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처럼 한 도시가 폐허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아홉 차례나 거친 도시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트로이 유적지는 고대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 뒤 어떤 역사학자도 수천 년 동안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오던 트로이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트로이 유적지의 비밀을 밝혀낸 것은 고대 도시의 존재를 확신했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엄청난 재산을 모은 뒤 집요한 추적 끝에 1873년 마침내 유적지를 발굴했다. ‘일리아스’를 길라잡이로 사용한 슐리만은 오늘날 터키 북서쪽에 있는 히사를리크 마을 아래서 트로이를 발견한 것이다.


 슐리만이 호메로스에 심취해 트로이 발굴에 나선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여덟 살 때 그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루트비히 예러가 쓴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사줬다. 어린 슐리만은 불타는 트로이 삽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가 트로이의 몰락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슐리만은 믿지 않았다.

                                                                                                      

            
 슐리만이 처음 호메로스의 시를 접한 것은 독일에서 말단직원으로 일할 때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직원 하나가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줄줄 암송했다. 난생 처음 그리스어를 들은 슐리만은 뜨거운 눈물까지 흘렸다. 이후 그는 그리스어를 비롯한 외국어 공부에 열중해 영어, 라틴어 등 무려 15개 언어에 능통했다.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실증주의적인 관점에 따라 신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로 여겼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문학 차원을 넘어 서구 문화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한다. 호메로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시는 35편이나 되지만, 훼손 없이 온전히 전하는 것은 두 서사시뿐이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벌어지는 전사들의 무용담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었던 모험, 사랑과 방랑 등 파란만장한 여행담이다. ‘일리아스’는 ‘일리온(트로이)의 노래’라는 뜻이고,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의미다.

                                                                                      

                                                             <트로이 유적에 있는 트로이 목마 모형>


 ‘일리아스’의 줄거리는 간단한 편이다. 그리스군 용사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총사령과 아가멤논에게 화가 잔뜩 나서 전투를 거부한 뒤, 여신인 자기 어머니에게 부탁해 자기편이 지도록 일을 꾸민다. 그리스군은 한동안 아킬레우스 없이도 잘 싸우지만 끝내 위기에 처한다. 이를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전투에 뛰어든다.

 

   그는 잠깐 동안 큰 전공을 세우고 적을 격퇴하지만, 헥토르에게 죽고 만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게 방향을 돌린다. 그는 신이 만든 새로운 무장을 하고 친구의 원수를 죽인다.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그는 날마다 헥토르의 시신을 학대하지만, 결국 신들의 중재로 시신을 돌려보낸다.

                                                                                                

                                                                   <오디세이아 이야기 그림>


 ‘오디세이아’의 줄거리는 이렇다. ‘증오 받는 자’라는 뜻을 지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항해에 나선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결정한 그의 운명은 이름처럼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타카 왕인 오디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비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궁전에 몰려들어 그의 재산을 탕진하며 오만방자하게 군다.

 

   오디세우스는 항해 도중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혔다가 불에 달군 말뚝으로 외눈을 찌르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요정 키르케의 마술에 걸려들어 일행이 모두 돼지로 변하는 위기도 겪고, ‘사이렌’이란 말의 어원이 된 세이렌 자매가 사는 바위 옆도 지난다. 폴리페모스를 시각장애인으로 만든 것에 분노한 포세이돈이 풍랑을 일으켜 그를 요정 칼립소의 섬으로 가게 한다. 귀향을 위해 저승까지 찾아갔던 오디세우스는 이후에도 몇 번의 난파와 표류 등 죽을 고비를 넘긴다. 파이아케스인들의 스케리아 섬에서 나우시카 공주에게 구조돼 천신만고 끝에 고향 이타카 섬으로 돌아간다.


 두 서사시 구성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적절하게 평한 사람도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했고, 그 밖에 많은 사건들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실제로 ‘일리아스’는 9년 동안 일어난 일을 단 50일 동안의 사건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오디세이아’ 역시 20년 동안에 있었던 일을 단 40일로 압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일리아스’의 구성은 단순한 반면, ‘오디세이아’는 복잡하다고 분석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에서는 모든 사건이 분노의 모티프(삽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오디세이아’는 여러 모티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두 서사시를 비교하면서 ‘일리아스’는 비극적이고, ‘오디세이아’는 낭만적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일리아스’가 인간의 조건을 보여주는 데 비해, ‘오디세이아’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제시한다는 견해도 있다. 어떤 이는 ‘일리아스’가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인 반면, ‘오디세이아’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에 괴로워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해석한다. 


 두 시의 대조적인 성격 등으로 인해 작가 호메로스와 작품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둘러싼 논쟁들이 끊이지 않는다. 기원전 8세기 전후의 인물로 알려진 호메로스가 실존인물이었는가? 단일 작가인가, 복수의 작가인가? 이 같은 논란은 글자로 옮겨지기 전 입으로만 전해진 구송시(口誦詩) 이론이 자리를 잡으면서 다소 수그러들었다. 누군가가 큰 틀을 잡아놓았지만, 그 재료는 예부터 전해온 것이었다는 주장이 대세가 됐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내용의 중복이 없고, 신들이나 영웅들의 모습도 다르다. 가장 흔한 견해는 ‘일리아스’의 경우 호메로스가 젊었을 때 지은 것이고, ‘오디세이아’는 그의 만년 작품이라는 설이다.


  문자로 전해지는 서양 최초의 문학작품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양의 문화를 언급할 때 언제나 첫 자리에 나온다. 호메로스는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와 함께 서양문학의 4대 작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비극 작품들이 모두 호메로스의 ‘위대한 만찬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단테는 호메로스가 ‘이야기들의 기초를 세운 아버지’라고 규정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부바르와 폐퀴쉐’에 레몽 크노가 붙인 서문에는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디세이아’이다”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다.

                                                                                           

                                                                       <하인리히 슐리만 기념 우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를 “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간직한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은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거울’인 호메로스가 자신의 원초적인 모델이었다. 아일랜드 문호 제임스 조이스는 호메로스로부터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끌어와 소설 주인공으로 삼았다. 20세기 최고의 영어소설로 꼽히는 ‘율리시스’(Ulysses)는 그리스어 오디세우스(Odysseus)의 라틴어, 영어식 표기다.


 두 작품은 지금도 모든 서양 학생들의 교육 자료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지식인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상상력의 보고다. 로마 문학을 대표하는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종합하여 구상했다.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도 호메로스는 피할 수 없는 참고자료였다.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331번이나 전거로 나타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죽음 뒤에 오는 삶에 가치를 두는 것은 호메로스 이후의 발전”이라고 평가한다.

                                                                                          

                                                                        <트로이와 고대 그리스 세계 지도>


 두 서사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 국민의 문학, 교육,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언어, 문학, 조형미술, 나아가 그리스인들의 자의식 형성 토대가 됐다. 로마 시대 이후엔 서사시의 규범이 됐다.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랍을 배경으로 변형된 호메로스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더 큰 변형을 거치면서 에스파냐의 로맨스, 프로방스의 칸초네, 프랑스의 우화시, 독일의 민화가 됐다. 아이슬란드 무용담 ‘외팔이 에길’과 영국 민간우화인 ‘잭과 콩나무’도 이와 흡사하다.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두 서사시가 2차 세계대전 후 대중적 볼거리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가 물속에 있는 나우시카를 엿보는 장면은 스트립쇼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들’로, 키클롭스는 영화 ‘킹콩’으로, 키르케는 빌헬름 파브스트의 영화 ‘아틀란티스의 여왕’에서 안티네아로 바뀐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경멸’은 ‘오디세이아’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 현장에 대한 이야기다.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해 할리우드 정상급 배우들을 등장시킨 영화 ‘트로이’는 2004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극화한 ‘일리아스’의 낭독을 듣기 위해 2005년 9월 무려 3,000여명이 로마 공회당의 가장 큰 극장을 가득 메웠다. 낭독 공연은 3일 밤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힘든 여행의 대명사로 ‘오디세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쓴다. 클래식 오디세이, 우주 오디세이, 과학 오디세이, 논술 오디세이, 미학 오디세이…심지어 한자 오디세이, 금융 오디세이까지. 가히 두 작품을 모르고선 유럽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논어’를 인용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살핀다.”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진정성 있는 조치가 선행되지 않고선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4월 논어의 명구절을 빌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발표한 미·일 공동성명을 비난했다.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넓게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 미·일 안보조약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며 댜오위다오(일본 이름 센카쿠 열도)가 중국에 속한다는 근본적 사실은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이 대목을 들었다.

