿네이버스는 프랑스에서 1개에 적게는 5천 원, 많게는 5~20만 원까지 하는 최우량 품종의 종자 달걀을 수입했고, 북측에서는 반경 4㎞ 이내에 외부인의 접근이 금지된 종계장(種鷄場)을 제공했다.


 지원 사업의 효과가 날로 높아지자 북한은 이번엔 사료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굿네이버스는 원산 근교에 있는 아연 공장에 기계를 증설해, 이곳에서 생산한 아연을 팔아 원료를 공급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이 사업 역시 남한 정부의 무상기금 150만 달러와 은행 융자 유상 기금 700만 달러를 투입해 2년여 만에 은행 융자금 전액을 갚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 같은 북한에서의 사회적 기업 운영 경험은 굿네이버스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지역 개발 사업을 벌이는 데 커다란 자산이 됐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은 진작 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사장의 견해다. “때늦은 감이 있죠. 하지만 북한은 지금 후원금 몇 십만 달러가 간절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문 구호 분야를 개발해야 합니다. 농축산업, 의료, 교육 등 특화 분야에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요. 북측의 관심도 식량이나 비료 지원보다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개발 협력 쪽에 쏠려 있습니다.”


 구빈리 협동농장은 이 이사장에게 잊지 못할 ‘통일 경험’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을 포함한 사업 점검 방북단은 열흘 정도 머물면서 주민들과 더없이 가까워졌다. 그곳 개천에서 물고기를 함께 잡아 매운탕을 끓이고 한솥밥을 지어 먹으며 정을 나눴다.


 “북한을 우수한 인력과 풍부한 자원을 갖춘 가능성 있는 시장으로 보고 투자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통일 경험을 하는 북한 주민이 늘어나면 진짜 통일도 저절로 앞당겨지겠지요.”

 

아동 보호 지원


 굿네이버스는 그동안 농축산 분야를 포함해 북한의 25개 사업장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북한 주민 22만여 명을 도왔다. 신의주를 비롯한 지역의 육아원 아동들에게 영양식을 지원하는 아동 보호 지원 사업은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실질적 도움이 되고 있다. 2018년에는 북한 아동들이 굶주림에 고통받지 않도록 ‘굿네이버스 미국’을 통해 114톤의 분유를 지원했고, 20여 종의 의약품을 전달해 보건 의료 환경개선에도 힘썼다. 이와 함께 아동 교육을 위해 교과서 제작용 종이 150톤과 교육용 컴퓨터를 지원했고, 인라인 스케이트와 축구공 같은 특기 교육 자재도 틈틈이 제공해 오고 있다.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이사장이 1991년 창립한 굿네이버스는 이제 세계적인 NPO로 성장했다. 현재 한국 내 52개 지부, 36개 나라 210개 사업장에서 전문 사회복지 사업과 국제 구호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구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원만 3천 명이 넘고, 한국에서만 50만여 명에 이르는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1996년엔 한국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로부터 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 지위’를 얻기도 했다.


 “창립자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북 화해 분위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북한 주민 지원 사업을 축소하거나 끊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로우면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넘쳐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9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Sowing Seeds of Growth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Good Neighbors, an international NGO founded and led by Yi Il-ha, has been in the vanguard of humanitarian assistance in North Korea since the mid-1990s. The efforts go far beyond simple handouts, setting examples for the organization’s similar projects around the world.

 

 One of the most contentious issues surrounding South Korea’s approach to North Korea is humanitarian aid. Some regard assistance as a misguided and unfruitful effort spoiling the leaders in Pyongyang. Others urge charity regardless of the adversarial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sides. Yi Il-ha, known as the godfather of Korea’s non-government organization movement, is in the latter camp.


 The aim of Good Neighbors is a world in which hunger is absent and peaceful harmony is universal. Established by Yi in 1991, the NGO has 52 branches in South Korea and 303 offices in nearly 40 other countries. In 1996, Good Neighbors became the first Korean NGO to receive “general consultative” status from the UN Economic and Social Council (ECOSOC), the highest recognition the United Nations grant to NGOs.

 

A Hunger-Free World

 

 More than 3,000 staff members operate the organization’s welfare and relief programs and there are more than half a million donors in South Korea alone. Early this year, Yi anticipated the end of a long freeze on civilian aid programs for North Korea. But the collapse of the second U.S.-North Korea summit in February in Hanoi dashed his hopes.


 Yi had planned to build a large dairy farm and milk processing plant in North Korea, if Washington-Pyongyang relations improved. He intended to lay the groundwork for raising pigs, cattle and chickens, and build dairy processing and sausage factories. He had also hoped to supply South Koreans with samgyetang, or ginseng chicken soup, made in the North. He further had plans to help upgrade the North’s healthcare infrastructure. They included construction of a pharmaceutical research center, pharmaceutical plants and hospitals and other healthcare facilities, as well as factories to produce injectable solutions and capsules and herbal medicines. With U.S.-North Korea nuclear negotiations in limbo, however, all these plans remain on the drawing board.

 

Dairy Cattle Project

 

 Good Neighbors’ humanitarian aid programs in the North can be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child care and protection; agricultural and stockbreeding development; and healthcare services. The NGO’s presence in the North began in 1995, when it started delivering food and daily necessities. At the time, North Korea’s economy was on a downward spiral, which culminated in widespread famine in 1997, the year Yi visited the North for the first time.


 The next year, Good Neighbors’ paradigm changed when Chung Ju-yung, founder of the Hyundai Group, delivered 1,001 heads of cattle to the North in two spectacular parades of 50 trucks across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Following Chung’s example, Good Neighbors delivered 200 pregnant dairy cows a few months later and built dairy farms in the North. Chung’s largesse was publicized, but North Korean officials wanted the NGO’s deliveries to be unreported.

 

 Yi agreed with no objections. However, the fact that the cows were kept in quarantine in Incheon before their delivery became an open secret and they were filmed by a TV news crew as they left the port, upsetting North Korean authorities. After twists and turns, a total of 510 dairy cows were sent to the North and became the herds of four new dairy fa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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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fact, the idea of sending dairy cows to the North was conceived in 1995, when Yi visited the Chinese border city of Dandong. There, he met an Australian of Korean descent who had sent 200 head of hanu, or Korea’s indigenous cattle, to the North Korean city of Haeju, only to be told that dairy cows would be more helpful.


 Convinced that the North Koreans could have a future if they had a viable dairy industry, Yi consulted a senior dairy industry researcher in the United States. He promised to help but ran into U.S. government disapproval. When a fellow Good Neighbors member working for Seoul Milk learned about the logjam, he helped Yi buy his company’s 200 pregnant dairy cows at a giveaway price of 1.5 million won per head.


 A secondary reason for Good Neighbors’ interest in starting dairy farming in the North was that herds would require ongoing exchanges between North Koreans and South Korean veterinarians, dairy experts and Good Neighbors staff. Sure enough, Yi and his staff have so far made some 140 visits to the North--Yi about 120 visit himself.

 

 Eventually, North Korean officials wanted milk processing equipment to increase the added value of milk. After building a cheese processing plant for them, Good Neighbors attached one condition: half of the profit had to go to villagers and the other half to feed destitute children.

 

Raising Incomes

 

 The success of this project exceeded expectations. The income of residents in Kubin-ri, a rural village in Kangdong County on the outskirts of Pyongyang, jumped 10-fold in five years. Naturally, the village population grew as well. The villagers were so proud that they described their achievement on a placard, writing in large letters, and placed it at the entrance to their village.


 After seeing the success of the dairy project, the North’s Agriculture Ministry asked for support for chicken farming. It raised the need to buy expensive eggs to improve breeds, as well as equipment, from overseas. Good Neighbors purchased eggs of the most productive egg-laying chicken breeds from France that cost 5,000 to 200,000 won each, while the North built a chicken breeding farm that was off-limits to outsiders within the radius of 4 kilometers.


 Again, success bred a request. This time, it was a fertilizer plant. Good Neighbors planned to expand an existing zinc factory near Wonsan and sell zinc produced there to supply raw materials for fertilizer. The project started with a US$1.5 million grant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a US$7 million bank loan. It was so successful that the loan was repaid in just two years.


 All in all, Good Neighbors has helped some 220,000 North Koreans, including children, at 25 worksites throughout the North. The NGO’s experience in the North has become a reservoir of models to conduct regional development projects in other parts of the world.


 Good Neighbors’ food delivery programs for daycare centers in various regions help address chronic food shortages in North Korea. In 2018 alone, 114 tons of powdered milk was sent through Good Neighbors USA. Other deliveries aimed at children have included 150 tons of paper for printing textbooks and educational computers, as well as inline skates and soccer balls.


 Chongsong Pharmaceutical Company in Pyongyang produces dosages for injection. Good Neighbors is helping North Korea improve its health care system.

 

Food Assistance

 

 On a bigger scale, Yi believes, the humanitarian food assistance program that is currently in public debate in South Korea should have been implemented earlier. “It’s a little late to do it,” he says.


 “But the North isn’t in dire need of a few hundreds of thousands of dollars from the outside right now. Before anything else, we should develop specialized relief programs for them. We need to strengthen the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of the North’s agriculture, stockbreeding, healthcare and education. The North is also interested in sustainable development cooperation rather than food or fertilizer aid.”


 Yi recalls an unforgettable experience at the Kubin-ri Cooperative Farm. He and a few members of his staff stayed there for about 10 days and became very close to the locals. Together, they caught fish in a stream and then prepared and shared a spicy fish stew.


 “You can achieve success if you invest in the North, regarding it as a potential market with outstanding talents and abundant natural resources,” Yi says. “We can achieve unification early if many more North Koreans have chances to work and share experiences with South Koreans.”


 Then he adds, “My primary duty as founder of Good Neighbors is to create an atmosphere of reconciliation between the two Koreas. This is why we can’t reduce or stop humanitarian aid programs for North Korean people. I think I’ll have fulfilled my duty in the world if both Koreas become reconciled and peaceful.”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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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LiNK, Liberty in North Korea)는 미국의 한인 학생들이 2004년 설립한 비정부단체이다. 현재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을 비롯한 16개국 275개 단체와 협력 관계를 맺고 주로 탈북민들의 해외 정착을 돕고 있는데, 최근 한국지부장 박석길(Sokeel Park 朴錫吉) 씨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한국계 영국인으로 LiNK의 한국지부를 이끌고 있는 박석길 씨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동갑인 35세이다. 그는 자신이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더라면 ‘장마당 세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 주민들 중 특히 이 세대에 주목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태어난 이 젊은이들이야말로 북한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개연성이 높은 세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장마당’은 소련 붕괴 이후 북한 정부가 주민들에 대한 생필품 배급을 대폭 줄이자, 먹고 살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야외 시장을 가리키며 일정 부분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상징한다. 북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장마당 세대는 1990년대 중반 국가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몰락한 이후 성장해 기존 세대와 사뭇 다른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 이 연령대의 탈북민들에게 “당에서 배급받은 기억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외부 세계의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접한 이들은 가치관, 인식, 행동 등에서 부모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보 기술과 환경이 바뀌면서 이들은 불법 외국 미디어를 소비해 외부 세계의 색다른 관점에 눈을 뜨게 됐다. 특히 패션을 비롯한 외양과 생활 방식은 남한 드라마와 중국 영화로부터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국제 정치 전문가이기도 한 박 지부장은 장마당 세대 이외에 북한의 가족들과 접촉을 이어가고 있는 탈북인, 자본주의, 정보 유입의 확대, 정부 통제를 벗어난 인적 연결망 탄생, 북한 내부의 만연한 부패를 6대 북한 변화 요인으로 꼽는다.

 

우연한 계기

 

 “유엔에서 인턴십을 하느라 뉴욕에 있을 때 탈북인을 여러 명 만나게 됐죠. 그때 북한 주민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각오와 열정을 갖게 됐습니다.” 박 씨가 탈북인을 돕는 링크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관계학·국제정치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유엔이나 영국 외교부에서 일하고 싶어, 우선 유엔 인턴십부터 지원했다. 인턴으로 일하던 2008년 어느 날 뉴욕에 온 탈북자 구호단체 ‘크로싱 보더(Crossing Border)’ 설립자인 마이크 김의 강연을 들으러 가게 됐다. 시카고 출신 한인 2세이자 금융 전문가인 마이크 김은 북한 주민들의 빈곤 실상과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Escaping North Korea』라는 책을 출간한 직후였다. 훗날 탈북인을 돕다가 중국 공안에 구속되기도 한 그는 강연이 끝난 뒤 박 씨에게 링크에서 활동해 보라고 권했다.


 링크는 1980년대 후반에‘카스콘(KASCON, Korean American Students Conference)’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한국인 학생들과 미국인 학생들이 모여 해마다 컨퍼런스를 열면서 탈북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2004년 예일대에 모인 한인 2세 학생들은 고통 받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북한의 자유’라는 뜻이 담긴 ‘링크’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기로 했다. 회의나 토론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링크의 활동비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각종 재단, 학생, 기업가, 종교 단체, 회원 등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소모임에서는 티셔츠나 직접 구운 과자와 버블 티, 주먹밥 같은 작은 물건들을 팔고, 음악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하기도 한다. 정부 지원 예산은 전혀 없다.


 기부금은 주로 중국에 은신해 있는 탈북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쓰인다. 1명이 탈출하는 데 드는 돈은 3000달러(약 330만 원) 정도다. 탈북인의 주요 경유지인 동남아 국가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영어 교육과 직업 훈련도 시켜준다.


 링크는 ‘노마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노마드 인턴’을 양성해 미국, 캐나다 등지를 다니며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바꾸게 하는 캠페인이다. 노마드 인턴으로 선발되면 북한 관련 교육을 받는다. 그런 다음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10주 동안 북한을 알리는 활동을 펼친다. 노마드 인턴은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모두 1000여 곳을 방문한다.


 “미국 50개 주 중 두세 곳을 빼고 거의 모든 지방을 돌았어요. 작은 마을에 사는 미국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을 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장을 다녀본 박 씨의 체험담이다.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외교관의 꿈을 대신한 링크

 

박 씨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13살 때인 1998년 처음 한국에 방문했다. 영국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소년 박석길은 처음 찾아온 한국에서 북한의 존재를 실감나게 체험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창문에 붙어 있는 빨간 스티커가 궁금했던 그는 “이게 뭐냐”고 아버지에게 캐물었다. 아버지는 “북한 간첩을 신고하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린 소년은 그때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생생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 실향민이었다. 명천은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선물로 보낸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칠보산(七寶山)이 있는 곳이다. 박 씨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할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 갔다. 통역·번역가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국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 것은 물론 BBC 뉴스에서 한국 얘기가 나오면 “와서 보라”고 채근했다.


