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LiNK, Liberty in North Korea)는 미국의 한인 학생들이 2004년 설립한 비정부단체이다. 현재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을 비롯한 16개국 275개 단체와 협력 관계를 맺고 주로 탈북민들의 해외 정착을 돕고 있는데, 최근 한국지부장 박석길(Sokeel Park 朴錫吉) 씨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한국계 영국인으로 LiNK의 한국지부를 이끌고 있는 박석길 씨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동갑인 35세이다. 그는 자신이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더라면 ‘장마당 세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 주민들 중 특히 이 세대에 주목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태어난 이 젊은이들이야말로 북한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개연성이 높은 세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장마당’은 소련 붕괴 이후 북한 정부가 주민들에 대한 생필품 배급을 대폭 줄이자, 먹고 살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야외 시장을 가리키며 일정 부분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상징한다. 북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장마당 세대는 1990년대 중반 국가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몰락한 이후 성장해 기존 세대와 사뭇 다른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 이 연령대의 탈북민들에게 “당에서 배급받은 기억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외부 세계의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접한 이들은 가치관, 인식, 행동 등에서 부모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보 기술과 환경이 바뀌면서 이들은 불법 외국 미디어를 소비해 외부 세계의 색다른 관점에 눈을 뜨게 됐다. 특히 패션을 비롯한 외양과 생활 방식은 남한 드라마와 중국 영화로부터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국제 정치 전문가이기도 한 박 지부장은 장마당 세대 이외에 북한의 가족들과 접촉을 이어가고 있는 탈북인, 자본주의, 정보 유입의 확대, 정부 통제를 벗어난 인적 연결망 탄생, 북한 내부의 만연한 부패를 6대 북한 변화 요인으로 꼽는다.

 

우연한 계기

 

 “유엔에서 인턴십을 하느라 뉴욕에 있을 때 탈북인을 여러 명 만나게 됐죠. 그때 북한 주민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각오와 열정을 갖게 됐습니다.” 박 씨가 탈북인을 돕는 링크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관계학·국제정치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유엔이나 영국 외교부에서 일하고 싶어, 우선 유엔 인턴십부터 지원했다. 인턴으로 일하던 2008년 어느 날 뉴욕에 온 탈북자 구호단체 ‘크로싱 보더(Crossing Border)’ 설립자인 마이크 김의 강연을 들으러 가게 됐다. 시카고 출신 한인 2세이자 금융 전문가인 마이크 김은 북한 주민들의 빈곤 실상과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Escaping North Korea』라는 책을 출간한 직후였다. 훗날 탈북인을 돕다가 중국 공안에 구속되기도 한 그는 강연이 끝난 뒤 박 씨에게 링크에서 활동해 보라고 권했다.


 링크는 1980년대 후반에‘카스콘(KASCON, Korean American Students Conference)’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한국인 학생들과 미국인 학생들이 모여 해마다 컨퍼런스를 열면서 탈북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2004년 예일대에 모인 한인 2세 학생들은 고통 받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북한의 자유’라는 뜻이 담긴 ‘링크’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기로 했다. 회의나 토론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링크의 활동비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각종 재단, 학생, 기업가, 종교 단체, 회원 등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소모임에서는 티셔츠나 직접 구운 과자와 버블 티, 주먹밥 같은 작은 물건들을 팔고, 음악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하기도 한다. 정부 지원 예산은 전혀 없다.


 기부금은 주로 중국에 은신해 있는 탈북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쓰인다. 1명이 탈출하는 데 드는 돈은 3000달러(약 330만 원) 정도다. 탈북인의 주요 경유지인 동남아 국가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영어 교육과 직업 훈련도 시켜준다.


 링크는 ‘노마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노마드 인턴’을 양성해 미국, 캐나다 등지를 다니며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바꾸게 하는 캠페인이다. 노마드 인턴으로 선발되면 북한 관련 교육을 받는다. 그런 다음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10주 동안 북한을 알리는 활동을 펼친다. 노마드 인턴은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모두 1000여 곳을 방문한다.


 “미국 50개 주 중 두세 곳을 빼고 거의 모든 지방을 돌았어요. 작은 마을에 사는 미국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을 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장을 다녀본 박 씨의 체험담이다.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외교관의 꿈을 대신한 링크

 

박 씨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13살 때인 1998년 처음 한국에 방문했다. 영국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소년 박석길은 처음 찾아온 한국에서 북한의 존재를 실감나게 체험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창문에 붙어 있는 빨간 스티커가 궁금했던 그는 “이게 뭐냐”고 아버지에게 캐물었다. 아버지는 “북한 간첩을 신고하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린 소년은 그때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생생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 실향민이었다. 명천은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선물로 보낸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칠보산(七寶山)이 있는 곳이다. 박 씨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할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 갔다. 통역·번역가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국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 것은 물론 BBC 뉴스에서 한국 얘기가 나오면 “와서 보라”고 채근했다.


 영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박 씨는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 합격한 뒤 서울에 와 1년간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익혔다. 어머니를 더 닮아 외모는 서양인이지만 이제 한국어가 유창하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2007년 다시 한국으로 와 행정안전부의 지방정부연수원 국제협력교육과에서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박 씨는 2012년 5월 링크 한국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영국 외교관의 꿈을 접고 서울에서 장기 체류 상근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서울에 있는 한국지부에서는 현재 그를 포함해 8명의 회원이 상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탈북 난민 구조와 보호, 정착을 돕는 링크의 기존 업무뿐만 아니라 탈북민들을 대하는 인식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무엇보다 한국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한국 학생들이 탈북인을 너무 모르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에 탈북인이 얼마나 왔는지 대부분 모릅니다. 3만 명이 넘는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한국 학생들이 북한 주민에 무관심한 건 북한 이슈가 너무 정치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 씨는 링크가 ‘북한인권운동단체’로 불리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수단체로 알려져 활동에 제약을 받을까 봐 걱정스러워서다. “한국에선 북한인권단체라 하면 바로 보수우파라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우파도 좌파도 아닙니다. 북한 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비정부단체일 뿐입니다. 북한인권단체란 표현도 그래서 꺼려요.”

                                                              


 하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인권 개선 없이 북한의 정상 국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지금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비핵화를 어렵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이 문제를 언제까지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독재 정권 시절의 한국에게도 그랬듯이 북한 인권 문제는 어렵지만 누군가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박 씨는 BBC 월드서비스에 한국어 방송을 넣는 방안도 영국의 데이비드 앨턴(David Alton) 상원의원과 더불어 추진하고 있다. 한국어 방송이 많아질수록 북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프레임을 벗어난 공감 능력


 2018년 한 해 동안 링크의 도움을 받아 북한 밖에 정착한 탈북인은 326명에 달한다. 탈북인 구출 사업을 시작한 이후 2018년 말까지 합하면 모두 1000여 명이 링크의 혜택을 받았다. “탈북인들은 남북한 간 문화 격차와 생소한 제도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링크는 탈북인이 한국에 정착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탈북민들이 늘어나고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씨는 탈북민이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일 뿐 아니라 북한 변화의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탈북인 대부분이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통화하면서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의식적으로 북한 내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한 축이 된다는 논리다. 박 씨는 앞으로 10~20년 안에 지금과는 아주 다른 북한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북한 주민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북한을 ‘한민족이며 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을 많은 지하자원과 값싼 노동력 등을 갖춘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나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요.”


 박 씨는 “한국 청년들이 북한 사회에 대해 참 무심하다. 그래서 북한이 문을 열었을 때 편견과 몰이해로 인한 남과 북의 사회적 갈등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는 정치·안보 프레임으로만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에도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북한이라고 하면 흔히 김정은이나 핵무기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2500만 북한 주민이지요.”


 링크는 탈북민 지원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달하는 활동도 한다. 2018년 만든 다큐멘터리 <장마당 세대>(The Jangmadang Generation)도 그 일환이다. 박 지부장이 공동 감독을 맡은 이 52분짜리 다큐멘터리는 탈북 청년 10명의 생생한 육성으로 북한 청년들의 사고와 문화를 전해 준다. 박 지부장은 “다큐멘터리를 본 분들은 영상 속 북한 청년들이 내 친구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주문한다. “적대도, 시혜도 아닌 시선이 중요하죠.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가교가 탈북인인 셈입니다.”


 박 지부장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올해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탈북민과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영국 축구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 선수와 함께 뛰고 있는 해리 케인도 이번 훈장 서훈자 명단에 올랐다. 박 지부장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동하며 탈북인들이 무사히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모든 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훗날 여건이 된다면 조부모의 고향인 북한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북한 문제가 너무 큰 이슈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9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ALES OF TWO KOREAS

 

‘Refugees are the Vanguards of Change’

 

 Liberty in North Korea (LiNK) rescues and resettles North Korean defectors. The U.S.-based NGO’s office in Seoul is headed by Sokeel Park, who regards displaced North Koreans as potential facilitators of change in the communist North. But he feels South Koreans need to change a lot, too.

 

  When 13-year-old Sokeel Park, a Briton of Korean descent, first came to South Korea in 1998, a red sticker on every bus piqued his curiosity. That, his father explained, was an appeal to alert authorities about suspected North Korean agents.


 Today, Park is telling South Koreans about their fellow Koreans in the North, but not as an informant. He heads the South Korean branch of Liberty in North Korea (LiNK), a U.S.-based non-government organization dedicated to rescuing and resettling North Korean defectors. Its efforts are aided by 275 support clubs in 16 countri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Canada, Britain and Japan.


  At 34, Park is almost the same age as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Park believes their age group holds the keys to meaningful change on the Korean peninsula. If he was born in the North, Park would be in the “jangmadang generation.” Jangmadang (or changmadang in North Korea’s Romanization system) refers to North Korean farmers’ markets and black markets, seedlings of a nascent market economy. Jang is an abbreviation of sijang, meaning “market” and broadly “capitalism”; and madang means “place,” “spot scene,” etc. The markets began to emerge in the 1990s as the North grappled with natural disasters that destroyed crops and the end of assistance from the Soviet Union, which had collapsed.


  The jangmadang generation constitutes a quarter of the North Korean population. Growing up with a reeling socialist economic system, this cohort’s socialization differs markedly from previous generations.


  Most defectors of this generation claim they never received food rations from the Workers’ Party in their country. Their cultural experience is far removed from that of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too. With relatively more access to outside information, these young adults have different values, perceptions and attitudes. The internet and smuggled thumb drives have helped them develop alternative perspectives. South Korean TV shows and Chinese movies increasingly influence their fashion and lifestyle.


  Park sees six catalysts, or motives, for change in the North: the jangmadang generation; capitalism; chronic corruption; rising inflow of information; defectors, or refugees, who are in contact with their relatives in the North; and personal networks beyond government control. But to optimize the potential contribution that North Korean resettlers could make, the sentiment of South Koreans must be changed, says Park.

 

Genesis of LiNK


 LiNK is an offspring of KASCON, the Korean American Students Conference, which began in 1989. As interest in North Koreans fleeing their country swelled, their plight became a key topic of KASCON’s annual gatherings. Motivated to go beyond discussions and debates, second-generation Korean-American students at Yale University formed LiNK in 2004 and placed the headquarters in Washington, D.C.


  LiNK relies on donations from various organizations, students, businesspeople, religious groups, and its own members. It also sells T-shirts, cookies, bubble teas and rice balls, and organizes fund-raising concerts. It doesn’t receive subsidies from any government.


  Most of LiNK’s budget is spent on rescuing North Korean escapees hiding in China. It costs about US$3,000 (about 3.3 million South Korean won) per person. The group brings them through 3,000 miles of secret rescue routes through China and Southeast Asia to safe and free resettlement in South Korea or the United States.
By late 2018, LiNK had rescued more than 1,000 North Korean refugees and helped them resettle. Nearly one third of the total was achieved in 2018 alone.


 Park believes North Korea will be quite different in the next 10 to 20 years. Accordingly, young South Koreans need to empathize with North Korean people above anything else, he says emphatically.

 

 Vicarious Goal Fulfillment


 Park was born to a Korean father and a British mother in Manchester, England, where he grew up. His first trip to South Korea was to accompany his grandmother’s remains after she died in England.


 Between high school and university, Park spent a year at Yonsei University’s Korean Language Institute in Seoul. He earned a degree at the University of Warwick, where he majored in psychology, and returned to Seoul in 2007 to work at the Ministry of the Interior and Safety for a year. One of his duties was to facilitate courses on South Korea’s economy and culture for visiting officials from developing countries.


 Over the next two years, Park obtained a master’s degree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international political history at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began working as an intern at the United Nations headquarters in New York. During this time, Park met North Korean defectors and decided that he would devote himself to working on behalf of North Koreans.


  Park’s goal was a permanent job at the UN or the British Foreign Office. It was by sheer chance that he began working for LiNK. He attended a lecture in London by Mike Kim, the founder of Crossing Borders, an NGO that provides humanitarian assistance to North Korean refugees and their children living in China. After the lecture, Kim advised Park to work for LiNK.


 In May 2012, when LiNK’s Seoul office opened, Park abandoned his dream of becoming a British diplomat to join the new branch. Besides Park, there are eight staffers. Their main task is to rescue, protect and resettle refugees. Those stranded North Koreans need substantial assistance in adapting to South Korean society due to the wide gulf between the two Koreas in terms of their culture as well as their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s.

 

Heading the Seoul Office


 Park’s overriding goal is to get young South Koreans involved. He is flabbergasted at how little they know about North Korean defectors, who now number more than 30,000.


 Park believes North Korea will be quite different in the next 10 to 20 years. Accordingly, young South Koreans need to empathize with North Korean people above anything else, he says emphatically. At present, they seem to be grossly indifferent and lacking in empathy toward North Koreans, Park says. If empathy toward North Koreans were measured on a scale of 1 to 100, he estimates young South Koreans would barely score 10.


 As far as Park is concerned, the long-term chances of meaningful redirection in North Korea will improve with every refugee who resettles in South Korea. He believes North Korean resettlers abroad can be levers to economic and psychological change as they remit money to their relatives back home and secretly communicate with them.


  Park suggest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use a different lens when scrutinizing North Korea. Discussions about the North typically revolve around Kim Jong-un or Pyongyang’s nuclear arms buildup. Park says the human factor, or the North’s 25 million people, needs to receive more attention. To that end, LiNK regularly releases vivid stories about North Koreans. An example is the 2018 documentary, “The Jangmadang Generation,” which features 10 young refugees. After watching the 52-minute documentary co-directed by Park, South Koreans would comment that they found North Koreans not much different from their friends, Park says.


  This year, Park received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BE) from the British royal household for his services to UK-Korean relations. That was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to aiding defectors and promoting human rights in North Korea. Park passes credit to those who unassumingly help LiNK safely rescue displaced North Koreans.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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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민국 국민 생각--------대한민국 국민 생각---- 2019.10.20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국민 생각----

    국민 여러분 윤지오 유승준은 국민 속이고 돈벌고 도망간 년놈이다
    유승준이 자기가 군대 간다고 말한적 없다고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사기를 친다
    유승준 본인이 방송에서 여러번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가야 된다고자기도 군대 간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읍니다\
    방송에서 보고 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구나 정말 나쁜놈이다 정말 뻔뻔한놈이다
    유승준 본인이 직접 군대간다고 말해놓고
    군대가기전 병무청까지 속이고 미국가서 미국 시민권 취득하고 미국으로 도망친놈이
    아직도 뻔뻔하게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로 속이다니 정말 나쁜놈이다
    미국에서 미국시민권자로 평생 살기 바란다
    대한민국은 당신같이 국민사기치고 거짓말로 국민속이고 군대도 안가고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은 필요없다
    아이들 교육에도 안좋다해병대김흥국이백번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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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운동--
    -다음유튜브에서 성범죄1위목사 검색 필독하자?..
    다음 네이버 구글에서 종교개판이다 검색 필독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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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은 자기 가족은 문제 삼지 말라고 하더니 조국한테 하는 짓은 뭔짓인가 ?..
    윤석열이 조국장관한테 한짓이 정치 검찰들이 하는 짓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렇게 생각한다
    운석열 검찰총장은 본인 말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인터넷과 유튜브로 나경원 자녀의혹 검색 필독하고 수사하고
    황교안 자녀의혹 검색 필독하자 조국 장관님처럼 수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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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장관님 대한민국 리더가 되어 주십시요 부탁합니다 !!
    조국 법무부장관님 검찰 개혁 불쏘시개 역할 완수하고 정말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님이 대한민국 리더감인지 확실히 알았읍니다
    윤석열이 검찰이 정치 검찰이라는 것을
    표적수사 과잉수사 불공정수사를 국민들은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알았읍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반드시 검찰 개혁이 필요한것을 알았읍니다
    검찰 개혁은 문재인 대통령과 국민들이 하겠읍니다
    대한민국은 조국 장관님같은 리더가 필요합니다
    조국 법무부장관님 다음에는 반드시 대한민국 리더가 되어주십시요
    대한민국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계속 응원하겠읍니다
    !!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대한민국 리더가 될때까지 계속 응원하겠읍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문재인 대통령 파이팅 조국 교수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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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 지원 단체인 하나누리 대표 방인성 목사는 자원봉사자들이 손수 짠 목도리를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지원 사역을 8년째 이어오고 있다. 2017년부터는 마을금고를 주축으로 하는 북한 농촌마을 자립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한국 교회들이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여기기에 앞서 그들의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에 자리한 라선특별시는 북한에서 맹추위로 소문난 곳이다. 1월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18도인 데다가 “소가 날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바람이 거세다. 하나누리의 대표이자 함께여는교회의 담임목사인 방인성(Pang In-sung 方仁成) 씨는 해마다 겨울이면 이 추운 곳으로 향한다. 라진·선봉경제특구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의 아이들에게 목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곳에 겨울나기 물품을 전달하고 있는 방 목사는 “목도리 3,000여 개가 담긴 종이 상자를 실은 트럭이 칼바람을 뚫고 유치원, 탁아소, 보육원을 돌고 나면 아이들 표정이 무척 밝아진다”고 전했다.

                          
 “난방 연료가 부족한 실정이라 북한 어린이들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견뎌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목도리는 최고의 겨울나기 선물이죠. 그래서 저는 1m 남짓한 목도리가 3,000리나 떨어진 남과 북의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자원봉사자들의 정성

 

방인성 목사가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목도리는 예외 없이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든다. 주로 중고교 학생인 자원봉사자들이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손수 뜬다. 사무실에 오지 못하는 봉사자들은 하나누리가 제공하는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한 뒤 다시 사무실로 보내 준다. 캠페인에 참여한 중고교생들은 목도리를 뜨는 것으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자원봉사 시간을 인정받는 효과도 있으니, 이 캠페인은 남북한 청소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에서도 이 캠페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임직원들이 단체로 목도리 뜨기 운동에 동참했고, 미국·캐나다 등지에서도 재료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해마다 국내외적으로 2,000~3,000명이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것이 방 목사의 귀띔이다.


 목도리를 뜨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재료와 함께 동봉된 도안을 보면 처음 해 보는 사람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재료비는 방 목사가 벌이는 ‘목도리, 남북을 잇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독지가들의 정성으로 마련된다. 이 캠페인은 2011년 한 하나누리 직원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남북 관계의 악화로 교류 사업이 모두 중단됐을 때였다.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어려워도 민간 교류의 끈은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방 목사에게 목도리 뜨기 아이디어가 참신하게 다가왔다. 중국인을 통해 물품을 북한에 전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북한 관계자들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감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이 서울 중구에 있는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뜨고 있다. 목도리 뜨기 행사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열리는데, 방문이 어려운 자원봉사자들은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해서 보내온다.

                                                                          

자립을 위한 마을금고 사업

 

 하나누리는 좀 더 거시적인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북한 농촌마을 자립 모델 사업이 그것이다. 2009년부터 라선특별시 룡평마을에 농기구·비료·종자 등을 꾸준히 지원해 왔고, 량강도의 농장, 함경북도 청진의 고아원·보육원을 돕기도 했던 하나누리는 2017년부터 룡평자립마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10년 계획인 이 프로젝트는 외부 지원 없이 이 마을이 스스로 식량, 육아, 주거, 교육, 의료, 에너지, 자치 등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목표다.


 이 사업의 핵심은 마을금고 운영이다. 하나누리에서 마을금고 농장 계좌에 넣은 자금을 주민들이 대출 받아 농약이나 농기구를 사고 나중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 사업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창시한 그라민은행의 영세민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마이크로크레딧에서 착상했다.


 룡평마을은 48가구에 농장 면적이 62정보(약 61만 5,000㎡)에 달한다. 이 마을은 2017년 마을금고 대출로 트랙터 1대, 디젤유, 비료 등을 구입했다. 대출 규모는 한국 돈으로 치면 3,290만 원 정도다. 이 마을에서 보내온 2017년 성과 보고서를 보면 괄목할 만하다. 벼와 옥수수의 생산량이 각각 전년 대비 1정보(9,917㎡)당 1톤씩 늘었다. 또 1가구당 월 생활 수준을 비교하면 전년보다 쌀 10㎏, 국수 10㎏ 정도 소비가 증가했다.