                                                                                         


  두 사례는 송나라 재상 조보(趙普)가 임종할 무렵 황제 태종에게 아뢰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신에게 논어 한 권이 있사온데 그 반으로 폐하(송나라를 세운 태조를 지칭)를 도와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고, 그 반으로 폐하(태종을 지칭)를 도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훗날 “논어를 절반만 읽으셔도 천하를 다스립니다”라는 말로 단장취의(斷章取義)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조보가 반쪽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말까지 생겨났다.

 

   이를 원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홍정욱 전 국회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을 읽으려면 ‘한비자’를, 사람을 이기려면 ‘손자병법’을, 사람을 다스리려면 ‘논어’를, 사람을 구하려면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는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지배계층의 성전(聖典)으로 통했다.


 논어의 가르침은 ‘인’(仁)이 핵심 개념이다. 공자는 인간이 인을 실천하는 이유는 누구나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장 신임했던 제자 안회(顔回)가 ‘인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답한다.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공자는 사회의 여러 계층을 하나로 결속하는 원리가 인(仁)이라고 여겼다.

                                                                                          

                                                                                     <공자 초상화>


   공자는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려면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예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위정자와 지식인층이 선왕 대대로 전하는 예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논어 안연편 첫 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 이를 ‘사물(四勿)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공자의 보수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논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과 더불어 ‘군자’(君子)다. 두 단어가 각각 109번, 107번이나 언급된다. 공자의 이상적 인간관인 ‘군자’는 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논어가 군자들에게 내리는 생활 지침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자는 논어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 나올 정도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군자는 곧잘 소인(小人)과 대비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군자는 큰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안온한 삶의 터를 생각한다. 군자는 두루 적용되는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작은 혜택을 생각한다.” “군자는 두루 마음 쓰고 편당 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마음 쓰지 아니한다.” “군자는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면서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중국 취푸의 공자묘>


 공자가 내린 소인의 정의에는 성적·계급적 편견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는 게 고문헌·고고학의 대가인 리링 베이징대 교수의 생각이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논어에는 ‘소인’이란 말이 스물네 번 나온다. 평소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려운 시절이 오면 군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을 비유한 대목도 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공자는 군자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든다. “젊어서는 여색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고, 장성해서는 다툼이 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늙어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공자는 ‘정치란 바르게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은 행하고, 그 몸가짐이 부정하면 호령하여도 백성은 따르지 않는다.” “법령으로 지도하고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은 법망을 뚫고 형을 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도덕으로 지도하고 예법으로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은 부정을 수치로 알고 정의를 찾게 된다.” “정치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이 위정자를 믿게 해야 한다. 식량, 군비, 백성의 신뢰 가운데 부득이하게 먼저 버려야 한다면 군비, 식량 순서로 버려라.”

                                                                                              

                                                                                  <공자 사당>


  공자는 중용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항상 중용을 유지할 것을 역설했다. 공자는 ‘중용의 덕’을 최고의 덕이라고 가르친다.


   논어는 인간의 참 본성이 정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 “정직함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 정직은 올바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을 말한다. “임금을 속이지 않으며, 임금의 안색을 거스를지라도 바른말을 해야 한다.” 논어가 강조한 것은 한마디로 안으로 성인이 되는 것과 밖으로 왕도를 실천하는 일이다.


   논어에는 세상 사는 이치나 정치, 문화, 교육 등에 관한 제자들과의 문답, 제자들끼리 나눈 이야기, 공자의 혼잣말, 당대 정치가들이나 평범한 마을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등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공자의 풍모와 성격이 곳곳에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와 제자들이 이야기하던 분위기와 말투까지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성적도>


  ‘논어’의 논(論)은 편집, 어(語)는 어록이란 의미다. 논어는 원래 ‘제논어’(齊論語), ‘노논어’(魯論語), 공자 고택의 벽에서 나온 ‘고논어’(古論語) 세 종류로 전해 오다가 서한 말에 장우(張禹)라는 이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을 만들었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유교문화권에서 논어의 지위는 서양의 성경이나 다름없었다. 2000여 년간 논어는 아무나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면 이단 취급을 받는 것과 흡사하다. 심지어 송나라 주희(朱熹)의 논어 주석본은 원나라 이후 과거 시험의 모범적 교재로 채택돼 다른 학파의 책들과 차별되는 지위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논어보다 한참 아래인 주자의 말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윤휴는 주희 말을 자기 스타일대로 해석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러다 보니 논어는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나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철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논어의 자구 하나로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논어는 다른 고전들과는 달리 읽는 이에 따라 같은 문장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논어 자체가 갖는 함축성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주석서가 나올 수밖에 없다. 주석서로는 하안(何晏)의 논어집해와 주희의 논어집주가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논어집해부터 일본 학자의 설까지 참고해 ‘논어고금주’라는 새로운 주석서를 편찬했다.

                                                                                        

                                                                       <공자가 시용했던 우물>


  동양 문화 속에서 논어는 그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중국과 동아시아 문명에서 공자와 논어가 차지하는 위상은 서양 문명에서 예수와 ‘성경’, 플라톤의 ‘대화록’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려 ‘동아시아 사상사는 논어 다시읽기의 역사’라는 표현도 나왔다.


   논어는 중국의 혼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36년 한나라 무제가 유학을 국정의 지침으로 삼은 이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공자와 논어는 지고의 가치로 숭배됐다. 일본에서는 ‘논어를 읽은 자가 논어를 모른다’는 속담까지 생겨났을 만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서양의 인권혁명을 태동시킨 계몽주의 사상의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논어였다는 견해도 있다.


  공자와 논어는 신해혁명 이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 등의 지식인에 의해 중국의 봉건적 누습의 근원이라고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는 시절이 있었다. 이런 풍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린뱌오와 공자 비판)운동 때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외환위기 직후 한 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부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에서 논어가 수백만 권이 팔리는 등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는 체제안정과 질서유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공자 떠받들기를 하는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논어는 한국에서도 최고 경영자와 학생에 이르기까지 필독서의 하나로 꼽힌다. 서양에서 중국 붐과 함께 논어가 부각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출간된 3000여 종의 관련 저서와 국내외 160여 종의 번역서가 논어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디지털 선지자’로 불리는 미래학자 돈 탭스코트는 2012년 6월 유명한 TED 강연에서 인터넷이 선도하는 미래를 흥미롭게 갈파했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개방성은 세상이 협동, 공유, 투명성, 권력 분산이라는 네 가지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요지다. 진보는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집단 지성의 마법을 역설한 이 강연은 끝부분의 철새 동영상과 이야기가 감동을 더해준다. 수천 마리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찌르레기 떼는 상호협력적인 신호체계에 따라 움직인다. 이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적을 함께 물리치고 날아가는 방향도 협의를 거쳐 결정한다. 찌르레기 떼에 리더십은 있으나 지도자는 따로 없다.