 영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박 씨는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 합격한 뒤 서울에 와 1년간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익혔다. 어머니를 더 닮아 외모는 서양인이지만 이제 한국어가 유창하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2007년 다시 한국으로 와 행정안전부의 지방정부연수원 국제협력교육과에서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박 씨는 2012년 5월 링크 한국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영국 외교관의 꿈을 접고 서울에서 장기 체류 상근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서울에 있는 한국지부에서는 현재 그를 포함해 8명의 회원이 상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탈북 난민 구조와 보호, 정착을 돕는 링크의 기존 업무뿐만 아니라 탈북민들을 대하는 인식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무엇보다 한국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한국 학생들이 탈북인을 너무 모르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에 탈북인이 얼마나 왔는지 대부분 모릅니다. 3만 명이 넘는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한국 학생들이 북한 주민에 무관심한 건 북한 이슈가 너무 정치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 씨는 링크가 ‘북한인권운동단체’로 불리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수단체로 알려져 활동에 제약을 받을까 봐 걱정스러워서다. “한국에선 북한인권단체라 하면 바로 보수우파라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우파도 좌파도 아닙니다. 북한 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비정부단체일 뿐입니다. 북한인권단체란 표현도 그래서 꺼려요.”

                                                              


 하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인권 개선 없이 북한의 정상 국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지금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비핵화를 어렵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이 문제를 언제까지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독재 정권 시절의 한국에게도 그랬듯이 북한 인권 문제는 어렵지만 누군가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박 씨는 BBC 월드서비스에 한국어 방송을 넣는 방안도 영국의 데이비드 앨턴(David Alton) 상원의원과 더불어 추진하고 있다. 한국어 방송이 많아질수록 북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프레임을 벗어난 공감 능력


 2018년 한 해 동안 링크의 도움을 받아 북한 밖에 정착한 탈북인은 326명에 달한다. 탈북인 구출 사업을 시작한 이후 2018년 말까지 합하면 모두 1000여 명이 링크의 혜택을 받았다. “탈북인들은 남북한 간 문화 격차와 생소한 제도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링크는 탈북인이 한국에 정착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탈북민들이 늘어나고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씨는 탈북민이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일 뿐 아니라 북한 변화의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탈북인 대부분이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통화하면서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의식적으로 북한 내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한 축이 된다는 논리다. 박 씨는 앞으로 10~20년 안에 지금과는 아주 다른 북한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북한 주민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북한을 ‘한민족이며 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을 많은 지하자원과 값싼 노동력 등을 갖춘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나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요.”


 박 씨는 “한국 청년들이 북한 사회에 대해 참 무심하다. 그래서 북한이 문을 열었을 때 편견과 몰이해로 인한 남과 북의 사회적 갈등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는 정치·안보 프레임으로만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에도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북한이라고 하면 흔히 김정은이나 핵무기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2500만 북한 주민이지요.”


 링크는 탈북민 지원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달하는 활동도 한다. 2018년 만든 다큐멘터리 <장마당 세대>(The Jangmadang Generation)도 그 일환이다. 박 지부장이 공동 감독을 맡은 이 52분짜리 다큐멘터리는 탈북 청년 10명의 생생한 육성으로 북한 청년들의 사고와 문화를 전해 준다. 박 지부장은 “다큐멘터리를 본 분들은 영상 속 북한 청년들이 내 친구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주문한다. “적대도, 시혜도 아닌 시선이 중요하죠.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가교가 탈북인인 셈입니다.”


 박 지부장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올해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탈북민과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영국 축구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 선수와 함께 뛰고 있는 해리 케인도 이번 훈장 서훈자 명단에 올랐다. 박 지부장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동하며 탈북인들이 무사히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모든 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훗날 여건이 된다면 조부모의 고향인 북한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북한 문제가 너무 큰 이슈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9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ALES OF TWO KOREAS

 

‘Refugees are the Vanguards of Change’

 

 Liberty in North Korea (LiNK) rescues and resettles North Korean defectors. The U.S.-based NGO’s office in Seoul is headed by Sokeel Park, who regards displaced North Koreans as potential facilitators of change in the communist North. But he feels South Koreans need to change a lot, too.

 

  When 13-year-old Sokeel Park, a Briton of Korean descent, first came to South Korea in 1998, a red sticker on every bus piqued his curiosity. That, his father explained, was an appeal to alert authorities about suspected North Korean agents.


 Today, Park is telling South Koreans about their fellow Koreans in the North, but not as an informant. He heads the South Korean branch of Liberty in North Korea (LiNK), a U.S.-based non-government organization dedicated to rescuing and resettling North Korean defectors. Its efforts are aided by 275 support clubs in 16 countri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Canada, Britain and Japan.


  At 34, Park is almost the same age as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Park believes their age group holds the keys to meaningful change on the Korean peninsula. If he was born in the North, Park would be in the “jangmadang generation.” Jangmadang (or changmadang in North Korea’s Romanization system) refers to North Korean farmers’ markets and black markets, seedlings of a nascent market economy. Jang is an abbreviation of sijang, meaning “market” and broadly “capitalism”; and madang means “place,” “spot scene,” etc. The markets began to emerge in the 1990s as the North grappled with natural disasters that destroyed crops and the end of assistance from the Soviet Union, which had collapsed.


  The jangmadang generation constitutes a quarter of the North Korean population. Growing up with a reeling socialist economic system, this cohort’s socialization differs markedly from previous generations.


  Most defectors of this generation claim they never received food rations from the Workers’ Party in their country. Their cultural experience is far removed from that of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too. With relatively more access to outside information, these young adults have different values, perceptions and attitudes. The internet and smuggled thumb drives have helped them develop alternative perspectives. South Korean TV shows and Chinese movies increasingly influence their fashion and lifestyle.


  Park sees six catalysts, or motives, for change in the North: the jangmadang generation; capitalism; chronic corruption; rising inflow of information; defectors, or refugees, who are in contact with their relatives in the North; and personal networks beyond government control. But to optimize the potential contribution that North Korean resettlers could make, the sentiment of South Koreans must be changed, says Park.

 

Genesis of LiNK


 LiNK is an offspring of KASCON, the Korean American Students Conference, which began in 1989. As interest in North Koreans fleeing their country swelled, their plight became a key topic of KASCON’s annual gatherings. Motivated to go beyond discussions and debates, second-generation Korean-American students at Yale University formed LiNK in 2004 and placed the headquarters in Washington, D.C.


  LiNK relies on donations from various organizations, students, businesspeople, religious groups, and its own members. It also sells T-shirts, cookies, bubble teas and rice balls, and organizes fund-raising concerts. It doesn’t receive subsidies from any government.


  Most of LiNK’s budget is spent on rescuing North Korean escapees hiding in China. It costs about US$3,000 (about 3.3 million South Korean won) per person. The group brings them through 3,000 miles of secret rescue routes through China and Southeast Asia to safe and free resettlement in South Korea or the United States.
By late 2018, LiNK had rescued more than 1,000 North Korean refugees and helped them resettle. Nearly one third of the total was achieved in 2018 alone.


 Park believes North Korea will be quite different in the next 10 to 20 years. Accordingly, young South Koreans need to empathize with North Korean people above anything else, he says emphatically.

 

 Vicarious Goal Fulfillment


 Park was born to a Korean father and a British mother in Manchester, England, where he grew up. His first trip to South Korea was to accompany his grandmother’s remains after she died in England.


 Between high school and university, Park spent a year at Yonsei University’s Korean Language Institute in Seoul. He earned a degree at the University of Warwick, where he majored in psychology, and returned to Seoul in 2007 to work at the Ministry of the Interior and Safety for a year. One of his duties was to facilitate courses on South Korea’s economy and culture for visiting officials from developing countries.


 Over the next two years, Park obtained a master’s degree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international political history at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began working as an intern at the United Nations headquarters in New York. During this time, Park met North Korean defectors and decided that he would devote himself to working on behalf of North Koreans.


  Park’s goal was a permanent job at the UN or the British Foreign Office. It was by sheer chance that he began working for LiNK. He attended a lecture in London by Mike Kim, the founder of Crossing Borders, an NGO that provides humanitarian assistance to North Korean refugees and their children living in China. After the lecture, Kim advised Park to work for LiNK.


 In May 2012, when LiNK’s Seoul office opened, Park abandoned his dream of becoming a British diplomat to join the new branch. Besides Park, there are eight staffers. Their main task is to rescue, protect and resettle refugees. Those stranded North Koreans need substantial assistance in adapting to South Korean society due to the wide gulf between the two Koreas in terms of their culture as well as their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s.

 

Heading the Seoul Office


 Park’s overriding goal is to get young South Koreans involved. He is flabbergasted at how little they know about North Korean defectors, who now number more than 30,000.


 Park believes North Korea will be quite different in the next 10 to 20 years. Accordingly, young South Koreans need to empathize with North Korean people above anything else, he says emphatically. At present, they seem to be grossly indifferent and lacking in empathy toward North Koreans, Park says. If empathy toward North Koreans were measured on a scale of 1 to 100, he estimates young South Koreans would barely score 10.


 As far as Park is concerned, the long-term chances of meaningful redirection in North Korea will improve with every refugee who resettles in South Korea. He believes North Korean resettlers abroad can be levers to economic and psychological change as they remit money to their relatives back home and secretly communicate with them.


  Park suggest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use a different lens when scrutinizing North Korea. Discussions about the North typically revolve around Kim Jong-un or Pyongyang’s nuclear arms buildup. Park says the human factor, or the North’s 25 million people, needs to receive more attention. To that end, LiNK regularly releases vivid stories about North Koreans. An example is the 2018 documentary, “The Jangmadang Generation,” which features 10 young refugees. After watching the 52-minute documentary co-directed by Park, South Koreans would comment that they found North Koreans not much different from their friends, Park says.


  This year, Park received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BE) from the British royal household for his services to UK-Korean relations. That was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to aiding defectors and promoting human rights in North Korea. Park passes credit to those who unassumingly help LiNK safely rescue displaced North Koreans.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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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민국 국민 생각--------대한민국 국민 생각---- 2019.10.20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국민 생각----

    국민 여러분 윤지오 유승준은 국민 속이고 돈벌고 도망간 년놈이다
    유승준이 자기가 군대 간다고 말한적 없다고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사기를 친다
    유승준 본인이 방송에서 여러번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가야 된다고자기도 군대 간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읍니다\
    방송에서 보고 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구나 정말 나쁜놈이다 정말 뻔뻔한놈이다
    유승준 본인이 직접 군대간다고 말해놓고
    군대가기전 병무청까지 속이고 미국가서 미국 시민권 취득하고 미국으로 도망친놈이
    아직도 뻔뻔하게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로 속이다니 정말 나쁜놈이다
    미국에서 미국시민권자로 평생 살기 바란다
    대한민국은 당신같이 국민사기치고 거짓말로 국민속이고 군대도 안가고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은 필요없다
    아이들 교육에도 안좋다해병대김흥국이백번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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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운동--
    -다음유튜브에서 성범죄1위목사 검색 필독하자?..
    다음 네이버 구글에서 종교개판이다 검색 필독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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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은 자기 가족은 문제 삼지 말라고 하더니 조국한테 하는 짓은 뭔짓인가 ?..
    윤석열이 조국장관한테 한짓이 정치 검찰들이 하는 짓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렇게 생각한다
    운석열 검찰총장은 본인 말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인터넷과 유튜브로 나경원 자녀의혹 검색 필독하고 수사하고
    황교안 자녀의혹 검색 필독하자 조국 장관님처럼 수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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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장관님 대한민국 리더가 되어 주십시요 부탁합니다 !!
    조국 법무부장관님 검찰 개혁 불쏘시개 역할 완수하고 정말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님이 대한민국 리더감인지 확실히 알았읍니다
    윤석열이 검찰이 정치 검찰이라는 것을
    표적수사 과잉수사 불공정수사를 국민들은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알았읍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반드시 검찰 개혁이 필요한것을 알았읍니다
    검찰 개혁은 문재인 대통령과 국민들이 하겠읍니다
    대한민국은 조국 장관님같은 리더가 필요합니다
    조국 법무부장관님 다음에는 반드시 대한민국 리더가 되어주십시요
    대한민국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계속 응원하겠읍니다
    !!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대한민국 리더가 될때까지 계속 응원하겠읍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문재인 대통령 파이팅 조국 교수님 파이팅

    +++++++++++++++++++++++++++++++++++++++++++++++++++++++++


  대북 지원 단체인 하나누리 대표 방인성 목사는 자원봉사자들이 손수 짠 목도리를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지원 사역을 8년째 이어오고 있다. 2017년부터는 마을금고를 주축으로 하는 북한 농촌마을 자립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한국 교회들이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여기기에 앞서 그들의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에 자리한 라선특별시는 북한에서 맹추위로 소문난 곳이다. 1월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18도인 데다가 “소가 날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바람이 거세다. 하나누리의 대표이자 함께여는교회의 담임목사인 방인성(Pang In-sung 方仁成) 씨는 해마다 겨울이면 이 추운 곳으로 향한다. 라진·선봉경제특구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의 아이들에게 목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곳에 겨울나기 물품을 전달하고 있는 방 목사는 “목도리 3,000여 개가 담긴 종이 상자를 실은 트럭이 칼바람을 뚫고 유치원, 탁아소, 보육원을 돌고 나면 아이들 표정이 무척 밝아진다”고 전했다.

                          
 “난방 연료가 부족한 실정이라 북한 어린이들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견뎌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목도리는 최고의 겨울나기 선물이죠. 그래서 저는 1m 남짓한 목도리가 3,000리나 떨어진 남과 북의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자원봉사자들의 정성

 

방인성 목사가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목도리는 예외 없이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든다. 주로 중고교 학생인 자원봉사자들이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손수 뜬다. 사무실에 오지 못하는 봉사자들은 하나누리가 제공하는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한 뒤 다시 사무실로 보내 준다. 캠페인에 참여한 중고교생들은 목도리를 뜨는 것으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자원봉사 시간을 인정받는 효과도 있으니, 이 캠페인은 남북한 청소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에서도 이 캠페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임직원들이 단체로 목도리 뜨기 운동에 동참했고, 미국·캐나다 등지에서도 재료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해마다 국내외적으로 2,000~3,000명이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것이 방 목사의 귀띔이다.


 목도리를 뜨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재료와 함께 동봉된 도안을 보면 처음 해 보는 사람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재료비는 방 목사가 벌이는 ‘목도리, 남북을 잇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독지가들의 정성으로 마련된다. 이 캠페인은 2011년 한 하나누리 직원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남북 관계의 악화로 교류 사업이 모두 중단됐을 때였다.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어려워도 민간 교류의 끈은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방 목사에게 목도리 뜨기 아이디어가 참신하게 다가왔다. 중국인을 통해 물품을 북한에 전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북한 관계자들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감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이 서울 중구에 있는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뜨고 있다. 목도리 뜨기 행사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열리는데, 방문이 어려운 자원봉사자들은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해서 보내온다.

                                                                          

자립을 위한 마을금고 사업

 

 하나누리는 좀 더 거시적인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북한 농촌마을 자립 모델 사업이 그것이다. 2009년부터 라선특별시 룡평마을에 농기구·비료·종자 등을 꾸준히 지원해 왔고, 량강도의 농장, 함경북도 청진의 고아원·보육원을 돕기도 했던 하나누리는 2017년부터 룡평자립마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10년 계획인 이 프로젝트는 외부 지원 없이 이 마을이 스스로 식량, 육아, 주거, 교육, 의료, 에너지, 자치 등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목표다.


 이 사업의 핵심은 마을금고 운영이다. 하나누리에서 마을금고 농장 계좌에 넣은 자금을 주민들이 대출 받아 농약이나 농기구를 사고 나중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 사업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창시한 그라민은행의 영세민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마이크로크레딧에서 착상했다.