 자립마을 사업의 관건은 빌린 돈의 상환 능력에 있다. 2018년 7월 17일 1차 상환액이 들어왔다. 초기 사업이 안정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하는 방 목사는 “룡평자립마을은 북한 전 지역에 적용 가능한 확산 모델”이라고 역설했다. 이 마을에서 상환한 자금은 나선특별시의 또 다른 마을에 재투자할 계획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 이후를 대비하다


 하나누리는 라선특별시에 대표 사무소를 여는 계획도 세웠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전반적 관리, 수익의 재투자, 남측 기업의 소통 창구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표 사무소는 중장기적으로 여행사, 외국어 학원, 운송업, 양식업, 지하자원 개발, 스마트시티, 도시·토지 개발 연구 사업 등을 추진하게 된다.


 방 목사는 룡평마을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구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0~30%의 고금리 대출이 북한 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2009년 북한 정부가 화폐 개혁을 단행했을 때 저축했던 돈을 많이 잃어버렸던 북한 주민들은 은행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 영향으로 고리대금업이 성행했고, 가계 대출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 착안해 마을금고에서 사업 대출뿐만 아니라 가계 대출도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룡평마을 1가구당 월 생활비가 한화 5만 원 수준인 점을 감안해, 한 가구당 최대 한화 8만 5,000원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것이 사업의 뼈대다.


 하나누리는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실질적인 활동, 연구, 교육, 이 세 날개로 통일을 준비한다는 목표로 2007년 출범했으며, 2019년 1월에는 부설 연구 기관으로 ‘하나누리 동북아연구소(Hananuri Northeast Asia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했다.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장은 룡평자립마을 사업 모델화 연구를 과제로 삼는다.


 하나누리 산하에는 이 외에도 ‘토지 + 자유연구소(Institute of Land and Liberty)’가 설립돼 희년경제(禧年經濟) 체제를 연구하고 있다. 토지든 노예든 빌린 지 50년이 되는 해에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던 초기 기독교 전통인 ‘희년’에서 착안한 개념인데, 햇빛이나 공기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공유하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즉 통일 이후 북한의 토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남북한에 적용 가능한 대안 경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두 체제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새로운 대안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드러내는 경제 구조를 성경 속의 희년 법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누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 사회·문화 교류 차원에서 남북 미술 작가들의 합동 전시회를 열고, 남북 청소년들의 나무 심기 봉사 활동을 통해 교류하는 기회도 만들었다. 2007년에는 남북 청년 500여 명이 도라산 역에서 휴전선을 넘어 개성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행사도 준비했다. ‘자전거로 분단을 넘는다’는 취지로 기획한 행사였다. 하지만 다음 해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행사는 돌연 취소됐다.


 “통일부나 후원 기업, 북측에서 모두 크게 관심을 보인 행사였어요.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협의서를 작성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는데,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더는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추진하고 싶습니다.”
 방인성 목사는 2007년 비정부기구 하나누리를 설립하여 북한 주민들을 위한 실질적 지원 외에도 통일 이후를 대비해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개신교 개혁 운동에 대한 관심

 

 방 목사의 북한 지원 사업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다. 하나누리의 활동은 남쪽 기독교계에서조차 대체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을 하느냐”, “그 사람들은 없어져야 되는 사람들이다. 속지 마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정도다. 방 목사는 “통일이 되면 한국 교회들이 북한에 예배당 세울 생각만 하는데, 북한 주민을 실질적으로 돕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교회와 교단들이 경쟁하며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확장에만 욕심을 부린다면 북한은 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한국 교회가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먼저 북한 주민을 사랑하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통일과 평화 운동에서 ‘돈보다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주변인들을 독려한다.


 방 목사가 북한과 통일 문제에 열중하게 된 데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인 할아버지 방계성(方啓聖)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절해 총살형을 당했다. 방 목사의 아버지 방정원(方正圓) 씨도 목사였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어 북쪽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령이라는 생각으로 통일과 평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방 목사는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신학부와 옥스퍼드대 웨스트민스터칼리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영국 국제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킹스 크로스 한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옥스퍼드 한인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1996년 귀국한 그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투옥됐던 성도들이 서울 창신동에 세운 성터교회를 맡았다. 이 성터교회 시절 아픈 신자를 위해 신장을 기증하는 바람에 그는 신장 하나로 살고 있다. ‘목사의 설교와 삶은 일치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방 목사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염원하며 광화문광장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한 적도 있다.


 이렇듯 남북 지원 사업과 사회적 현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그는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함께여는교회는 신자가 100명 남짓한 작은 교회이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를 결성해 개신교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9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ALES OF TWO KOREAS
A Well-Knit Unification Plan

 

 Rev. Pang In-sung tries to advance unification through humanitarian assistance, defying ups and downs in inter-Korean relations. He urges South Korean churches to take an interest in giving North Koreans substantial help to improve their livelihood before regarding them as evangelization targets.

 

 Every winter Rev. Pang In-sung leaves for the frigid northernmost edge of North Korea. Sub-zero temperatures are the norm in the border region, where they say “winds are powerful enough to lift cows.”


 The philanthropic pastor’s destination is the Rason Special Economic Zone, a slice of North Hamgyong Province, which is wedged between China, Russia and the East Sea. The purpose of his annual visit is to deliver humanitarian aid, a product of his roles as senior pastor of the Open Together Church in Seoul and president of Hananuri, an aid organization affiliated with his church. The recipients are those who are most vulnerable to the threat of frostbite from a brutal winter.

 

Mufflers and Microfinance

 

 “In the biting winds, we make a round of kindergartens, daycare centers and orphanages, delivering a truckload of about 3,000 mufflers. The children’s faces brighten up when they receive the mufflers,” Pang says. “North Korean children are exposed to winter chill with little warm clothing to protect them, when heating fuel is in very short supply. Mufflers are the best gifts for them in winter. I think those 1-meter-long mufflers connect people in the two Koreas.”

 

 Hananuri (literally, “one world”) also provides financial support in Ryongpyong, a farming village in the Rason area. It runs a communal fund to help the villagers buy farm equipment and supplies to promote self-reliance. It is modeled after the microcredit program of the Grameen Bank founded by Muhammad Yunus, a Bangladeshi social entrepreneur, economist and civil society leader, who received the Nobel Peace Prize in 2006.


 Hananuri was launched in 2007 with the goal of making preparations for national reunification based on three aspects of support programs: practical activities, research and education for building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Its newly opened think tank, the Northeast Asia Research Institute, is tasked with creating a win-win development model for Northeast Asia. Currently, it is studying Ryongpyong as a possible prototype.


  Through Hananuri as well as his Open Together Church, a small church with only some 100 members, Rev. Pang hopes to convince South Korea’s megachurches to reconsider their post-unification plans. “South Korean churches are mostly thinking of opening churches in the North, once the nation becomes reunified. But they should pay attention first to how to provide real help to North Koreans.”

 

Volunteer Knitters

 

 In 2011, a Hananuri staffer suggested giving mufflers as gifts to North Koreans. Inter-Korean relations were deadlocked at the time, with exchange programs almost completely stalled. Pang felt that private sector exchanges should be maintained, regardless of the state of relations between the governments. The idea of knitting mufflers struck him as fresh and original. “It was a great idea. Even North Korean officials marveled at how we conceived of such an idea,” Pang says.


  Most of the mufflers distributed through his “Mufflers Connect Both Koreas” campaign are knitted by South Korean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By participating in the campaign, the students earn school credits for volunteer community service. On the fourth Saturday of every month, they gather at the Hananuri office in Seoul’s Jung District to knit together. Those who cannot come receive knitting materials at their homes and send the finished mufflers to the office. The knitting materials are funded by donations.


  Children and teachers at North Korean kindergartens and daycare centers are particularly touched when they hear that the mufflers were knitted by South Korean students, probably because they feel they have received truly warm gifts. This is why Pang adheres to having mufflers voluntarily hand-knitted one by one, although he knows it would be far simpler to buy and send them to the North.


  Employees of Samsung Display and other Korean companies have also become involved in the campaign, and proposals to participate come from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mong other countries. “Some 2,000 to 3,000 people at home and abroad participate every year,” Pang says.

 

Communal Fund for Self-Reliance

 

  Hananuri’s activity in Ryongpyong began in 2009, when it provided assistance to daycare centers in Chongjin, also in North Hamgyong Province, and orphanages in nearby Ryanggang Province.


  In 2017, Hananuri began a 10-year project to help Ryongpyong become more self-sufficient in food supply, childcare, housing, education, medical service, energy and self-administration. The village fund, part of the project, extended a loan equivalent to some 33 million South Korean won (approximately US$30,000) to the village’s 48 households. With the money they purchased seeds, fertilizer and farm equipment for the 615,000 square meters (152 acres) of land that they tend.

 

  The success or failure of such self-reliance projects depends on whether the villagers can repay their loan. The village’s 2017 performance report helped mollify any concerns. Rice and corn output increased by about 60 tons each, compared to 2016, and each household’s consumption of rice and noodles increased by about 10 kilograms year-on-year. The first repayment was made on July 17, 2018.


  “Ryongpyong is a diffusion model that can be applied to any other place in the North,” Pang says. He plans to reinvest the repayment in another village in Rason.


 “North Korean children are exposed to winter chill with little warm clothing to protect them, when heating fuel is in very short supply. Mufflers are the best gifts for them in winter. I think those 1-meter-long mufflers connect people in the two Koreas.”

 

Preparing for Post-Unification Era


  Hananuri intends to open a representative office in Rason for on-site management of its aid projects. The office will also reinvest profits and serve as a communication channel for South Korean corporations. Over the mid- and long-term, the office will conduct research on tourism, foreign language education, transportation, fish farming, underground resources development and smart city programs as well as urban planning and land development.
While undertaking the Ryongpyong project, Rev. Pang learned that most villagers had heavy debt loads. He also came to know that loans with an interest rate of 10 to 30 percent are commonplace in the North. Many North Koreans do not trust banks, because they suffered substantial losses in the 2009 currency reform, which forced everyone to obtain new banknotes while limiting the swappable amount of the suddenly obsolete old currency.


 Loan sharks have filled the void created by the distrust of banks and the amount of household loans is raising alarm. To help relieve the pressure, Pang is preparing to let the communal fund offer an interest-free loan of up to an equivalent of 85,000 South Korean won to individual households. The average monthly cost of living per household amounts to some 50,000 South Korean won.


  Hananuri has another think tank devoted to the study of land use, namely the Institute of Land and Liberty. Research at the institute is focused on a jubilee cycle of economy, referring to an early biblical tradition in which land, property and slaves would be returned to their owners in the 50th year. The research concerns how land and property should be handled in the North after unification and what alternative economy could apply to both Koreas.


  “I believe that we need a new alternative economic structure for the unified peninsula, transcending the current systems of both Koreas,” Pang says. “The new alternative structure will have to envision genuine peace, following the biblical tradition of the Jubilee.”


 During the liberal administration of President Roh Moo-hyun (2003-2008), Hananuri sponsored joint exhibitions of South and North Korean artists and provided youths from both Koreas with an opportunity to plant trees together. In 2007, it envisioned 500 youths from both sides crossing the Demilitarized Zone on bicycles. But after the conservative Lee Myung-bak administration took over the following year, the cross-border bike ride had to be abruptly cancelled.


 “The Unification Ministry and potential sponsors, as well as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took a great interest in the event,” Pang says. “But we couldn’t go ahead because inter-Korean relations chilled. We had already reached an agreement with the North’s National Economic Cooperation Federation and we were just about to start it. I want to push for the event again if another chance comes sometime in the future.”


 The hostile political environment is not the only obstacle to Pang’s aid projects. Hananuri’s activities are not properly understood even by South Korean churches. Some compare his projects to “shoveling sand against the tide.” But Pang’s stress on grassroots support is unwavering.


  “More chaos will result in the North if South Korea’s megachurches and various Christian denominations and organizations compete only to open churches and expand their influence there,” he says. “I hope South Korean churches won’t regard North Koreans merely as targets of evangelization, but will love them first and then think seriously of ways for people of both Koreas to live together peacefully.”


  Rev. Pang In-sung is shaping a win-win development model for post-unification Korea in addition to providing substantial assistance to North Koreans through Hananuri, a nongovernmental aid organization founded in 2007.

 

Efforts for Church Reform

 

  Pang is a third-generation pastor in his family. His grandfather, Rev. Pang Gye-sung, aroused his interest in North Korea and the unification of the divided peninsula. “I was more and more interested in unification and peace, as I believed that loving North Koreans is the essence of the gospel, transcending the tragedy of my own family,” he says.


  Rev. Pang Gye-sung was a pastor from Cholsan, North Pyongan Province. He was imprisoned for refusing to pay respects at Shinto shrin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fter the national liberation in 1945, communists killed him for refusing to put up a North Korean national flag at his church and join the North’s Christian federation.


  Pang In-sung studied theology at King’s College London and the University of Oxford’s Faculty of Theology. He was ordained as a minister at the International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Kingdom and worked as a curate at a Korean church in Kings Cross, London, and as senior pastor at another Korean church in Oxford.

 
  After returning to South Korea in 1996, he took charge of the Seongteo Church, which was built in Seoul by Protestants who were incarcerated for refusing to pay respects at Shinto shrin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He has only one kidney because he donated the other to a sick member of the church. It was a decision based on his conviction of “practicing what you preach.” In 2014, Pang staged a 40-day hunger protest at Gwanghwamun Square in downtown Seoul, seeking justice for the victims of the Sewol Ferry disaster that year, most of them high school students.


 Pang also is known for his advocacy for small church. In cooperation with the Solidarity for Church Reform in Korea, he is conducting a Protestant reform movement that seeks an end to hereditary succession of church administration and leadership.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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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에서는 북한 하면 으레 ‘은둔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최근 비핵화 협상으로 북한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지만, 여전히 통제가 엄격한데다가 방문마저 자유롭지 않아 사회 전모를 제대로 알 수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국제 사회의 엄혹한 제재로 경제 발전은 정체되고 인민들의 생활고도 극심하리라는 통념을 갖는다.


 이 같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진천규 기자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타커스)는 우리가 잘 몰랐던 ‘평양의 오늘’을 보여 준다. 그는 2017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방북해, 40여 일간 북한 주민 250여 명을 만나고 취재한 내용과 사진을 이 책에 수록했다. 그래서 이 책은 북한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 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휴가 중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단절되었던 지난 9년간 한국 언론인의 방북 취재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을 지닌 한국인 프리랜서 언론인인 진 기자는 북한 당국과 신뢰 관계를 구축해 평양은 물론 원산, 마식령 스키장, 묘향산, 남포 등지의 모습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자동차와 휴대전화

 

 진 기자가 스스로 ‘평양 순회 특파원’이라고 칭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언론 자유 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민주 모금 형태로 창간된 「한겨레」 신문에 합류했던 그는 그해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담 등을 취재하면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특히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는 풀기자로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손을 잡고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직접 찍기도 했다. 
                                                                       

<진천규 기자가 찍은 평양 창천거리>

 이후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그가 17년 만에 다시 찾은 북한에서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여긴 것은 자동차와 휴대전화였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 옥류관 앞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10여 대가 늘 줄을 서 있었다. 택시는 외국인이나 고위 간부들만 탈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일반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차가 드물어 한산한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 경찰이 수신호를 하던 평양에 신호등이 없으면 안 될 만큼 자동차 대수가 늘어난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죠. 평양 시내에만 6,000대 이상의 택시가 돌아다니고 택시 회사도 5~6개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인 운전원에게 물었더니, “택시는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이 없는 뒷골목까지 가려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개인 소유의 자동차가 없어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러시아워에는 약간의 교통 혼잡 현상도 일어난다고 한다.

 또 하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여전히 정보와 이동이 통제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휴대전화 사용자가 500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양 시내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더 이상 신기한 장면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진 기자가 평양 취재 중 더욱 놀란 사실은 예상보다 훨씬 개방적인 인터넷 환경이었다. 평양국제공항에서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그는 국제공항이라서 가능한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묵었던 평양호텔에서도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는데,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상황은 아니겠지 짐작하면서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원하는 자료를 바로 찾고, 미국이나 남한의 지인과 아무 때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평양에서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면 받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보내는 이메일이 맞느냐”며 깜짝 놀라곤 했단다. 한번은 업무 때문에 급하게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방이 메일을 받고도 평양에서 보낸 게 맞는지, 행여 감시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해 답장을 안 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도 평양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와 이메일로 실시간 소통하며 출간 마무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신뢰를 토대로 한 취재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평양 시내는 신축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과거에 비해 훨씬 화려해 보였다. 특히 창전(倉田)거리는 외국인들이 ‘평해튼(평양 맨해튼)’이나 ‘리틀 두바이’라고 부를 정도의 모습이었다. 또한 주로 과학자들이 거주하는 미래과학자 거리에는 고층 아파트와 고급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야심차게 개발했다는 신시가지 려명(黎明)거리의 빌딩숲은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카퍼레이드 방송 화면에도 잡힌 바 있다. 
                                                                  

 

 진 기자는 평양에 피자 가게가 6개나 운영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식당이라고 한다. 만경대 구역 축전동에 있는 ‘이딸리아료리전문식당’은 2008년 평양에 처음 생긴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진 기자가 방문했을 때 300여 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것이 보통 시민들의 살림집 내부 모습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살림집이라 불리는 아파트를 취재할 기회가 생겼는데, 북한 관계자는 그에게 “외부인으로는 최초의 취재”라고 귀띔했다. 그가 방문한 곳은 고층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려명거리 지역이었는데, 2017년 완공된 이 아파트는 재개발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 1순위로 입주 자격이 주어졌고, 근처에 근무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진 기자가 방문한 집에는 침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등이 갖춰져 있었으며, 남한의 중산층 가정집과 비슷한 생활환경을 누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하고 찾아갔지만, 일부러 없던 물건을 갖다 놓거나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평양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수가 아니라 서양처럼 방의 개수로 계산한다고 한다. 방 2개짜리 집, 3개짜리 집, 4개짜리 집 등으로 집의 크기를 구분 짓는 것이다. 방의 개수는 집주인의 권력 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양 가족의 숫자로 결정한다고 한다.

 

   려명거리에 있는 아파트의 한 달 주택 사용료는 240원으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700원 정도다. 실제 가격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요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 기자는 “고층 아파트의 경우 엘리베이터 관리자가 따로 있어 눈길을 끌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전기료는 받고, 수도료는 따로 없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방북 취재 기간 동안 자신을 담당하는 안내원이 있었지만, “평양 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취재했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은 어떠한 검열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과 사진은 전체 모습이 온전히 나오게 해 달라. 건설 노동자와 남루한 노인 모습은 찍지 말아 달라”가 전부였다고 한다.

 

문화적 통일을 향한 노력

 

 그동안 세상에 공개된 북한 관련 책과 사진은 주로 외국 기자가 취재한 것들이다. 그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진 기자는 그런 한계를 깨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까지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다. 
                                                                         

                                                 <진천규 기자>

 그는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조금만 더 경제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곧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녘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오판이란 판단이 들었다”고 말한다. 평양 사람들은 의식주를 단순히 해결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외부인들의 생각보다 다양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진 기자는 북한핵 문제로 북한과 미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난해 10월에도 “평양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으리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 취재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진 그는 ‘경계인’으로서 “편견 없이 보고 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런 얘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평양의 특별한 일면을 북한 전체의 모습처럼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비판하지만, “남한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얘기다.

 평양 상주 특파원이 오랜 꿈이었던 그는 지금 2019년 개국할 계획인 ‘통일 TV’를 설립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준비위원장을 맡은 통일 TV는 남과 북이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역사물과 자연 다큐멘터리, 음식 관련 프로그램 등을 제작하고, 북측 영상물 저작권을 확보해 방영하는 케이블 방송사다. 그는 통일 TV를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남과 북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 문화적 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18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Alternate Perspective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a Ji-kwon Photographer

 

 Western media often describe North Korea as “reclusive,” a nod to its rigidly controlled accessibility. The limitation naturally inhibits a thorough understanding of its society. Consequently, outsiders are apt to believe that international sanctions are crippling the North’s economy and heaping hardship on its people.

 “Pyongyang Time Flows with Seoul Time,” published by Takers in Seoul earlier this year, contradicts this conventional view. Written by Jin Chun-kyu, a U.S.-based freelance journalist, the book unveils an unfamiliar tapestry of today’s Pyongyang, thanks to relaxed restrictions on his visits. Starting in October 2017, Jin visited North Korea four times over the next nine months, staying a total of 40 days. His book, the result of meeting about 250 North Koreans and taking insightful photographs, describes how much the North has changed in recent years. Amid his efforts to unlock relations with Pyongyang,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included the book in his summer vacation reading.