  이 이야기는 110여 년 전 러시아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명저 ‘상호부조론’(원제: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한국어 번역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서 주장한 동물세계의 원리 그대로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주의자들이 역설하는 생존경쟁보다 상호부조가 인류와 동물세계의 진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메시지를 이 책에 담아냈다. 크로포트킨은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가 인류의 문명과 동물의 세계를 이끌어온 힘이라는 점을 동물학, 역사학, 인류학의 해박한 지식으로 입증한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지닌 영국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의 논문에 자극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됐다. 헉슬리가 다윈의 핵심적인 사상보다 용어 몇 개를 가져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에 과학적인 외피를 입힌 사람이라고 크로포트킨은 믿었다. 헉슬리는 1888년 ‘19세기’라는 잡지에 논문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을 발표한다. 헉슬리는 이 논문에서 동물의 세계를 검투장에 비유했다. “그 싸움에서는 가장 강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교활한 자가 살아남아 또 다시 싸운다. 어차피 살려주는 것이 아니기에 관객은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죽이라고 표시할 필요조차 없다.” 헉슬리는 이 논리를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 사회진화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삶은 자유경쟁의 연속이다.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족관계를 넘어서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이론에 따른 투쟁이 존재의 일상상태다.”

                                                                                                


  크로포트킨은 188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죄목으로 5년 금고형을 언도받고 프랑스 클레르보 감옥에 갇힌다. 그는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동안 미뤄뒀던 ‘종의 기원’ 문제를 이 때 되짚어보게 된다. 당시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학장이던 칼 케슬러의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됐다. 캐슬러는 1880년 1월 러시아 박물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상호부조의 법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원고를 통해 종의 생존과 진화에서는 생존경쟁의 법칙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호부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논파했다. 케슬러는 이 논문을 정교하게 가다듬지 못한 채 몇 달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크로포트킨은 1888년 클레르보 감옥에서 석방된 지 한 달 뒤에 나온 헉슬리의 논문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을 읽고 나서 반박논문을 준비했다. 그는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1890~1896년 같은 잡지에 상호부조에 관한 논문들을 잇달아 실어 헉슬리를 논박했다. 이 논문들을 모아 1902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상호부조론’의 1차 목표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생존경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해버렸다. 그들은 동물의 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저작물들은 정복당한 자의 비애라는 슬로건을 마치 근대 생물학의 결정판인양 퍼뜨렸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크로포트킨은 ‘종의 기원’을 접한 뒤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를 탐험하면서 생존경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며 그가 경험한 것은 동물들의 치열하고 냉정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의지하는 상호부조였다. 그는 곤충과 조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들은 종의 경계까지 넘어선 상호부조를 통해 자연이 주는 혹독한 시련을 넘겨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는 대신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이야말로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관찰 결과다. “공동체의 어느 구성원이든 먹이를 달라고 요청하면 나눠주는 것이 개미에게는 의무이기도 하다.” “작은 티티원숭이들은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한다. 몇몇 종들은 부상한 동료들을 끔찍하게 배려하고, 퇴각하는 동안에도 죽었거나 살려낼 희망이 없다고 확인될 때까지 부상한 동료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크로포트킨 초상화>


  크로포트킨은 인간사회에서 상호부조가 형성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붕괴되는 과정까지 꼼꼼히 추적했다. 그는 원시사회의 상호부조를 설명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를 언급한다.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은 공산제를 기반으로 했지만 유럽의 영향을 받은 몇몇 원주민들은 사적 소유를 인정했다. 이들은 지나친 부의 축적이 부족의 단합을 깨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부작용을 방지할 방안으로 포틀래치를 시행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면 씨족 사람들을 성대한 잔치에 불러 모아 실컷 먹인 뒤 전 재산을 모두에게 나눠준다. 그 뒤 잔치 때 입었던 옷을 벗고 낡은 털옷으로 갈아입고는 누구보다 가난해졌지만 우정을 얻게 됐다.”


  크로포트킨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동유럽 등 유럽 전역의 농촌에서 공유제가 존재한다는 점도 눈여겨봤다. 민회가 공유지를 관리하고 촌락공동체가 폭넓은 자치권을 소유하는 스위스를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한다. 당시 스위스에서는 관습적인 상호부조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근대적인 다양한 요구들이 충족되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생존경쟁이 없다는 게 아니라 생존경쟁 외에도 상호부조라는 원리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모두에 맞선 각자의 전쟁은 자연의 유일한 법칙이 아니다. 상호투쟁만큼이나 상호부조 역시 자연의 법칙이다.”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 주면서 그런 습성과 성격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는 상호부조와 개인의 자기주장을 진보의 두 요인으로 꼽는다.


   그는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 만들어낸 상호 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결론짓는다. 크로포트킨은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과학자답게 사변적인 형이상학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자연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상호부조론’은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최초의 연구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나키즘은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동양에서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고, 무질서한 혼란 상태나 극단적 테러리즘이 덧씌워졌다. ‘상호부조론’은 이러한 오해와 비난 속에서 아나키즘을 변호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무정부주의’란 말이 식민지해방운동에 가담한 아나키스트들을 이간질하는 데 쓰였다.

                                                                                                 


  19세기 이래 헉슬리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정치철학으로 이용된 반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피압박 개인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치철학의 바탕이 됐다. ‘상호부조론’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려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응원서로 읽힌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동서 냉전이 격화하면서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던 아나키즘은 1960년대 들어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가 모두 위기에 봉착하자 부활했다. 1968년의 세계적인 혁명 분위기는 ‘상호부조론’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념적 구분을 넘어서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흘러넘쳐 1968년 전 세계의 거리를 장악했던 시위대는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과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동시에 내걸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1980년대 말에도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운동에서, 인간의 자연 지배를 비판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 아나키즘의 상징인 검은 깃발이 펄럭였다.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이후 1%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도 ‘상호부조론’과 맥이 닿는다.


 비슷한 시기에 ‘상호부조론’의 아나키즘은 생태주의, 대안공동체, 대안교육, 빈집점거운동, 반문화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풀뿌리민주주의운동 등을 통해 소생했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지식의 공동소유까지 주장하는 아나코-코뮨주의로 이론화했다.


  그 사이 ‘상호부조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게 쏟아져 나왔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유례없이 격렬해지자 이런 경향은 더욱 깊어져갔다. 많은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상호부조에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국 인류학자 애쉴리 몬타구는 ‘상호부조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격찬한다.

                                                                         

  ‘상호부조론’ 못지않게 크로포트킨의 자서전도 세계적 명저로 꼽힌다. 그의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은 세계 5대 자서전 가운데 하나다. 5대 자서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닉, 자네 책일세! 방금 뉘른베르크에서 도착했어. 완성되었네!” 그러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손은 거의 느낄 수 없는 힘으로 책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몹시 애쓰는 목소리로 말했다. “완성되었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열락(悅樂)의 빛이 창백하고 야윈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성-되었어!” 그는 들릴듯말듯한 소리로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다. 얼마 후 그의 머리가 갑자기 홱 떨어졌다. “돌아가셨습니다.” 방안의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죽다니? 아니야, 코페르니쿠스 같은 사람이 죽을 수는 없어! 그는 이 책 속에서 살아 있어!”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데이바 소벨, 웅진지식하우스)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과학혁명의 서막을 연 역작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원제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로 막 출간되던 1543년 5월24일 세상을 하직한다.

 

   책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 공교롭게 교차한 것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과학 암흑기인 중세에는 조그마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열심히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무엄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회전한다는 우아하고 장엄한 성경의 세계관에 비기면 지나치게 ‘혁명적’이었다.