 룡평마을은 48가구에 농장 면적이 62정보(약 61만 5,000㎡)에 달한다. 이 마을은 2017년 마을금고 대출로 트랙터 1대, 디젤유, 비료 등을 구입했다. 대출 규모는 한국 돈으로 치면 3,290만 원 정도다. 이 마을에서 보내온 2017년 성과 보고서를 보면 괄목할 만하다. 벼와 옥수수의 생산량이 각각 전년 대비 1정보(9,917㎡)당 1톤씩 늘었다. 또 1가구당 월 생활 수준을 비교하면 전년보다 쌀 10㎏, 국수 10㎏ 정도 소비가 증가했다.


 자립마을 사업의 관건은 빌린 돈의 상환 능력에 있다. 2018년 7월 17일 1차 상환액이 들어왔다. 초기 사업이 안정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하는 방 목사는 “룡평자립마을은 북한 전 지역에 적용 가능한 확산 모델”이라고 역설했다. 이 마을에서 상환한 자금은 나선특별시의 또 다른 마을에 재투자할 계획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 이후를 대비하다


 하나누리는 라선특별시에 대표 사무소를 여는 계획도 세웠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전반적 관리, 수익의 재투자, 남측 기업의 소통 창구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표 사무소는 중장기적으로 여행사, 외국어 학원, 운송업, 양식업, 지하자원 개발, 스마트시티, 도시·토지 개발 연구 사업 등을 추진하게 된다.


 방 목사는 룡평마을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구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0~30%의 고금리 대출이 북한 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2009년 북한 정부가 화폐 개혁을 단행했을 때 저축했던 돈을 많이 잃어버렸던 북한 주민들은 은행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 영향으로 고리대금업이 성행했고, 가계 대출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 착안해 마을금고에서 사업 대출뿐만 아니라 가계 대출도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룡평마을 1가구당 월 생활비가 한화 5만 원 수준인 점을 감안해, 한 가구당 최대 한화 8만 5,000원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것이 사업의 뼈대다.


 하나누리는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실질적인 활동, 연구, 교육, 이 세 날개로 통일을 준비한다는 목표로 2007년 출범했으며, 2019년 1월에는 부설 연구 기관으로 ‘하나누리 동북아연구소(Hananuri Northeast Asia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했다.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장은 룡평자립마을 사업 모델화 연구를 과제로 삼는다.


 하나누리 산하에는 이 외에도 ‘토지 + 자유연구소(Institute of Land and Liberty)’가 설립돼 희년경제(禧年經濟) 체제를 연구하고 있다. 토지든 노예든 빌린 지 50년이 되는 해에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던 초기 기독교 전통인 ‘희년’에서 착안한 개념인데, 햇빛이나 공기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공유하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즉 통일 이후 북한의 토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남북한에 적용 가능한 대안 경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두 체제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새로운 대안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드러내는 경제 구조를 성경 속의 희년 법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누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 사회·문화 교류 차원에서 남북 미술 작가들의 합동 전시회를 열고, 남북 청소년들의 나무 심기 봉사 활동을 통해 교류하는 기회도 만들었다. 2007년에는 남북 청년 500여 명이 도라산 역에서 휴전선을 넘어 개성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행사도 준비했다. ‘자전거로 분단을 넘는다’는 취지로 기획한 행사였다. 하지만 다음 해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행사는 돌연 취소됐다.


 “통일부나 후원 기업, 북측에서 모두 크게 관심을 보인 행사였어요.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협의서를 작성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는데,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더는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추진하고 싶습니다.”
 방인성 목사는 2007년 비정부기구 하나누리를 설립하여 북한 주민들을 위한 실질적 지원 외에도 통일 이후를 대비해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개신교 개혁 운동에 대한 관심

 

 방 목사의 북한 지원 사업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다. 하나누리의 활동은 남쪽 기독교계에서조차 대체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을 하느냐”, “그 사람들은 없어져야 되는 사람들이다. 속지 마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정도다. 방 목사는 “통일이 되면 한국 교회들이 북한에 예배당 세울 생각만 하는데, 북한 주민을 실질적으로 돕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교회와 교단들이 경쟁하며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확장에만 욕심을 부린다면 북한은 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한국 교회가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먼저 북한 주민을 사랑하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통일과 평화 운동에서 ‘돈보다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주변인들을 독려한다.


 방 목사가 북한과 통일 문제에 열중하게 된 데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인 할아버지 방계성(方啓聖)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절해 총살형을 당했다. 방 목사의 아버지 방정원(方正圓) 씨도 목사였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어 북쪽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령이라는 생각으로 통일과 평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방 목사는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신학부와 옥스퍼드대 웨스트민스터칼리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영국 국제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킹스 크로스 한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옥스퍼드 한인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1996년 귀국한 그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투옥됐던 성도들이 서울 창신동에 세운 성터교회를 맡았다. 이 성터교회 시절 아픈 신자를 위해 신장을 기증하는 바람에 그는 신장 하나로 살고 있다. ‘목사의 설교와 삶은 일치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방 목사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염원하며 광화문광장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한 적도 있다.


 이렇듯 남북 지원 사업과 사회적 현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그는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함께여는교회는 신자가 100명 남짓한 작은 교회이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를 결성해 개신교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9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ALES OF TWO KOREAS
A Well-Knit Unification Plan

 

 Rev. Pang In-sung tries to advance unification through humanitarian assistance, defying ups and downs in inter-Korean relations. He urges South Korean churches to take an interest in giving North Koreans substantial help to improve their livelihood before regarding them as evangelization targets.

 

 Every winter Rev. Pang In-sung leaves for the frigid northernmost edge of North Korea. Sub-zero temperatures are the norm in the border region, where they say “winds are powerful enough to lift cows.”


 The philanthropic pastor’s destination is the Rason Special Economic Zone, a slice of North Hamgyong Province, which is wedged between China, Russia and the East Sea. The purpose of his annual visit is to deliver humanitarian aid, a product of his roles as senior pastor of the Open Together Church in Seoul and president of Hananuri, an aid organization affiliated with his church. The recipients are those who are most vulnerable to the threat of frostbite from a brutal winter.

 

Mufflers and Microfinance

 

 “In the biting winds, we make a round of kindergartens, daycare centers and orphanages, delivering a truckload of about 3,000 mufflers. The children’s faces brighten up when they receive the mufflers,” Pang says. “North Korean children are exposed to winter chill with little warm clothing to protect them, when heating fuel is in very short supply. Mufflers are the best gifts for them in winter. I think those 1-meter-long mufflers connect people in the two Koreas.”

 

 Hananuri (literally, “one world”) also provides financial support in Ryongpyong, a farming village in the Rason area. It runs a communal fund to help the villagers buy farm equipment and supplies to promote self-reliance. It is modeled after the microcredit program of the Grameen Bank founded by Muhammad Yunus, a Bangladeshi social entrepreneur, economist and civil society leader, who received the Nobel Peace Prize in 2006.


 Hananuri was launched in 2007 with the goal of making preparations for national reunification based on three aspects of support programs: practical activities, research and education for building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Its newly opened think tank, the Northeast Asia Research Institute, is tasked with creating a win-win development model for Northeast Asia. Currently, it is studying Ryongpyong as a possible prototype.


  Through Hananuri as well as his Open Together Church, a small church with only some 100 members, Rev. Pang hopes to convince South Korea’s megachurches to reconsider their post-unification plans. “South Korean churches are mostly thinking of opening churches in the North, once the nation becomes reunified. But they should pay attention first to how to provide real help to North Koreans.”

 

Volunteer Knitters

 

 In 2011, a Hananuri staffer suggested giving mufflers as gifts to North Koreans. Inter-Korean relations were deadlocked at the time, with exchange programs almost completely stalled. Pang felt that private sector exchanges should be maintained, regardless of the state of relations between the governments. The idea of knitting mufflers struck him as fresh and original. “It was a great idea. Even North Korean officials marveled at how we conceived of such an idea,” Pang says.


  Most of the mufflers distributed through his “Mufflers Connect Both Koreas” campaign are knitted by South Korean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By participating in the campaign, the students earn school credits for volunteer community service. On the fourth Saturday of every month, they gather at the Hananuri office in Seoul’s Jung District to knit together. Those who cannot come receive knitting materials at their homes and send the finished mufflers to the office. The knitting materials are funded by donations.


  Children and teachers at North Korean kindergartens and daycare centers are particularly touched when they hear that the mufflers were knitted by South Korean students, probably because they feel they have received truly warm gifts. This is why Pang adheres to having mufflers voluntarily hand-knitted one by one, although he knows it would be far simpler to buy and send them to the North.


  Employees of Samsung Display and other Korean companies have also become involved in the campaign, and proposals to participate come from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mong other countries. “Some 2,000 to 3,000 people at home and abroad participate every year,” Pang says.

 

Communal Fund for Self-Reliance

 

  Hananuri’s activity in Ryongpyong began in 2009, when it provided assistance to daycare centers in Chongjin, also in North Hamgyong Province, and orphanages in nearby Ryanggang Province.


  In 2017, Hananuri began a 10-year project to help Ryongpyong become more self-sufficient in food supply, childcare, housing, education, medical service, energy and self-administration. The village fund, part of the project, extended a loan equivalent to some 33 million South Korean won (approximately US$30,000) to the village’s 48 households. With the money they purchased seeds, fertilizer and farm equipment for the 615,000 square meters (152 acres) of land that they tend.

 

  The success or failure of such self-reliance projects depends on whether the villagers can repay their loan. The village’s 2017 performance report helped mollify any concerns. Rice and corn output increased by about 60 tons each, compared to 2016, and each household’s consumption of rice and noodles increased by about 10 kilograms year-on-year. The first repayment was made on July 17, 2018.


  “Ryongpyong is a diffusion model that can be applied to any other place in the North,” Pang says. He plans to reinvest the repayment in another village in Rason.


 “North Korean children are exposed to winter chill with little warm clothing to protect them, when heating fuel is in very short supply. Mufflers are the best gifts for them in winter. I think those 1-meter-long mufflers connect people in the two Koreas.”

 

Preparing for Post-Unification Era


  Hananuri intends to open a representative office in Rason for on-site management of its aid projects. The office will also reinvest profits and serve as a communication channel for South Korean corporations. Over the mid- and long-term, the office will conduct research on tourism, foreign language education, transportation, fish farming, underground resources development and smart city programs as well as urban planning and land development.
While undertaking the Ryongpyong project, Rev. Pang learned that most villagers had heavy debt loads. He also came to know that loans with an interest rate of 10 to 30 percent are commonplace in the North. Many North Koreans do not trust banks, because they suffered substantial losses in the 2009 currency reform, which forced everyone to obtain new banknotes while limiting the swappable amount of the suddenly obsolete old currency.


 Loan sharks have filled the void created by the distrust of banks and the amount of household loans is raising alarm. To help relieve the pressure, Pang is preparing to let the communal fund offer an interest-free loan of up to an equivalent of 85,000 South Korean won to individual households. The average monthly cost of living per household amounts to some 50,000 South Korean won.


  Hananuri has another think tank devoted to the study of land use, namely the Institute of Land and Liberty. Research at the institute is focused on a jubilee cycle of economy, referring to an early biblical tradition in which land, property and slaves would be returned to their owners in the 50th year. The research concerns how land and property should be handled in the North after unification and what alternative economy could apply to both Koreas.


  “I believe that we need a new alternative economic structure for the unified peninsula, transcending the current systems of both Koreas,” Pang says. “The new alternative structure will have to envision genuine peace, following the biblical tradition of the Jubilee.”


 During the liberal administration of President Roh Moo-hyun (2003-2008), Hananuri sponsored joint exhibitions of South and North Korean artists and provided youths from both Koreas with an opportunity to plant trees together. In 2007, it envisioned 500 youths from both sides crossing the Demilitarized Zone on bicycles. But after the conservative Lee Myung-bak administration took over the following year, the cross-border bike ride had to be abruptly cancelled.


 “The Unification Ministry and potential sponsors, as well as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took a great interest in the event,” Pang says. “But we couldn’t go ahead because inter-Korean relations chilled. We had already reached an agreement with the North’s National Economic Cooperation Federation and we were just about to start it. I want to push for the event again if another chance comes sometime in the future.”


 The hostile political environment is not the only obstacle to Pang’s aid projects. Hananuri’s activities are not properly understood even by South Korean churches. Some compare his projects to “shoveling sand against the tide.” But Pang’s stress on grassroots support is unwavering.


  “More chaos will result in the North if South Korea’s megachurches and various Christian denominations and organizations compete only to open churches and expand their influence there,” he says. “I hope South Korean churches won’t regard North Koreans merely as targets of evangelization, but will love them first and then think seriously of ways for people of both Koreas to live together peacefully.”


  Rev. Pang In-sung is shaping a win-win development model for post-unification Korea in addition to providing substantial assistance to North Koreans through Hananuri, a nongovernmental aid organization founded in 2007.

 

Efforts for Church Reform

 

  Pang is a third-generation pastor in his family. His grandfather, Rev. Pang Gye-sung, aroused his interest in North Korea and the unification of the divided peninsula. “I was more and more interested in unification and peace, as I believed that loving North Koreans is the essence of the gospel, transcending the tragedy of my own family,” he says.


  Rev. Pang Gye-sung was a pastor from Cholsan, North Pyongan Province. He was imprisoned for refusing to pay respects at Shinto shrin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fter the national liberation in 1945, communists killed him for refusing to put up a North Korean national flag at his church and join the North’s Christian federation.


  Pang In-sung studied theology at King’s College London and the University of Oxford’s Faculty of Theology. He was ordained as a minister at the International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Kingdom and worked as a curate at a Korean church in Kings Cross, London, and as senior pastor at another Korean church in Oxford.

 
  After returning to South Korea in 1996, he took charge of the Seongteo Church, which was built in Seoul by Protestants who were incarcerated for refusing to pay respects at Shinto shrin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He has only one kidney because he donated the other to a sick member of the church. It was a decision based on his conviction of “practicing what you preach.” In 2014, Pang staged a 40-day hunger protest at Gwanghwamun Square in downtown Seoul, seeking justice for the victims of the Sewol Ferry disaster that year, most of them high school students.


 Pang also is known for his advocacy for small church. In cooperation with the Solidarity for Church Reform in Korea, he is conducting a Protestant reform movement that seeks an end to hereditary succession of church administration and leadership.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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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에서는 북한 하면 으레 ‘은둔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최근 비핵화 협상으로 북한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지만, 여전히 통제가 엄격한데다가 방문마저 자유롭지 않아 사회 전모를 제대로 알 수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국제 사회의 엄혹한 제재로 경제 발전은 정체되고 인민들의 생활고도 극심하리라는 통념을 갖는다.