 Until the recent thaw, chilly cross-border relations blocked South Korean reporters from entering the North. But Jin has a permanent U.S. resident card, placing him in a different category than other South Koreans, and he has built-up trust with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His status allowed him to move around relatively freely, meeting North Koreans at the Masikryong Ski Resort and Mt. Myohyang as well as in Wonsan, Nampo and Pyongyang, and photographing moments of their lives.

Cars and Mobile Phones

 

 Jin calls himself a “roving correspondent reporting from Pyongyang” for a reason. In 1988, he formed The Hankyoreh, a left-leaning South Korean newspaper, along with other journalists who were forced out of mainstream news media by military dictatorships. That year, Jin had a brush with the North when he covered a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meeting at the border truce village of Panmunjom. He then visited the North to cover high-level inter-Korean talks in 1992 and the first inter-Korean summit in 2000. At the latter, he photographed President Kim Dae-jung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il grinning and raising their hands after they signed the June 15 North-South Joint Declaration.

 Jin e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2001. Sixteen years later, he revisited the North and was dumbstruck by the multitude of cars and proliferation of mobile phones that had transpired.

 Taxis were everywhere, or queued up at hotspots. About 10 taxis always stood in front of Okryugwan, waiting for diners to leave the best restaurant in Pyongyang. Contrary to assumptions that only foreigners and senior officials took taxis, ordinary citizens tapped the taxi swarm. Where police officers’ whistles and hand signals were once enough on quiet streets, traffic lights had now become a necessity to maintain order.

 Before, such traffic was “unimaginable,” Jin said in an interview. “I heard that more than 6,000 taxis are running around streets in Pyongyang alone and that there are five to six taxi companies there.”
 One taxi driver said his cohorts mainly had passengers going to neighborhoods that lacked a subway station or bus stop. More and more people used taxis because they were unable to have a car. Even light traffic jams occurred during rush hours.

 Jin’s next big surprise was to learn that as many as five million North Koreans were now using mobile phones, though information and movement were still controlled. Pyongyang pedestrians having a conversation on a mobile phone or taking a picture with it were no longer a novelty.

 Another revelation that far exceeded expectations was Internet availability. At Pyongyang International Airport, Jin assumed his connection to a Wi-Fi network was simply a service for global travelers. Later, he discovered unfettered Internet access at his Pyongyang hotel as well. At first, it was hard for him to fathom, guessing that not everyone was allowed to log on.
“It was possible for me to find data I wanted immediately and exchange emails with my acquaintances in the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 anytime,” Jin recalled.

 His email from Pyongyang to Seoul was met with skepticism; recipients asked, “Is this really an email you sent from the North?” One day Jin waited and waited in vain for a reply to his urgent email to Seoul. He later learned that the recipient doubted that the email was really sent from Pyongyang and feared that he was being watched by somebody. Jin put the finishing touches to “Pyongyang Time Flows with Seoul Time” while in Pyongyang, exchanging emails with the publishing house of his book in Seoul.

 

Trusted Outsider

 

 Crisscrossing Pyongyang, Jin came upon streets lined with new high-rise buildings that looked fancier than in the past. Changjon Street is so gorgeous that even foreigners call it “Pyonghattan,” a portmanteau of Pyongyang and Manhattan, or “Little Dubai.” Mirae (Future) Scientists Street, where many scientists live, was so packed with high-rise apartment buildings and a high-end department store that it looked like a backdrop in a capitalist country. A complex of structures in Ryomyong New Town, a development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reportedly advocated vigorously, was shown by TV cameramen riding along President Moon’s motorcade during his visit to Pyongyang in September.

 Jin learned that as many as six pizza parlors occupy the North Korean capital, catering to ordinary citizens, not foreign tourists, and in 2008, the first Italian restaurant opened in Chukjon-dong, Mangyongdae District. When he visited there, Jin found that the spacious 990-square-meter restaurant was packed with customers enjoying pizza or spaghetti.

 The rarest pictures that Jin took in Pyongyang show the insides of ordinary citizens’ apartments. A guide told Jin that he was the first outsider to see the insides of Pyongyang residents’ apartments. He visited Ryomyong Street, which is flanked by year-old high-rise buildings staffed with elevator operators. The buildings’ residents are returnees to the neighborhood, who had to relocate when redevelopment began. Most residents there work nearby.

 The homes Jin visited were furnished with beds, gas stoves, refrigerators and electric cookers. They resembled middle-income homes in South Korea. Although residents were informed of his visit, Jin did not have the impression that they had installed items that they did not own or decked their homes out purposefully.

 North Koreans do not measure their apartments by pyeong (3.3 sq. meters) as done in South Korea, but by the number of rooms. Hence, there are apartments with two to four rooms. The number of family members, not social status and position, determines what apartment they occupy. Each family pays a monthly rent of 240 won (about 2,700 South Korean won) for their home on Ryomyong Street. It may not be a realistic price; it seems to be a symbolic rent, Jin said. North Koreans do not have water bills but are charged for electricity to encourage energy saving.

 During his latest visit, Jin was escorted by a guide but did not experience interference. “I was able to freely talk with Pyongyang citizens. Nobody censored the pictures and videos I took,” he said.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only asked him to photograph statues of (the nation’s founder) Kim Il-sung and (former leader) Kim Jong-il in full length and not to take pictures of construction workers and elderly people in ragged clothes.

 

 Efforts towards Cultural Unification

 

 Most of the books and pictures about the North published so far are by non-Korean journalists. Not being native Korean speakers, they had to approach the North and its people from the observer’s point of view. Jin, however, was positioned to skirt the linguistic barrier. He wanted to record not only North Koreans’ appearance, but also their emotions and thinking.

 “The outside world, including the United States, believes that North Korea will throw its hands up in the air and surrender soon if more economic sanctions are imposed. But it occurred to me, when I took a firsthand look at today’s North Korea, that such a belief is misguided,” he said. 

  Jin found Pyongyang residents enjoying diverse lives as consumers, far from simply fulfilling their basic needs as outsiders tend to think. Pyongyang people were leading their daily lives “in a calm way, contrary to widespread fears that North Korea was busy preparing for a war,” even in October 2017, when Pyongyang-Washington antagonism intensified over the North’s missile tests and continued development of nuclear weapons. 
 

 With a sense of mission, Jin said that he was determined to “see and report on everything without prejudice” as a “border rider.” Some people accuse him of wrongfully using unique aspects of Pyongyang to paint a revisionist portrait of North Korea. He disagrees. “It’s wise to accept it, as it is, as we accept the difference between Seoul and provincial regions, isn’t it?”

 While dreaming about becoming a permanent correspondent in Pyongyang, Jin is currently absorbed in creating “Unification TV,” a cable network scheduled to launch in 2019. The content plan includes airing history programs, nature documentaries and food programs that people in the South and the North can enjoy, as well as North Korea-produced programs after obtaining their copyrights.
 “I believe that both Koreas can play a big role in moving up the cultural unification of the nation by exchanging diverse cultural contents with each other and restoring homogeneity,” said Jin, who is chairing the Unification TV preparatory committee.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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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1년 만에 다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평양냉면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 회담 만찬 식탁에 오를 ‘옥류관 평양냉면’을 모두 발언에서 언급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고, 바로 그날부터 점심과 저녁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유명 냉면 가게 앞이 장사진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 카드회사가 통계 자료를 통해 회담 직후 사흘 동안 서울 시내 평양냉면 가게 매출이 전 주보다 80%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평양냉면의 폭발적 인기 속에서 주목받는 곳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수석 요리사를 동반하고 온, 바로 그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비법을 배운 탈북민 요리사 윤종철 씨가 경영하는 동무밥상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이 집은 이번 신드롬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맛집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 맛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일 점심시간에는 1시간 넘게 순서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상 회담을 계기로 더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 바빠진 윤종철 씨를 서울 합정역 부근에 있는 동무밥상에서 만났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식당은 아직 붐비고 있었다. “가게 규모에 비해 원래 손님이 많았지만, 남북 정상 회담 덕분에 갑자기 더 늘어났습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필리핀 같은 외국 방송사까지 우리 식당을 취재하고 싶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종철 씨는 1998년 탈북해 2000년 한국에 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음식을 배운 이력이 있는 그는 2015년 서울 합정동에 ‘동무밥상’이란 음식점을 열어 북한 음식을 내고 있다.

                                                                              

 

 남북한 평양냉면의 차이

 

 동무밥상에서 평양냉면만 팔지는 않는다. 메뉴판에는 오리 불고기, 명태 식해, 찹쌀 순대, 감자 만두, 옥수수 국수 같은 다양한 북한 향토 음식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평양냉면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음식 하면 자연스럽게 평양냉면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이 4대 냉면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옥류관 냉면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윤 씨는“고급 인력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북한에서는 뭐든 잘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전부 평양에 보내져요.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 1961년 김일성 교시로 만들어진 옥류관입니다.”

 윤 씨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음식에서 평양 최고의 식당인 옥류관의 맛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냉면을 만들 때도 남한의 평양냉면집들과 달리 옥류관 식으로 소 잡뼈와 양지, 꿩고기, 닭고기를 우려낸 냉면 육수를 돌과 숯, 모래가 담긴 여과기에서 한 번 걸러 낸다. 간장은 양파, 대파, 사과, 배를 넣고 달여 낸다. 그런데 윤 씨는 “옥류관 평양냉면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이유는 육수와 간장을 만드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 대동강과 남한 한강의 물맛이 다르다고 강조하는 그는 “옥류관이 금강산에도, 중국에도 생겼지만 물이 달라서 냉면 맛이 다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 동무밥상의 냉면은 반죽의 재료 배합 비율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밀 함량이 60~70%에 이르는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과 다르게 메밀 비율은 40%로 낮고 대신 고구마 전분이 40%, 밀가루가 20% 들어간다. 그래서 면발을 씹어 보면 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옥류관 냉면의 국수는 메밀 40%에 감자 녹말이 60%”라면서 자신도 개업 초기에는 옥류관과 동일한 비율로 면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면발이 질기다면서 가위로 잘라 먹는 손님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녹말 비율을 줄이고 밀가루를 섞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포함한 국수 종류를 ‘명(命)길이 국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에도 냉면을 먹고, 잔칫집에 가도 냉면을 줍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어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면이 쫄깃쫄깃한 이유를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제 얘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어서 설명을 안 하기로 한 대신 반죽에 밀가루를 섞었지요.”

                                                                                

 

 그는 또 옥류관에서는 소화를 돕는 식소다를 반죽에 넣지만 자신은 넣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남한 사람들은 식소다를 넣으면 안 먹어요.”


 식소다로 인해 옥류관 냉면이 칡냉면에 가까운 검은 색이 나는 것과 달리 동무밥상의 냉면이 연회색으로 바뀐 것은 바로 그 차이 때문이다.


 남측예술공연단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가 옥류관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가수 윤도현(尹度玹)은 “옥류관에서는 종업원이 직접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식초를 뿌려 준다. 우리처럼 육수에 직접 식초를 넣지 않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다”고 소개한 바 있다. 윤종철 씨는 남북 음식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여 식초와 겨자는 손님들의 취향대로 넣도록 하고 있다. 동무밥상에서는 냉면 상차림에 평양 백김치, 함경도 콩나물김치, 양강도 양배추김치가 함께 나오는데 이 또한 윤 씨의 배려다. 손님들이 북한의 명물로 소문난 김치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남한 평양냉면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무밥상 냉면에 처음에는 “심심하다”거나 “밍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이 집의 냉면 맛에 한번 빠지면 단골이 된다고 하는데, 그 비결은 아무 양념도 치지 않고 수저로 홀짝거리며 계속 떠먹게 되는 육수 맛 때문이란다.

                                                                  

소중한 북한 음식의 원형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 씨가 평양의 옥류관에서 요리를 배운 데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덕이 컸다.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식 요리사로 일했던 경력이 자칫 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당 간부를 지낼 만큼 출신 성분은 괜찮았다. 그 덕분에 윤 씨는 군에 입대한 뒤 당의 배려로 전문 취사병 교육을 받게 됐고, 교육을 받으러 간 곳이 바로 옥류관이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요리를 배운 뒤, 군 간부 전용 식당의 요리사로 배치됐다. 10년 넘게 북한군 장성급 전용 식당에서 고향이 각기 다른 장성들이 제각각 주문하는 요리들을 만들다 보니 여러 지역의 음식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머릿속에 북한 음식 레시피가 수백 가지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게 다양한 레시피를 익힌 그는 제대 후에는 회령경공업전문학교에서 발효 공부를 해 된장, 간장 같은 발효 식품이나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고, 강의도 했다. 평양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이따금 불려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8년 탈북한 그는 중국을 거쳐 2000년 한국으로 왔다. 정착 초기에는 건설 현장 일용직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013년 한 음식 문화 행사에 참석한 윤 씨는 북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체험한 옥류관 요리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요리 스튜디오 ‘호야쿡스’ 이호경 사장의 도움으로 3일짜리 ‘팝업 스토어’를 차릴 수 있었고, 고객들 호응이 좋아 2015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윤종철 씨는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먹기 편하게 전분과 밀가루의 조합을 만들어 냈고, 지나치게 많은 양념을 써서 먹은 후에 계속 갈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레시피도 개발했다. 그의 진심과 솜씨가 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옥류관 냉면의 비법을 전수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고, 프랜차이즈를 하자는 제의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다고 한다. 만약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되면, 옥류관 식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의 원형을 고수하기 위한 자신의 철칙이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맛있다는 표현을 ‘딱 소리 난다’고 합니다. 동무밥상 냉면이 옥류관 냉면 못지않게 맛있다는 걸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런 유혹을 이겨 내고 싶습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행하는 계간 KOREANA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Pyongyang Cold Noodles
A Taste of Unity


Kim Hak-soon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 great beneficiary of the inter-Korean summit on April 27, despite all its fanfare, turned out to be Pyongyang naengmyeon. The meeting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11 years. But with no major breakthrough in North Korea’s denuclearization reported, South Koreans’ interest turned to what was eaten rather than what was said. 

  After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dined on the cold noodles, long lines immediately formed at the most well-known South Korean restaurants featuring the dish, which became the top searched keyword online. In the three days after the summit, sales at Seoul restaurants specializing in Pyongyang naengmyeon exceeded that of the previous week by more than 80 percent, according to one credit card company.

  Kim said a chef from Okryu-gwan, the best restaurant in the North Korean capital, prepared the naengmyeon. That turned the spotlight to Dongmu Bapsang owned by Yun Jong-cheol, a former trainee at the North Korean restaurant who defected to the South in 2000.


 Food critics and a TV show about gourmet dining had already noted the small, unassuming restaurant run by Yun and his wife. Yet it was the summit that turned the restaurant into an overnight sensation, with media and word of mouth assuring diners that Dongmu Bapsang duplicates Okryu-gwan’s Pyongyang-style naengmyeon. Customers stood in line for more than an hour at lunchtime.
 

  I met Yun at his restaurant, which stands on a side street near Hapjeong subway station, in Mapo District, Seoul, just north of the Han River. The restaurant was still bustling long after the lunch crush. “My restaurant was busy with customers before. But their number soared after the summit. Even Japanese and Philippine TV crews, as well as TV crews here, want to make reports on my restaurant,” Yun said.

 

The Menu, Common to Royal

 

 Yun tries to recreate the taste of Okryu-gwan in his menu, but he is mindful of South Koreans’ palate and makes adjustments accordingly. Little seasoning is required in recipes that he has developed. 

  His array of dishes offered includes everyday fare such as duck bulgogi, fermented pollack, glutinous rice sundae (Korean blood sausage), potato dumplings and corn noodles. But the menu also has elaborate dishes that appeared on the table of royals. Such delicacies must be ordered in advance. There is also a variety of North Korean-style kimchi to be relished, including Pyongyang-style white kimchi, Hamgyong Province-style bean sprout kimchi, and Ryanggang Province-style cabbage kimchi. But Pyongyang naengmyeon is undoubtedly the most popular dish at the restaurant. This should come as no surprise at all. Whenever South Koreans think about North Korean dishes, it is Pyongyang naengmyeon that instantly comes to mind. 


 Besides Okryu-gwan, there are three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Pyongyang - Chongryu-gwan, Koryo Hotel and Minjok Sikdang - but Yun matter-of-factly said Okryu-gwan has the best naengmyeon chefs. “In North Korea, all talented people are sent to Pyongyang. Okryu-gwan, a restaurant built at the regime founder Kim Il-sung’s instruction in 1961, is where the best chefs are working.”

 

Broth & Noodles

 

 The broth for Yun’s naengmyeon is made with cattle bones, beef brisket, pheasant meat and chicken. And unlike other Pyongyang naengmyeon restaurants in South Korea, Yun applies a finishing touch by straining the broth through a filter made up of stones, charcoal and sand - just as Okryu-gwan does. He also boils soy sauce with onions, scallions, apples and pears. Still, Yun won’t claim that his naengmyeon is exactly the same as that served at the top Pyongyang restaurant. “It’s a pity that I can’t perfectly recreate the Okryu-gwan naengmyeon here,” Yun said. The main reason is that South Korean water used for the broth and soy sauce taste different from North Korea’s.

 “Okryu-gwan has branches at Mt. Kumgang (North Korea) and in China. But their naengmyeon tastes slightly different from each other,” he said.

 The composition of the noodles at Dongmu Bapsang also differs from other restaurants. At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Seoul, some 60 to 70 percent of the noodle is buckwheat. Yun uses a 40:40:20 ratio of buckwheat to sweet potato starch to flour. That makes his noodles less sticky. 


 Okryu-gwan’s buckwheat to potato starch ratio is 40:60, according to Yun. He used that ratio when he opened his restaurant toward the end of 2015. But he began to use less starch and more flour after he saw his customers cutting his noodles because of their stickiness.

 “People in North Korea call all kinds of noodles ‘long-life noodles,’ because long noodles refer to a healthy long life. That’s why guests are served with naengmyeon at birthday parties or wedding receptions. I was stunned to see South Koreans eat their naengmyeon after cutting the noodles with scissors.” Yun said.

 “At first, I tried to explain to customers why my noodles were sticky. But unfortunately, I found some of them feeling displeased with my explanation. So, I stopped trying to persuade them. I decided instead to add more flour to the dough.”

 Another departure from Okryu-gwan is the use of baking soda. Its chef adds it to dough, believing that it is good for digestion. South Koreans are health-conscious, but they don’t like noodles cooked with baking soda, Yun observed. Baking soda makes Okryu-gwan’s naengmyeon blackish brown just like kudzu starch noodles, bu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pale gray. 
 

 Besides differences in the texture and appearance of the two restaurants’ naengmyeon, how customers enjoy the cold noodles differs. Rock singer Yoon Do-hyun had Okryu-gwan’s naengmyeon when he was in Pyongyang in early April to perform concerts. He said, “I saw waitresses pick up customers’ noodles with chopsticks themselves and sprinkle vinegar on them. This is different from the way we do it. We put vinegar directly into the broth.”

 Yun isn’t fussy about how his customers wield vinegar and mustard bottles; they attack their bowls of cold noodles any way they want. He has accepted the difference between the dietary cultures of the two Koreas.

  Some customers, familiar with the taste of South Korean-style Pyongyang naengmyeon, initially use words like “bland” or “insipid” to describe Dongmu Bapsang’s naengmyeon. But they quickly become regular patrons once they are accustomed to the taste. They even enjoy sipping the broth without adding any seasoning. 
 

 A native of Onsong, North Ham-gyong Province, Yun trained at Okryu-gwan thanks to his father who was a senior official in the Workers’ Party. The fact that his grandfather was a chef of Japanese dishes during the last years of the colonial era could have been a black mark on his family name. But Yun’s father was promoted to a senior party position.

 

Journey Through Kitchens
 
 After Yun enlisted in the army, he trained as a culinary specialist at Okryu-gwan for four months and then was assigned to a mess hall for high-ranking army officers. There he stayed for over 10 years, absorbing the recipes of many regional dishes for the senior officers, who came from all corners of the country. “I have hundreds of recipes of North Korean dishes in my head,” Yun said.
 After his time in the army, Yun attended Hoeryong College of Light Industry, where he acquired fermentation techniques and learned how to make fermented foods like soybean paste, soy sauce and cider. Having mastered the techniques, he later delivered culinary lectures. At times he was even ordered to cook special foods at big events in Pyongyang. 

  Yun fled North Korea in 1998 during the “March of Hardship” period. He ultimately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0 via China. While trying to settle here, he did a myriad of odd jobs, including manual labor at construction sites. His break came in 2013 at a culinary event, where he described his experience at Okryu-gwan.

  His story captivated restaurateur Lee Ho-kyung of Hoya Cooks, a culinary studio in Seoul, and he helped Yun open a three-day “pop-up store.” It was an instant hit; he was convinced to open his own restaurant in 2015. 
 

 There is never a shortage of customers at Yun’s restaurant, as news of his sincerity and cooking techniques spreads through word of mouth. Many chefs also pay a visit to learn his naengmyeon recipe, and some restaurateurs have even proposed launching a franchise. The proposals are rejected immediately. Yun fears that his principle of upholding the original distinctiveness of North Korean dishes might be tainted if he accepts such offers.