                                                                         

                                          <폴란드 크라쿠프대학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동상>

                  

  코페르니쿠스는 이 책이 나오기 30여 년 전 지동설을 처음 떠올리고 20여 년 뒤 원고를 완성했으나, 종교계의 저항과 탄압이 두려워 출판을 꺼렸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의 언급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대한 개신교계의 애절한 저항 가운데 하나다. “어떤 신출내기 천문학자가 이 하늘, 해, 달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것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바보는 모든 천문학을 반대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신성한 성경에서 이르기를 여호수아는 지구가 아닌 태양에게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출간 당시 분위기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내용 자체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으로 가득하다. 수리천문학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지독하게 난삽한 천문서였기 때문이다. 천문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오언 깅거리치 전 하버드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태양 중심 우주론을 다룬 첫 5퍼센트 정도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씌어졌으나 나머지 95퍼센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전문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는 구형이다’ ‘지구도 역시 구형이다’ ‘땅과 물이 어떻게 하나의 구체를 형성하는가’ ‘지구의 세 가지 운동의 증명’ 등을 통해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는 걸 논증했다. 지구의 세 가지 운동설은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1년에 한번 공전하고, 지구 축이 회전한다는 내용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다른 행성과의 관계 속에서 수학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했던 지구 중심 체계와 ‘지구-달-금성-수성-태양-화성-목성-토성’이라는 천체 순서를 부인했다. 태양 중심 체계에 따라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의 순서를 주장했다. 완벽한 구 모양을 띤 모든 천체들이 일정한 중심을 지니고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이론도 들어 있다.

 

  지축의 선회운동에 의한 세차 운동을 포함한 지구의 운동, 춘분점의 이동에 대한 수학적인 설명도 담았다. 달의 운동과 행성들의 경도 방향 운동, 행성들의 위도 방향 운동에 대해서도 증명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는 현대에 밝혀진 오류들도 있지만, 훗날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타원운동을 체계화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단점을 보완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더욱 정밀한 관측으로 지동설을 뒷받침했다.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의해 마침내 지동설은 정설로 굳어지게 됐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관측 사실과 전통적 학설의 불일치 때문이었다. 새로운 천체관을 찾던 그는 고대 문헌으로부터 지동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계 위성 순서>

 

   이 책에는 천문학적 내용 외에 교황과 교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글들이 많이 담겨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이 책을 출판하며, 교회가 곤란해 하던 역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애써 강조한다. 그 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에서 교회와 논쟁거리가 될 만한 내용은 모두 뺐다.

 

   코페르니쿠스의 서문과 교황에 대한 헌정사를 읽으면 이 책 곳곳에서 이단으로 몰리지 않으려는 과학자의 눈물겨운 고뇌가 엿보인다. 교회의 위협을 우려한 인쇄업자는 서문을 ‘이것은 하나의 가설이다’라고 바꾸어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루터파 교인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결정적인 이유는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 사제였기 때문이다.

 

 저명한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아서 케스틀러는 ‘몽유병자들’(1959년)이라는 책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역사상 가장 판매가 신통치 않은 책’이라고 낙인찍는 것으로 부족해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지나치게 어려웠던 탓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 스스로도 책에 모순되는 부분이 많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아 자신의 대작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 초상>

    이를 염려해온 그의 유일한 제자 레티쿠스는 스승에게 책의 출판을 설득하기 위해 3년 앞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펴낸다. 이 소책자는 은밀하면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이듬해 재판이 발행된다. 레티쿠스는 출판을 망설이는 스승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인쇄업자인 뉘른베르크의 페트레이우스에게 최종 원고를 가지고 간다. 세상을 바꾼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세상으로 나온다.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기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은 초판 400부도 다 팔리지 않았다. “구입해서 읽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무색하게 당시의 독자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은 케플러, 갈릴레이, 튀코 브라헤 같은 천문학자와 출판업자 9명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이런 평가에 대해 깅거리치 전 하버드대 교수는 여러 가지 증거를 대며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한다. 케스틀러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한 별명을 제목으로 쓴 책에서 깅거리치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정말 그런지 여러 나라 도서관을 돌며 검증을 시도한다. 깅거리치는 갈릴레이와 케플러, 미하엘 마에스틀린 같은 일급 천문학자들이 소유하고 메모가 적힌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소개하면서 천문학자들 사이의 격렬한 다툼과 더불어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교회가 벌인 검열의 흔적까지 있음을 알려준다.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 더불어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결론은 과학 역사뿐만아니라 인류의 삶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획기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를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처음 사용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는 이제 세계인의 화두가 될 정도다. 칸트는 인식이 대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 구성에 근거한다는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서양이 신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책이 바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다. 이 책은 우주에서 신을 제거하고 우주와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을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성서에 따라 우주를 해석하고 과학을 말하던 세계에 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상상이 개입되면서 새로운 과학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지동설에 대한 독일 문호 괴테의 언급이 흥미롭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동상>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한 ‘회전’이란 용어 ‘Revolution’은 훗날 ‘혁명’이라는 정치사회적 단어로 변용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회전, 순환, 주기, 반복 등의 뜻을 지녔으나 천체의 회전처럼 정치사회적 변화도 어떤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일로 보고 비유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Revolution’을 혁명이라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한 게 17세기에 일어난 영국 명예혁명부터였다고 말한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당부한 코페르니쿠스의 친구 앤드류 오시안더 서문 때문인지 가톨릭 교계에서도 이 책이 나온 직후에는 위협이 있었을 뿐 금서조치는 없었다. 외려 루터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의 위협이 더 컸다. 하지만 지동설을 입증하는 학설이 난무하자 교황청은 1616년 마침내 이 책을 금서목록으로 지정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70여 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교황청은 ‘움직일 수 없는 과학’으로 증명된 1835년에 들어서야 금서에서 해제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후 시대에도 허상 바로잡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인식을 대중들까지 올바르게 고치는데 3세기나 지나야 했다. 올바른 과학을 규탄당한 코페르니쿠스가 복권되는데 5세기가 걸린다. 로마 가톨릭이 지동설과 관련된 오류를 인정한 것은 1992년의 일이다.

 

  1543년에 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초판본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이라는 진기록도 갖게 됐다. 2008년 6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221만500달러(약 22억6700만원)에 팔렸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밝혀냈소! 드디어 해냈단 말이오.” 1953년 겨울 끝자락인 2월 21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연구소 근처 이글 식당에 단골 청년이 들어서자마자 들뜬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뒤따라 들어온 다른 청년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이 함께 발견한 사실이 중대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떠들어대면 위험부담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흥분한 청년은 서른일곱 살의 영국 분자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고, 멀뚱멀뚱했던 청년은 갓 스물다섯 살의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이었다. 이들이 바로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발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디옥시리보핵산(DNA)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한 학자다. 이 발견은 물리학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버금가는 생물학의 쾌거다. 이들의 발견은 엄청난 폭발력을 분출했다. 인간 유전자의 비밀이 밝혀짐에 따라 전 세계에 DNA 연구 열풍이 일어났고, 생명과학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거듭했다.

 

   이들의 발견은 같은 해 4월 25일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900단어 남짓하고 1쪽에 불과한 논문으로 발표돼 세상을 뒤흔들었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 발견’이라는 제목의 이 짧은 논문은 두 사람을 최고 과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여기에 DNA의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구조는 생물학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 그 논문은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단서가 됐던 ‘로제타스톤’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썼다. 이들은 9년 뒤인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을 받은 지 6년 후인 1968년 왓슨은 DNA 구조 발견의 전말을 소설처럼 쓴 책을 단독으로 펴냈다. ‘이중나선’(원제 The Double Helix: A Personal Account of the Discovery of the Structure of DNA)이란 제목의 이 책은 마치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DNA 구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그리 많지 않다. 책에는 위대한 발견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뒷담화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왓슨은 연구 업적을 앞 다퉈 이뤄내기 위해 과학자들끼리 펼치는 치열한 신경전과 암투, 갈등, 속임수, 실패와 좌절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지은이 특유의 직설과 유머가 포개져 과학에 대한 재미까지 돋운다.