 이 같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진천규 기자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타커스)는 우리가 잘 몰랐던 ‘평양의 오늘’을 보여 준다. 그는 2017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방북해, 40여 일간 북한 주민 250여 명을 만나고 취재한 내용과 사진을 이 책에 수록했다. 그래서 이 책은 북한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 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휴가 중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단절되었던 지난 9년간 한국 언론인의 방북 취재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을 지닌 한국인 프리랜서 언론인인 진 기자는 북한 당국과 신뢰 관계를 구축해 평양은 물론 원산, 마식령 스키장, 묘향산, 남포 등지의 모습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자동차와 휴대전화

 

 진 기자가 스스로 ‘평양 순회 특파원’이라고 칭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언론 자유 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민주 모금 형태로 창간된 「한겨레」 신문에 합류했던 그는 그해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담 등을 취재하면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특히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는 풀기자로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손을 잡고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직접 찍기도 했다. 
                                                                       

<진천규 기자가 찍은 평양 창천거리>

 이후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그가 17년 만에 다시 찾은 북한에서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여긴 것은 자동차와 휴대전화였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 옥류관 앞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10여 대가 늘 줄을 서 있었다. 택시는 외국인이나 고위 간부들만 탈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일반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차가 드물어 한산한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 경찰이 수신호를 하던 평양에 신호등이 없으면 안 될 만큼 자동차 대수가 늘어난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죠. 평양 시내에만 6,000대 이상의 택시가 돌아다니고 택시 회사도 5~6개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인 운전원에게 물었더니, “택시는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이 없는 뒷골목까지 가려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개인 소유의 자동차가 없어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러시아워에는 약간의 교통 혼잡 현상도 일어난다고 한다.

 또 하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여전히 정보와 이동이 통제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휴대전화 사용자가 500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양 시내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더 이상 신기한 장면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진 기자가 평양 취재 중 더욱 놀란 사실은 예상보다 훨씬 개방적인 인터넷 환경이었다. 평양국제공항에서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그는 국제공항이라서 가능한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묵었던 평양호텔에서도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는데,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상황은 아니겠지 짐작하면서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원하는 자료를 바로 찾고, 미국이나 남한의 지인과 아무 때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평양에서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면 받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보내는 이메일이 맞느냐”며 깜짝 놀라곤 했단다. 한번은 업무 때문에 급하게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방이 메일을 받고도 평양에서 보낸 게 맞는지, 행여 감시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해 답장을 안 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도 평양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와 이메일로 실시간 소통하며 출간 마무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신뢰를 토대로 한 취재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평양 시내는 신축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과거에 비해 훨씬 화려해 보였다. 특히 창전(倉田)거리는 외국인들이 ‘평해튼(평양 맨해튼)’이나 ‘리틀 두바이’라고 부를 정도의 모습이었다. 또한 주로 과학자들이 거주하는 미래과학자 거리에는 고층 아파트와 고급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야심차게 개발했다는 신시가지 려명(黎明)거리의 빌딩숲은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카퍼레이드 방송 화면에도 잡힌 바 있다. 
                                                                  

 

 진 기자는 평양에 피자 가게가 6개나 운영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식당이라고 한다. 만경대 구역 축전동에 있는 ‘이딸리아료리전문식당’은 2008년 평양에 처음 생긴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진 기자가 방문했을 때 300여 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것이 보통 시민들의 살림집 내부 모습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살림집이라 불리는 아파트를 취재할 기회가 생겼는데, 북한 관계자는 그에게 “외부인으로는 최초의 취재”라고 귀띔했다. 그가 방문한 곳은 고층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려명거리 지역이었는데, 2017년 완공된 이 아파트는 재개발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 1순위로 입주 자격이 주어졌고, 근처에 근무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진 기자가 방문한 집에는 침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등이 갖춰져 있었으며, 남한의 중산층 가정집과 비슷한 생활환경을 누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하고 찾아갔지만, 일부러 없던 물건을 갖다 놓거나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평양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수가 아니라 서양처럼 방의 개수로 계산한다고 한다. 방 2개짜리 집, 3개짜리 집, 4개짜리 집 등으로 집의 크기를 구분 짓는 것이다. 방의 개수는 집주인의 권력 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양 가족의 숫자로 결정한다고 한다.

 

   려명거리에 있는 아파트의 한 달 주택 사용료는 240원으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700원 정도다. 실제 가격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요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 기자는 “고층 아파트의 경우 엘리베이터 관리자가 따로 있어 눈길을 끌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전기료는 받고, 수도료는 따로 없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방북 취재 기간 동안 자신을 담당하는 안내원이 있었지만, “평양 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취재했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은 어떠한 검열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과 사진은 전체 모습이 온전히 나오게 해 달라. 건설 노동자와 남루한 노인 모습은 찍지 말아 달라”가 전부였다고 한다.

 

문화적 통일을 향한 노력

 

 그동안 세상에 공개된 북한 관련 책과 사진은 주로 외국 기자가 취재한 것들이다. 그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진 기자는 그런 한계를 깨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까지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다. 
                                                                         

                                                 <진천규 기자>

 그는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조금만 더 경제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곧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녘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오판이란 판단이 들었다”고 말한다. 평양 사람들은 의식주를 단순히 해결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외부인들의 생각보다 다양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진 기자는 북한핵 문제로 북한과 미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난해 10월에도 “평양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으리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 취재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진 그는 ‘경계인’으로서 “편견 없이 보고 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런 얘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평양의 특별한 일면을 북한 전체의 모습처럼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비판하지만, “남한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얘기다.

 평양 상주 특파원이 오랜 꿈이었던 그는 지금 2019년 개국할 계획인 ‘통일 TV’를 설립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준비위원장을 맡은 통일 TV는 남과 북이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역사물과 자연 다큐멘터리, 음식 관련 프로그램 등을 제작하고, 북측 영상물 저작권을 확보해 방영하는 케이블 방송사다. 그는 통일 TV를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남과 북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 문화적 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8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Alternate Perspective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a Ji-kwon Photographer

 

 Western media often describe North Korea as “reclusive,” a nod to its rigidly controlled accessibility. The limitation naturally inhibits a thorough understanding of its society. Consequently, outsiders are apt to believe that international sanctions are crippling the North’s economy and heaping hardship on its people.

 “Pyongyang Time Flows with Seoul Time,” published by Takers in Seoul earlier this year, contradicts this conventional view. Written by Jin Chun-kyu, a U.S.-based freelance journalist, the book unveils an unfamiliar tapestry of today’s Pyongyang, thanks to relaxed restrictions on his visits. Starting in October 2017, Jin visited North Korea four times over the next nine months, staying a total of 40 days. His book, the result of meeting about 250 North Koreans and taking insightful photographs, describes how much the North has changed in recent years. Amid his efforts to unlock relations with Pyongyang,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included the book in his summer vacation reading.

 Until the recent thaw, chilly cross-border relations blocked South Korean reporters from entering the North. But Jin has a permanent U.S. resident card, placing him in a different category than other South Koreans, and he has built-up trust with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His status allowed him to move around relatively freely, meeting North Koreans at the Masikryong Ski Resort and Mt. Myohyang as well as in Wonsan, Nampo and Pyongyang, and photographing moments of their lives.

Cars and Mobile Phones

 

 Jin calls himself a “roving correspondent reporting from Pyongyang” for a reason. In 1988, he formed The Hankyoreh, a left-leaning South Korean newspaper, along with other journalists who were forced out of mainstream news media by military dictatorships. That year, Jin had a brush with the North when he covered a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meeting at the border truce village of Panmunjom. He then visited the North to cover high-level inter-Korean talks in 1992 and the first inter-Korean summit in 2000. At the latter, he photographed President Kim Dae-jung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il grinning and raising their hands after they signed the June 15 North-South Joint Declaration.

 Jin e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2001. Sixteen years later, he revisited the North and was dumbstruck by the multitude of cars and proliferation of mobile phones that had transpired.

 Taxis were everywhere, or queued up at hotspots. About 10 taxis always stood in front of Okryugwan, waiting for diners to leave the best restaurant in Pyongyang. Contrary to assumptions that only foreigners and senior officials took taxis, ordinary citizens tapped the taxi swarm. Where police officers’ whistles and hand signals were once enough on quiet streets, traffic lights had now become a necessity to maintain order.

 Before, such traffic was “unimaginable,” Jin said in an interview. “I heard that more than 6,000 taxis are running around streets in Pyongyang alone and that there are five to six taxi companies there.”
 One taxi driver said his cohorts mainly had passengers going to neighborhoods that lacked a subway station or bus stop. More and more people used taxis because they were unable to have a car. Even light traffic jams occurred during rush hours.

 Jin’s next big surprise was to learn that as many as five million North Koreans were now using mobile phones, though information and movement were still controlled. Pyongyang pedestrians having a conversation on a mobile phone or taking a picture with it were no longer a novelty.

 Another revelation that far exceeded expectations was Internet availability. At Pyongyang International Airport, Jin assumed his connection to a Wi-Fi network was simply a service for global travelers. Later, he discovered unfettered Internet access at his Pyongyang hotel as well. At first, it was hard for him to fathom, guessing that not everyone was allowed to log on.
“It was possible for me to find data I wanted immediately and exchange emails with my acquaintances in the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 anytime,” Jin recalled.

 His email from Pyongyang to Seoul was met with skepticism; recipients asked, “Is this really an email you sent from the North?” One day Jin waited and waited in vain for a reply to his urgent email to Seoul. He later learned that the recipient doubted that the email was really sent from Pyongyang and feared that he was being watched by somebody. Jin put the finishing touches to “Pyongyang Time Flows with Seoul Time” while in Pyongyang, exchanging emails with the publishing house of his book in Seoul.

 

Trusted Outsider

 

 Crisscrossing Pyongyang, Jin came upon streets lined with new high-rise buildings that looked fancier than in the past. Changjon Street is so gorgeous that even foreigners call it “Pyonghattan,” a portmanteau of Pyongyang and Manhattan, or “Little Dubai.” Mirae (Future) Scientists Street, where many scientists live, was so packed with high-rise apartment buildings and a high-end department store that it looked like a backdrop in a capitalist country. A complex of structures in Ryomyong New Town, a development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reportedly advocated vigorously, was shown by TV cameramen riding along President Moon’s motorcade during his visit to Pyongyang in September.

 Jin learned that as many as six pizza parlors occupy the North Korean capital, catering to ordinary citizens, not foreign tourists, and in 2008, the first Italian restaurant opened in Chukjon-dong, Mangyongdae District. When he visited there, Jin found that the spacious 990-square-meter restaurant was packed with customers enjoying pizza or spaghetti.

 The rarest pictures that Jin took in Pyongyang show the insides of ordinary citizens’ apartments. A guide told Jin that he was the first outsider to see the insides of Pyongyang residents’ apartments. He visited Ryomyong Street, which is flanked by year-old high-rise buildings staffed with elevator operators. The buildings’ residents are returnees to the neighborhood, who had to relocate when redevelopment began. Most residents there work nearby.

 The homes Jin visited were furnished with beds, gas stoves, refrigerators and electric cookers. They resembled middle-income homes in South Korea. Although residents were informed of his visit, Jin did not have the impression that they had installed items that they did not own or decked their homes out purposefully.

 North Koreans do not measure their apartments by pyeong (3.3 sq. meters) as done in South Korea, but by the number of rooms. Hence, there are apartments with two to four rooms. The number of family members, not social status and position, determines what apartment they occupy. Each family pays a monthly rent of 240 won (about 2,700 South Korean won) for their home on Ryomyong Street. It may not be a realistic price; it seems to be a symbolic rent, Jin said. North Koreans do not have water bills but are charged for electricity to encourage energy saving.

 During his latest visit, Jin was escorted by a guide but did not experience interference. “I was able to freely talk with Pyongyang citizens. Nobody censored the pictures and videos I took,” he said.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only asked him to photograph statues of (the nation’s founder) Kim Il-sung and (former leader) Kim Jong-il in full length and not to take pictures of construction workers and elderly people in ragged clothes.

 

 Efforts towards Cultural Unification

 

 Most of the books and pictures about the North published so far are by non-Korean journalists. Not being native Korean speakers, they had to approach the North and its people from the observer’s point of view. Jin, however, was positioned to skirt the linguistic barrier. He wanted to record not only North Koreans’ appearance, but also their emotions and thinking.

 “The outside world, including the United States, believes that North Korea will throw its hands up in the air and surrender soon if more economic sanctions are imposed. But it occurred to me, when I took a firsthand look at today’s North Korea, that such a belief is misguided,” he said. 

  Jin found Pyongyang residents enjoying diverse lives as consumers, far from simply fulfilling their basic needs as outsiders tend to think. Pyongyang people were leading their daily lives “in a calm way, contrary to widespread fears that North Korea was busy preparing for a war,” even in October 2017, when Pyongyang-Washington antagonism intensified over the North’s missile tests and continued development of nuclear weapons. 
 

 With a sense of mission, Jin said that he was determined to “see and report on everything without prejudice” as a “border rider.” Some people accuse him of wrongfully using unique aspects of Pyongyang to paint a revisionist portrait of North Korea. He disagrees. “It’s wise to accept it, as it is, as we accept the difference between Seoul and provincial regions, isn’t it?”

 While dreaming about becoming a permanent correspondent in Pyongyang, Jin is currently absorbed in creating “Unification TV,” a cable network scheduled to launch in 2019. The content plan includes airing history programs, nature documentaries and food programs that people in the South and the North can enjoy, as well as North Korea-produced programs after obtaining their copyrights.
 “I believe that both Koreas can play a big role in moving up the cultural unification of the nation by exchanging diverse cultural contents with each other and restoring homogeneity,” said Jin, who is chairing the Unification TV preparatory committee.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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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1년 만에 다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평양냉면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 회담 만찬 식탁에 오를 ‘옥류관 평양냉면’을 모두 발언에서 언급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고, 바로 그날부터 점심과 저녁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유명 냉면 가게 앞이 장사진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 카드회사가 통계 자료를 통해 회담 직후 사흘 동안 서울 시내 평양냉면 가게 매출이 전 주보다 80%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평양냉면의 폭발적 인기 속에서 주목받는 곳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수석 요리사를 동반하고 온, 바로 그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비법을 배운 탈북민 요리사 윤종철 씨가 경영하는 동무밥상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이 집은 이번 신드롬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맛집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 맛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일 점심시간에는 1시간 넘게 순서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상 회담을 계기로 더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 바빠진 윤종철 씨를 서울 합정역 부근에 있는 동무밥상에서 만났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식당은 아직 붐비고 있었다. “가게 규모에 비해 원래 손님이 많았지만, 남북 정상 회담 덕분에 갑자기 더 늘어났습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필리핀 같은 외국 방송사까지 우리 식당을 취재하고 싶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종철 씨는 1998년 탈북해 2000년 한국에 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음식을 배운 이력이 있는 그는 2015년 서울 합정동에 ‘동무밥상’이란 음식점을 열어 북한 음식을 내고 있다.

                                                                              

 

 남북한 평양냉면의 차이

 

 동무밥상에서 평양냉면만 팔지는 않는다. 메뉴판에는 오리 불고기, 명태 식해, 찹쌀 순대, 감자 만두, 옥수수 국수 같은 다양한 북한 향토 음식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평양냉면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음식 하면 자연스럽게 평양냉면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이 4대 냉면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옥류관 냉면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윤 씨는“고급 인력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북한에서는 뭐든 잘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전부 평양에 보내져요.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 1961년 김일성 교시로 만들어진 옥류관입니다.”