 “In North Korea, people say ‘it’s as if a snapping sound is heard,’ when they find the food tasty. I want to overcome such temptation and prove to my compatriots in the North tha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no less delicious than Okryu-gwan’s, when the two Koreas are finally reunified sometime in the future,” he said.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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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기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3만 1,000여 명 가운데 70% 가량이 여성이다. 이들 탈북 여성들이 겪는 인권 침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성차별과 성폭력이다. 사단법인 ‘여성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이하 ‘여인지사’)은 이렇게 인권 침해로 고통 받는 탈북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돕고 있다. 특히 가정 폭력,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를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4대 폭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 고립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정착한 지 오래되지 않은 탈북 여성들은 특히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나 사회적 연대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한 피해자가 어렵게 용기를 내 문제 제기를 하고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안전과 비밀이 침해되거나 피해자가 도리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Korea Women’s Hot Line)에서 상담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향순(金香順) 여인지사 공동 대표의 말이다. 이 단체가 성 관련 인권 침해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탈북 여성이 남한 여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경우가 무려 10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여인지사에서 탈북 여성들의 상담을 맡고 있는 이샘 씨는 이런 현상을 “인권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와 경제적 약자인 탈북 여성들의 절박한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해석했다.

                                                                          

 

인권 침해에 대한 낮은 인식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탈북 여성들의 첫 반응은 의외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걸 드러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했던 탈북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강간죄로 감옥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간통 사실이 발각돼도 여성은 부화방탕(浮華放蕩)했다는 비난을 받고 석 달 동안 노동단련대에 보내지지만, 남성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남성들이 체제 불만을 성적인 농담으로 푸는 일이 잦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성희롱과 성폭력의 개념 차이를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또한 대체적으로 남한 정착 과정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가정 폭력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정 폭력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었고, 남한에 와서도 관련법과 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성매매에 노출되는 탈북 여성들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죠. 가해자들도 탈북 여성들의 취약점을 악용해 범행을 은폐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동포사랑』의 기자이기도 한 이샘 씨는 그 자신도 탈북 후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 생활을 하다가 2011년 서울로 온 탈북 여성이다. 이샘 상담원은 자신이 담당했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한 40대 탈북 여성은 모 기업 회장의 자택에서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12시간 동안 간병 일을 해 오고 있다고 한다. 다리가 불편하고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 기업인은 야한 농담으로 성희롱을 하거나 몸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하는 사례가 잦았다. 참다못해 항의하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그런 일이 지속됐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곳보다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탈북 여성의 성폭력 피해는 취업이나 결혼을 알선하는 과정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거나 배우자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접근해 강제 추행을 저지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또 외롭게 살아가다 온라인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기만 하고 막상 결혼에는 실패하는 사례도 다수 접수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탈북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악용해 성매매로 유인하는 업주들도 있다. 당장 생활이 곤란한 일부 탈북 여성의 경우 “한국에서 성매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매매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의 교육 탓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정착하고 나서 성매매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 여성이 전체의 3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권유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며, 취업 교육으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인권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들

 

  여인지사는 2016년부터 여성가족부 위탁 사업으로 북한 이탈 여성 상담 치유 전담 프로그램인‘찾아가는 상담’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전문 상담원이 참여하는 통합 지원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해 시작한 ‘찾아가는 상담’은 각기 다른 대상을 위한‘자조(自助) 그룹’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자녀 교육과 부부 관계 상담을 하는 주부 그룹, 직장 문화 애로 사항·후속 학업·과로 문제 등을 상담하는 직장 여성 그룹, 20~30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학공부 상담 그룹 등 3개 자조 모임이 있다. 이 가운데 ‘찾아가는 상담’ 프로그램에 곁들여지는 국내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자유로운 여행에 갈증을 느껴온 탓이다.

 여인지사는 이밖에도 『알아 두면 좋은 여성 인권 지침서』, 『탈북 여성 지원 실무자를 위한 여성 폭력 예방 교육 매뉴얼』 등의 책자도 발간해 탈북 여성들과 탈북민 지원 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이들 책자는 여성 폭력 문제의 실상과 남북한 인식 차이, 대처 방법 등을 사례를 들어 꼼꼼하게 알려 준다. 이밖에 여성 폭력 예방 교육 영상물을 제작해 전국의 하나센터 등 탈북민 지원 기관의 현장 교육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 이탈 여성의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상담원 양성 과정 프로그램을 새롭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영희(洪英姬) 공동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일·가정 양립의 문제점과 직장 내에서 겪는 여러 갈등 형태를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남북한 여성 연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런가 하면 여인지사는 탈북 여성 인권 지원 못지않게 남북 여성 연대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남북 여성 합창단 ‘여울림’을 2011년 창단했다. 여울림은 해마다 전국 합창제에 출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 이름에는 ‘여성들의 어울림’, ‘소리의 어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합창단은 격주 토요일마다 노래 연습을 하는데, 현재 전체 단원이 35명이며 연습 때는 평균 25명이 참석한다. 60대 탈북 여성 합창 단원 김명화 씨는 “음악 문화와 발성법이 달라 처음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연습하면서 맞춰 나가고 있다”면서 “연습 후 회식을 통해 남측 여성들과 더욱 가까워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합창단 지휘를 맡고 있는 최영실(崔永實) 전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는 “음악적 이질감을 가진 남북 여성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노래하는 과정은 거리감과 편견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최영애(崔永愛) 이사장은 “2012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남북여성문화제가 주변화, 대상화된 탈북 여성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극적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면서 “남한 사회에서 탈북 여성들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같은 복지적 차원을 넘어 인권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여인지사는 2010년 대표적 여성 인권 운동가인 최영애 이사장의 주도 아래 설립됐다. 그는 ‘성폭력’이란 단어가 통용되기도 전인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들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특히 여인지사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진보와 보수 인사들을 두루 아우르는 단체라는 점이 특징이다. 남한의 여성 인권 운동 단체 대표, 북한 여성 연구자, 탈북 여성들이 이 단체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 Human Rights, a New Perspective for Female Defector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a Ji-kwon Photographer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provides legal assistance to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who often suffer human rights violations as they settle down in South Korea. The civic group also educates the women about sexual offenses, a subject with little public awareness in North Korean society, and helps them build mutual understanding and solidarity with South Korean women through various activities including seminars and choir performances.

 

  According to data from the Institute for Unification Education of the Ministry of Unification, women accounted for a whopping 70 percent of some 31,000 North Korean defectors who have arrived in South Korea as of late 2017. Not a few of the women fall victim to human rights violations.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WHRD) specializes in helping them. The civic group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domestic violence, sexual assault, sexual harassment and human trafficking for the purpose of sexual exploitation, the most egregious crimes against women.

 “Victims feel frustrated because they don’t know where to turn to for help,” said Kim Hyang-soon, co-president of WHRD who used to be a counselor at the Korea Women’s HotLine. “Many female defectors, especially those who recently settled down here, have no community or social network in which they can confide. In many cases, victims fear if they take pains to raise problems or file charges, the subsequent investigations or trials will endanger their safety, jeopardize their privacy, or force them to quit their jobs.”

 WHRD’s focus on sex-related offenses against female defectors is driven by the fact that they are 10 times more likely to be victimized than South Korean women. Lee Saem, a WHRD counselor, blames the contrast on “a gap in understanding human right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 people and the desperate situation these women, an economically disadvantaged group, face here in the South.”

 

Low Awareness of Human Rights Abuses

 

 Differences in laws, systems and cultures between the two Koreas have formed dissimilar concepts of what constitutes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 Thus, the initial reaction of most women from North Korea to the #MeToo movement in South Korea and abroad is to ask, “How can one speak about such things in public?”

 The reason for such cautious attitude can be found in North Korean society, which tends to be lenient toward sexual assaults by men. After becoming acclimated to such social mores, North Korean women often react passively to acts of sexual violence. They say in unison, “I never heard of anybody jailed for rapes.” In adultery cases, women are normally sentenced to three months’ hard labor, but the male offenders are not punished. In addition, it is said that North Korean men frequently make sexual jokes and innuendos with impunity.

 Domestic violence is not recognized as a serious human rights violation in North Korea. After their arrival in South Korea, North Korean women’s prioritized needs are to survive and adapt, rendering it difficult for them to react to domestic violence. Furthermore, many lack sufficient access to information on related laws and support services.

At Risk of Sexual Exploitation

 

 “Even if they want to raise the issue of human rights violations, including sexual assaults, it remains difficult for them to do so. It’s a shame that offenders are able to cover up their crimes by taking advantage of female defectors’ vulnerability,” said Lee, who is also a reporter at Dongpo Sarang (Love of Compatriots), a magazine published by the Korea Hana Foundation. 
 

  Lee herself is a refugee who arrived in Seoul in 2011. After fleeing North Korea, she worked as a housemaid in Beijing and Shanghai for 10 years. She recounted the experience of a female defector whom she met as a counselor.

  The woman, in her 40s, worked as a caregiver at the home of a company chairman who suffered from leg pain and diabetes. She worked from 8 p.m. to 8 a.m. every day. The businessman sexually harassed her frequently by telling lewd jokes or touching her. He sometimes apologized for his actions when she protested but continued to harass her. Nonetheless, she could not afford to quit her job since her salary was high enough to save money to bring her daughter over from North Korea.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s predominantly occur when North Korean women pursue job or marriage opportunities. More often than not, men harass or rape them after approaching them under the pretext of finding them a job or a future husband. Some women meet men on dating websites, hoping to have a serious relationship. But the men they meet through those sites often assault them or renege on their marriage commitment.

 Some proprietors of illegal establishments lure female defectors into prostitution by taking advantage of their dire need for money to survive. Some of the women engage in prostitution with the mistaken belief that “it is not shameful to sell sex here in South Korea,” because they were taught back in the North that “prostitution is a common phenomenon of capitalism.”

 In a 2012 survey of 140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commissioned by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every second woman said that “they have been asked to sell sex in South Korea.” The main reason they were approached was economic hardship due to a lack of opportunities for vocational training and self-help measures.

 

 Programs to Improve Human Rights
 
 Since 2016, WHRD has operated a counseling and healing program for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t the request of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which provides comprehensive support services coordinated by counselors. The program is designed to help the women become emotionally stable. It supports three self-help cohort groups: a group for housewives providing counsel on children’s education and marriage relationships; a group for office workers providing counsel on work culture, continuing education and fatigue from overwork; and a group for young women in their 20s and 30s providing counsel on college education. An affiliated program, dubbed “Travel Korea Project,” is particularly popular as most of the women have a deep desire to travel freely.

 WHRD also publishes pamphlets and creates educational videos for distribution to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nd support agencies such as regional centers across the country. The pamphlets include “Useful Guidelines on Women’s Basic Rights” and “Manual on Education for the Preven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for Working-Level Officials Supporting Female Defectors.”

 They provide detailed information about violence against women and about differences of percep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nd how to cope with them. The educational videos explain how women can protect themselves from violence. 

  A new WHRD program aims at training counselors to help female settlers to achieve a better work-life balance. Hong Young-hee, co-president of WHRD, said, “The purpose is to systematically train experts who can give counsel on the work-life balance and conflicts at work - the issues these women experience on a daily basis.” WHRD also tries to build a framework of solidarity for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To that end, in 2011, it launched a joint choir, “Yeoullim,” which has since participated in the annual national choir festival. The name carries a double connotation - “women in harmony” and “harmony of sounds.” The choir practices every other Saturday. On average, about 25 of its 35 members attend the practice sessions.

 

New Paradigm of Solidarity

 

 “We had difficulties at first because of differences in musical culture and methods of vocalization. But we’re narrowing the differences by practicing together,” Kim Myeong-hwa, in her 60s, said. “I’m happy because we’ve got more acquainted with South Korean women at the dinner table after practicing.”

 Choi Young-sil, a former professor of theology at Sungkonghoe University who serves as conductor, said, “The process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listening to one another’s voices and singing together, despite their musical differences, is a good opportunity to increase mutual understanding by overcoming psychological distance and prejudices.”

 “A cultural festival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which has been held every year since 2012, has been a stepping-stone to help transform the marginalized North Korean women into masters of their own lives and active members of our society,” said Choi Young-ae, founder and chairwoman of the civic group. “In our society, they are merely regarded as a group of disadvantaged people in need of assistance. But from now on, we’d like to open up a new horizon from a human rights perspective rather than from the standpoint of subsistence and welfare, like helping them find jobs.”

 Choi Young-ae founded WHRD in 2010. She also established the Korea Sexual Violence Relief Center in 1991 and led the movement to improve women’s rights long before the term “sexual violence” became widely used. Remarkably, WHRD transcends ideologies and comprises progressive and conservative members and supporters. Its leading members include a representative from a South Korean women’s rights organization and a researcher in North Korean women’s affairs, as well as North Korean women.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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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마다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하다. 행인들의 대화에서도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린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다가 조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인 마을’이 자리 잡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의 풍경이다. ‘고려인’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에 살고 있는 한국계 교포들을 통틀어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들은 1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의 후예인데, 3~5세대를 거치면서 최소한 세 번 이상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경험했다.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1세대는 스탈린 시절 일본 스파이로 의심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해야 했다.


 2개월 만에 총 17만 1,781명의 한국인(3만 6,442 가구)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질병과 영양 실조 등으로 4만 명이 사망했다. 낯선 황무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또 다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4만여 명에 달하고 그중 4,0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광주 월곡동에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원룸 같은 협소한 곳에 살면서 제조업체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문학대학과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던 시인 김블라디미르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 씨는 부인과 딸, 아들, 손자 등 일가족 10여 명과 함께 2011년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했다. 광주에 고려인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김 씨처럼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온 고려인들은 대개 광주 내 산업단지와 인근 농공단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터와 가깝고 집값이 싼 원룸 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고, 월곡동은 그렇게 고려인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터전을 닦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낯선 환경과 곤궁한 경제적 여건에 처해 있지만, 끈끈한 공동체 정신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궈나가고 있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가 하면 주민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상담소, 쉼터, 마을 방송국 같은 각종 지원 공간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기차게 삶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다.

 유입 인구가 늘면서 자영업 성공 사례도 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족을 뜻하는 ‘시먀’란 이름의 카페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주식인 누룩빵과 꼬치구이를 만들어 판다. 전발레리 씨가 2015년 1호점을 낸 이래 큰딸과 아들 부부가 4호점까지 낸 이 가족 카페는 고려인 마을에 생겨난 최초의 맛집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런가 하면 허아나스타시야 씨가 2017년 10월 개업한 유럽 스타일의 카페 ‘코레아나’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성공한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음식점, 여행사, 환전소, 기념품 가게 등 30여 개 점포가 들어선 ‘고려인 마을 특화거리’까지 생겨났다.

 이곳에 고려인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마을의 산파역을 맡은 고려인 3세 신조야 씨가 한국 땅을 밟은 2001년 무렵부터다. 공장에서 일하던 신 씨가 월급이 체불되자 새날교회 이천영(李天永)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게 계기였다. 이후 신 씨는 이 목사의 도움으로 2005년 월곡동에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을 설립하고,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고려인센터를 열었다. 2007년부터 중국 동포와 고려인 동포에게 합법적 체류의 길을 열어 준 방문취업비자가 발급되자, 이로 인해 광주를 찾는 고려인의 수도 급증했다. 고려인들이 유독 이곳에 몰려드는 까닭은 간단하다.

 고국이 낯선 이들에게 쉼터는 물론 숙식과 통역 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입소문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고충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 주는 해결사 신조야 씨 덕분이다. 그래서 신 씨의 별명은 ‘고려인의 대모’다.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조야 엄마가 없으면 우린 못 살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신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고려인들의 전화번호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또 신 대표와 2008년 결혼한 남편도 이주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탈북민이어서 고려인들의 든든한 동지가 돼 주고 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한국어 교육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낮은 대접밖에 받지 못해요. 대학교를 두 곳이나 졸업해도 취직을 못합니다.” 신조야 씨의 말이다. 그녀는 고향에서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너무 힘들어 할아버지의 조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려인 3세 정스베틀라나 씨도 신 씨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다. “여기 와서 세탁기 조립 공장에 들어갔어요. 일요일에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그렇게 돈을 모아 원룸 보증금 50만 원을 만들었죠.”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어 쓰기와 자국민 우선 정책을 펴는 바람에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고려인들은 점차 사회적 약자로 밀려났다. 그런데 언어로 인한 차별 때문에 고향을 떠난 고려인들이 조국에 와서도 부딪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비자 문제 등으로 관공서를 찾아가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물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소한 일상도 한국어가 서툰 이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려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이 바로 교육이다.

 조선족 같은 중국 동포나 동남아 노동자들은 대개 혼자서 돈을 벌러 오지만, 고려인들은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들어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 문제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곳에서 고려인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한국 최초의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다. 2007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11년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무상 교육기관이자 초·중·고 통합형 대안학교로 인성교육을 중시하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 학교는 고려인 마을을 탄생하게 한 또 다른 주역인 이천영 목사가 이끌고 있다. 신조야 씨가 고려인 마을의 ‘대모’라면 이 목사는 ‘대부’인 셈이다.

 고려인 마을의 한국어 강좌는 여러 기관에서 수준별, 시간대별로 나눠 진행한다. 수강생이 늘어나 현재 성인을 위한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등 3개 반과 최근 이주한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주말 근무와 야근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동포를 위한 고려FM 방송 강좌는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한다.

 또한 2013년 문을 연 아동센터에서는 초·중·고생들을 위해 방과 후에 한국어, 영어, 수학, 러시아어 쓰기, 예능 학습을 지도하며 축구와 기타도 가르친다. 2012년 개관한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가정의 어린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아 한글 학습, 문예 활동, 운동을 지도하고 급식과 간식도 제공한다. 2017년 7월부터는 초등학교 과정의 주말 러시아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려인 자녀들은 한국어와 러시아 두 개의 언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출생지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한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어를 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미디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심축

 

 고려인 종합지원센터는 이 마을의 심장이다. 이곳은 당장 거처가 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딱한 처지의 고려인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쉼터이자 취업, 산업재해, 체불 임금, 비자 문제 등 온갖 애로사항을 상담하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며 교육장이다. 2017년 6월 문을 연 고려인역사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종합지원센터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1860년대 연해주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그 후손들이 온갖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2017년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 사업’도 자체적으로 벌였다. 광주 고려인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미디어다. 중병에 걸리거나 수술비가 부족한 경우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고려FM방송과 나눔방송 뉴스를 통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주민 역사상 첫 자체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한 고려FM방송은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한 고려인들을 위해 80%의 프로그램이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24시간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고려FM방송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청취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편 나눔방송 뉴스는 페이스북이나 이메일로 11만여 명에게 전파되면서 고려인 마을의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실어 나른다.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4세들

 

 광주 지역 고려인들은 투철한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 도우면서 관혼상제를 치르는 것은 물론 ‘깔끔이 봉사단’을 창설해 거리 청소 자원봉사와 자율방범 활동도 벌이고 있다. 또한 매달 ‘고려인 마을 방문의 날’을 정해 운영하면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2017년 11월에는 신아그리피나 바실리예프 우즈베키스탄 교육부 장관이 방문하기도 했다.

