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 베를린에 지구상 마지막 분단의 땅인 남북한의 식물이 한데 어우러질 예술정원이 탄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2019년 5월 23일 포츠담광장의 쿨투어포룸(Kulturforum)에 조성된 한시적인 정원 ‘제3의 자연 (Das dritte Land)’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중요성을 독일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인근에 조성된 이 예술정원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착안한 백두대간으로 형상화됐다. 현무암과 흙으로 만든 축소 백두대간에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듯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로 남북을 잇는 주축이자 자연 생태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북쪽 경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을 통해 남해안으로 맥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태학적인 면을 넘어 인문사회학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무언의 기도와도 같은 이 신비한 예술정원은 40대 예술인 3명이 의기투합한 합작품이다.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의 김금화(Kim Keum-hwa 金錦和) 큐레이터와 설치미술가 한석현(Han Seok-hyun 韓碩鉉), 김승회(Kim Seung-hwoe 金承會) 두 작가가 3년여의 준비 끝에 일궈냈다. 기획과 조직은 김금화 큐레이터, 작품의 전체 비주얼은 한석현 작가, 식물 관련 부분은 김승회 작가가 나눠 맡았다.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
김금화 큐레이터는 베를린에서 현대예술 독립기획사를 운영하면서 한국과 독일의 작가, 갤러리, 기업의 예술 전시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한석현 작가는 현대 미술과 생태학적 실천의 확장적 결합에 천착해왔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김승회 작가는 분단된 베를린 장벽과 통일 이후 장벽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적·도시건축학적·생태학적 변화에 주목해왔다. 미술과 조경의 소통이 가능한 공공미술을 기반으로 삼는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특성이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한석현 작가는 이 정원을 구상하면서 시각적 표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한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며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남북의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번 프로젝트에 넣으면서 비 갠 뒤 안개가 자욱한 산자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반도의 산세가 담고 있는 수묵화적 풍경을 정원 예술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탐색한 끝에 결국 검은 바위 밑에서 피어나는 흰 색깔의 야생화와 안개 분무 장치를 통해서 산수화의 정취를 표현해 냈다.
수묵화적 풍경
그가 처음 예술 정원을 구상한 것은 2016년 베를린 베타니엔 예술가의 집(Kunstlerhaus Bethanien)에서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2016년 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독일 통일이 이런 안정감과 평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독일 통일이 양측이 서로 원하고 자유롭게 왕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정치적 결정만 기다리기보다는 남북한 사람들이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10여 년간 저 자신조차도 누군가와 통일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남북한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어졌어요”
예술 정원의 핵심 주제는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이다. ‘제3의 자연’이란 명칭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명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했는데,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자코포 본파디오(Jacopo Bonfadio)가 정원을 인간이 만든 ‘제3의 자연(Terza Natura)’이라 정의하고 예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린 데서 착상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남북한 경계 없이 어우러진 한반도의 산수와 초목을 감상할 수 있다.
“정원은 자연에 대한 동경,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러한 정원의 의미에 분단된 남북한의 현재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중첩시킨 제목입니다.”
상상과 현실
그러나 작가들의 이런 구상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엄정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획 초기에 호의적이고 협조적이었던 북한 측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그 결과 현재 예술 정원에는 작가들이 처음 선별한 60종 3,000주의 남북한 식물 가운데 절반가량인 45종 1,500주만 심겨 있다. 북한에서 가져오기로 한 식물이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때문에 전달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북한 쪽 백두대간이 자생지인 야생화들은 경북 봉화군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가져와 아쉬움을 달랬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북측에서 직접 식물들을 가져올 방법을 찾고 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소속 베를린 식물원, 한국 국립수목원, 북한 조선중앙식물원 등과 접촉 중이다.
그 밖에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대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행정적 허가를 받아내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베를린 공원관리청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힘겨운 과정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발 벗고 나섰다. 적법한 절차를 밟고, 규격과 시공 방법도 독일 표준을 따라야 했다. 공원관리청, 식물보호관리청 등의 규정과 작가들의 예술적 아이디어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것들이 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이었다. 다행히 2019년 3월 한 달 동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3만 2,500유로를 모금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유명 배우들과 뮤지션 등 각계 인사들이 프로젝트에 공감해 응원 메시지를 보냈으며, 기획과 홍보에 힘을 보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 독일 크룰재단(Hans and Charlotte Krull Foundation) 등에서도 후원이 뒤따랐다. 아직 북한 땅에서 자란 식물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단계이지만 어렵게 이룬 성과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당초 2019년 11월 15일까지였던 개장 기간도 베를린 주민들과 베를린 미테(Mitte) 지구 문화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올해 10월 30일까지 연장됐다.
독일 당국의 지원
2019년 5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 개장 기간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분위기를 띄웠다. 첫날 공연을 펼친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Jo Su-mi 曺秀美) 씨는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남북 교류와 평화를 기원하는 예술 정원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개장 행사에서는 가야금 연주자 주보라(Ju Bo-ra)와 퓨전 타악기 핸드팬(Handpan) 연주자 진성은(Jin Sung-eun)의 합동 연주도 있었다.
6월 7일에는 수화(手話)를 하면서 북한 가요 <임진강>을 불러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 이랑(Lee Lang 李瀧)이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1월 8일에는 사찰 음식을 세계에 알린 정관(Jeong Kwan) 스님이 이 교회에서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화합의 만찬을 선보였다. 이어 김금화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경계와 유토피아, 정치와 예술’이라는 주제 아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쳤다. 프로젝트가 연장되면서 세 사람은 북한 식물을 확보하는 데 계속 힘을 쏟고 있다.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계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예술 정원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어떤 이야기든 나누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석현 작가의 말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김금화 큐레이터는 “남북 대화가 진척되어 이 정원에서 남북 생태학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백두대간의 식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계간 KOREANA 2020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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