 윤 씨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음식에서 평양 최고의 식당인 옥류관의 맛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냉면을 만들 때도 남한의 평양냉면집들과 달리 옥류관 식으로 소 잡뼈와 양지, 꿩고기, 닭고기를 우려낸 냉면 육수를 돌과 숯, 모래가 담긴 여과기에서 한 번 걸러 낸다. 간장은 양파, 대파, 사과, 배를 넣고 달여 낸다. 그런데 윤 씨는 “옥류관 평양냉면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이유는 육수와 간장을 만드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 대동강과 남한 한강의 물맛이 다르다고 강조하는 그는 “옥류관이 금강산에도, 중국에도 생겼지만 물이 달라서 냉면 맛이 다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 동무밥상의 냉면은 반죽의 재료 배합 비율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밀 함량이 60~70%에 이르는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과 다르게 메밀 비율은 40%로 낮고 대신 고구마 전분이 40%, 밀가루가 20% 들어간다. 그래서 면발을 씹어 보면 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옥류관 냉면의 국수는 메밀 40%에 감자 녹말이 60%”라면서 자신도 개업 초기에는 옥류관과 동일한 비율로 면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면발이 질기다면서 가위로 잘라 먹는 손님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녹말 비율을 줄이고 밀가루를 섞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포함한 국수 종류를 ‘명(命)길이 국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에도 냉면을 먹고, 잔칫집에 가도 냉면을 줍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어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면이 쫄깃쫄깃한 이유를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제 얘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어서 설명을 안 하기로 한 대신 반죽에 밀가루를 섞었지요.”

                                                                                

 

 그는 또 옥류관에서는 소화를 돕는 식소다를 반죽에 넣지만 자신은 넣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남한 사람들은 식소다를 넣으면 안 먹어요.”


 식소다로 인해 옥류관 냉면이 칡냉면에 가까운 검은 색이 나는 것과 달리 동무밥상의 냉면이 연회색으로 바뀐 것은 바로 그 차이 때문이다.


 남측예술공연단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가 옥류관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가수 윤도현(尹度玹)은 “옥류관에서는 종업원이 직접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식초를 뿌려 준다. 우리처럼 육수에 직접 식초를 넣지 않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다”고 소개한 바 있다. 윤종철 씨는 남북 음식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여 식초와 겨자는 손님들의 취향대로 넣도록 하고 있다. 동무밥상에서는 냉면 상차림에 평양 백김치, 함경도 콩나물김치, 양강도 양배추김치가 함께 나오는데 이 또한 윤 씨의 배려다. 손님들이 북한의 명물로 소문난 김치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남한 평양냉면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무밥상 냉면에 처음에는 “심심하다”거나 “밍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이 집의 냉면 맛에 한번 빠지면 단골이 된다고 하는데, 그 비결은 아무 양념도 치지 않고 수저로 홀짝거리며 계속 떠먹게 되는 육수 맛 때문이란다.

                                                                  

소중한 북한 음식의 원형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 씨가 평양의 옥류관에서 요리를 배운 데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덕이 컸다.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식 요리사로 일했던 경력이 자칫 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당 간부를 지낼 만큼 출신 성분은 괜찮았다. 그 덕분에 윤 씨는 군에 입대한 뒤 당의 배려로 전문 취사병 교육을 받게 됐고, 교육을 받으러 간 곳이 바로 옥류관이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요리를 배운 뒤, 군 간부 전용 식당의 요리사로 배치됐다. 10년 넘게 북한군 장성급 전용 식당에서 고향이 각기 다른 장성들이 제각각 주문하는 요리들을 만들다 보니 여러 지역의 음식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머릿속에 북한 음식 레시피가 수백 가지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게 다양한 레시피를 익힌 그는 제대 후에는 회령경공업전문학교에서 발효 공부를 해 된장, 간장 같은 발효 식품이나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고, 강의도 했다. 평양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이따금 불려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8년 탈북한 그는 중국을 거쳐 2000년 한국으로 왔다. 정착 초기에는 건설 현장 일용직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013년 한 음식 문화 행사에 참석한 윤 씨는 북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체험한 옥류관 요리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요리 스튜디오 ‘호야쿡스’ 이호경 사장의 도움으로 3일짜리 ‘팝업 스토어’를 차릴 수 있었고, 고객들 호응이 좋아 2015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윤종철 씨는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먹기 편하게 전분과 밀가루의 조합을 만들어 냈고, 지나치게 많은 양념을 써서 먹은 후에 계속 갈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레시피도 개발했다. 그의 진심과 솜씨가 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옥류관 냉면의 비법을 전수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고, 프랜차이즈를 하자는 제의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다고 한다. 만약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되면, 옥류관 식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의 원형을 고수하기 위한 자신의 철칙이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맛있다는 표현을 ‘딱 소리 난다’고 합니다. 동무밥상 냉면이 옥류관 냉면 못지않게 맛있다는 걸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런 유혹을 이겨 내고 싶습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행하는 계간 KOREANA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Pyongyang Cold Noodles
A Taste of Unity


Kim Hak-soon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 great beneficiary of the inter-Korean summit on April 27, despite all its fanfare, turned out to be Pyongyang naengmyeon. The meeting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11 years. But with no major breakthrough in North Korea’s denuclearization reported, South Koreans’ interest turned to what was eaten rather than what was said. 

  After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dined on the cold noodles, long lines immediately formed at the most well-known South Korean restaurants featuring the dish, which became the top searched keyword online. In the three days after the summit, sales at Seoul restaurants specializing in Pyongyang naengmyeon exceeded that of the previous week by more than 80 percent, according to one credit card company.

  Kim said a chef from Okryu-gwan, the best restaurant in the North Korean capital, prepared the naengmyeon. That turned the spotlight to Dongmu Bapsang owned by Yun Jong-cheol, a former trainee at the North Korean restaurant who defected to the South in 2000.


 Food critics and a TV show about gourmet dining had already noted the small, unassuming restaurant run by Yun and his wife. Yet it was the summit that turned the restaurant into an overnight sensation, with media and word of mouth assuring diners that Dongmu Bapsang duplicates Okryu-gwan’s Pyongyang-style naengmyeon. Customers stood in line for more than an hour at lunchtime.
 

  I met Yun at his restaurant, which stands on a side street near Hapjeong subway station, in Mapo District, Seoul, just north of the Han River. The restaurant was still bustling long after the lunch crush. “My restaurant was busy with customers before. But their number soared after the summit. Even Japanese and Philippine TV crews, as well as TV crews here, want to make reports on my restaurant,” Yun said.

 

The Menu, Common to Royal

 

 Yun tries to recreate the taste of Okryu-gwan in his menu, but he is mindful of South Koreans’ palate and makes adjustments accordingly. Little seasoning is required in recipes that he has developed. 

  His array of dishes offered includes everyday fare such as duck bulgogi, fermented pollack, glutinous rice sundae (Korean blood sausage), potato dumplings and corn noodles. But the menu also has elaborate dishes that appeared on the table of royals. Such delicacies must be ordered in advance. There is also a variety of North Korean-style kimchi to be relished, including Pyongyang-style white kimchi, Hamgyong Province-style bean sprout kimchi, and Ryanggang Province-style cabbage kimchi. But Pyongyang naengmyeon is undoubtedly the most popular dish at the restaurant. This should come as no surprise at all. Whenever South Koreans think about North Korean dishes, it is Pyongyang naengmyeon that instantly comes to mind. 


 Besides Okryu-gwan, there are three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Pyongyang - Chongryu-gwan, Koryo Hotel and Minjok Sikdang - but Yun matter-of-factly said Okryu-gwan has the best naengmyeon chefs. “In North Korea, all talented people are sent to Pyongyang. Okryu-gwan, a restaurant built at the regime founder Kim Il-sung’s instruction in 1961, is where the best chefs are working.”

 

Broth & Noodles

 

 The broth for Yun’s naengmyeon is made with cattle bones, beef brisket, pheasant meat and chicken. And unlike other Pyongyang naengmyeon restaurants in South Korea, Yun applies a finishing touch by straining the broth through a filter made up of stones, charcoal and sand - just as Okryu-gwan does. He also boils soy sauce with onions, scallions, apples and pears. Still, Yun won’t claim that his naengmyeon is exactly the same as that served at the top Pyongyang restaurant. “It’s a pity that I can’t perfectly recreate the Okryu-gwan naengmyeon here,” Yun said. The main reason is that South Korean water used for the broth and soy sauce taste different from North Korea’s.

 “Okryu-gwan has branches at Mt. Kumgang (North Korea) and in China. But their naengmyeon tastes slightly different from each other,” he said.

 The composition of the noodles at Dongmu Bapsang also differs from other restaurants. At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Seoul, some 60 to 70 percent of the noodle is buckwheat. Yun uses a 40:40:20 ratio of buckwheat to sweet potato starch to flour. That makes his noodles less sticky. 


 Okryu-gwan’s buckwheat to potato starch ratio is 40:60, according to Yun. He used that ratio when he opened his restaurant toward the end of 2015. But he began to use less starch and more flour after he saw his customers cutting his noodles because of their stickiness.

 “People in North Korea call all kinds of noodles ‘long-life noodles,’ because long noodles refer to a healthy long life. That’s why guests are served with naengmyeon at birthday parties or wedding receptions. I was stunned to see South Koreans eat their naengmyeon after cutting the noodles with scissors.” Yun said.

 “At first, I tried to explain to customers why my noodles were sticky. But unfortunately, I found some of them feeling displeased with my explanation. So, I stopped trying to persuade them. I decided instead to add more flour to the dough.”

 Another departure from Okryu-gwan is the use of baking soda. Its chef adds it to dough, believing that it is good for digestion. South Koreans are health-conscious, but they don’t like noodles cooked with baking soda, Yun observed. Baking soda makes Okryu-gwan’s naengmyeon blackish brown just like kudzu starch noodles, bu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pale gray. 
 

 Besides differences in the texture and appearance of the two restaurants’ naengmyeon, how customers enjoy the cold noodles differs. Rock singer Yoon Do-hyun had Okryu-gwan’s naengmyeon when he was in Pyongyang in early April to perform concerts. He said, “I saw waitresses pick up customers’ noodles with chopsticks themselves and sprinkle vinegar on them. This is different from the way we do it. We put vinegar directly into the broth.”

 Yun isn’t fussy about how his customers wield vinegar and mustard bottles; they attack their bowls of cold noodles any way they want. He has accepted the difference between the dietary cultures of the two Koreas.

  Some customers, familiar with the taste of South Korean-style Pyongyang naengmyeon, initially use words like “bland” or “insipid” to describe Dongmu Bapsang’s naengmyeon. But they quickly become regular patrons once they are accustomed to the taste. They even enjoy sipping the broth without adding any seasoning. 
 

 A native of Onsong, North Ham-gyong Province, Yun trained at Okryu-gwan thanks to his father who was a senior official in the Workers’ Party. The fact that his grandfather was a chef of Japanese dishes during the last years of the colonial era could have been a black mark on his family name. But Yun’s father was promoted to a senior party position.

 

Journey Through Kitchens
 
 After Yun enlisted in the army, he trained as a culinary specialist at Okryu-gwan for four months and then was assigned to a mess hall for high-ranking army officers. There he stayed for over 10 years, absorbing the recipes of many regional dishes for the senior officers, who came from all corners of the country. “I have hundreds of recipes of North Korean dishes in my head,” Yun said.
 After his time in the army, Yun attended Hoeryong College of Light Industry, where he acquired fermentation techniques and learned how to make fermented foods like soybean paste, soy sauce and cider. Having mastered the techniques, he later delivered culinary lectures. At times he was even ordered to cook special foods at big events in Pyongyang. 

  Yun fled North Korea in 1998 during the “March of Hardship” period. He ultimately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0 via China. While trying to settle here, he did a myriad of odd jobs, including manual labor at construction sites. His break came in 2013 at a culinary event, where he described his experience at Okryu-gwan.

  His story captivated restaurateur Lee Ho-kyung of Hoya Cooks, a culinary studio in Seoul, and he helped Yun open a three-day “pop-up store.” It was an instant hit; he was convinced to open his own restaurant in 2015. 
 

 There is never a shortage of customers at Yun’s restaurant, as news of his sincerity and cooking techniques spreads through word of mouth. Many chefs also pay a visit to learn his naengmyeon recipe, and some restaurateurs have even proposed launching a franchise. The proposals are rejected immediately. Yun fears that his principle of upholding the original distinctiveness of North Korean dishes might be tainted if he accepts such offers.

 “In North Korea, people say ‘it’s as if a snapping sound is heard,’ when they find the food tasty. I want to overcome such temptation and prove to my compatriots in the North tha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no less delicious than Okryu-gwan’s, when the two Koreas are finally reunified sometime in the future,” he said.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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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기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3만 1,000여 명 가운데 70% 가량이 여성이다. 이들 탈북 여성들이 겪는 인권 침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성차별과 성폭력이다. 사단법인 ‘여성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이하 ‘여인지사’)은 이렇게 인권 침해로 고통 받는 탈북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돕고 있다. 특히 가정 폭력,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를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4대 폭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 고립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정착한 지 오래되지 않은 탈북 여성들은 특히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나 사회적 연대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한 피해자가 어렵게 용기를 내 문제 제기를 하고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안전과 비밀이 침해되거나 피해자가 도리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Korea Women’s Hot Line)에서 상담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향순(金香順) 여인지사 공동 대표의 말이다. 이 단체가 성 관련 인권 침해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탈북 여성이 남한 여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경우가 무려 10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여인지사에서 탈북 여성들의 상담을 맡고 있는 이샘 씨는 이런 현상을 “인권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와 경제적 약자인 탈북 여성들의 절박한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해석했다.

                                                                          

 

인권 침해에 대한 낮은 인식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탈북 여성들의 첫 반응은 의외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걸 드러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했던 탈북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강간죄로 감옥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간통 사실이 발각돼도 여성은 부화방탕(浮華放蕩)했다는 비난을 받고 석 달 동안 노동단련대에 보내지지만, 남성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남성들이 체제 불만을 성적인 농담으로 푸는 일이 잦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성희롱과 성폭력의 개념 차이를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또한 대체적으로 남한 정착 과정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가정 폭력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정 폭력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었고, 남한에 와서도 관련법과 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성매매에 노출되는 탈북 여성들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죠. 가해자들도 탈북 여성들의 취약점을 악용해 범행을 은폐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동포사랑』의 기자이기도 한 이샘 씨는 그 자신도 탈북 후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 생활을 하다가 2011년 서울로 온 탈북 여성이다. 이샘 상담원은 자신이 담당했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한 40대 탈북 여성은 모 기업 회장의 자택에서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12시간 동안 간병 일을 해 오고 있다고 한다. 다리가 불편하고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 기업인은 야한 농담으로 성희롱을 하거나 몸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하는 사례가 잦았다. 참다못해 항의하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그런 일이 지속됐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곳보다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탈북 여성의 성폭력 피해는 취업이나 결혼을 알선하는 과정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거나 배우자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접근해 강제 추행을 저지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또 외롭게 살아가다 온라인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기만 하고 막상 결혼에는 실패하는 사례도 다수 접수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탈북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악용해 성매매로 유인하는 업주들도 있다. 당장 생활이 곤란한 일부 탈북 여성의 경우 “한국에서 성매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매매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의 교육 탓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정착하고 나서 성매매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 여성이 전체의 3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권유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며, 취업 교육으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인권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들

 

  여인지사는 2016년부터 여성가족부 위탁 사업으로 북한 이탈 여성 상담 치유 전담 프로그램인‘찾아가는 상담’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전문 상담원이 참여하는 통합 지원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해 시작한 ‘찾아가는 상담’은 각기 다른 대상을 위한‘자조(自助) 그룹’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자녀 교육과 부부 관계 상담을 하는 주부 그룹, 직장 문화 애로 사항·후속 학업·과로 문제 등을 상담하는 직장 여성 그룹, 20~30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학공부 상담 그룹 등 3개 자조 모임이 있다. 이 가운데 ‘찾아가는 상담’ 프로그램에 곁들여지는 국내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자유로운 여행에 갈증을 느껴온 탓이다.