 다양한 지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그저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이곳 고려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병이 났을 때다. 체류 기간 90일을 채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더라도 매달 10만 원 가량인 보험료를 부담하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닥친 또 다른 어려움은 체류 비자 문제다. 현 재외동포법은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분류해 장기 체류를 인정하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동포 4세부터는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방문동거비자 자격이 만료되는 만 19세가 되면 한국을 떠나거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를 계속 갱신하면서 재입국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지가 한국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 적용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고려인 4세 자녀들이 광주 고려인 마을에만 4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왕래가 자유로운 재외동포비자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2018년은 고려인이 조국인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우리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조국인 이 땅에서 증명해 내겠습니다.” 신조야 씨의 당찬 다짐은 고려인들의 도저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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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블라디미르 시인의 ‘반전의 삶’
 
 김블라디미르 시인은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조금 각별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교수를 지낸 지식인이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려인 3세인 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고려FM 방송에서는 ‘행복문학’이란 문학 프로그램을 러시아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광주와 전국 단위 행사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할 때가 많다.
 “저는 펜 말고는 평생 손에 뭔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국에 와서 난생처음 육체노동을 하고 있지요. 한국 말을 잘 못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죠. 그나마 몇 해 전 소장암 수술을 받은 뒤로는 힘쓰는 일을 거의 못합니다. 과수원과 농장에서 사과, 배, 블루베리, 딸기 같은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처음 공장에서 일할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 2~3년간은 후회가 밀려와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한국에 온 게 잘한 일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199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는 꼭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그에게는 틈틈이 시를 쓰는 게 큰 즐거움이다. 한국에 와서 쓴 시를 모아 2017년 2월 첫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을 냈다. 눈 내린 광주의 풍경에 반해 시를 쓰고, 그 시의 제목을 시집에도 붙였다. 이 시집에는 한국 땅을 밟은 후 김 시인이 쓴 35편의 시가 한국어로 번역돼 러시아어와 함께 실렸다. 계명대 러시아문학과 정막래(鄭莫來) 교수가 시집 출판을 권유하는 바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러시아어로 쓴 시의 한국어 번역도 정 교수가 맡았는데, 그녀는 고려인 동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다가 김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시에는 조국과 자연에 대한 사랑, 스탈린의 강제 추방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가게 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애환 같은 것들이 진솔한 표현으로 오롯이 담겨 있다. 그가 쓴 많은 시 가운데 유난히 폐부를 찌르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이여! 우리 조국이여 이해해 주소서 / 우리가 멀리서 살았던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님을’(「힘들게 기다려 온 80년 세월」)
 그는 2017년 여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주관한 ‘회상열차-극동 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에 고려인 마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와 알마티까지 13박 14일 일정으로 고려인 선조들이 겪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회상열차 체험은 그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었다. 앞으로 펴낼 두 번째 시집에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시가 많이 담길 것이라고 한다.
 시인인 그는 언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언어가 모국어여야 하지만, 한국어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여기서 몇 년 살면서 조금은 늘었지만,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30여 년 동안 타슈켄트 외국어대학과 타슈켄트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던 김 시인은 55세 정년 퇴직 규정에 따라 이른 나이에 강단을 떠나야 했다. 퇴직 후 한국행을 결심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2011년 3월이었다. 곧이어 아내와 자녀들도 한국으로 왔다. 이제 손주들까지 포함하면 고려인 마을에서 1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이곳이 내 조국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의 시에도 그런 심경이 듬뿍 묻어난다.
 “내 벗들이여, 역사적인 조국의 땅에서 / (……) 나는 외국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 나는 고려인,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정신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추석」)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봄 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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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Seeking Hope in Grandparents’ Homeland

 

 Many signs of the backstreet stores are written in the Cyrillic alphabet and passers-by are more likely speaking Russian than Korean. That is typical here in the Wolgok-dong neighborhood of Gwangju’s Gwangsan District, where a community of Goryeo-in, or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has developed. Goryeo-in, or Goryeo-saram as they call themselves, means “Goryeo peopl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in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The word Goryeo comes from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ryeo, which ruled the Korean peninsula from 918 to 1392. 

 Ethnic Koreans living in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are commonly called “Goryeo-in.” They ar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over 100 years ago. Their grandparents and parents experienced at least three diaspora over three to five generations. The first major waves of Koreans migrated to Primorsky Krai, or Maritime Province, in the Russian Far Ea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1937, however, the Stalin government deemed immigrants and ethnic groups inherently disloyal to the Soviet state and deported them to barren areas of Central Asia. Included among these groups were ethnic Koreans, who at the time were subjects of the Empire of Japan, which was hostile to the Soviet Union. In just over two months, a total of 171,781 ethnic Koreans (36,442 families) were forcibly relocated to Kazakhstan and Uzbekistan. Upon arrival, they were faced with harsh living conditions which led to tens of thousands of deaths from disease and malnutrition.

 

Building Their Own Village

 

 After the Soviet Union dissolved in 1991, their descendants continued to suffer discrimination in the now independent Central Asian countries, which prompted many of them to move to the land of their ancestors. As many as 40,000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currently live in Korea, and about one-tenth of them reside in Gwangju’s Wolgok-dong neighborhood. Most of them found work in an industrial complex in the city or a nearby agro-industrial park, so they naturally looked for cheap studio apartments near their workplaces. Hence, part of Wolgok-dong has turned into their enclave.
 Despite their unfamiliar environment and difficult economic conditions, the Goryeo-in are creating their new nest with a strong community spirit. They are rebuilding their lives strenuously, after independently establishing support facilities, including a cooperative association, community shelter, local radio stations and centers for daycare as well as for children and community activities.

 Amid the growing influx, an increasing number of the new settlers have become successful small business owners. A cafe named “Cемья,” Russian for “family,” sells leavened flatbread and grilled meat on skewers, both staple foods of Central Asia. It is considered the first gourmet destination in this community. Jun Valery started it in 2015 and the cafй now has four branches, including those managed by his eldest daughter and son and their spouses. “Koreana,” a European-style cafй opened by Huh Anastasia in October 2017, is also gaining popularity. These types of success stories have multiplied, giving rise to a business district of their own clustered with restaurants, travel agencies, currency vendors and souvenir shops, among other stores.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began to settle in Korea around 2001 when Shin Joya arrived.

 A third-generation Goryeo-in, Shin asked Lee Chun-young, the pastor of the Saenal (“New Day”) Church in Gwangju, for help when she could not receive her back pay from a factory where she had worked. In 2005, Shin founded Goryeo-in Village with Reverend Lee’s help and opened a community center in an old shopping mall. After 2007, when the government began issuing visitor work visas for ethnic Koreans from China and Central Asia, the number of Goryeo-in arriving in Gwangju rose sharply. 

 The reason they are rushing to Gwangju is simple. News spread far and wide by word of mouth throughout Central Asia that the community center helps new arrivals find room and board and provides translation services. This was made possible thanks to Shin’s attitude to help newcomers resolve their problems as if they were her own relatives and friends. The transplants from Central Asia often say, “We could hardly survive were it not for Joya.” Shin has more than 2,000 phone numbers of her fellow resettlers stored in her cellphone. Her husband, a defector from North Korea whom she married in 2008, is also a strong supporter of the community. “No matter how highly educated they are, ethnic Koreans are treated with low regard in Uzbekistan.


 In most cases, they can’t find jobs even if they have more than two college degrees,” Shin said. She decided to leave for her grandparents’ land, because it was too hard to scrape out a living.
 Jung Svetlana, another third-generation descendant, migrated here for the same reason. “After I arrived, I began working at a washing machine assembly line,” she said. “As a side job, I washed dishes at a restaurant on Sundays. That way, I saved 500,000 won to pay the deposit for a one-bedroom studio apartment.”

Education of Future Generations

 

 Ethnic Koreans, who could speak only Russian, were gradually reduced to an underprivileged class, as Central Asian nations, which gained independence after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passed new language laws and constitutions that favored the dominant national or ethnic groups. Ironically, here in Korea, it is once again their language ability that remains the biggest barrier facing the very people who left their hometowns because of language discrimination. From filling in visa application forms to sending children to school or simply going shopping, routine tasks can present stumbling blocks if they have inadequate Korean language skills. 

 The linguistic difficulties make the residents of this village consider it their most important task to educate future generations. Most ethnic Koreans from China or migrant workers from Southeast Asia come here alone and mainly focus on earning money. But most Goryeo-in arrive as three-generation families and thus pay keen attention to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The institution responsible for educating children in this community is Saenal School, the country’s first multicultural alternative school. It opened in 2007 and was accredited by the Education Ministry in 2011. This tuition-free school is well-known, even among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because it provides both 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 attaching importance to all-round personality development. The school is run by Reverend Lee, who was instrumental in developing the community alongside Shin Joya. In a sense, Shin and Lee are the “godmother” and “godfather” of the village.
 Several village institutions offer Korean language classes at different levels and different hours. With enrollment rising, there are currently three levels of classes for adults - beginner, intermediate and advanced - and special classes for children who have recently arrived. Language programs on Goryeo FM Radio are highly popular with those who miss classes because of their work schedule.

 The community’s children center that opened in 2013 teaches primary and secondary students Korean, English, Russian, math and art, as well as playing soccer and guitar, after school. The daycare center that opened in 2012 helps young children from dual-income families with Korean reading and writing and physical education from morning till evening, providing them with meals and snacks. Since July 2017, the village also has been offering Russian classes for primary schoolchildren on weekends, because most parents here want their children to learn both Korean and Russian.

 Goryeo-in Village celebrates the third Sunday in October as “Day of Goryeo-in.” Children of the village pose after performing a traditional Korean fan dance on the fifth annual “Day of Goryeo-in” in 2017.

 

Community Networks and Media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s the heart of the village. It serves as a temporary shelter for those who have no other place to stay and have to find a job, and as a counseling center that helps resolve all kinds of problems, including finding a job, dealing with work-related accidents, retrieving back pay and assisting with visa problems. 

  Another important facility is the community history museum that opened in June 2017, adjacent to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nside the small museum, visitors can learn about the figh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support for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by Koreans who had settled down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starting from the 1860s. The museum also recalls the ubiquity of the discrimination and unfair treatments that their descendants endured. In 2017, the village organized an event to commemorate the 80th anniversary of ethnic Koreans’ deportation to Central Asia. 

 The community’s media form one of the pillars of the village. Its residents operate a help network through the local radio stations, Goryeo FM and Nanum (“Sharing”). They offer support to anyone facing difficulties, such as suffering from a serious illness or having trouble paying medical expenses. Goryeo FM is the first-ever radio station run by ethnic Koreans who have found a new home in the country of their ancestors. Eighty percent of its programs are in Russian for the convenience of community members who are more comfortable listening to Russian than Korean. This 24/7 radio station is so popular that even their relatives and friends in Central Asia listen to its programs with a smartphone app. Meanwhile, Nanum Radio supplies detailed news about the village to some 110,000 listeners every day via Facebook and email.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The community spirit of the Goryeo-in in the Gwangju area is strong. Residents help each other organize weddings and funerals and gather volunteers who clean the streets and help prevent crimes. They also established a monthly “Visit Goryeo-in Village Day” to attract attention from the general public, and in November 2017, the village welcomed Uzbekistan’s Minister of Preschool Education Agrippina Shin. 

 There are a variety of support programs underway for the village residents. Nevertheless, life here is not always easy. Residents feel particularly helpless when they fall ill. Even if they become eligible for health insurance coverage after staying 90 days, it is still a considerable burden for most of them to pay 100,000 won for their health insurance every month. 

 Another chronic difficulty is obtaining visas. The current law regards only first- through third-generation Goryeo-in as “overseas ethnic Koreans” and grants them long-term stay permits, but classifies fourth and younger generations as “foreigners.” Accordingly, the latter must leave Korea when they turn 19, even if they were born in Korea, or have to leave and re-enter the country repeatedly to renew their three-month visitor visas. There are currently some 400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in the village who are inconvenienced by these visa constraints. 

 This year marks the 30th anniversary of the first arrival of Goryeo-in. “We’ll prove here in our homeland that we’re proud descendants of the Korean nation by upholding the wishes of our ancestors who dedicated themselves to seeing their country’s sovereignty restored,” said Shin J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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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wist in Life’

 

The Story of Kim Vladimir

 

 Kim Vladimir, a poet and third-generation ethnic Korean from Uzbekistan, stands out among residents of Goryeo-in Village. It is not because he was once a university professor who is now working as a day laborer, but because he is such a spirited supporter of other resettlers in the village. He is the Russian-language host of “Happy Literature” on local radio station Goryeo FM. He often attends national or municipal events as the community’s representative.

 “I’d held nothing in my hand besides pens,” he said. “But manual labor is the only thing I can do here because I’m not good at Korean. However, since I underwent small intestine cancer surgery a few years ago, there’s hardly anything I can do that requires physical strength. I now grow and harvest apples, pears, blueberries and strawberries at orchards and farms.”

 Kim struggled to adjust to working in a factory for the first time. During his initial three years in Korea, he regretted relocating and seriously considered returning to Uzbekistan. But on the other hand, it was good for him to have come to Korea out of respect for his father’s last wishes. “My father told me about Korea right before he died in 1990. He told me to ‘go back to our homeland under any circumstances,” he recalled. 

 During his spare time, Kim revels in writing poems. In February 2017, “First Snow in Gwangju,” his first collection of poems written in Korea, was published. The title borrows from one of the 35 poems in the collection, which Kim wrote in Russian. Jeong Mak-lae, a former professor of Russian literature at Keimyung University in Daegu, encouraged Kim to have the poems published. They became acquainted when Jeong was preparing a thesis on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She translated the poems and in the book the collection appears in both Russian and Korean. 

  Kim’s poems vividly convey his love for his ancestors’ homeland and its nature as well as the joys and sorrows of the lives of his grandfather and parents. A verse in one of his many poems stands out and stings us to the quick.


“Republic of Korea! O our homeland, please understand / that we lived far away, not because of our fault.” (from “80 Excruciating Years of Wait”)

 In the summer of 2017, Kim represented his community in “A Nostalgia Train Ride: Trans-Siberian Silk Road Odyssey,” a 14-day trip jointly sponsored by the Commemorative Committee for the 80th Anniversary of Stalin’s Deportation of Koreans to Central Asia and the Korean Global Foundation. The journey on the Trans-Siberian Railway went from Vladivostok in Russia to Ushtobe and Almaty in Kazakhstan, retracing the arduous steps of the displaced Korean ancestors. Kim plans to devote his second collection of poems to their forcible relocation.

 Kim taught Russian literature at the Tashkent State University of Foreign Languages and the Tashkent Medical College in Uzbekistan for about 30 years. But he had to retire at an early age of 55 in accordance with retirement regulations. He then decided to relocate to Korea and boarded a plane bound for his ancestral homeland in March 2011. His wife and children followed soon after. But he still longs for the day when he can say proudly, “This is my homeland.” One of his poems clearly reveals his feelings. 

 “My friends, in my historic homeland / (…) I don’t want to hear such a pejorative term as foreigner / because I’m a Goryeo-in, I’m a Korean / spiritually, conscientiously, and genealogically.” (from “Chuseok” [Korean Thanksgiving Day])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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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한과 북미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과 대표단은 해마다 두 차례씩 어김없이 북한에 다녀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에 이어 11월에도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의료진을 포함한 외국인 대표단들과 함께 방북했다. 심각한 상태인 북한 주민들의 결핵 치료가 어떤 정치적, 외교적 현안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적 지원은 남북 관계가 좋든 나쁘든 초정치적, 탈이념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인이어서 ‘인세반’이란 한국 이름을 쓰는 린튼 회장은 올해로 20년째 북한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보건성(保健省)이 “보건 문제 1위도 결핵, 2위도 결핵, 3위도 결핵”이라고 말했을 만큼 북한에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한 뒤 대북 식량 지원 활동을 벌이던 린튼 회장이 결핵 퇴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튼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요청을 받은 후부터다. 1997년 북한 보건성 최창식(Choe Chang-sik 崔昌植) 부부장이 “식량 대신 결핵 치료 지원을 해 달라”고 린튼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이 먼저 결핵 치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8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 린튼 회장은 결핵 퇴치 작업만을 위해 50차례 이상 방북했으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비롯해 20년간 대북 의료 지원에 사용한 금액은 약 5,100만 달러(578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동 X선 검진 차량, X선 진단 기계, 현미경, 수술실 패키지 같은 것들이 망라됐다. 그런 적극적 의료 지원 사업으로 1997부터 2007년까지 25만 명 이상의 일반 결핵 환자가 치료됐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결핵 환자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겨울철 날씨가 남쪽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고, 가족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결핵 노출과 전염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뿐만 아니라 갓 출산한 젊은 여성들이 결핵에 걸리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핵에 잘 걸리고, 그러면 아기를 돌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죠.”

 

 더욱이 일반 의약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점점 많이 생겨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결핵약에 내성이 생겨 재발한 환자를 뜻한다. 북한은 해마다 새로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4,000~5,000명 규모로 발생한다. 다제내성 결핵균은 여러 종류의 치료 약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 결핵 환자는 6∼8개월간 일반적 결핵약을 먹으면 완치율이 90%에 달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일반 결핵약보다 많게는 100배 이상 비싼 약을, 그것도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장기 복용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완치율도 낮은 편이다. “일반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데 약 20달러가 소요되는 반면, 다제내성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가 5,000달러 정도 듭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고가의 약을 장기간 투약해야 되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 치명적이란 데 있다. 다제내성 결핵이 흔히 ‘슈퍼결핵’으로 일컬어지는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으로 이어지면 치료가 더욱 어렵고 사망률도 높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면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 환자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은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 이어져야 한다. 한번 이런 환자로 등록되면 약 2년간 책임을 지고 치료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해 왔다. 그러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다제내성 결핵 치료 프로그램 하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북한 결핵 환자와 의료진들이 다제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2008년 북한에서 다제내성 결핵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환자들 19명의 가래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뒤 양성 반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제내성 결핵 약제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1,500명 이상의 환자가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이제 현장에서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즉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마다 린튼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보통 3주간 북한에 머물며 결핵 퇴치 활동을 하지만 “충분한 활동을 위해선 기간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니지요.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달합니다.”
                                                                       

 

 이런 살뜰한 관리 덕분에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고 린튼 회장은 설명했다. 세계 평균 완치율이 45%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그래서 북한 주민 사이에선 “다제내성 결핵에 걸려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의약품 및 의료 장비 지원과는 별개로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결핵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교육이다. 유진벨재단의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감염된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 치료를 돕다 보니 린튼 회장 스스로도 결핵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린튼 회장 자신도 어린 시절 결핵을 두 번 앓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핵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듣다 보니 린튼 가문은 결핵과 인연이 매우 깊다. 린튼 회장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Lois Linton)은 1960년 전남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난 뒤 결핵이 만연하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해 30여 년간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린튼 모자가 남북한에서 결핵 치료 활동을 전개한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만든 셈이다.

 린튼 회장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에 대한 사용 결과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분배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진벨재단은 한국 내 후원자와 재미 교포, 한국과 미국 정부 등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후원자의 85%가 한국인이고,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유진벨재단은 모든 지원 대상 의료 기관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반드시 후원자 이름을 밝힌다.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 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은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평양, 서울, 워싱턴에서 동시에 필요한 모든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는 항상 대북 지원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많은 후원자가 있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남북한 간의 긴장감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

 지난해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방북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약품 반출 승인과 일정 혼란으로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계획한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린튼 회장은 전했다.

 한 번 방북할 때마다 가져가는 치료약은 6개월 분량이다. 그런데 다음 방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린튼 회장은 한국 정부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에 대한 면허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주길 희망한다. 건수별로 물자 반출을 승인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북하는 검증된 민간 단체는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승인 없이 물품 반출 승인이나 방북 일정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 사랑

 

  린튼 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그 뒤 1992~1994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대북 지원 활동에 나섰다.

 유진 벨은 구한말인 1895년 한국 땅을 밟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시작한 미국 선교사였다. 린튼 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 Linton)과 결혼한 뒤 역시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와 함께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3·1운동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린튼 회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50년에 태어났지만, 선교사인 아버지 휴 린튼(Hugh Linton)을 따라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남북한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컬럼비아대 교수 겸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그는 학자에서 대북 지원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개인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습니다. 관건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했을 때야말로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존 린튼(John Linton)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초창기에 형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도왔다. 린튼 회장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유진 벨 목사 이후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교수라면 은퇴할 나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 활동을 지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후원자들과 북한 의료진의 희생 정신이 없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Eugene Bell Foundation’s Love of Neighbors across the DMZ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Inter-Korean relations interspersed with tension and confrontation have moved to another precarious level in the wake of North Korea’s recent nuclear weapons and missile test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a civic group has consistently delivered humanitarian aid to the North. It is the Eugene Bell Foundation, established in 1995 by Stephen Linton, a great-grandson of American missionary Eugene Bell, to mark the centennial of his arrival in Korea.

 

  Stephen Linton and his team visit North Korea twice each year no matter how tense the inter-Korean relations or Pyongyang-Washington ties are. This year is no exception. They visited the North in May and November, along with foreign donors and medical staff, carrying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is is because treating the severe forms of tuberculosis (TB) that many North Koreans are suffering from is more urgent than any political or diplomatic issue. Regardless of whether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re good or bad, the foundation never wavers in its belief that humanitarian aid should be “apolitical and non-ideological.”

 Linton, a Korean at heart who likes using his Korean name “In Se-ban,” has taken the lead in the efforts to beat TB in the North for 20 years. After launching the Eugene Bell Foundation in 1995, Linton first delivered food aid to the North, but then turned his attention to fighting TB there after receiving an official request by the Pyongyang authorities. In 1997, North Korea’s then vice minister of public health, Choe Chang-sik, sent a letter to Linton, asking for “assistance for TB treatment instead of food aid,” although the country was experiencing severe food shortages at the time.

  Linton has visited the North more than 80 times, and over 50 times for TB treatment alone. His foundation has so far delivered some US$51 million (roughly 57.8 billion won) worth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o the North. The medical equipment included mobile X-ray vans, diagnostic X-ray machines, microscopes and surgical instruments. More than 250,000 patients were treated from 1997 to 2007, thanks to the foundation’s active medical support.

 

Treating MDR-TB Patients

 

  The situation is still not good despite the consistent efforts by Linton and the Eugene Bell Foundation, because Korean winters are cold, particularly in the North, and it is easy for its residents to contract TB as North Korean families often live together in small spaces. Young women who have just given birth and elderly people are especially prone to the disease.
 “Women’s immune system weakens after childbirth and so they get susceptible to TB, and it becomes more difficult for them to take care of their babies,” Linton says.