 

   이 책에는 연구에 대한 왓슨의 몰입과 집착이 남다르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영화 관람을 무척 즐긴 왓슨은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DNA 모형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난방장치가 고장 난 기차에서도 DNA에 몰두했다. “추위에 떨던 나는 신문지를 덮었고, 그 여백에 낙서를 시작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DNA가 두 가닥으로 엮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는 훗날 노벨상 공동 수상자가 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누이동생 엘리자베스 왓슨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미인계를 꿈꿨다. ‘두 사람이 사귀면 윌킨스와 더불어 DNA에 관한 X선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하고 상상하는 장면은 상식 수준을 넘어선 성취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다.

 

   그는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즐길 줄 아는 성격을 지녀 난관을 무리 없이 돌파한 것 같다고 털어놓으면서 과학자로서의 미래를 낙관한다. “과학자의 생활이란 게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퍽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책은 과학자로 성공하는 비결의 하나에 사교성이 포함된다는 걸 은근히 드러낸다. 왓슨은 뛰어난 두뇌, 성실, 신중을 강조하지 않았다. 왓슨은 남들이 자신을 돕도록 했다고 썼다.

 

    실제로 고독하게 연구실에 틀어박혀 실험만 하고, 너무나 뛰어나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거나, 젊은이의 창의력과 의욕을 무시한 사람은 경쟁에서 졌다. 반면 왓슨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었다. 경쟁자든, 자신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다가가 정보를 얻고 의견도 구했다. 책에 동료 과학자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과는 상반된다.

                                                                 

 

<제임스 왓슨(왼쪽)과 프랜시스 크릭>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과정에는 전설적인 성공담만 있는 건 아니다. ‘이중나선’은 왓슨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책이지만,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 저작이기도 하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왓슨은 글의 들머리에서 대뜸 공동연구자였던 크릭이 겸손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촌평하며 시작한다.

 

   왓슨은 결정학 분야의 선구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성격이 괴팍하고 데이터 분석능력이 떨어지는 여성학자로 묘사해 유족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프랭클린은 당시 가장 해상도 높은 DNA의 X선 사진을 찍었던 과학자다. 왓슨은 프랭클린이 킹스 대학 여성 휴게실의 열악한 환경에 불만이 많았고, 그런 사소한 일을 못 견뎌했다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불만은 더 나은 휴게실을 제공받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서, 여성 과학자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프랭클린이 안경을 벗고 머리를 조금만 우아하게 손질하면 어떤 모습일지를 연상하는 대목에서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까지 드러난다. 프랭클린은 1958년 암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1962년 왓슨과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연구업적을 쌓은 그의 공로가 파묻혔다. 왓슨과 크릭이 사실상 참고한 결정적인 실험 데이터는 윌킨스가 사적으로 보여준 프랭클린의 사진이었음에도, 이들은 공식적으로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책이 당초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하기로 했다가 취소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같은 서술에 대한 세간의 거센 비판도 있었다. 왓슨은 프랭클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후기를 덧붙였다.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

 

 왓슨은 한참 뒤 인종 차별 논란에도 휩싸인다. 그는 2007년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생명과학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들’이라는 또 다른 회고록을 냈다. 그는 이 책을 홍보하던 도중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 흑인들이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추론이 가능한 언급이었다. 이 때문에 79세의 나이에 43년간 일했던 연구소를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솔직함이 왓슨을 깎아내리지는 못했다.

 

   왓슨은 대학생 때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어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은 뒤 유전학의 비전을 알게 되고, 이때 과감한 진로 결정을 내렸다고 회고한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은 최종적으로는 물리학 또는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DNA 이중나선 구조 모델은 오늘날에도 별로 고칠 것이 없다. 왓슨은 “이중나선에서 시작된 생명과학의 새로운 지식은 인류의 삶을 한 단계 진전시킨 강력한 힘이 됐다”고 자부한다. 지름이 10억 분의 1m도 되지 않는 DNA가 인류와 과학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흥분시킬만했다. 호박만한 토마토가 탄생한 것도, 유전자를 분석해 범인을 잡게 된 것도 모두 DNA 구조가 밝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전 정보의 흐름을 제시하는 이론인 센트럴 도그마, 돌연변이설, 인간 유전체(게놈)지도 완성 같은 현대 생물학의 중요한 개념과 사건이 모두 DNA 구조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됐다. 최근에는 1g에 DVD 50만장의 정보를 수록할 수 있는 ‘정보저장 DNA’가 개발돼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인간과 동식물의 유전자 구조를 해독해냄으로 암, 심장병, 당뇨, 혈우병 같은 치명적 질환에 대한 유전자 치료법이 가능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 복제’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불러오기도 했다.

                                                               

                                                       <DNA이중나선 구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저자와 세상을 동시에 바꿔 놓았다. 왓슨 자신이 대중적인 스타 과학자가 된 것은 물론, 과학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도 관심을 유도한 공로가 지대하다. 왓슨처럼 글쓰기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왓슨은 이 작은 책으로 유전자 과학의 흥미진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 덕에 대중은 훨씬 더 과학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중나선’의 이중효과다. 이 같은 개인적인 유명세와 대중의 이해가 훗날 그가 인간유전체(게놈) 연구에 엄청난 예산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왓슨보다 12살 많은 공동 연구자 크릭이 더 비상한 통찰력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DNA구조 발견 이야기를 할 때 크릭보다 왓슨이 먼저 떠오르는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보통 사람들은 왓슨만 기억한다. 그가 1990년대 게놈프로젝트의 기수로 미국 생물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학자가 된 것은 연구업적뿐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왓슨이 더 각광받은 것은 이 책이 그를 인간미 넘치는 과학자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수많은 젊은 지성들이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몰려든 것은 오로지 이 책 때문이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과학자를 꿈꾸게 만들었다. 과학계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중나선’이 스테디셀러가 된 까닭은 장차 과학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과학자와 연구의 본질, 과학자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덕택이다.

 

  왓슨은 2007년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생명공학기업 454라이프사이언시스가 인류 최초로 한 사람의 전체 유전코드를 읽어냈다. 그 유전코드의 주인공이 왓슨이었다. 크릭은 200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분자생물학계의 성난 황소’라는 별명까지 얻은 왓슨은 여전히 건재해 이따금 언론에 오르내린다.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연구하면서 논문을 발표하고 있어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5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중국에는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 친구가 되지 말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싸우지 마라’는 속설이 있다. ‘삼국지를 열 번 읽으면 물 위를 걸어 다닌다’는 신화 같은 얘기도 전한다. ‘30대가 넘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마라’는 경구도 존재한다. 삼국지가 인간 세계의 권모술수와 인생의 모든 것이 농축돼 있는 명저임을 일깨우는 금언이다.


 삼국지에 비견되는 격언이 따라다니는 책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을 천 번 읽으면 신과 통하는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성공한 기업가 중에는 실제로 ‘손자병법’을 천 번 이상 읽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도 떠돈다.

 

   과거 행적 때문에 낙마한 박근혜 정부의 첫 국방장관 후보자 김병관 예비역 4성장군의 프로필에서 ‘손자병법을 3백번 읽은 ‘병법의 대가’에다 해설서까지 집필했다’는 대목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그런가 하면 국방부장관 출신인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손자병법을 보면...”이라는 비유화법을 즐겨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단장 시절 장병들에게 손자병법 교육을 많이 시킨 것으로 소문난 김 실장은 손자병법 13편 ‘용간’(用間) 3619자를 송두리째 외웠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손자병법’은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무(孫武)가 오나라 왕 합려(闔閭)의 초빙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강론한 열세편의 병법서다. 합려는 이 책을 읽고 3만의 군사로 30만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는 등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손자는 손무를 높여 부르는 칭호다.