 여인지사는 이밖에도 『알아 두면 좋은 여성 인권 지침서』, 『탈북 여성 지원 실무자를 위한 여성 폭력 예방 교육 매뉴얼』 등의 책자도 발간해 탈북 여성들과 탈북민 지원 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이들 책자는 여성 폭력 문제의 실상과 남북한 인식 차이, 대처 방법 등을 사례를 들어 꼼꼼하게 알려 준다. 이밖에 여성 폭력 예방 교육 영상물을 제작해 전국의 하나센터 등 탈북민 지원 기관의 현장 교육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 이탈 여성의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상담원 양성 과정 프로그램을 새롭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영희(洪英姬) 공동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일·가정 양립의 문제점과 직장 내에서 겪는 여러 갈등 형태를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남북한 여성 연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런가 하면 여인지사는 탈북 여성 인권 지원 못지않게 남북 여성 연대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남북 여성 합창단 ‘여울림’을 2011년 창단했다. 여울림은 해마다 전국 합창제에 출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 이름에는 ‘여성들의 어울림’, ‘소리의 어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합창단은 격주 토요일마다 노래 연습을 하는데, 현재 전체 단원이 35명이며 연습 때는 평균 25명이 참석한다. 60대 탈북 여성 합창 단원 김명화 씨는 “음악 문화와 발성법이 달라 처음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연습하면서 맞춰 나가고 있다”면서 “연습 후 회식을 통해 남측 여성들과 더욱 가까워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합창단 지휘를 맡고 있는 최영실(崔永實) 전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는 “음악적 이질감을 가진 남북 여성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노래하는 과정은 거리감과 편견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최영애(崔永愛) 이사장은 “2012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남북여성문화제가 주변화, 대상화된 탈북 여성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극적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면서 “남한 사회에서 탈북 여성들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같은 복지적 차원을 넘어 인권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여인지사는 2010년 대표적 여성 인권 운동가인 최영애 이사장의 주도 아래 설립됐다. 그는 ‘성폭력’이란 단어가 통용되기도 전인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들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특히 여인지사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진보와 보수 인사들을 두루 아우르는 단체라는 점이 특징이다. 남한의 여성 인권 운동 단체 대표, 북한 여성 연구자, 탈북 여성들이 이 단체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 Human Rights, a New Perspective for Female Defector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a Ji-kwon Photographer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provides legal assistance to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who often suffer human rights violations as they settle down in South Korea. The civic group also educates the women about sexual offenses, a subject with little public awareness in North Korean society, and helps them build mutual understanding and solidarity with South Korean women through various activities including seminars and choir performances.

 

  According to data from the Institute for Unification Education of the Ministry of Unification, women accounted for a whopping 70 percent of some 31,000 North Korean defectors who have arrived in South Korea as of late 2017. Not a few of the women fall victim to human rights violations.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WHRD) specializes in helping them. The civic group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domestic violence, sexual assault, sexual harassment and human trafficking for the purpose of sexual exploitation, the most egregious crimes against women.

 “Victims feel frustrated because they don’t know where to turn to for help,” said Kim Hyang-soon, co-president of WHRD who used to be a counselor at the Korea Women’s HotLine. “Many female defectors, especially those who recently settled down here, have no community or social network in which they can confide. In many cases, victims fear if they take pains to raise problems or file charges, the subsequent investigations or trials will endanger their safety, jeopardize their privacy, or force them to quit their jobs.”

 WHRD’s focus on sex-related offenses against female defectors is driven by the fact that they are 10 times more likely to be victimized than South Korean women. Lee Saem, a WHRD counselor, blames the contrast on “a gap in understanding human right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 people and the desperate situation these women, an economically disadvantaged group, face here in the South.”

 

Low Awareness of Human Rights Abuses

 

 Differences in laws, systems and cultures between the two Koreas have formed dissimilar concepts of what constitutes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 Thus, the initial reaction of most women from North Korea to the #MeToo movement in South Korea and abroad is to ask, “How can one speak about such things in public?”

 The reason for such cautious attitude can be found in North Korean society, which tends to be lenient toward sexual assaults by men. After becoming acclimated to such social mores, North Korean women often react passively to acts of sexual violence. They say in unison, “I never heard of anybody jailed for rapes.” In adultery cases, women are normally sentenced to three months’ hard labor, but the male offenders are not punished. In addition, it is said that North Korean men frequently make sexual jokes and innuendos with impunity.

 Domestic violence is not recognized as a serious human rights violation in North Korea. After their arrival in South Korea, North Korean women’s prioritized needs are to survive and adapt, rendering it difficult for them to react to domestic violence. Furthermore, many lack sufficient access to information on related laws and support services.

At Risk of Sexual Exploitation

 

 “Even if they want to raise the issue of human rights violations, including sexual assaults, it remains difficult for them to do so. It’s a shame that offenders are able to cover up their crimes by taking advantage of female defectors’ vulnerability,” said Lee, who is also a reporter at Dongpo Sarang (Love of Compatriots), a magazine published by the Korea Hana Foundation. 
 

  Lee herself is a refugee who arrived in Seoul in 2011. After fleeing North Korea, she worked as a housemaid in Beijing and Shanghai for 10 years. She recounted the experience of a female defector whom she met as a counselor.

  The woman, in her 40s, worked as a caregiver at the home of a company chairman who suffered from leg pain and diabetes. She worked from 8 p.m. to 8 a.m. every day. The businessman sexually harassed her frequently by telling lewd jokes or touching her. He sometimes apologized for his actions when she protested but continued to harass her. Nonetheless, she could not afford to quit her job since her salary was high enough to save money to bring her daughter over from North Korea.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s predominantly occur when North Korean women pursue job or marriage opportunities. More often than not, men harass or rape them after approaching them under the pretext of finding them a job or a future husband. Some women meet men on dating websites, hoping to have a serious relationship. But the men they meet through those sites often assault them or renege on their marriage commitment.

 Some proprietors of illegal establishments lure female defectors into prostitution by taking advantage of their dire need for money to survive. Some of the women engage in prostitution with the mistaken belief that “it is not shameful to sell sex here in South Korea,” because they were taught back in the North that “prostitution is a common phenomenon of capitalism.”

 In a 2012 survey of 140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commissioned by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every second woman said that “they have been asked to sell sex in South Korea.” The main reason they were approached was economic hardship due to a lack of opportunities for vocational training and self-help measures.

 

 Programs to Improve Human Rights
 
 Since 2016, WHRD has operated a counseling and healing program for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t the request of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which provides comprehensive support services coordinated by counselors. The program is designed to help the women become emotionally stable. It supports three self-help cohort groups: a group for housewives providing counsel on children’s education and marriage relationships; a group for office workers providing counsel on work culture, continuing education and fatigue from overwork; and a group for young women in their 20s and 30s providing counsel on college education. An affiliated program, dubbed “Travel Korea Project,” is particularly popular as most of the women have a deep desire to travel freely.

 WHRD also publishes pamphlets and creates educational videos for distribution to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nd support agencies such as regional centers across the country. The pamphlets include “Useful Guidelines on Women’s Basic Rights” and “Manual on Education for the Preven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for Working-Level Officials Supporting Female Defectors.”

 They provide detailed information about violence against women and about differences of percep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nd how to cope with them. The educational videos explain how women can protect themselves from violence. 

  A new WHRD program aims at training counselors to help female settlers to achieve a better work-life balance. Hong Young-hee, co-president of WHRD, said, “The purpose is to systematically train experts who can give counsel on the work-life balance and conflicts at work - the issues these women experience on a daily basis.” WHRD also tries to build a framework of solidarity for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To that end, in 2011, it launched a joint choir, “Yeoullim,” which has since participated in the annual national choir festival. The name carries a double connotation - “women in harmony” and “harmony of sounds.” The choir practices every other Saturday. On average, about 25 of its 35 members attend the practice sessions.

 

New Paradigm of Solidarity

 

 “We had difficulties at first because of differences in musical culture and methods of vocalization. But we’re narrowing the differences by practicing together,” Kim Myeong-hwa, in her 60s, said. “I’m happy because we’ve got more acquainted with South Korean women at the dinner table after practicing.”

 Choi Young-sil, a former professor of theology at Sungkonghoe University who serves as conductor, said, “The process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listening to one another’s voices and singing together, despite their musical differences, is a good opportunity to increase mutual understanding by overcoming psychological distance and prejudices.”

 “A cultural festival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which has been held every year since 2012, has been a stepping-stone to help transform the marginalized North Korean women into masters of their own lives and active members of our society,” said Choi Young-ae, founder and chairwoman of the civic group. “In our society, they are merely regarded as a group of disadvantaged people in need of assistance. But from now on, we’d like to open up a new horizon from a human rights perspective rather than from the standpoint of subsistence and welfare, like helping them find jobs.”

 Choi Young-ae founded WHRD in 2010. She also established the Korea Sexual Violence Relief Center in 1991 and led the movement to improve women’s rights long before the term “sexual violence” became widely used. Remarkably, WHRD transcends ideologies and comprises progressive and conservative members and supporters. Its leading members include a representative from a South Korean women’s rights organization and a researcher in North Korean women’s affairs, as well as North Korean women.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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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마다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하다. 행인들의 대화에서도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린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다가 조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인 마을’이 자리 잡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의 풍경이다. ‘고려인’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에 살고 있는 한국계 교포들을 통틀어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들은 1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의 후예인데, 3~5세대를 거치면서 최소한 세 번 이상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경험했다.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1세대는 스탈린 시절 일본 스파이로 의심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해야 했다.


 2개월 만에 총 17만 1,781명의 한국인(3만 6,442 가구)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질병과 영양 실조 등으로 4만 명이 사망했다. 낯선 황무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또 다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4만여 명에 달하고 그중 4,0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광주 월곡동에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원룸 같은 협소한 곳에 살면서 제조업체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문학대학과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던 시인 김블라디미르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 씨는 부인과 딸, 아들, 손자 등 일가족 10여 명과 함께 2011년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했다. 광주에 고려인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김 씨처럼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온 고려인들은 대개 광주 내 산업단지와 인근 농공단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터와 가깝고 집값이 싼 원룸 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고, 월곡동은 그렇게 고려인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터전을 닦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낯선 환경과 곤궁한 경제적 여건에 처해 있지만, 끈끈한 공동체 정신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궈나가고 있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가 하면 주민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상담소, 쉼터, 마을 방송국 같은 각종 지원 공간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기차게 삶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다.

 유입 인구가 늘면서 자영업 성공 사례도 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족을 뜻하는 ‘시먀’란 이름의 카페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주식인 누룩빵과 꼬치구이를 만들어 판다. 전발레리 씨가 2015년 1호점을 낸 이래 큰딸과 아들 부부가 4호점까지 낸 이 가족 카페는 고려인 마을에 생겨난 최초의 맛집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런가 하면 허아나스타시야 씨가 2017년 10월 개업한 유럽 스타일의 카페 ‘코레아나’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성공한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음식점, 여행사, 환전소, 기념품 가게 등 30여 개 점포가 들어선 ‘고려인 마을 특화거리’까지 생겨났다.

 이곳에 고려인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마을의 산파역을 맡은 고려인 3세 신조야 씨가 한국 땅을 밟은 2001년 무렵부터다. 공장에서 일하던 신 씨가 월급이 체불되자 새날교회 이천영(李天永)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게 계기였다. 이후 신 씨는 이 목사의 도움으로 2005년 월곡동에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을 설립하고,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고려인센터를 열었다. 2007년부터 중국 동포와 고려인 동포에게 합법적 체류의 길을 열어 준 방문취업비자가 발급되자, 이로 인해 광주를 찾는 고려인의 수도 급증했다. 고려인들이 유독 이곳에 몰려드는 까닭은 간단하다.

 고국이 낯선 이들에게 쉼터는 물론 숙식과 통역 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입소문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고충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 주는 해결사 신조야 씨 덕분이다. 그래서 신 씨의 별명은 ‘고려인의 대모’다.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조야 엄마가 없으면 우린 못 살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신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고려인들의 전화번호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또 신 대표와 2008년 결혼한 남편도 이주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탈북민이어서 고려인들의 든든한 동지가 돼 주고 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한국어 교육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낮은 대접밖에 받지 못해요. 대학교를 두 곳이나 졸업해도 취직을 못합니다.” 신조야 씨의 말이다. 그녀는 고향에서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너무 힘들어 할아버지의 조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려인 3세 정스베틀라나 씨도 신 씨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다. “여기 와서 세탁기 조립 공장에 들어갔어요. 일요일에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그렇게 돈을 모아 원룸 보증금 50만 원을 만들었죠.”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어 쓰기와 자국민 우선 정책을 펴는 바람에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고려인들은 점차 사회적 약자로 밀려났다. 그런데 언어로 인한 차별 때문에 고향을 떠난 고려인들이 조국에 와서도 부딪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비자 문제 등으로 관공서를 찾아가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물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소한 일상도 한국어가 서툰 이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려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이 바로 교육이다.

 조선족 같은 중국 동포나 동남아 노동자들은 대개 혼자서 돈을 벌러 오지만, 고려인들은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들어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 문제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곳에서 고려인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한국 최초의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다. 2007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11년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무상 교육기관이자 초·중·고 통합형 대안학교로 인성교육을 중시하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 학교는 고려인 마을을 탄생하게 한 또 다른 주역인 이천영 목사가 이끌고 있다. 신조야 씨가 고려인 마을의 ‘대모’라면 이 목사는 ‘대부’인 셈이다.

 고려인 마을의 한국어 강좌는 여러 기관에서 수준별, 시간대별로 나눠 진행한다. 수강생이 늘어나 현재 성인을 위한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등 3개 반과 최근 이주한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주말 근무와 야근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동포를 위한 고려FM 방송 강좌는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한다.