  Moreover, the situation is increasingly worsening due to the growing number of patients with multidrug-resistant tuberculosis (MDR-TB) that cannot be cured with ordinary medication because its germs are resistant to various types of drugs. Some 4,000 to 5,000 fresh cases of MDR-TB occur in the North each year.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ordinary forms of TB reaches 90 percent, if patients take medicines regularly for six to eight months. Medicines for MDR-TB are up to 100 times more expensive than drugs for ordinary TB, and the patients have to take such expensive medicines for a year and a half to two years. Besides, the treatment success rate is lower.


“It needs some 5,000 dollars, including medicine expenses, to treat an MDR-TB patient, while a mere 20 dollars is needed to treat an ordinary TB patient,” Linton says.

  What is more embarrassing is that any lapse in the timing of taking the medication can be critical for MDR-TB patients. It will grow even more difficult to treat the patients and their fatality rate will rise if MDR-TB develops into the so-called “super extensively drug-resistant TB.” MDR-TB patients can develop this more dangerous type of TB in a short period of time if their treatment stops. Therefore, aid materials for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should be delivered at least once every six months.
 

 For this reason, the Eugene Bell Foundation has focused on treating MDR-TB patients in the North since 2007. In this process, it has run one of the world’s largest MDR-TB treatment programs and given hundreds of North Korean doctors and TB patients a chance to learn how to treat the illness.

 “In 2008, we began collecting phlegm samples of 19 patients with a potential risk of MDR-TB in North Korea. Six months later, we went back to the North to treat those who had tested positive, carrying the necessary medicines,” Linton says. “This program has developed to the extent that it’s possible to treat more than 1,500 patients at any time. We now can immediately conduct tests and begin treatment on the spot.”

 A team of about 10 people, including Linton, stays in the North for about three weeks on every visit. But Linton says three weeks is not long enough to carry out substantial activities. “We visit all of the 12 sanatoriums during those 21 days. We test and accept new patients to the facilities. And we check to see if patients show improvement and give them medicines.”

 Thanks to careful management, Linton says,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MDR-TB patients has increased to 76 percent. It is a remarkable achievement, compared with the world’s average treatment success rate of the disease still hovering at 45 percent. These days, there is a saying among North Koreans that “there is hope even for MDR-TB patients if they just go to a Eugene Bell sanatorium.”

  Aside from the delivery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e greatest achievement Linton and his foundation have accomplished in the North is the education of TB patients and medical personnel. Through the foundation’s TB treatment program, thousands of North Korean residents have learned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when they are infected with TB bacteria. Linton himself seems to have become a TB expert in the course of helping treat North Korean patients.

 

‘We’re Mere Errand Runners’

 

 Linton fell ill with TB twice himself when he was a child, so he knows well how much pain the patients experience. Come to think of it, the Linton family had something to do with TB treatment all along. Stephen Linton’s mother, Lois Linton, founded the Soonchun Christian Tuberculosis Rehabilitation Center in 1960 when the Suncheon area in South Jeolla Province was hit by a flood and TB was running rampant. She fought the disease there for about 30 years.

  Linton meticulously checks to see how the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delivered to the North are used and spares no effort to enhance transparency in the distribution of aid supplies.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run with donations from South Korean and American donors as well as assistance from the South Korean and U.S. governments. Currently, 85 percent of donors are South Koreans, and North Korean beneficiaries are reportedly well aware that most donations come from them.
 

 The foundation makes it a rule to identify donors on all items it delivers on every visit to all target hospitals and facilities. There is no indication of the “Eugene Bell Foundation” but instead, the donors’ names are emblazoned on every medicine box the foundation delivers. Linton warns against the foundation and himself being made heroes. He keeps saying that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an “errand agency” and he is “nothing but an errand runner.”
 

 “We’re just playing the role of a delivery man or a donkey,” he says. “We’re only delivering and managing medicines and equipment. It is the Korean people who donate money for medical activities, give medical services, and benefit from these activities. My foundation and I have come forward, just because of the situation where it’s not easy for South Koreans to deliver their love to their compatriots across the border.”

 Then he adds,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But we aren’t worried because there are many donors who care about what we are doing. And it’s hard to remember when there wasn’t any tension.”

  In 2016, his travel schedule was interrupted once after a nuclear test by the North, causing a setback in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due to the suspension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approval. But Linton says that in 2017 everything has proceeded smoothly according to schedule.
 

 He delivers just six months’ worth of medication each time.
 Therefore, an interruption in his travel schedule means that MDR-TB patients in the North fail to receive timely treatment. This is why Linton hope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ill introduce a license system for aid groups and simplify the approval process for all aid groups regularly visiting the North.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Love of Korea over Generations

 

Linton first visited North Korea in 1979 when the World Table Tennis Championships were held in Pyongyang. From 1992 to 1994, he met then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three times as an interpreter and advisor for American pastor Billy Graham. In 1995, while a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Linton established the Eugene Bell Foundation to commemorate the centennial of the start of Eugene Bell’s missionary activities in Korea and immediately began delivering food aid for North Korean residents.

 Eugene Bell, his great-grandfather on his mother’s side, arrived in Korea in 1895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He began missionary activities and volunteer work in the Jeolla area. William Linton, his grandfather, also did missionary work in Jeolla after marrying Charlotte Bell, a daughter of Eugene Bell. In 1919,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illiam Linton, who was principal of the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suppor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Gunsan, North Jeolla Province, and informed Americans of it. He eventually saw his school closed and was deported from Korea for having refused to pay respects at a Shinto shrine. After Korea was liberated, he returned and founded a college that has since grown into Hannam University in Daejeon.

  Born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in the U.S. in 1950, Stephen Linton came to Korea with his missionary father, Hugh Linton, and grew up in Suncheon. He obtained a bachelor’s degree in philosophy from Yonsei University and a Ph.D. for a comparative study of North and South Korea from Columbia University. Later, he served as a professor and deputy director of the East Asian Institute’s Center for Korean Research at Columbia University.

 Asked why he turned from a scholar into a civic activist, Linton says, “As a Christian, I don’t believe that individual persons can change the world. I believe that the key is to put the love of neighbors into practice.”

 He keenly felt the need for the “love of neighbors” in 1995 when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made a formal request for assistanc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its food shortage came to a head. At the initial stage, his younger brother, John Linton, who is currently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 at Yonsei University’s Severance Hospital, helped give medical assistance to the North.

  Regarding his family’s love of Korea over four generations, Linton simply notes, “We’ve done what we should have done as believers of God.”

  But he seems firmly resolved when he says, “I would have retired by now if I had been a university professor. But I will continue to help treat TB patients in North Korea as long as I see the necessity.” Then he goes on to express his gratitude to all donors, as well as the medical staff in the North, saying, “Without their admirable spirit of sacrifice, this job would have been impossible.”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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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탈북민이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느라고 여념이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려운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선입견일 뿐이다.


 그런 편견의 틀을 깨는 단체가 있다. 남한 청년 6명을 포함해 50여 명의 탈북민 대학생들이 활동하는 ‘유니시드(Uniseed) 통일봉사단’이 그곳이다. 유니시드는 ‘통일의 씨앗’이란 뜻을 가진 이름으로, 이 봉사단은 매달 한 번씩 직접 만든 도시락을 서울역 노숙인들에게 나눠 준다.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힘든 과정을 겪는 자신들보다 노숙인들의 처지가 더 딱하다고 판단해서다.


 그들의 활동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북한 음식 문화 교류, 아동 복지시설 선물 전달, 그리고 쪽방촌에 김치와 연탄을 배달하는 활동도 연중행사로 벌인다. 또한 이들은 중국 등지에서 숨어 지내는 탈북민에게 거의 매달 생필품과 의류를 모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모여 나눔으로 소통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자”는 슬로건을 실천하고 있다.

                                                                        

 ‘미리 온 통일’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역 부근 만리현 감리교회 주방에 유니시드 통일봉사단 청년 10여 명이 어김없이 모여든다. 이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밥을 짓고 국을 끓인다. 또 돼지 불고기, 멸치 볶음, 오징어 오이 무침, 김치 같은 반찬도 능숙하게 만든다. 국과 반찬은 철따라 종류가 조금씩 달라진다. 겨울에는 따끈한 어묵국이나 된장국, 봄에는 싱싱한 봄나물, 여름엔 시원한 오이냉국처럼 계절을 감안해 메뉴를 구성한다.
                                                                       

 봉사단 청년들은 이렇게 정성껏 만든 도시락을 오후 5시 서울역 광장으로 가져가 노숙인 200여 명에게 이른 저녁 삼아 나눠 준다. 200인분의 도시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 60만 원은 봉사단원들이 형편껏 갹출하거나 팬시 용품을 제작해 팔아서 보탠다. 때로는 각종 공모전에 참가하여 받은 상금으로 경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조리하는 과정이나 비용 마련 모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식사를 마친 노숙인들이 전하는 감사 인사가 그간의 노고를 잊게 한다.

 유니시드 통일봉사단을 창단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4학년 엄에스더(嚴Esther) 대표가 도시락 나눔 봉사에 나선 것은 2014년 7월부터다. 자신이 받은 장학금 250만 원을 종잣돈 삼아, 뜻을 같이 한 탈북민 대학생 친구 네 명과 함께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뒤따랐다. 남북이 하나가 되게 하자는 생각으로 북한 음식인 두부밥 700개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는데, 예상과 달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낯선 음식이 노숙인들의 입에 잘 맞지 않은 탓이었다. 그 일로 봉사단원들은 “도움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노숙인들에게는 어떤 별미보다 따뜻한 밥과 익숙한 된장국이 최상의 메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이후 반찬도 일반 가정집 식단으로 짜게 되었다.

 

 순수한 열정을 인정받다
 
 도시락 봉사 활동을 하면서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다. “물은 왜 갖다 주지 않느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빨갱이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겠다”고 말해 가슴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눔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봉사단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일화도 생겨났다. 2014년 가을쯤이었다. 도시락 나눔 봉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노숙인 한 분이 엄 대표에게 다가와 봉지 하나를 건넸다. 봉지 안에는 찹쌀떡 세 개와 귤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엄 대표는 ‘누군가에게 받아 나중에 드시려고 챙겨둔 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2015년 여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뜨거운 음식을 해 나르느라 진땀을 흘리는 봉사단원에게 노숙인 한 분이 종이 박스를 뜯어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봉사단원들과 노숙인들 사이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진심이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시락을 나눠 주느라 분주한 봉사단원에게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 주는 분, 배식이 끝난 뒤 쓰레기를 함께 치워 주는 분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간혹 도시락을 받아 갔다가 탈북 청년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음식이란 얘기를 듣고서는 “도무지 마음이 아파 먹을 수 없다”면서 돌려주러 오는 분들도 생길 정도가 되었다.

 창단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노숙인들이 먼저 봉사단을 반긴다. 엄 대표는 한 노숙인으로부터 “다른 단체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유니시드 청년들에게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가도 그런 말이 생각나면 주저앉을 수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탈북민 봉사단원인 조은희 씨는 “처음엔 노숙인들이 무서워 선뜻 다가갈 용기를 못 냈는데 이제는 먼저 안부도 묻게 되었고, 봉사하는 날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유니시드 통일봉사단이 하필 노숙인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은 그들이 장애인이나 고령의 노인들 못지않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봉사단원 김미정 씨는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노숙인 돕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며, “아마도 일부 노숙인들이 잦은 음주나 거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도움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들과 함께 도시락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30대 후반의 한 남한 청년은 “탈북 친구들이 노숙인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전했다.

                                                                        

탈북민의 자존감을 높이다

 

 엄 대표는 두 번의 탈북 끝에야 겨우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004년 3월 탈북에 성공했지만, 그해 10월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되었다. 하지만 2006년 중국으로 재탈북해 2008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옌지(延吉)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의 눈앞에서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가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홀로 남아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었던 당시, 엄 대표는 삶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거리에서 사지가 없는 노인이 입에 붓을 물고 글씨를 써서 생계를 잇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슴이 뭉클해져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낸 그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생겼고, 그 길로 무작정 장애인 시설에 찾아갔다. 하지만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신분증부터 보여 달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때 “숨어 사는 사람은 좋은 일도 못 하는구나” 싶어 무척 서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엄 대표는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지인에게 소개받은 장애인 사회복지 법인 ‘엔젤스헤이븐(Angel’s Haven)’을 찾아갔다. 그것이 봉사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장애인들을 씻기고 시설 곳곳을 쓸고 닦았다. 학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토요일 봉사는 빼먹는 법이 없었다. 힘에 부쳐 코피가 터질 때도 있었지만, 봉사 활동은 남한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봉사를 통해서 나도 어딘가에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존감도 부쩍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 활동에 엄 대표가 더욱 빠져들게 된 것은 이후 개인적 아픔이 더해지면서부터다. 북한에 있던 남동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1000만 원이나 들여 어렵게 탈북시킨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는 등 불운이 한꺼번에 찾아오자 엄 대표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가족보다 먼저 떠오른 것이 자신을 응원하고 걱정해 주던 동료 봉사자들의 얼굴이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엄 대표는 “봉사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극단적 선택을 막는 해법임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탈북자의 자살률이 남한 사람의 세 배에 이른다고 하니,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개인적 상처로 아파하던 엄 대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민이 자존감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2014년 자원봉사단을 창단했다. 지인들을 설득해 조리를 위한 장소를 비롯해 도시락, 젓가락 등 물품을 후원받았던 엄 대표는 좀 더 안정적인 봉사단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 음식을 개발·판매하는 사회적 기업 ‘오순도순’을 창업했다.

 이 기업은 2015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Korea Social Enterprise Promotion Agency)이 주최한 전국소셜벤처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탈북민 경제 자립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부터는 서울 성동구 심(SEAM; Social Entrepreneurship and Mission) 센터에서 푸드트럭 영업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심센터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을 키우는 곳으로, 엄 대표는 이곳에서 진행하는 푸드트럭 운영을 기반 삼아 ‘유니시드 컴퍼니’를 차려 봉사 활동의 폭을 넓힐 계획이다.

 엄 대표의 꿈은 대학교마다 유니시드 컴퍼니의 지부가 생겨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통일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탈북민의 남한 정착이 ‘남한 사람화’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시대의 가교’가 되게끔 하려고 한다. 그것이 진정한 탈북민의 정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탈북민 자원봉사단들의 다양한 활동

 

 자발적 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탈북민 자원봉사단은 비단 유니시드 통일봉사단 하나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선정한 10여 개의 봉사 단체로 구성된 ‘착한(着韓)봉사단’이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2015년 11월에 구성돼 1년에 두세 차례 합동 봉사 활동을 펼치는 착한봉사단은 탈북민 회원이 50% 이상인 봉사 단체를 선정 기준으로 삼는다.

 남북하나재단(Korea Hana Foundation) 관계자는 “착한봉사단은 탈북민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수혜자가 아닌 기여자라는 인식을 제고하고, 대한민국에서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정착 의지를 높임과 동시에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착한봉사단은 2017년 4월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Sudokwon Landfill Site Management Corporation) 안에 조성된 숲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통일 나무’를 심는 행사에 참여했다. 기아자동차 가족 봉사단과 함께 진행한 이 행사는 남북한 주민들이 직접 통일을 염원하는 나무를 심고 이후 이 나무를 북한에 보내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이날 착한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통일 나무 심기에 참가한 탈북민 자원봉사단은 광명하나향우회, 하나봉사회, 새터민햇빛사랑회 등이다.

 대한적십자사 산하의 하나봉사회 곽수진 대표는 “봉사라는 단어를 남한에 와서 처음 들어 봤다”면서 “우리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고 탈북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함경북도 무산이 고향인 안영애 씨는 “북한의 산들은 대개 민둥산인데 통일이 되는 날 고향 땅에다 옮겨 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착한봉사단 합동 봉사 활동은 2016년 5월 14일 첫발을 내디뎠다. 경기도 연천군 나룻배 마을이 첫 무대였다. 나룻배 마을은 휴전선과 연접한 최북단 마을 가운데 하나다. ‘평화생태마을’로 지정된 이곳에 위치한 하천은 2009년 북한이 황강댐을 방류하는 바람에 6명의 사망자를 냈다.

 봉사 활동은 마을 어른들에게 북한 음식 대접하기, 통일을 염원하는 벽화 그리기, 마을 가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착한봉사단이 준비한 북한 음식은 두릅냉면, 북한식 만두, 두부밥, 인조고기 등 현재 북한에서 인기 있는 먹거리였다.

 이밖에도 착한봉사단은 2016년 5월 국립현충원의 무명용사 묘를 찾아 벌초를 비롯한 환경미화 봉사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11월에는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 있는 독거 노인들을 방문해 직접 담근 김치를 전달하기도 했다. 착한봉사단 이외에도 2015년 이후 크고 작은 탈북민 봉사 단체 50여 곳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Volunteerism Laying the Groundwork for Unification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he notion that North Korean defectors are content with merely receiving help is a stereotype as wrongful and unhelpful as the view that they are simply preoccupied with the hardships of adapting to their new environment. Those are sheer prejudices. That generosity and altruism are innate human qualities is well established by biological and behavioral sciences, including the tendency of people in need to help others in a worse situation.

 A small group of people has broken the hard shell of such prejudices. They formed a volunteer group called UniSeed, consisting of some 50 undergraduate students who are North Korean defectors and six young South Koreans. Members of UniSeed, short for Seed of Unification, raise funds for meals they themselves prepare and distribute once a month to people who live rough near Seoul Station. These students from North Korea believe that homeless people are in worse situations than they themselves who are going through tough times surviving in a new society.

  The group works on a variety of charity activities year-round, reaching out to share what comforts they can offer to people in need: They pool money to give gifts to child welfare facilities and make kimchi that they deliver, along with coal briquettes for heating, to residents of poor neighborhoods. Almost every month, they also gather donations for daily necessities and clothing to send to defectors who are hiding in China and other countries. Through such activities, they are putting into action their group’s slogan: “Young people of the two Koreas should get together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through sharing and become one by loving each other.”

 

A Taste of Unification

 

 About 10 UniSeed volunteers arrive at the kitchen of the Mallihyeon Methodist Church near Seoul Station at 1 p.m. on the third Saturday of every month. They are assigned different tasks and work quickly and efficiently, mindful of a self-imposed deadline. They cook rice, soup and pork bulgogi; they stir-fry dried anchovies, make a salad of squid with cucumbers, or pickle kimchi. They prepare different kinds of soups and side dishes each season. They make hot fish-cake soup or soybean paste soup in winter, fresh wild greens salad in spring, and chilled cucumber soup in summer.

  At 5 p.m., the young volunteers deliver the boxed meals they prepared as an early dinner to about 200 homeless people at Seoul Station Plaza. It costs them 600,000 won to make boxed dinners for about 200 people; they chip in their own pocket money and raise the rest of the amount by selling small handicraft items they produce. Sometimes, they join contests to raise money, and the cash prizes they win help fund the meals they prepare. It is not easy to raise money and cook so many meals but they feel rewarded when they hear words of thanks from the people they serve.

  Esther Um, the founder and head of UniSeed, is a senior majoring in Chinese language at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She began delivering boxed dinners to homeless people in Seoul in July 2014. She launched the effort with the help of four other students from North Korea with 2.5 million won she had received as scholarship.

 Like any fledgling effort, they learned by trial and error how to do such outreach right; even with the best intentions, gestures of caring can fall short. They once made 700 boxes of tofu rice (fried bean curd chunks stuffed with rice), a North Korean dish, to distribute among homeless people, wanting to help alleviate their hunger and at the same time to offer a taste of North Korean food. But contrary to their expectations, the recipients of the boxed meals did not seem to like it. The unfamiliar food did not suit their taste. This taught the volunteers a lesson: Helping is not one-sided giving; it must be a response to what people in need want. They realized that more than anything else, people who live rough just want a warm bowl of rice and delicious soybean paste soup. This prompted them to prepare homestyle meals.

 

Touching Hearts

 

 Hurt feelings come with the territory, and volunteers learn to take them in stride. Some of the homeless men would snap at them in a fit of temper, “Why didn’t you bring us water?” Others simply rejected their lunch boxes, saying, “I’ll not eat what pinkos are giving us.” But as time went by, heartwarming gestures came, too, moving the volunteers’ hearts. On an autumn day in 2014, Um was about to leave after serving boxed meals when one of the men approached and handed her a bag of three small glutinous rice cakes and an orange. She was deeply moved by this small gift, thinking aloud, “He must have received them from someone and stashed them away to eat later…”

 On a sweltering summer day in 2015, another man made a fan out of cardboard and fanned perspiring volunteers who were delivering warm food to them. A growing sense of appreciation for the volunteers arose from the people they served, manifested in different gestures. When it rained, some of them would hold umbrellas over the busy volunteers, and after the boxed meals were delivered, more and more of them joined the volunteers in cleaning up the area. Some even came back to return their meals, having found it hard to eat them after hearing that they had been prepared by young defectors who were struggling for survival themselves.

 Three years after the launch of UniSeed, the volunteers are now being received with open arms. Um said she once heard a man say, “I sometimes sense that people from other volunteer groups work mechanically. But I can feel sincerity in what the UniSeed people are doing.” This made her decide to hang in there despite difficulties, she added.