   합려가 손무의 실력을 검증한 뒤 기용한 에피소드는 매우 흥미롭다. 손무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합려는 병서 강의가 아니라 현장 지휘 능력을 보고 싶었다. 이때 손무는 궁녀들을 대상으로 삼아 병법의 효험을 시범했다.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궁녀들을 데리고 지휘하겠다니 합려와 주변에서는 당연히 실패할 것이라고 여겼다. 손무는 180명의 궁녀를 두 편으로 나눴다. 그 중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을 지휘자로 임명했다. 손무는 궁녀들에게 좌향좌, 우향우 등 기본적인 제식 훈련 동작을 가르치고 명령대로 따라 하라고 지시했다. 사전에 동작 요령을 알려주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도끼로 처형한다는 규칙을 충분히 설명했다. 궁녀들은 키득키득 웃기만 할뿐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손무는 다시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궁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손무는 “명령이 불명확할 때는 장수가 책임을 지지만 반복해 명확히 설명했는데도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지휘자의 책임”이라면서 두 지휘자의 목을 쳤다. 그 후 다른 두 사람을 새 지휘자로 임명하고 명령을 내렸더니 궁녀들은 군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베이징 텐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


 ‘손자병법’은 인류 최고의 병법서로 통한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대목이다. 중국 혁명가 마오쩌둥(毛澤東)이 가장 좋아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는 공산당 정부를 수립한 뒤 서양 정치인들을 만나 글을 써줄 때 이 구절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이 말은 흔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바꿔 쓰이곤 한다.


  ‘손자병법’은 역설적이게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전쟁은 나라의 대사이다. 전쟁에서 최하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고, 최상책은 모략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 책은 전쟁에 이기는 법을 다섯 가지로 명쾌하게 제시한다. 첫째, 싸움을 할 수 있는 경우와 싸울 수 없는 경우를 잘 분간하는 일이다. 둘째, 적을 공격할 때 얼마만한 병력을 동원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계량하는 것이다. 셋째,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한다. 넷째,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지휘관이 풍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손자병법 영문판>


   손무는 먼저 전쟁에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그것이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에 어떤 부정적 파급 효과를 낳는지 매우 치밀하게 계산해냈다. 전쟁과 경제의 상관성이다. 그는 이를 토대로 전쟁 개시 시점, 전장 선택, 전투 유형, 전쟁 기간, 종전 결정을 내릴 때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


   손무는 지도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한마음을 갖고 전쟁을 벌이도록 하는 사회적 결속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는 군사학에 뛰어난 것은 물론 지리, 재정, 경제 같은 분야도 탁월했다.


   이 책은 장수의 자질로 지혜, 믿음, 어짊, 용기, 엄격함을 들었다. 현대의 리더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과 일맥상통한다. 손자병법에는 네 종류의 장수가 등장한다.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은 덕장(德將)보다 한 수 아래이며, 덕장도 복장(福將)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 복장은 운장(運將)을 뜻한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손자병법’ 열세 편 가운데 마지막은 간첩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다룬 ‘용간’(用間)편이다. 김장수 실장이 깡그리 외웠다는 바로 그 곳이다.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쏟아 붓는 전쟁을 치르면서 적에 관한 정보를 모르는 장수는 군사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에 장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 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 간첩의 활용을 강조한 것이다. 간첩은 현지 민간인 첩자인 인간(因間), 적의 관료를 스파이로 쓰는 내간(內間),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이중간첩인 반간(反間), 적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의 거짓정보를 흘리는 사간(死間), 적진에서 살아 돌아와 보고하는 파견간첩인 생간(生間) 등 다섯으로 나뉜다. 손무가 이 가운데 가장 중시한 것은 반간이다. 반간을 통해 인간·내간을 얻을 수 있고, 사간 작전도 벌일 수 있으며, 생간의 안전 생환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탁월한 지혜가 없으면 간첩을 쓸 수 없고, 백성에 대한 사랑과 정의로운 목적이 없으면 간첩을 부릴 수 없으며, 미묘한 판단력이 없으면 첩보에서 참된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


   ‘시작은 처녀처럼 마무리는 달아나는 토끼처럼’이라는 손자병법의 구절은 전쟁이든 무엇이든 시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인상 깊은 대목의 하나는 전쟁에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군주의 명이라도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허허실실 전략도 유명하다. “전쟁에서 한 번 승리한 계책은 되풀이하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시켜 형세에 대응해야 한다.” “예상을 뒤엎어 공격하고 수비하라.” “가기 좋은 길은 도리어 나쁜 길이다.”


   오늘날 우리가 ‘손자병법’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삼국지의 영웅’ 조조가 남긴 책 덕분이라고 한다. 조조는 중복이 되는 부분을 정리하고 나름의 해석을 붙인 다음 유산으로 남겼다. ‘손자병법’에 처음 주석을 붙인 것도 조조가 쓴 ‘손자약해(孫子略解)’다. 조조는 손자약해 서문에서 “내가 병서와 전쟁 계책을 많이 보았지만 손무가 쓴 책이 가장 깊이가 있다. 자세히 계획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분명하게 꾀해야 한다고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썼다. 중국 고문헌·고고학의 대가 리링 교수는 2000여 년 전 조조가 해설한 대목 가운데 손자 13편이 압권이라고 평한다. 불멸의 명저 ‘사기’를 쓴 사마천도 “세상에서 병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자 13편’을 들먹인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공자를 문성(文聖), 손자를 무성(武聖)으로 꼽아 문무 양대 산맥으로 기린다.


   ‘손자병법’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1936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의 추격으로 시골 오지인 옌안까지 쫓겨 간 마오쩌둥은 동지이자 참모였던 예젠잉(葉劍英)을 화급히 불렀다. 그 명령 가운데는 손자병법 책을 구하라는 것도 있었다.


   중국 해군은 올 들어 병사들에게 현대 해상 분쟁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손자병법’을 가르친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난세의 영웅 조조, 당 태종, 명대 유학자 왕양명 등도 이 책을 탐독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썼다.


  서기 717년 중국에 왔던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된 ‘손자병법’은 일본 왕실의 비서(秘書)로 전해오다가 300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무예를 숭상했던 일본문화에서 ‘손자병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손자병법’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병서 가운데 하나다. 전쟁영웅 나폴레옹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빌헬름 황제가 이 병서를 읽은 후 “1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하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이 1990년대 초 이라크와의 걸프전 지상전에 참여하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90쪽짜리 ‘손자병법’을 필독서로 나눠 줬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았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손자병법’은 6200여자에 불과하지만 간결한 단어에 승패와 운명의 변화 원리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압축한 전쟁의 고전이다. 단순히 전쟁의 지혜를 넘어 인간 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전해준다. 이 책은 전쟁의 자잘한 수행이 아니라, 전쟁의 준비에만 여섯 편을 할애하고 있다. 전체가 열 세편임을 고려하면,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전쟁 준비에 관한 내용이어서 경영에서도 지혜를 얻을 게 숱하다.


 이 때문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같은 이는 ‘손자병법’을 머리맡에 두고 경영전략서로 활용할 정도다. 마쓰시다전기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직원들에게 반드시 ‘손자병법’을 읽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의사·기업가 출신의 정치가 안철수 의원도 ‘손자병법’을 미국 유학 시절 백번 넘게 읽었다고 그의 부친이 소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손자병법을 ‘선거’에 악용해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것이나, 경영에 비도덕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손무가 말한 전쟁의 철학에 어긋난다.