 또한 2013년 문을 연 아동센터에서는 초·중·고생들을 위해 방과 후에 한국어, 영어, 수학, 러시아어 쓰기, 예능 학습을 지도하며 축구와 기타도 가르친다. 2012년 개관한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가정의 어린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아 한글 학습, 문예 활동, 운동을 지도하고 급식과 간식도 제공한다. 2017년 7월부터는 초등학교 과정의 주말 러시아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려인 자녀들은 한국어와 러시아 두 개의 언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출생지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한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어를 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미디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심축

 

 고려인 종합지원센터는 이 마을의 심장이다. 이곳은 당장 거처가 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딱한 처지의 고려인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쉼터이자 취업, 산업재해, 체불 임금, 비자 문제 등 온갖 애로사항을 상담하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며 교육장이다. 2017년 6월 문을 연 고려인역사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종합지원센터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1860년대 연해주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그 후손들이 온갖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2017년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 사업’도 자체적으로 벌였다. 광주 고려인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미디어다. 중병에 걸리거나 수술비가 부족한 경우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고려FM방송과 나눔방송 뉴스를 통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주민 역사상 첫 자체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한 고려FM방송은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한 고려인들을 위해 80%의 프로그램이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24시간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고려FM방송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청취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편 나눔방송 뉴스는 페이스북이나 이메일로 11만여 명에게 전파되면서 고려인 마을의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실어 나른다.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4세들

 

 광주 지역 고려인들은 투철한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 도우면서 관혼상제를 치르는 것은 물론 ‘깔끔이 봉사단’을 창설해 거리 청소 자원봉사와 자율방범 활동도 벌이고 있다. 또한 매달 ‘고려인 마을 방문의 날’을 정해 운영하면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2017년 11월에는 신아그리피나 바실리예프 우즈베키스탄 교육부 장관이 방문하기도 했다.

 다양한 지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그저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이곳 고려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병이 났을 때다. 체류 기간 90일을 채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더라도 매달 10만 원 가량인 보험료를 부담하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닥친 또 다른 어려움은 체류 비자 문제다. 현 재외동포법은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분류해 장기 체류를 인정하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동포 4세부터는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방문동거비자 자격이 만료되는 만 19세가 되면 한국을 떠나거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를 계속 갱신하면서 재입국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지가 한국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 적용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고려인 4세 자녀들이 광주 고려인 마을에만 4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왕래가 자유로운 재외동포비자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2018년은 고려인이 조국인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우리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조국인 이 땅에서 증명해 내겠습니다.” 신조야 씨의 당찬 다짐은 고려인들의 도저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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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블라디미르 시인의 ‘반전의 삶’
 
 김블라디미르 시인은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조금 각별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교수를 지낸 지식인이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려인 3세인 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고려FM 방송에서는 ‘행복문학’이란 문학 프로그램을 러시아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광주와 전국 단위 행사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할 때가 많다.
 “저는 펜 말고는 평생 손에 뭔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국에 와서 난생처음 육체노동을 하고 있지요. 한국 말을 잘 못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죠. 그나마 몇 해 전 소장암 수술을 받은 뒤로는 힘쓰는 일을 거의 못합니다. 과수원과 농장에서 사과, 배, 블루베리, 딸기 같은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처음 공장에서 일할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 2~3년간은 후회가 밀려와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한국에 온 게 잘한 일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199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는 꼭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그에게는 틈틈이 시를 쓰는 게 큰 즐거움이다. 한국에 와서 쓴 시를 모아 2017년 2월 첫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을 냈다. 눈 내린 광주의 풍경에 반해 시를 쓰고, 그 시의 제목을 시집에도 붙였다. 이 시집에는 한국 땅을 밟은 후 김 시인이 쓴 35편의 시가 한국어로 번역돼 러시아어와 함께 실렸다. 계명대 러시아문학과 정막래(鄭莫來) 교수가 시집 출판을 권유하는 바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러시아어로 쓴 시의 한국어 번역도 정 교수가 맡았는데, 그녀는 고려인 동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다가 김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시에는 조국과 자연에 대한 사랑, 스탈린의 강제 추방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가게 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애환 같은 것들이 진솔한 표현으로 오롯이 담겨 있다. 그가 쓴 많은 시 가운데 유난히 폐부를 찌르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이여! 우리 조국이여 이해해 주소서 / 우리가 멀리서 살았던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님을’(「힘들게 기다려 온 80년 세월」)
 그는 2017년 여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주관한 ‘회상열차-극동 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에 고려인 마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와 알마티까지 13박 14일 일정으로 고려인 선조들이 겪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회상열차 체험은 그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었다. 앞으로 펴낼 두 번째 시집에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시가 많이 담길 것이라고 한다.
 시인인 그는 언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언어가 모국어여야 하지만, 한국어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여기서 몇 년 살면서 조금은 늘었지만,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30여 년 동안 타슈켄트 외국어대학과 타슈켄트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던 김 시인은 55세 정년 퇴직 규정에 따라 이른 나이에 강단을 떠나야 했다. 퇴직 후 한국행을 결심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2011년 3월이었다. 곧이어 아내와 자녀들도 한국으로 왔다. 이제 손주들까지 포함하면 고려인 마을에서 1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이곳이 내 조국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의 시에도 그런 심경이 듬뿍 묻어난다.
 “내 벗들이여, 역사적인 조국의 땅에서 / (……) 나는 외국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 나는 고려인,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정신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추석」)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봄 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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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Seeking Hope in Grandparents’ Homeland

 

 Many signs of the backstreet stores are written in the Cyrillic alphabet and passers-by are more likely speaking Russian than Korean. That is typical here in the Wolgok-dong neighborhood of Gwangju’s Gwangsan District, where a community of Goryeo-in, or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has developed. Goryeo-in, or Goryeo-saram as they call themselves, means “Goryeo peopl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in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The word Goryeo comes from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ryeo, which ruled the Korean peninsula from 918 to 1392. 

 Ethnic Koreans living in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are commonly called “Goryeo-in.” They ar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over 100 years ago. Their grandparents and parents experienced at least three diaspora over three to five generations. The first major waves of Koreans migrated to Primorsky Krai, or Maritime Province, in the Russian Far Ea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1937, however, the Stalin government deemed immigrants and ethnic groups inherently disloyal to the Soviet state and deported them to barren areas of Central Asia. Included among these groups were ethnic Koreans, who at the time were subjects of the Empire of Japan, which was hostile to the Soviet Union. In just over two months, a total of 171,781 ethnic Koreans (36,442 families) were forcibly relocated to Kazakhstan and Uzbekistan. Upon arrival, they were faced with harsh living conditions which led to tens of thousands of deaths from disease and malnutrition.

 

Building Their Own Village

 

 After the Soviet Union dissolved in 1991, their descendants continued to suffer discrimination in the now independent Central Asian countries, which prompted many of them to move to the land of their ancestors. As many as 40,000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currently live in Korea, and about one-tenth of them reside in Gwangju’s Wolgok-dong neighborhood. Most of them found work in an industrial complex in the city or a nearby agro-industrial park, so they naturally looked for cheap studio apartments near their workplaces. Hence, part of Wolgok-dong has turned into their enclave.
 Despite their unfamiliar environment and difficult economic conditions, the Goryeo-in are creating their new nest with a strong community spirit. They are rebuilding their lives strenuously, after independently establishing support facilities, including a cooperative association, community shelter, local radio stations and centers for daycare as well as for children and community activities.

 Amid the growing influx, an increasing number of the new settlers have become successful small business owners. A cafe named “Cемья,” Russian for “family,” sells leavened flatbread and grilled meat on skewers, both staple foods of Central Asia. It is considered the first gourmet destination in this community. Jun Valery started it in 2015 and the cafй now has four branches, including those managed by his eldest daughter and son and their spouses. “Koreana,” a European-style cafй opened by Huh Anastasia in October 2017, is also gaining popularity. These types of success stories have multiplied, giving rise to a business district of their own clustered with restaurants, travel agencies, currency vendors and souvenir shops, among other stores.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began to settle in Korea around 2001 when Shin Joya arrived.

 A third-generation Goryeo-in, Shin asked Lee Chun-young, the pastor of the Saenal (“New Day”) Church in Gwangju, for help when she could not receive her back pay from a factory where she had worked. In 2005, Shin founded Goryeo-in Village with Reverend Lee’s help and opened a community center in an old shopping mall. After 2007, when the government began issuing visitor work visas for ethnic Koreans from China and Central Asia, the number of Goryeo-in arriving in Gwangju rose sharply. 

 The reason they are rushing to Gwangju is simple. News spread far and wide by word of mouth throughout Central Asia that the community center helps new arrivals find room and board and provides translation services. This was made possible thanks to Shin’s attitude to help newcomers resolve their problems as if they were her own relatives and friends. The transplants from Central Asia often say, “We could hardly survive were it not for Joya.” Shin has more than 2,000 phone numbers of her fellow resettlers stored in her cellphone. Her husband, a defector from North Korea whom she married in 2008, is also a strong supporter of the community. “No matter how highly educated they are, ethnic Koreans are treated with low regard in Uzbekistan.


 In most cases, they can’t find jobs even if they have more than two college degrees,” Shin said. She decided to leave for her grandparents’ land, because it was too hard to scrape out a living.
 Jung Svetlana, another third-generation descendant, migrated here for the same reason. “After I arrived, I began working at a washing machine assembly line,” she said. “As a side job, I washed dishes at a restaurant on Sundays. That way, I saved 500,000 won to pay the deposit for a one-bedroom studio apartment.”

Education of Future Generations

 

 Ethnic Koreans, who could speak only Russian, were gradually reduced to an underprivileged class, as Central Asian nations, which gained independence after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passed new language laws and constitutions that favored the dominant national or ethnic groups. Ironically, here in Korea, it is once again their language ability that remains the biggest barrier facing the very people who left their hometowns because of language discrimination. From filling in visa application forms to sending children to school or simply going shopping, routine tasks can present stumbling blocks if they have inadequate Korean language skills. 

 The linguistic difficulties make the residents of this village consider it their most important task to educate future generations. Most ethnic Koreans from China or migrant workers from Southeast Asia come here alone and mainly focus on earning money. But most Goryeo-in arrive as three-generation families and thus pay keen attention to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The institution responsible for educating children in this community is Saenal School, the country’s first multicultural alternative school. It opened in 2007 and was accredited by the Education Ministry in 2011. This tuition-free school is well-known, even among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because it provides both 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 attaching importance to all-round personality development. The school is run by Reverend Lee, who was instrumental in developing the community alongside Shin Joya. In a sense, Shin and Lee are the “godmother” and “godfather” of the village.
 Several village institutions offer Korean language classes at different levels and different hours. With enrollment rising, there are currently three levels of classes for adults - beginner, intermediate and advanced - and special classes for children who have recently arrived. Language programs on Goryeo FM Radio are highly popular with those who miss classes because of their work schedule.

 The community’s children center that opened in 2013 teaches primary and secondary students Korean, English, Russian, math and art, as well as playing soccer and guitar, after school. The daycare center that opened in 2012 helps young children from dual-income families with Korean reading and writing and physical education from morning till evening, providing them with meals and snacks. Since July 2017, the village also has been offering Russian classes for primary schoolchildren on weekends, because most parents here want their children to learn both Korean and Russian.

 Goryeo-in Village celebrates the third Sunday in October as “Day of Goryeo-in.” Children of the village pose after performing a traditional Korean fan dance on the fifth annual “Day of Goryeo-in” in 2017.

 

Community Networks and Media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s the heart of the village. It serves as a temporary shelter for those who have no other place to stay and have to find a job, and as a counseling center that helps resolve all kinds of problems, including finding a job, dealing with work-related accidents, retrieving back pay and assisting with visa problems. 

  Another important facility is the community history museum that opened in June 2017, adjacent to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nside the small museum, visitors can learn about the figh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support for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by Koreans who had settled down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starting from the 1860s. The museum also recalls the ubiquity of the discrimination and unfair treatments that their descendants endured. In 2017, the village organized an event to commemorate the 80th anniversary of ethnic Koreans’ deportation to Central Asia. 

 The community’s media form one of the pillars of the village. Its residents operate a help network through the local radio stations, Goryeo FM and Nanum (“Sharing”). They offer support to anyone facing difficulties, such as suffering from a serious illness or having trouble paying medical expenses. Goryeo FM is the first-ever radio station run by ethnic Koreans who have found a new home in the country of their ancestors. Eighty percent of its programs are in Russian for the convenience of community members who are more comfortable listening to Russian than Korean. This 24/7 radio station is so popular that even their relatives and friends in Central Asia listen to its programs with a smartphone app. Meanwhile, Nanum Radio supplies detailed news about the village to some 110,000 listeners every day via Facebook and email.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The community spirit of the Goryeo-in in the Gwangju area is strong. Residents help each other organize weddings and funerals and gather volunteers who clean the streets and help prevent crimes. They also established a monthly “Visit Goryeo-in Village Day” to attract attention from the general public, and in November 2017, the village welcomed Uzbekistan’s Minister of Preschool Education Agrippina Shin. 

 There are a variety of support programs underway for the village residents. Nevertheless, life here is not always easy. Residents feel particularly helpless when they fall ill. Even if they become eligible for health insurance coverage after staying 90 days, it is still a considerable burden for most of them to pay 100,000 won for their health insurance every month. 

 Another chronic difficulty is obtaining visas. The current law regards only first- through third-generation Goryeo-in as “overseas ethnic Koreans” and grants them long-term stay permits, but classifies fourth and younger generations as “foreigners.” Accordingly, the latter must leave Korea when they turn 19, even if they were born in Korea, or have to leave and re-enter the country repeatedly to renew their three-month visitor visas. There are currently some 400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in the village who are inconvenienced by these visa constraints. 

 This year marks the 30th anniversary of the first arrival of Goryeo-in. “We’ll prove here in our homeland that we’re proud descendants of the Korean nation by upholding the wishes of our ancestors who dedicated themselves to seeing their country’s sovereignty restored,” said Shin J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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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wist in Life’

 

The Story of Kim Vladimir

 

 Kim Vladimir, a poet and third-generation ethnic Korean from Uzbekistan, stands out among residents of Goryeo-in Village. It is not because he was once a university professor who is now working as a day laborer, but because he is such a spirited supporter of other resettlers in the village. He is the Russian-language host of “Happy Literature” on local radio station Goryeo FM. He often attends national or municipal events as the community’s representative.

 “I’d held nothing in my hand besides pens,” he said. “But manual labor is the only thing I can do here because I’m not good at Korean. However, since I underwent small intestine cancer surgery a few years ago, there’s hardly anything I can do that requires physical strength. I now grow and harvest apples, pears, blueberries and strawberries at orchards and farms.”

 Kim struggled to adjust to working in a factory for the first time. During his initial three years in Korea, he regretted relocating and seriously considered returning to Uzbekistan. But on the other hand, it was good for him to have come to Korea out of respect for his father’s last wishes. “My father told me about Korea right before he died in 1990. He told me to ‘go back to our homeland under any circumstances,” he recalled. 

 During his spare time, Kim revels in writing poems. In February 2017, “First Snow in Gwangju,” his first collection of poems written in Korea, was published. The title borrows from one of the 35 poems in the collection, which Kim wrote in Russian. Jeong Mak-lae, a former professor of Russian literature at Keimyung University in Daegu, encouraged Kim to have the poems published. They became acquainted when Jeong was preparing a thesis on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She translated the poems and in the book the collection appears in both Russian and Korean. 

  Kim’s poems vividly convey his love for his ancestors’ homeland and its nature as well as the joys and sorrows of the lives of his grandfather and parents. A verse in one of his many poems stands out and stings us to the quick.


“Republic of Korea! O our homeland, please understand / that we lived far away, not because of our fault.” (from “80 Excruciating Years of Wait”)

 In the summer of 2017, Kim represented his community in “A Nostalgia Train Ride: Trans-Siberian Silk Road Odyssey,” a 14-day trip jointly sponsored by the Commemorative Committee for the 80th Anniversary of Stalin’s Deportation of Koreans to Central Asia and the Korean Global Foundation. The journey on the Trans-Siberian Railway went from Vladivostok in Russia to Ushtobe and Almaty in Kazakhstan, retracing the arduous steps of the displaced Korean ancestors. Kim plans to devote his second collection of poems to their forcible relocation.