  Cho Eun-hee, a UniSeed volunteer from North Korea, said, “At first, I didn’t have the courage to approach homeless people because I was scared. But now, I can ask them how they’re doing. I can’t wait for our days of service to them.”

 UniSeed decided to reach out to people who live rough on the streets in the first place because its members believed that their lives were no less tough than that of people with disabilities or elderly people living in poverty. Kim Mi-jeong, another volunteer, observed, “South Koreans don’t seem to like seeing us help homeless people. They seem to consider them undeserving of help because they drink too much or behave in an unruly manner.”

 

 Sense of Self-worth
 
 Um barely reached South Korea on her second attempt. In March 2004, she fled North Korea but was captured in China and repatriated in October that year. In 2006, she fled to China again, and in 2008, she finally reached South Korea. In the process, she had to helplessly watch her mother and younger sister get caught by Chinese police in Yanji, northeast China.

 Hopeless and desperate, she considered ending her own life. But then she happened to see an old man on a street who had no limbs and held a brush between his lips, writing calligraphy to make a living. Deeply touched by the scene, she regained her courage to live on. She suddenly felt compelled to help other people and visited an institution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But when she said she wanted to do volunteer work there, a staffer told her to show them her ID card first. It made her feel very sad. “For a defector, even doing a good deed is neither simple nor easy,” she thought.

  She then went to Angels’ Haven, a welfare center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that an acquaintance had told her about right after she arrived in South Korea. Thus began her volunteer activities. Every Saturday, she rose early in the morning, helped people wash themselves, and cleaned every corner of the center. She never skipped a single Saturday despite her busy schedule as a student and part-time worker. Sometimes she had a nosebleed. But the volunteer service was the only pleasure she found in South Korea.
 

 She said, “I’ve strongly felt through doing volunteer service that I’m also needed somewhere. I found my pride buoyed significantly when I realized that I could do something for somebody else, not simply letting myself be helped by others.”

 She dedicated herself more to doing volunteer service after tragedy struck her family once again. She became deeply depressed when she received news about her younger brother’s death in the North and when her mother, whom she had managed to spirit out of the country by spending as much as 10 million won in bribes, was diagnosed with cancer. Once again, she was on the verge of suicide when the faces of volunteers, who had cheered her up and showed sympathy for her, flashed across her mind. This second close call made her realize, she said, that “doing volunteer work is also a solution preventing defectors from making extreme choices.” She has a point: Statistics show that the suicide rate among North Korean defectors is three times as high as that of South Koreans.
 

 Rising above the devastation caused by her own family’s tragedy, Um launched UniSeed in 2014 to help other defectors regain their sense of self-worth. She persuaded people she knew to allow volunteers to use a kitchen and supply them with chopsticks and lunchboxes for the meals they would prepare. She also founded Osundosun, meaning “amiably and harmoniously,” a social enterprise that produces and sells North Korean foods to raise funds for a more stable operation of UniSeed.
 

 In 2015, Osundosun won a top prize in a national social venture competition sponsored by the Korea Social Enterprise Promotion Agency. Its staff underwent a refresher self-reliance course run by the Korea Racing Authority. Since November 2016, Osundosun has been running a food truck business with the help of the SEAM (Social Entrepreneurship and Mission) Center, a faith-based community project in Seongdong District, Seoul, that supports social enterprises. Um now plans to expand her services by launching UniSeed Company based on the food truck business.

  She envisions branches of UniSeed Company sprouting at each college and university campus for young people from both Koreas to join hands and create an environment for unification. Through this effort, she wants to see defectors become a bridge for the era of unification, instead of simply being South Korean residents. This will open a genuine way for defectors to settle down here, she believes.

 

Returning Love Received

 

 Besides UniSeed, there are other volunteer groups operated by defectors. One of them is the Chakhan Volunteer Group. (The word “chakhan” here refers to defectors who have arrived in South Korea; its pronunciation implies “good” or “good-hearted.”) Chakhan is made up of 10 small volunteer clubs selected by the Korea Hana Foundation, an agency under the Unification Ministry helping defectors to settle down here. Since its launch in November 2015, Chakhan has been organizing joint volunteer work by its member clubs, each with more than 50 percent of North Korean defectors as their members, two or three times a year.

  An official of the Korea Hana Foundation said, “The Chakhan project was launched to help defectors strengthen their resolve to settle down smoothly here and achieve social unity by raising their awareness as contributors, not simply as beneficiaries. Through volunteer service, they can return love, which they have received here, to neighbors in need.”

 In April this year, Chakhan volunteers planted trees in a forest developed on a landfill in Incheon, thinking of their own hometowns back in the North, together with volunteers from Kia Motors. The event was doubly significant in that South and North Koreans joined hands planting trees that will be sent to the North after they have grown, affirming their shared dream for national unification. The defectors who planted trees that day were volunteers from Chakhan member clubs, such as Gwangmyeong Hana Hyanguhoe (Gwangmyeong Hana Residents Group), Hana Bongsahoe (Hana Volunteers Group) and Saeteomin Haetbit Saranghoe (Defectors Who Love Sunshine).

 “I heard of ‘volunteer servic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fter I arrived in South Korea,” said Kwak Su-jin, the head of Hana Bongsahoe, which is affiliated with the Korean Red Cross. “We started volunteer service to help neighbors in need and change people’s perception of defectors.”

 Ahn Yeong-ae, who hails from Musan in the North Korean province of North Hamgyong, said, “Most mountains in the North are bald. I planted trees in hopes of transplanting them to my hometown after unification.”

 Chakhan volunteers’ joint service activities started on May 14, 2016. They did their first volunteer service in a ferry port village in Yeoncheon County, Gyeonggi Province. It is one of South Korea’s northernmost villages, close to the Demilitarized Zone. They served North Korean dishes to the elderly, painted the walls of houses, cleaned roads and beautified the streetscape. The dishes the volunteers prepared included popular North Korean foods, such as cold noodles garnished with shoots of wild fatsia greens, North Korean-style dumplings, tofu rice and soy-meat. In May 2016, Chakhan volunteers mowed and trimmed greenery around the tombs of the unknown soldiers at the National Cemetery.
 

 Besides Chakhan, about 50 other groups of North Korean defectors have also been doing volunteer service across the country since 2015.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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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북한의 솔제니친’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북한작가의 소설집 <고발>이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에서 호평을 이어간다. 그이 말고도 탈북한 시인 장진성, 소설가 김유경의 작품집이 그들만의 비극적인 체제의 실상과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해외에 소개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정작 남한에서는 이들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다. 무엇이 우리의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놓은 것일까.

 서방세계가 알고 있는 북한 문학은 대부분 3대를 이어온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북한 문학은 여전히 최고지도자의 통치이념에 따라 창작의 큰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새해 첫날 발표되는 지도자의 신년사가 해마다 문학의 방향과 작품 내용의 바탕이 된다.

 

찬양과 사회비판 사이 

 

 그렇다고 찬양 문학작품 일색이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북한의 공인 문인 조직인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 분과에 소속돼 문예 활동을 하다가 1998년 탈북한 최진이 시인(58)의 다음 증언은 통념과 조금 다르다. “남한에서는 북한 작가들이 찬양 문학만 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북한이 독재 사회여서 겉으로는 체제 찬양적인 문학이 많아 보이지만 체제를 찬양하는 작가를 극단적인 아첨주의자이며 문학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다고 여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들도 친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을 땐 이따금 체제에 대한 완곡한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있다고 최진이 시인은 말한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시를 지나치게 많이 쓴 한 작가가 동료들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 “너는 짬만 나면 김일성 부자 욕을 해대더니 찬양시는 어찌 그리 많이 쓰느냐.” 그러자 그 작가는 “난 김일성 부자가 아니라 내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어쩔래” 하고 둘러댔다고 한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한번은 작가동맹의 찬양시를 보고 나서 “닭살이 돋는 것 같다”며 물리친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북한 작가들은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사회주의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사회비판이 조심스럽게 허용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 이질성과 같은 다양한 문제에도 관심을 쏟게 됐다고 한다.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 백남룡(白南龍)의 <벗>(1988)은 1990년대 후반 남한에도 소개됐을 정도로 탈이념적 소설이다. <청춘송가>는 청년 지식인, 과학자, 기술자들이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가치 있는 삶을 형상화하면서 남녀 간 애정 윤리를 다룬 작품이다. 이혼 문제를 다뤄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벗>은 2011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돼 해외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북한 문학 작품이 유럽에서 출판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2004년 남한에서 출간됐던 또 다른 북한 소설인 홍석중(洪錫中)의 <황진이>는 2002년 당시 평양의 독서계를 석권한 인기 역사물이었다. 홍석중은 남북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았고 널리 읽힌 역사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손자이기도 하다.

 

세계가 반디의 <고발>에 주목한 까닭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 반체제 문학 작품을 내놓는 건 금기다.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라면 북한 특유의 정치범 수용소 행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얼굴 없는 작가의 문제작이 최근 들어 남한과 서방세계에서 부쩍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반디’라는 필명을 쓰는 북한 작가의 단편소설집 <고발>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들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처음 붙여진 ‘북한의 솔제니친’이라는 별명 덕분에 유명세가 한층 더해졌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의 문학이 외부 세계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솔제니친이 스탈린 독재체제의 만행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북한의 반체제 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도 반디의 소설집 <고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발>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실린 일곱 편의 단편에는 북한 체제 아래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핍진하게 묘사돼 있다. 각기 다른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김일성 시대에 대한 비판’이라는 큰 주제에 하나로 묶여 있다.


  첫머리에 놓인 ‘탈북기’는 몰래 피임약을 먹는 아내를 의심했던 한 남자가 대물림되는 출신성분제에 절망해 끝내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고 그 과정을 친구에게 알리는 편지 형식의 단편소설이다. ‘유령의 도시’는 거리의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세 살배기 아이 때문에 창문에 커튼을 쳐놓았다가 ‘수령님 모독죄’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가족 이야기와 함께 병영국가의 실상이 담겼다. ‘지척만리’는 여행증 없이는 이동이 금지된 북한에서 몰래 기차를 타고 고향 초입까지 갔다가 검문소에서 막혀 노모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 아들의 애달픈 사연을 그렸다.


  마지막에 수록된 ‘빨간 버섯’은 공산당의 당사를 ‘독이 든 빨간 버섯’으로 규정하고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원히”라고 절규하는 북한 기자를 등장시켜 김씨 정권 타도를 촉구한다. 일곱 편의 작품 순서는 탈북이라는 소극적 저항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공산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단계까지 작가의 면밀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솔제니친’

 

 이 소설집의 원고가 2013년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반디의 친척 여동생이 탈북에 성공해 서울로 들어왔다. 몇 달 뒤 그가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에게 원고 얘기를 꺼냈다. 도 대표는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친구를 통해 ‘원고를 건네 달라’는 편지를 반디에게 전했다. 편지를 읽은 반디는 비밀장소에 감춰두었던 원고 뭉치를 꺼내 체제 선전용으로 제작, 배포된 <김일성 선집>, <김정일 노작> 같은 북한선전용 책자와 함께 싸 보냈다.


 원고지는 1960-1970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았다. 오래전 쓰인 것을 보여주듯 갈색으로 바랜 원고지 위에 볼펜이 아닌 연필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작가는 원고의 제목을 ‘고발’이라고 스스로 정해서 써 놓았으며, 반디라는 가명도 본인이 정했다. 반디는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1950년생 남성이고,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라고 도희윤 대표는 증언한다. 그렇지만 이 증언에는 작가를 보호하려는 의향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도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5월 이 희귀한 작품집을 세상에 내놨다.


  사실 남한에서는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작가가 탈북민이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원고 반출 과정만 무성한 화제를 낳았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반디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와 문학성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이처럼 냉담했던 한국 내 반응과 달리 2016년 프랑스어 번역판이 나오면서 해외 반응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어판 발문을 쓴 북한인권운동가 피에르 리굴로 프랑스사회역사연구소장이 작가 반디를 ‘북한의 솔제니친’이라고 표현하자, 외국 언론들이 한결같이 이를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리굴로는 ‘작은 반딧불이지만 희망은 크다’는 의미의 제목을 붙인 발문을 썼다. 일간지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라디오방송 앵테르, 앵포, RFI, 잡지 마리안느 같은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번역자 임영희(57) 씨는 “한국 소설을 오랫동안 번역했지만 <고발>만큼 지적인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서 “소설의 구성이 아주 훌륭하다”고 상찬했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고발>은 2017년 3월을 전후해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독일, 스웨덴, 포르투갈 등 21개국에서 19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30)가 영어판 번역을 맡았다. 이 영어 번역본 은 영국 펜(PEN)이 선정하는 2016년 하반기 번역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미국 뉴욕에서는 반디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만들기 위한 재미동포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북한에 살고 있는 익명의 작가 반디가 쓴 반체제 이야기들은 베일에 싸인 독재 정권에서 나타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전 세계적인 문학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평을 내놓았다. 문학전문지 더밀리언즈는 <고발>을 ‘2017년 가장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불가해한 북한의 삶을 다룬 매우 드문 작품”으로,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폐쇄된 일당 독재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감동적이고 놀라운 픽션으로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을 시험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영국판 출판사 서펜츠 테일 발행인 한나 웨스트랜드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솔제니친을 떠올리게 하고, 통렬한 풍자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를 연상하게 한다”고 평가한다. 김종회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기교적 측면에서는 한국 현대작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서 문학의 공식적 목표가 김일성 가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교만으로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세계의 뜨거운 반응과 동시에 한국에서는 발간 3년 만에 출판사를 옮겨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표지와 더불어 작가의 최초 원고를 충실하게 살려 작품이 지닌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 개정판을 출간한 다산북스는 “3년 전 출간됐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다. 시장성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북한 문학작품은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다른 탈북 문학인들의 작품도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탈북시인 장진성은 북한 주민의 실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로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 렉스 워너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2014년 출간한 수필집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는 영국 도서판매 순위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2000년 탈북한 김유경이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인간모독소>는 프랑스 출판사 필립 피키에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탈북 문학인의 작품이 해외에서 조명 받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리얼리즘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호응이 낮은 것은 호기심과 절박감의 정도 차이에서도 오는 듯하다. 한국인들은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데다 언론을 통해 북한의 비극적인 실상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문학작품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나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높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남한 주민들은 ‘위기의 만성화’로 말미암아 체감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일부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북한 문학을 이념론, 나아가 ‘색깔론’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N. Korean Dissident Literature Sparks Global Interest

 

 Unlike defectors’ memoirs exposing the cruel reality in North Korea,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by an author still living in the North is drawing attention for its vivid literary depiction of the little-known everyday circumstances of the lives of its population. Translated and published in many foreign languages, “The Accusation” by Bandi offers a rare glimpse of North Korean creative writing.
 In the eyes of the West, North Korean literature is not much more than a tool to praise and idolize the three generations of the Kim dynasty’s dictatorship. In fact, official North Korean literature is indeed based on the governing ideology of the supreme leader who sets out guidelines for the country’s writers in his annual New Year’s address.

 

Praise of the Regime and Criticism of Society

 

 However, it is wrong to think that North Korean literature is singularly about saccharine flattery of the regime. The poet Choi Jinyi, who defected to South Korea in 1998, wants to disabuse people of this common misconception; there certainly is more than meets the eye. She used to engage in literary activities as a member of the Poetry Subcommittee in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North] Korean Writers’ Union. She said, “Many people in the South tend to believe that North Korean authors only write works praising the regime. On the surface, there seem to be many literary works glorifying the regime; that’s because the North is an authoritarian society. But in fact, those who write such works are regarded as extreme sycophants, ignorant of the most basic concepts of literature.”

 

 When they are with trusted writer friends, at times even members of the union complain about the regime in a roundabout way, Choi said. One day, a writer who had written many poems eulogizing the regime’s founder, Kim Il-sung, and his son, Kim Jong-il, was criticized disapprovingly by his writer friends. They said, “Why are you writing so many poems in praise of the Kims, while often speaking ill of them in private?” He replied evasively, “I thought of my God, not the Kims, when I wrote the poems. So what?” It is said that the late leader Kim Jong-il once turned down a poem presented by the writers’ union after reading it, saying, “This gives me goosebumps.”


  North Korean writers pay attention to various issues such as love in everyday life, choice of careers, divorce, the gap between urban and rural areas, or generational diversity. They are cautiously allowed to make critical comments on society, provided they maintain the intrinsic autonomy of literature and the socialist system.

 

  Nam Dae-hyon’s “An Ode to Youth” (1987) and Paek Namryong’s “Friend” (1988) had no ideological undertones, so they were published in South Korea in the late 1990s. “An Ode to Youth” deals with the prevailing ethos of love, focusing on the worthy lives of young intellectuals, scientists, and engineers. “Friend,” a novel on divorce that had become a bestseller in the North, drew overseas readers’ attention after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in French in 2011. The book was the first North Korean literary work ever to be published in Europe. “Hwang Jin-yi” by Hong Sok-jung, a historical North Korean novel published in the South in 2004, made a sensation in Pyongyang in 2002. Hong is a grandson of Hong Myong-hui (1888~1968; pen name Byokcho), the author of “Im Kkokjong,” a historical saga highly acclaimed and widely read in both Koreas.

 

The Pseudonymous Author Bandi

 

  Dissident literature is taboo in the North. Anyone who writes a literary work explicitly criticizing the regime faces the certainty of incarceration in a political prison camp.


  Under these circumstances, a work by a pseudonymous author who is known to be living in the North has recently attracted wide attention in many countries, including South Korea. “The Accusation: Forbidden Stories from Inside North Korea” is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by a North Korean author who uses the name Bandi (Firefly) as his pseudonym. His fame grew after he was dubbed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by a French author. Bandi is a pseudonym the author gave himself, vowing to shed light on the reality in his destitute country, “just as a firefly shines only in a world of darkness.”


 Bandi is in a situation very similar to the fate faced by 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the 1970 Nobel laureate in literature, in the former Soviet Union. Just as Solzhenitsyn did, Bandi opposes the political system of his own country and smuggled out his manuscripts to the outside world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him to publish his works in his home country. It was only after two of Solzhenitsyn’s novels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and “The Gulag Archipelago” exposed atrocities of the Stalinist dictatorship that the literature of the Soviet Union began attracting widespread international attention. In the same vein, it was only after Bandi’s “The Accusation” was published that dissident literature in North Korea began entering the spotlight in the outside world.

  The seven short stories in this collection truthfully depict the harsh lives of people from various

walks of life, groaning under the North Korean political system. Each story has a different theme and plot, but all are written under a single umbrella theme: the indictment of the rule of Kim Il-sung.

  The first story, “Record of a Defection,” is an epistolary-style story about a man who grows suspicious of his wife who secretly takes birth control pills. He writes letters to his friend telling him of his frustration about the hereditary “caste system” and his decision to flee the country. “City of Specters” is a story about a family that was expelled from Pyongyang to a distant province “on blasphemy charges.” They had drawn the curtains shut at the window of their apartment because their three-year-old child had a seizure whenever he saw the portraits of Karl Marx and Kim Il-sung outside the window across the street. “So Close, Yet So Far” is a heartrending story about a son who fails to see his old mother at her deathbed. Although he manages to sneak into a train without a ticket, he is soon caught in a security check. In North Korea, nobody can travel anywhere without a travel pass.


 The last story is “The Red Mushroom.” Calling the Workers’ Party headquarters a “poisonous red mushroom,” a journalist calls for the overthrow of the Kim regime, crying out, “Pluck up that poisonous mushroom from this land ? no, from the Earth forever!” In a thematic sequence from the first story to the last, all seven stories in the collection reflect the tortuous progression of the author’s rebellion against the brutal regime ? from passive resistance by defection to calling for the overthrow of the Workers’ Party, the cradle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North Korea’s Solzhenitsyn’

 

 The manuscripts of these stories were smuggled into South Korea in 2013, in painstaking secrecy worthy of an espionage operation. A female relative of Bandi’s fled the North and arrived in Seoul. Several months later, she told Do Hee-yoon, secretary general of the Citizens’ Coalition for Human Rights of Abductees and North Korean Refugees, about the manuscripts. By sending a letter to Bandi through a Chinese friend visiting the North, Do asked him to deliver his manuscripts. After reading the letter, Bandi took out the manuscripts from a secret hiding place where he had stored them. To dodge luggage inspections, he hid them among the regime’s propaganda materials such as “The Selected Works of Kim Il-sung” and other such literature.


   The coarse manuscript paper was in such a poor state that it looked as if it was from the 1960s or 70s. The yellowed paper showed the author must have pressed hard with a pencil when writing the stories a long time ago. The author himself had named the collection “The Accusation.” He had also created the pseudonym Bandi for himself. According to Do Hee-yoon, Bandi is a man born in 1950, who still lives in the North and i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There is speculation, though, that Do is hiding Bandi’s real identity to protect him. After many twists and turns, the stories were published in Seoul in May 2014.