 ‘손자병법’은 과거엔 전쟁의 역사와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기업과 경영, 조직관리의 보감(寶鑑) 역할도 톡톡히 하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4.05.01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여 년 전 화제를 모았던 KBS 역사드라마 ‘제국의 아침’에는 고려 광종이 즉위 직후 신료 유신성으로부터 중국 고전 ‘한비자’(韓非子)를 전해 받는 장면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개혁군주인 광종은 ‘제왕학의 성전’으로 불리는 ‘한비자’를 읽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글이야.” 그는 고려 건국 초기 중앙집권체제와 왕권 강화를 위해 과단성 있는 개혁정책을 펼친다.


  ‘제국의 아침’이 방영될 무렵 때마침 16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노무현 당선자는 이상수 민주당 사무총장으로부터 ‘한비자’의 한 대목을 유념하라는 충언을 듣는다. “한비자에는 군주가 인사권을 남에게 이양하면 안 되며, 끝까지 인사비밀을 지켜야 신하들이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행위를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노 대통령 취임 직후에는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한비자’에 나오는 신하들의 여덟 가지 간사한 행동(팔간·八姦)을 경계하라는 칼럼을 한 일간지에 써 눈길을 끌었다.


  ‘한비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더불어 통치술의 명저로 꼽힌다. 제대로 된 군주라면 법(法)·술(術)·세(勢)라는 세 가지 통치도구를 모두 갖춰야 한다고 한비는 주문한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규칙이며, ‘술’은 소통 능력, ‘세’는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일컫는다.

                                                                    

 

   제자백가의 한 유파인 법가(法家)에는 한비가 나오기 전 세 갈래의 큰 학파가 있었다. 법을 강조한 상앙, 술을 역설한 신불해, 세를 강조한 신도가 그들이다. 상앙이 주창한 ‘법’은 백성들의 사익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뜻한다. 신불해의 ‘술’은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굳게 다지는 인사정책이다. 신도의 ‘세’는 군주만이 갖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를 의미한다.


 ‘한비자’는 군주의 권력 유지를 위한 법치 리더십의 원조 격이다. 군주가 공포한 법은 지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행위준칙이다. “법은 어떤 귀함도 없고, 먹줄은 나무가 굽었다고 해서 구부려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법은 만인에게 두루 적용되지만 군주는 예외다. ‘예는 일반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형벌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유가(儒家)의 입장보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이 책은 법을 이렇게 정의한다. “거울은 맑음을 지키는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아야 아름다움과 추함을 있는 그대로 비교할 수 있고, 저울은 균형을 지키는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아야 가벼움과 무거움을 있는 그대로 달 수 있다. 만약 거울이 움직인다면 대상을 밝게 비출 수 없고, 저울이 움직인다면 대상을 바르게 달 수 없는 것이다. 법이 바로 이런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초상>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신상필벌’(信賞必罰)로 요약할 수 있다. ‘한비자’는 상과 벌을 두 개의 칼자루에 비유하며, 상벌 권한을 함께 구사해야 명실상부한 군주로 군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작은 신의가 성취되면 큰 신의가 확립된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신의를 지키어 쌓는다. 상벌을 행함에 신의가 없으면 금지나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한비자’는 힘에 의존하는 것을 마다하고 덕을 베풀어 백성을 감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환상이며, 오로지 빈틈없이 권력체계를 정비하는 길이 통치의 요체라고 일깨운다.


 이 책은 국가의 흥망에 관해 이렇게 주장한다. “항상 강한 나라도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자가 강하면 나라가 강하게 되고 법을 받드는 자가 약하면 나라도 약해진다.”


   ‘한비자’는 신하를 다루는 세 가지 책략을 제시했다. 독단독람(獨斷獨攬)은 왕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신하에게는 단지 간언만 허락할 뿐 어떠한 권한도 나누어주지 않은 것을 뜻한다. 심장불노(心藏不露)는 왕이 자기의 견해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감춰서 남들로 하여금 도무지 자기의 생각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참험고찰(參驗考察)은 신하들의 과거와 현재, 성격의 특징과 심리상태를 조사·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조국 교수가 경계하라고 건의했다는 ‘팔간’은 나쁜 신하가 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다. 잠자리를 함께 하는 부인과 후궁 같은 동상(同床), 군주를 가까이 모시는 측근인 재방(在傍), 뇌물 청탁의 대상이 되는 친인척인 부형(父兄),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과중한 세금을 걷어 군주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자신의 사익을 취하는 양앙(養殃), 국가 재산을 함부로 사용해 백성을 일시적으로 즐겁게 하고 군주가 아닌 자신을 칭송하게 만드는 민맹(民萌), 교묘한 언설로 군주의 판단을 흐리는 유행(流行), 위세를 빌려 권력을 휘두르는 위강(威强), 주변국 외세를 빌리려는 사방(四方)이 그것이다.


   군주가 저지를 수 있는 열 가지 과오((十過)도 열거했다. 작은 충성, 작은 이익, 편협한 행실, 음악에 빠지는 것, 탐욕스럽고 괴팍한 것, 여색을 탐하는 것, 궁궐을 떠나 멀리 유람하는 것, 충신의 간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는 것, 작고 힘없는 나라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 등이다.

  ‘한비자’는 “시대가 다르면 일도 다르다”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방책도 달라져야 한다고 설파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즐겨 인용하는 ‘증자(曾子)의 돼지’고사도 ‘한비자’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아내가 장을 보러 가려고하자 아이가 울면서 따라가겠다고 보챘다. 아내가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줄 테니 집에 있으라’고 달래자 아이는 말을 들었다. 아내가 시장에서 돌아오자 증자는 돼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 ‘아이를 달래려 한 말인데 정말 잡으면 어떡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증자는 ‘아이에게 속임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어미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이 어미를 믿지 않게 된다’며 돼지를 잡았다는 일화다. 위나라 문후가 산지기와 사냥을 가겠다고 약속한 뒤 폭풍우가 몰아쳐 신하들이 만류했음에도 친히 사냥터까지 나가 애초의 약속을 지켰다는 예화도 마찬가지다.


   ‘한비자’는 원래 ‘한자(韓子)’라고 불렸다. 송나라 이후 당나라 때 학자 한유(韓愈)를 ‘한자(韓子)’라 부르게 되자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약소국이었던 한나라 출신인 한비는 자신을 몰라주는 군왕과 세상에 대한 울분을 ‘한비자’에 담았다. 한비는 조국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왕에게 글로 간언했지만 발탁되지 못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작은 나라 피렌체 출신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것과 흡사하다. 한비는 말재주가 없었지만 문장력만은 뛰어나 설화, 우화 같은 것을 두루 인용해 감동을 이끌어내는 책을 완성했다.


   ‘한비자’가 세상에 처음 나오자 가장 감명을 받은 이는 한나라 왕이 아니라 진나라 시황제였다. 막강한 왕권을 꿈꾼 진시황은 유가 사상을 비난하며 법치를 중시한 이 책을 읽고 무릎을 쳤다. “아아! 과인이 이 사람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중국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하기 전 진시황은 ‘한비자’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漢)나라 때 철학자인 왕충(王充)은 ‘논형’(論衡)이라는 책에서 한비의 조국 한(韓)나라가 망하고 적국인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한비 주장의 수용 여부에서 비롯된 차이라고 분석했다.


  한비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동문수학했던 친구 이사의 모함으로 옥중에서 독살됐다. 불운하게 삶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책은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한비자’는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제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탄생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그 뒤를 이은 역대 중국 왕조의 현실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비자’는 삼국시대 당시 재사 제갈공명이 죽으면서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글에서 반드시 숙독할 것을 권한 책이기도 하다. ‘난세에는 형벌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천명한 조조, ‘안정된 국가는 예로 통치하고, 혼란한 국가는 법으로 통치한다’고 말한 전진 시대의 왕맹(王猛), ‘죄를 지은 자는 마땅히 벌한다’는 철학으로 통치한 북송의 포증(包拯)도 ‘한비자’를 따랐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이 책을 탐독한 대표적인 군주다.