 Kim taught Russian literature at the Tashkent State University of Foreign Languages and the Tashkent Medical College in Uzbekistan for about 30 years. But he had to retire at an early age of 55 in accordance with retirement regulations. He then decided to relocate to Korea and boarded a plane bound for his ancestral homeland in March 2011. His wife and children followed soon after. But he still longs for the day when he can say proudly, “This is my homeland.” One of his poems clearly reveals his feelings. 

 “My friends, in my historic homeland / (…) I don’t want to hear such a pejorative term as foreigner / because I’m a Goryeo-in, I’m a Korean / spiritually, conscientiously, and genealogically.” (from “Chuseok” [Korean Thanksgiving Day])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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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한과 북미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과 대표단은 해마다 두 차례씩 어김없이 북한에 다녀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에 이어 11월에도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의료진을 포함한 외국인 대표단들과 함께 방북했다. 심각한 상태인 북한 주민들의 결핵 치료가 어떤 정치적, 외교적 현안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적 지원은 남북 관계가 좋든 나쁘든 초정치적, 탈이념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인이어서 ‘인세반’이란 한국 이름을 쓰는 린튼 회장은 올해로 20년째 북한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보건성(保健省)이 “보건 문제 1위도 결핵, 2위도 결핵, 3위도 결핵”이라고 말했을 만큼 북한에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한 뒤 대북 식량 지원 활동을 벌이던 린튼 회장이 결핵 퇴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튼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요청을 받은 후부터다. 1997년 북한 보건성 최창식(Choe Chang-sik 崔昌植) 부부장이 “식량 대신 결핵 치료 지원을 해 달라”고 린튼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이 먼저 결핵 치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8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 린튼 회장은 결핵 퇴치 작업만을 위해 50차례 이상 방북했으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비롯해 20년간 대북 의료 지원에 사용한 금액은 약 5,100만 달러(578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동 X선 검진 차량, X선 진단 기계, 현미경, 수술실 패키지 같은 것들이 망라됐다. 그런 적극적 의료 지원 사업으로 1997부터 2007년까지 25만 명 이상의 일반 결핵 환자가 치료됐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결핵 환자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겨울철 날씨가 남쪽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고, 가족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결핵 노출과 전염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뿐만 아니라 갓 출산한 젊은 여성들이 결핵에 걸리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핵에 잘 걸리고, 그러면 아기를 돌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죠.”

 

 더욱이 일반 의약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점점 많이 생겨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결핵약에 내성이 생겨 재발한 환자를 뜻한다. 북한은 해마다 새로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4,000~5,000명 규모로 발생한다. 다제내성 결핵균은 여러 종류의 치료 약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 결핵 환자는 6∼8개월간 일반적 결핵약을 먹으면 완치율이 90%에 달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일반 결핵약보다 많게는 100배 이상 비싼 약을, 그것도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장기 복용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완치율도 낮은 편이다. “일반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데 약 20달러가 소요되는 반면, 다제내성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가 5,000달러 정도 듭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고가의 약을 장기간 투약해야 되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 치명적이란 데 있다. 다제내성 결핵이 흔히 ‘슈퍼결핵’으로 일컬어지는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으로 이어지면 치료가 더욱 어렵고 사망률도 높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면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 환자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은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 이어져야 한다. 한번 이런 환자로 등록되면 약 2년간 책임을 지고 치료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해 왔다. 그러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다제내성 결핵 치료 프로그램 하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북한 결핵 환자와 의료진들이 다제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2008년 북한에서 다제내성 결핵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환자들 19명의 가래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뒤 양성 반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제내성 결핵 약제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1,500명 이상의 환자가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이제 현장에서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즉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마다 린튼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보통 3주간 북한에 머물며 결핵 퇴치 활동을 하지만 “충분한 활동을 위해선 기간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니지요.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달합니다.”
                                                                       

 

 이런 살뜰한 관리 덕분에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고 린튼 회장은 설명했다. 세계 평균 완치율이 45%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그래서 북한 주민 사이에선 “다제내성 결핵에 걸려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의약품 및 의료 장비 지원과는 별개로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결핵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교육이다. 유진벨재단의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감염된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 치료를 돕다 보니 린튼 회장 스스로도 결핵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린튼 회장 자신도 어린 시절 결핵을 두 번 앓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핵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듣다 보니 린튼 가문은 결핵과 인연이 매우 깊다. 린튼 회장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Lois Linton)은 1960년 전남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난 뒤 결핵이 만연하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해 30여 년간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린튼 모자가 남북한에서 결핵 치료 활동을 전개한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만든 셈이다.

 린튼 회장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에 대한 사용 결과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분배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진벨재단은 한국 내 후원자와 재미 교포, 한국과 미국 정부 등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후원자의 85%가 한국인이고,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유진벨재단은 모든 지원 대상 의료 기관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반드시 후원자 이름을 밝힌다.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 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은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평양, 서울, 워싱턴에서 동시에 필요한 모든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는 항상 대북 지원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많은 후원자가 있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남북한 간의 긴장감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

 지난해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방북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약품 반출 승인과 일정 혼란으로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계획한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린튼 회장은 전했다.

 한 번 방북할 때마다 가져가는 치료약은 6개월 분량이다. 그런데 다음 방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린튼 회장은 한국 정부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에 대한 면허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주길 희망한다. 건수별로 물자 반출을 승인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북하는 검증된 민간 단체는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승인 없이 물품 반출 승인이나 방북 일정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 사랑

 

  린튼 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그 뒤 1992~1994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대북 지원 활동에 나섰다.

 유진 벨은 구한말인 1895년 한국 땅을 밟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시작한 미국 선교사였다. 린튼 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 Linton)과 결혼한 뒤 역시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와 함께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3·1운동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린튼 회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50년에 태어났지만, 선교사인 아버지 휴 린튼(Hugh Linton)을 따라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남북한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컬럼비아대 교수 겸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그는 학자에서 대북 지원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개인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습니다. 관건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했을 때야말로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존 린튼(John Linton)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초창기에 형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도왔다. 린튼 회장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유진 벨 목사 이후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교수라면 은퇴할 나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 활동을 지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후원자들과 북한 의료진의 희생 정신이 없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Eugene Bell Foundation’s Love of Neighbors across the DMZ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Inter-Korean relations interspersed with tension and confrontation have moved to another precarious level in the wake of North Korea’s recent nuclear weapons and missile test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a civic group has consistently delivered humanitarian aid to the North. It is the Eugene Bell Foundation, established in 1995 by Stephen Linton, a great-grandson of American missionary Eugene Bell, to mark the centennial of his arrival in Korea.

 

  Stephen Linton and his team visit North Korea twice each year no matter how tense the inter-Korean relations or Pyongyang-Washington ties are. This year is no exception. They visited the North in May and November, along with foreign donors and medical staff, carrying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is is because treating the severe forms of tuberculosis (TB) that many North Koreans are suffering from is more urgent than any political or diplomatic issue. Regardless of whether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re good or bad, the foundation never wavers in its belief that humanitarian aid should be “apolitical and non-ideological.”

 Linton, a Korean at heart who likes using his Korean name “In Se-ban,” has taken the lead in the efforts to beat TB in the North for 20 years. After launching the Eugene Bell Foundation in 1995, Linton first delivered food aid to the North, but then turned his attention to fighting TB there after receiving an official request by the Pyongyang authorities. In 1997, North Korea’s then vice minister of public health, Choe Chang-sik, sent a letter to Linton, asking for “assistance for TB treatment instead of food aid,” although the country was experiencing severe food shortages at the time.

  Linton has visited the North more than 80 times, and over 50 times for TB treatment alone. His foundation has so far delivered some US$51 million (roughly 57.8 billion won) worth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o the North. The medical equipment included mobile X-ray vans, diagnostic X-ray machines, microscopes and surgical instruments. More than 250,000 patients were treated from 1997 to 2007, thanks to the foundation’s active medical support.

 

Treating MDR-TB Patients

 

  The situation is still not good despite the consistent efforts by Linton and the Eugene Bell Foundation, because Korean winters are cold, particularly in the North, and it is easy for its residents to contract TB as North Korean families often live together in small spaces. Young women who have just given birth and elderly people are especially prone to the disease.
 “Women’s immune system weakens after childbirth and so they get susceptible to TB, and it becomes more difficult for them to take care of their babies,” Linton says.

  Moreover, the situation is increasingly worsening due to the growing number of patients with multidrug-resistant tuberculosis (MDR-TB) that cannot be cured with ordinary medication because its germs are resistant to various types of drugs. Some 4,000 to 5,000 fresh cases of MDR-TB occur in the North each year.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ordinary forms of TB reaches 90 percent, if patients take medicines regularly for six to eight months. Medicines for MDR-TB are up to 100 times more expensive than drugs for ordinary TB, and the patients have to take such expensive medicines for a year and a half to two years. Besides, the treatment success rate is lower.


“It needs some 5,000 dollars, including medicine expenses, to treat an MDR-TB patient, while a mere 20 dollars is needed to treat an ordinary TB patient,” Linton says.

  What is more embarrassing is that any lapse in the timing of taking the medication can be critical for MDR-TB patients. It will grow even more difficult to treat the patients and their fatality rate will rise if MDR-TB develops into the so-called “super extensively drug-resistant TB.” MDR-TB patients can develop this more dangerous type of TB in a short period of time if their treatment stops. Therefore, aid materials for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should be delivered at least once every six months.
 

 For this reason, the Eugene Bell Foundation has focused on treating MDR-TB patients in the North since 2007. In this process, it has run one of the world’s largest MDR-TB treatment programs and given hundreds of North Korean doctors and TB patients a chance to learn how to treat the illness.

 “In 2008, we began collecting phlegm samples of 19 patients with a potential risk of MDR-TB in North Korea. Six months later, we went back to the North to treat those who had tested positive, carrying the necessary medicines,” Linton says. “This program has developed to the extent that it’s possible to treat more than 1,500 patients at any time. We now can immediately conduct tests and begin treatment on the spot.”

 A team of about 10 people, including Linton, stays in the North for about three weeks on every visit. But Linton says three weeks is not long enough to carry out substantial activities. “We visit all of the 12 sanatoriums during those 21 days. We test and accept new patients to the facilities. And we check to see if patients show improvement and give them medicines.”

 Thanks to careful management, Linton says,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MDR-TB patients has increased to 76 percent. It is a remarkable achievement, compared with the world’s average treatment success rate of the disease still hovering at 45 percent. These days, there is a saying among North Koreans that “there is hope even for MDR-TB patients if they just go to a Eugene Bell sanatorium.”

  Aside from the delivery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e greatest achievement Linton and his foundation have accomplished in the North is the education of TB patients and medical personnel. Through the foundation’s TB treatment program, thousands of North Korean residents have learned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when they are infected with TB bacteria. Linton himself seems to have become a TB expert in the course of helping treat North Korean patients.

 

‘We’re Mere Errand Runners’

 

 Linton fell ill with TB twice himself when he was a child, so he knows well how much pain the patients experience. Come to think of it, the Linton family had something to do with TB treatment all along. Stephen Linton’s mother, Lois Linton, founded the Soonchun Christian Tuberculosis Rehabilitation Center in 1960 when the Suncheon area in South Jeolla Province was hit by a flood and TB was running rampant. She fought the disease there for about 30 years.

  Linton meticulously checks to see how the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delivered to the North are used and spares no effort to enhance transparency in the distribution of aid supplies.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run with donations from South Korean and American donors as well as assistance from the South Korean and U.S. governments. Currently, 85 percent of donors are South Koreans, and North Korean beneficiaries are reportedly well aware that most donations come from them.
 

 The foundation makes it a rule to identify donors on all items it delivers on every visit to all target hospitals and facilities. There is no indication of the “Eugene Bell Foundation” but instead, the donors’ names are emblazoned on every medicine box the foundation delivers. Linton warns against the foundation and himself being made heroes. He keeps saying that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an “errand agency” and he is “nothing but an errand runner.”
 

 “We’re just playing the role of a delivery man or a donkey,” he says. “We’re only delivering and managing medicines and equipment. It is the Korean people who donate money for medical activities, give medical services, and benefit from these activities. My foundation and I have come forward, just because of the situation where it’s not easy for South Koreans to deliver their love to their compatriots across the border.”

 Then he adds,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But we aren’t worried because there are many donors who care about what we are doing. And it’s hard to remember when there wasn’t any tension.”

  In 2016, his travel schedule was interrupted once after a nuclear test by the North, causing a setback in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due to the suspension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approval. But Linton says that in 2017 everything has proceeded smoothly according to schedule.
 

 He delivers just six months’ worth of medication each time.
 Therefore, an interruption in his travel schedule means that MDR-TB patients in the North fail to receive timely treatment. This is why Linton hope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ill introduce a license system for aid groups and simplify the approval process for all aid groups regularly visiting the North.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Love of Korea over Generations

 

Linton first visited North Korea in 1979 when the World Table Tennis Championships were held in Pyongyang. From 1992 to 1994, he met then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three times as an interpreter and advisor for American pastor Billy Graham. In 1995, while a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Linton established the Eugene Bell Foundation to commemorate the centennial of the start of Eugene Bell’s missionary activities in Korea and immediately began delivering food aid for North Korean residents.

 Eugene Bell, his great-grandfather on his mother’s side, arrived in Korea in 1895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He began missionary activities and volunteer work in the Jeolla area. William Linton, his grandfather, also did missionary work in Jeolla after marrying Charlotte Bell, a daughter of Eugene Bell. In 1919,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illiam Linton, who was principal of the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suppor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Gunsan, North Jeolla Province, and informed Americans of it. He eventually saw his school closed and was deported from Korea for having refused to pay respects at a Shinto shrine. After Korea was liberated, he returned and founded a college that has since grown into Hannam University in Daejeon.

  Born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in the U.S. in 1950, Stephen Linton came to Korea with his missionary father, Hugh Linton, and grew up in Suncheon. He obtained a bachelor’s degree in philosophy from Yonsei University and a Ph.D. for a comparative study of North and South Korea from Columbia University. Later, he served as a professor and deputy director of the East Asian Institute’s Center for Korean Research at Columbia University.

 Asked why he turned from a scholar into a civic activist, Linton says, “As a Christian, I don’t believe that individual persons can change the world. I believe that the key is to put the love of neighbors into practice.”

 He keenly felt the need for the “love of neighbors” in 1995 when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made a formal request for assistanc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its food shortage came to a head. At the initial stage, his younger brother, John Linton, who is currently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 at Yonsei University’s Severance Hospital, helped give medical assistance to the North.

  Regarding his family’s love of Korea over four generations, Linton simply notes, “We’ve done what we should have done as believers of God.”

  But he seems firmly resolved when he says, “I would have retired by now if I had been a university professor. But I will continue to help treat TB patients in North Korea as long as I see the necessity.” Then he goes on to express his gratitude to all donors, as well as the medical staff in the North, saying, “Without their admirable spirit of sacrifice, this job would have been impossible.”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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