  In South Korea, few people paid attention to Bandi’s work. They merely took interest in the fact that the author was not a defector but still lived in the North and in how the manuscripts were smuggled out. Some people even suspected that the author was a fictitious person. Hence, the genuine worth and literary value of the work remained unappreciated.


   In contrast to such a cold response in South Korea, foreign readers and critics began showing keen interest in the work when its French edition was published in 2016. Pierre Rigoulot, a French historian and North Korea human rights activist and the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Social History in Paris, called Bandi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In his foreword for the French edition of “The Accusation,” Rigoulot wrote, “It’s a small firefly, but its hope is big.” The book received substantial mass media coverage in France, by dailies like Le Figaro and Liberation, radio stations France Inter, France Info and RFI, and magazines like Marianne. “I’ve translated many Korean novels into French. But I’ve never felt more intellectually ecstatic than while translating the stories by Bandi. The plots are splendid,” said Lim Yeong-hee, translator of the French version.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Publishers and human rights activists from various countries participate in a reading event of “The Accusation” at the Bridge of Freedom near Imjingak Pavilion south of the demilitarized zone in Paju, Gyeonggi Province on March 30, 2017.


  “The Accusation” has been translated into 19 languages and was published almost simultaneously in 21 countries, including Britain, Canada, Italy, Japan, Germany, Sweden, and the United States, in March of this year, as well as, most recently, in Portugal. Its English translation was done by Deborah Smith, a British translator who shared 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for Fiction in 2016 with Korean author Han Kang for her translation of Han’s novel “The Vegetarian.” Smith’s translation of “The Accusation” was among the 10 PEN Translates Autumn 2016 winners chosen by the English PEN. In New York, Korean-Americans organized a campaign to nominate Bandi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with effusive praise.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The Millions, an online literary magazine, picked “The Accusation” as one of the most anticipated books of 2017. Publishers Weekly, an American book review magazine, commented, “Bandi gives a rare glimpse of life in the ‘truly fathomless darkness’ of North Korea.” American online bookstore Amazon said, “‘The Accusation’ is a vivid depiction of life in a closed-off one-party state, and also a hopeful testament to the humanity and rich internal life that persists even in such inhumane conditions.”


 “[This] isn’t just a book with a good story behind it: it’s a collection of perfectly crafted novellas that, like Aleksandr Solzhenitsyn’s work [from the former Soviet Union], speak with authority and truthto- power directness,” Hannah Westland, of Serpent’s Tail, the British publisher of “The Accusation,” said to The Guardian. “Bandi’s absurdist approach to satire is reminiscent of Ionesco’s ‘Rhinoceros,’ and his biting wit . . . reminds you of that other great Russian literary dissident, Mikhail Bulgakov.”


  “Bandi is much different from contemporary South Korean writers from a technical point of view. We can’t simply determine his skill level, given that the official goal of North Korean literature is to show the greatness of the Kim family. But we should focus on his spirit of barehanded resistance to the regime,” said Kim Jong-hoi, a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at Kyung Hee University in Seoul.
 Amid the high acclaim abroad, the Korean version of “The Accusation” has been republished by another publishing house three years after its debut in South Korea. With its new cover, the new edition focuses on the literary value of the book by remaining as faithful to the original manuscripts as possible. Dasan Books, the publisher of the new edition, said, “Readers will find the new edition very different from its previous edition of three years ago. We believe this one has good marketability.”


 It is worth noting that many literary works by North Korean defectors have also received more attention overseas than in South Korea. In 2012, poet Jang Jin-sung won the Rex Warner Literary Prize from Oxford University for his poetry collection “I Am Selling My Daughter for 100 Won,” which truthfully reveals the miserable lives of the North Korean people. “Dear Leader,” his collection of essays published in 2014, ranked 10th among the top selling books in Britain that year. Kim Yu-gyong signed a publishing contract with French publisher Editions Philippe Picquier for her novel, “Ingan Modokso” (Camp for Defiling Human Beings), whose original edition came out in 2016. She used to write stories in Pyongyang a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She escaped from the country in 2000.

 

Response by South Koreans

 

  By comparison, South Korean readers are less responsive to North Korean literature than foreign readers, probably because they are less curious about society and life in the North. Many South Koreans hardly feel freshly informed and touched by North Korean literature that depicts the tragic reality of everyday life in the North, because they live in a standoff within spitting distance of North Korea across the demilitarized zone. On the radio, on TV, and in newspapers, they listen to, watch, and read about the lives of their erstwhile compatriots every day.


 While Americans and Europeans take nuclear threats from the North or the possibility of war on the Korean peninsula very seriously, South Koreans have become somewhat jaded and benumbed by continual threats and crises. Consequently, many South Koreans tend to look at North Korean literature primarily from an ideological point of view, rather than appreciate the authors’ literary depiction of their real-life experience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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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신조어와 괴상한 줄임말이 범람해 그렇지 않아도 분단 이후 이질적으로 변화해 온 남북한 일상용어는 한 통계에 의하면 이미 40% 가깝게 그 차이가 벌어졌다. 남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외래어만 해도 탈북민들에게는 낯선 정도를 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통일부가 2014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0%가 넘는 응답자가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를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로 꼽았다.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민이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컴퓨터 클리닝’이라고 쓰인 세탁소를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독특한 운영 방식

 

 탈북민들에게는 여기에 ‘영어 격차’라는 엄청난 고민이 더해진다. 영어를 배워 한 단계 도약하고 싶지만, 대부분 생계를 꾸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게 서울 마포구 독막로 180-8에 자리한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Global Education Center)이다.

 

  약칭으로 쓰는 ‘TNKR’은 ‘Teach North Korean Refugees’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탈북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곳은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Casey Lartigue) 씨와 한국인 이은구(Lee Eun-koo) 씨가 의기투합해 2013년 3월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다.

                                                                                            


 이들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독특하다. 직접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탈북민과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원어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준다. 여러 수강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르치는 영어 학원과 달리 학생이 강사에게 1대 1 맞춤형으로 배운다. 교육 장소, 시간, 수업방식, 교재 결정은 학생 희망에 맞춰준다. 인연 맺은 강사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강사에게 동시에 배우는 열혈 학생들도 적지 않다. 라티그 씨는 “강사들이 말하기를 잘 가르치는 사람, 문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 탈북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뛰어난 사람 등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강사들에게 배우는 게 유리한 면이 많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면담(matching session)을 통해 강사를 고를 수 있다. 이런 만남의 날을 두는 것은 서로 신뢰를 쌓고 학습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6년 말까지 50여 차례 열렸다. 강사와 연결되기 전 대기자들은 TNKR 사무실에서 과도기적으로 배울 기회(in-house tutoring)를 갖는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인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열의에 찬 학생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민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 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라티그 씨는 “영어를 배워 더 나은 직업을 구하고, 자연스레 남한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고 싶어 하는 탈북민들이 TNKR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470여 명에 이른다. 취재하던 날 현재 현장 만남 대기자가 8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고아, 인신매매 피해 경험자, 25살 이하 지원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고 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는 탈북민들은 구직과 남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어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탈북민 학생들의 사후 의견을 꼼꼼하게 챙기는 이은구 공동대표의 얘기다.

                                                                                   


 라티그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박연미(Park Yeon-mi) 씨를 꼽는다. “TNKR를 열기 전 2012년 12월 박연미 씨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13년 말께 공식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했지요, 박연미 씨는 2014년 1월 리매칭 학생으로 참여해 8개월 동안 무려 18명의 선생님들과 1대 1로 만나 일주일에 40시간 가까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의가 엄청나게 강했고, 우리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TNKR 홍보대사로도 활동한 박연미 씨는 지금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다.


 30대 늦깎이 대학생인 양세리(Yang Che-rie) 씨는 “학교 수업시간에 영어로 제 의견을 말하는 데 큰 용기가 생겼다. 우리 탈북민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배우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를 제공해 남한 사회 적응을 도와주는 TNKR이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호주,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출신 강사들과 영어 공부를 한 30대 출판 편집인 엄영남(Eom Yeong-nam) 씨는 “영어실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생긴 것 같다. 더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TNKR에서 삶의 자신감을 얻으면 좋겠다”고 추천한다.


  자원봉사자들의 국적과 직업은 다양하다. 미국인이 가장 많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의 다른 나라 출신도 많다. 이들의 직업도 교수, 교사, 학원 영어 강사, 대학원생, 프리랜서 작가 등 각계에 걸쳐 있다.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의무가 주어진다. 한번 참여하면 적어도 3개월 동안,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번에 90분 이상 가르쳐야 한다.


  자원봉사자들이 TNKR에 참여하는 까닭도 갖가지다. 크게 보면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북한과 북한사람을 알고 싶어서다. 두 번째는 이미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탈북민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밖에 단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거나, 영어 교사로서 어린아이들만을 가르치는 것이 따분해 성인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대 미국인 매튜 맥가윈(Matthew McGawin) 씨는 “발음과 문법을 바로 잡아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음 번 수업 때는 꼭 고쳐옵니다. 수업 때마다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라며 뿌듯해 한다.


  6명의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영국인 라이언 가드너(Ryan Gardener) 씨는 이렇게 말한다. “TNKR의 가장 큰 장점은 탈북민들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러 원어민 강사들을 스스로 선택해 영어와 더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배우는 장소를 그때마다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TNKR 프로그램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두 부문으로 나눠진다. ‘트랙 1’로 불리는 첫 단계는 영어와 친숙해지면서 기초영어, 문법, 어휘, 발음 등을 배우고,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찾는 단계다. 이 때 원어민 자원봉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노하우도 자연스레 덤으로 얻도록 한다.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단계를 거치고 있다.

 

  ‘트랙 2’는 공석에서 말하기(public speaking) 등 발표 능력을 익히고 키우는 단계다. 비즈니스에 활용하거나, 공공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특별프로그램이다. 이 단계에서는 글쓰기, 연설, 프리젠테이션 등을 배운다. 탈북민들이 무대와 영어에 대한 공포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도록 영어 웅변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한 해 두 차례, 2월과 8월에 대회를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 TNKR은 필요에 따라 영어 외 언어도 가르친다. 이를테면 변호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법률용어로 많이 쓰이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개인 후원금에 의존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0년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한 라티그 씨는 2010년 다시 찾은 한국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고부터 탈북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012년 3월, 30여 명의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건은 라티그 씨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강제 북송 반대 집회 현장에서 단식농성을 했던 박선영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이 탈북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말씀하셔서 저도 국제협력이사로 참여했습니다. 저의 주요 역할은 물망초 학교에 영어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모집하는 것이었죠.”


 라티그 씨는 ‘물망초학교’에서 이은구 씨를 알게 되자 자신의 외국인 인맥과 이은구 씨의 탈북민 네트워크를 합해 뜻을 펴기로 했다. 그 동안 자신이 만났던 탈북민들이 하나같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영어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실정을 알기에, 이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은구 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 영국 셰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북한인권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10여 년간 일하다가 현재 한국자원봉사협의회에서 근무하면서 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처음에 사무실도 홈페이지도 없이 몇 명의 학생과 자원봉사자만으로 시작했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탈북민들 사이에 제법 널리 알려졌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트위터(TNKR@TeachNKRefugees), 홈페이지(www.teachnorthkoreanrefugees.org) 등 SNS를 통해 배우고 싶은 사람,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재정문제다. 4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변변한 단독 사무실을 마련하기 어려워 이태원을 비롯해 서울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현재의 사무공간도 예산에 걸맞은 곳을 찾다가 골목 안의 허름한 단독주택에 세 들어 마련한 것이다. 정식으로 TNKR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얻은, 사실상 첫 단독 사무실인 셈이다.

 TNKR 운영비는 오로지 개인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강사들 중에 자기 학생을 위한 교재를 스스로 구입하거나 개인 후원금을 내는 이도 많다. 학생들도 선생님들의 무료 자원봉사에 감동받아 적은 액수지만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라티그 씨와 이은구 씨의 자비도 들어간다. 두 사람은 “탈북민들의 열망이 눈에 밟혀 힘들어도 이 일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다”며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TALES OF TWO KOREAS

 

 Volunteers Help Bridge the Language Gap for Defectors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is a private, nonprofit facility committed to helping North Korean defectors learn English. One-on-one lessons by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help defectors gain a competitive edge and equal opportunities in South Korean society with its emphasis on English proficiency.

 

  Statistical data show that the language gap between the two Koreas has grown by nearly 40 percent since the national division in the mid-1940s. It has been widened further by a deluge in South Korea of online slang words and odd abbreviations. Many foreign words South Koreans use without a thought are very unfamiliar and bewildering to the defectors. In a 2014 survey by the Unification Ministry, 40 percent of respondents indicated that the plethora of unfamiliar foreign words in everyday use was one of the biggest difficulties defectors who settled in South Korea were experiencing. For example, a defector living in Seoul went to a laundry store displaying a sign, “Computer Cleaning” (meaning “computeraided cleaning”), to have his computer fixed.

 

Unique Operating System

 

 “English competency,” a hefty burden, has been added to the defectors’ list of difficulties. They want to advance in their studies and jobs by learning English. But most of them do not dare to even think of it because just surviving in their new home is a challenge.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helps them get over those hurdles through a highly personalized teaching system that many South Korean families would willingly pay premium fees for if they could. TNKR is the abbreviation of “Teach North Korean Refugees”; it’s a private, nonprofit organization that runs a facility (located at 180-8 Dokmak-ro, Mapo District, Seoul) that teaches North Korean defectors English for free. It was founded in March 2013 and is directed jointly by Casey Lartigue, an American, and Lee Eun-koo, a South Korean.

  TNKR has a unique program and system of operating as a language teaching organization. They do not teach students themselves, but connect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who want to teach English. Unlike private cram schools that teach students in classrooms under a preset curriculum, TNKR arranges for students to learn English with teachers one-on-one. Where, when, how, and what to teach depend on the students’ wishes. If they want other teaching styles, students can ask for a change of teachers.

  Many students are so enthusiastic that they sign up with several teachers at once. It is very helpful for students to learn from multiple teachers because some are good at teaching spoken English, others at teaching grammar, and still others at giving inspiration to defectors, Lartigue said.
 Students can choose teachers at regular matching sessions that are aimed at building mutual trust and increasing efficiency in studying. About 50 such sessions had been held until late 2016. Those on a waiting list come for in-house tutoring sessions at the TNKR office before they are connected to teachers.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NK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Some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According to Lartigue, those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to find better jobs and adapt to a new life in South Korea more easily are knocking on the TNKR office’s door. Some 470 volunteers have taught or are teaching here.
 The day I visited the TNKR office, I heard that as many as 80 defectors were on the waiting list for matching sessions. Priority is given to orphans, formerly trafficked persons, and those under 25 years old. Those who have learned or are learning English at the center agree that the English education they have undergone here is very helpful to them in finding jobs and adapting to South Korean society.

  “It seems that students are satisfied with the English education here because it’s a customer-focused program that gives students a choice,” said Lee. She keeps a journal of feedback received from students.


   Though still early in its history, the track record of TNKR’s allvolunteer teaching program can be expected to be studded with many inspirational stories of students as well as teachers. The name Park Yeon-mi comes up as Lartigue speaks of their most unforgettable student. Park did not speak English well when he first met her in December 2012 before TNKR opened. Park then joined the TNKR program in late 2013. Beginning as a student of a re-matching program in January 2014, she studied hard for nearly 40 hours a week, learning from as many as 18 teachers, one-on-one for eight months. She had great enthusiasm for learning English and TNKR gave her a chance, Lartigue said.
 Once a promotional ambassador for TNKR, Park is now studying at Columbia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Yang Che-rie, a student in her 30s, said, “Thank God, I now have the courage to express myself in English during classes at school. I’m really grateful to the TNKR for helping us defectors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by undergoing substantive English education in a new environment and having a chance to build a human network.”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And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Students’ Enthusiasm

 

  Eom Yeong-nam, an editor and publisher in his 30s who learned English from teachers from Australia, Canada, the United States, and New Zealand, said, “I think I now have a useful tool: English proficiency. I hope more defectors will gain self-confidence at TNKR.”
Volunteers come from several countries and are working in various kinds of jobs. Americans top the list, followed by those from other English-speaking countries like Britain, Canada, Australia, and New Zealand. Their jobs in Korea range from university professor, schoolteacher, and cram school lecturer to graduate student and freelance writer. As TNKR volunteers they commit to perform the following duties as a minimum: they should teach for at least three months, more than twice a month, and more than 90 minutes per class.

 Students learn English in one-on-one sessions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under the TNKR (Teach North Korean Refugees) program, a teaching approach that would be the envy of most families keen on English education of their children.

 Volunteers have various reasons why they are taking part in the TNKR program. The teachers fall into roughly three categories: those who want to understand North Korea and North Koreans; those who want to add their experience of teaching defectors to their resume of volunteer work; and those who simply enjoy teaching. Others are teaching English here to experience something new and still others want to teach adults for a change, as a break from teaching English to children.

  Matthew McGawin, an American teacher in his 20s, proudly said that most students spoke accurately after their pronunciation and grammar were corrected. He pledged to teach better whenever he saw his students’ English improve.


   Ryan Gardener is a British teacher who has taught English to six defectors. He notes that the strongest point of the TNKR program is its system that allows defectors to choose native English speakers from various countries to learn many things as well as the language. Furthermore, he said one of the important things is to let students learn English in different settings each time.
 The TNKR program consists of two parts to help students improve their English. Track 1, the first step, helps students become familiar with the English language through actual use while learning basic English skills, grammar, vocabulary, and pronunciation, and finding ways to study by themselves. In the process of communicating with native speakers, students will naturally learn how to overcome their fear of speaking English with foreigners. Currently, most students have reached this stage.


 Track 2 is the step at which students cultivate their ability to express themselves formally in English, including public speaking. It is a special program designed to improve their ability to do busi ness or give public speeches in English. At this stage, they learn how to write and give a speech or a presentation. English speech contests are also held regularly to help defectors overcome both stage fright and the fear of speaking in English in front of other people. The center tries to hold such contests twice a year, in February and August, if possible.


  Other languages are also taught at the center. For example, it teaches Latin, which is often used in legal terms, to those students who want to become lawyers.

 

  Private Donations

 

 After earning an MA in pedagogy from Harvard University, Lartigue taught English at Yonsei and Hanyang universities in the 1990s. When he revisited Korea in 2010, he learned about the dire reality in North Korea and began taking a deep interest in North Korean defectors. He was greatly shocked by the news about China’s repatriation of about 30 defectors to North Korea in March 2012. He helped recruit volunteers to join protests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in Seoul. There, he met the legislator Park Sunyoung of the minor opposition Liberty Forward Party who had staged a hunger strike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He told her he wanted to get involved in helping North Korean refugees.


  At the time, Rep. Park brought up the idea of establishing Mulmangcho (Forget-Me-Not) School, an alternative school for young defectors. Lartigue joined her program as a volunteer board member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to help recruit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for the school.


   It was at Mulmangcho School that Casey Lartigue and Lee Eun-koo found each other in search of a practical way to help North Korean defectors. They readily agreed to work together towards their shared goal by using Lartigue’s network of English teachers and Lee’s network of defectors. The idea that took shape was to lay a stepping stone path for defectors by helping them acquire English language skills, an essential asset in South Korea’s job market as well as in society as a whole. For Lartigue, it was the natural thing to do: Each and every defector he had met asked him to teach them English and he knew that it would be difficult for them to find jobs in Korea unless they had a certain level of English proficiency.


  Lee obtained an MA in North Korean studies from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and another MA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University of Sheffield in England. She had worked as a researcher for about 10 years at the Database Center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and at the Education Support Center for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a government- funded education think tank. Concurrently working for Volunteering Korea, a civic group, she is a co-director of the TNKR program.


  The program started only with a handful of students and volunteers, without even an office or a website. It is now widely known among defectors. These days, students who want to learn English can have lively communications with aspirant volunteer teachers via Facebook (https://www. 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Twitter (@ TeachNKRefugees), or through the TNKR website (www. teachnorthkoreanrefugees.org).


   The biggest difficulty is the effort’s limited finances. Over the past four years, TNKR has had to move to various places around Seoul, including Itaewon, because it was financially strapped. It has now rented a shabby house in a back alley which fits within the budget. This is, in fact, its first independent office since the TNKR program started.


   Office expenses are borne by donations alone. Many teachers buy books for their students on their own or give donations. Impressed by such dedicated outpouring of free volunteer services, some students, too, donate what little money they have. Lartigue and Lee are also contributing their own money. Their eyes sparkling, they both said that they can never give up, no matter how hard their job may be, because they know how eager the defectors are to keep learning.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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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NKR 블로그 운영자 2017.07.14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TNKR 블로그 운영자입니다. TNKR에 대한 상세한 소개 감사드립니다 :)

    TNKR의 일정과 기록, TNKR 출신 학생들에 대해 알고싶은 분들은 블로그를 방문해 주세요!

    http://blog.naver.com/tnkr21

  2. 2017.07.17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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