                                                                                            

                                                                <이병철 이건희 회장 부자 자료 사진>


   ‘한비자’는 현대에 와서도 중국 지도자의 서가에서 빠지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마오쩌둥이 열독했고, 시진핑 국가 주석은 ‘한비자’를 거푸 인용하며 법치주의 국정운영방침을 내걸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1800년이나 앞선 ‘한비자’가 표방한 법치주의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더불어 동북아시아를 움직여온 양대 정치사상이다.


   ‘한비자’는 군주의 통치를 위한 것이지 일반 백성을 위해 쓴 게 아니다. ‘한비자’의 법치사상과 근대 서양의 법치주의는 엄청난 거리감이 존재한다. 한비의 사상은 ‘법에 의한 통치’라기보다 ‘법에 의한 통제’에 가깝다. 법으로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사상이 아니다. 서양의 법치사상은 왕권에 대항해 왕권을 약화하는 기능을 했다.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본질을 분석하고, 군주의 권력유지 방도를 제시해 제왕들의 대환영을 받은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선 한동안 ‘한비자’를 악의 책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한비자’는 오늘날 조직 관리의 리더십으로 확장된다.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도 현대 기업 관리에 ‘한비자’ 사상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도 ‘한비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병철 경영철학의 핵심인 사업보국과 인재제일주의는 ‘한비자’의 부국강병과 용인술과 맞닿는다. 이건희 회장이 임원 필독서로 ‘한비자’를 권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비는 삼류 지도자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고, 이류 지도자는 남의 힘을 사용하고, 일류 지도자는 남의 지혜를 사용한다고 가르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차닐 2015.07.03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읽고 퍼갑니다


 

 19세기 중반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 때 한 편의 연애소설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로맨스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시대의 자유와 혁명을 읊조리고 있었다.

 

    사회적 반향은 실로 엄청났다. 시대와 삶에 질문을 던지던 청년들은 안정된 집을 박차고 나와 소설 등장인물들의 행동 방식을 모방했다. 이 소설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랑과 혁명, 진보와 인간애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대위의 딸’,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인민주의 혁명가 체르니셰프스키는 이 소설도 옥중에서 탈고했다.


  혁명을 꿈꾸던 청년 니콜라이 레닌도 여느 러시아 청년들이 그랬듯이 이 소설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이 소설이 나온 지 꼭 40년이 되던 1902년 레닌은 똑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이 책은 당신의 전 생애를 내걸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소설”이라는 극찬과 함께. 정치 팸플릿인 레닌의 책 ‘무엇을 할 것인가?’((원제 Что делать?)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고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숙독해야할 ‘혁명교과서’가 됐다.

                                                                                                 

   
  레닌이 서른두 살에 내놓은 이 책은 대중들의 자생성에 의존하는 조합주의적 경제투쟁을 비판하면서 의식성과 정치투쟁을 강경한 목소리로 설파한다.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소수정예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이 나서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확고하게 심어줘야 한다는 게 주장의 고갱이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노동자들에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직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을 뿐이었다.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의식, 즉 조합으로 단결하여 고용주들과 투쟁하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이러저러한 법률들을 정부가 제정하도록 하는 등등의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모든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사회주의 학설이라는 것은 유산 계급의 교육 받은 대표자들, 즉 지식인들이 일궈 낸 철학, 역사, 경제 이론들에서 자라난 것이다.”


 

  레닌이 이 책에서 주로 공격하고 있는 경제주의자들은 단순히 ‘경제투쟁’만을 중요시하는 노동조합주의 정치가들이었다. 레닌은 이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마치 자신들이 아메리카 대륙이라도 발견한 듯이 당신들이 떠벌리며 열중하고 있는 바로 그 ‘고용주의 정부에 대한 노동자의 경제투쟁’이라는 것은, 러시아 벽촌의 대중들 가운데서 파업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사회주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하고 있는 일 아닌가. 우리는 ‘경제적’ 정치라는 죽 하나만으로 먹여 키울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인들이 우리 스스로도 아는 일을 반복해서 말하지 말고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공장의 경험과 ‘경제적’ 경험으로는 스스로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 바로 정치적 지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 많이 제공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레닌은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인민주의 노선(브나로드 운동)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혁명의 싹을 찾았다. 더욱 중요한 건 프롤레타리아의 ‘자생적 의식’을 지도하는 혁명 전위를 앞세웠다는 사실이다. 레닌의 전위주의는 이후 20세기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이 됐다. 프롤레타리아 바깥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가르치는 지도부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중앙에 권력이 집중돼야 한다는 ‘중앙집중주의’로 이어졌다.


   레닌은 여기서 이론 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혁명적 이론이 없다면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실천 활동의 가장 협소한 형태에 매몰되는 것이 기회주의의 최신 유행 설교와 서로 얼싸안고 있는 시기에, 이러한 생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이론의 중요성은 사람들이 자주 잊고 있는 또 다른 세 가지 상황에 의해 더욱 커지고 있다. 첫째, 우리 당은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제 면모를 갖춰 가고 있으며, 운동을 올바른 길에서 끌어내릴 위험이 있는 다른 경향의 혁명 사상들과 결산조차도 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이다. 둘째,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민족적 쇼비니즘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청년기의 나라에서 시작되고 있는 운동은 다른 여러 나라의 경험을 체현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의 국민적 과제는 전 세계 그 어떤 사회주의 정당도 직면해 본 적이 없던 성격의 것이다. 선진적 이론으로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 투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방부처리된 레닌의 시신>

 
 레닌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강조한다. “유일한 선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냐 둘 중의 하나다. 여기에 중도는 없다.” 레닌은 이데올로기 개념을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고 긍정적 의미로 확장시켜 이데올로기가 계급투쟁에서 차지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학설로서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경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런 경제 관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낳은 대중의 빈곤과 비참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전제 조건 아래에서 생겨난다. 현대의 사회주의적 의식은 깊이 있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레닌은 매스 미디어의 위력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혁명가였다. “매우 자주 발간되는 전 러시아적 신문 없이는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러한 활동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신문을 중심으로 저절로 형성되는 조직, 신문의 협력자들의 조직이 이른바 모든 것, 즉 최악의 혁명적 ‘탄압’의 시기에 당의 명예, 권위, 계승성을 지켜나가는 것에서부터 전 국민적인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그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끌어내려지는 레닌 동상>
   레닌은 하부구조의 상부구조 결정론에 입각한 카를 마르크스의 소극적 언론관과 달리 언론 자체를 혁명의 수단이자 주체로 규정했다. ‘신문은 비단 집단적 선전자, 집단적 선동자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라는 유명한 명제가 그것이다. 이 같은 언론관은 이후 모든 공산국가가 신문뿐 아니라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매스 미디어 전반에 적용하는 전체주의적 언론통제의 패러다임으로 발전했다.


   레닌이 이 책을 쓴 것은 1901년 봄부터 겨울 사이였다고 한다. 스스로 서문에 고백했듯이 짧은 시간에 쫓기면서 쓰다 보니 ‘문학적 퇴고가 부족한 상태’로 출간됐다. 자연히 간결하고 정연한 문장과는 거리감이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당시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이론·조직·실천면에서 모두 변화와 정립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서둘러 책을 내게 됐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본명인 그는 이 책에서 니콜라이 레닌이란 필명을 처음 썼고, 그 후 공식 이름으로 사용한다.

                                                                                                       


  이 책은 1917년에 성공한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기초 문서가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또 다른 대표작 ‘제국주의론’과 더불어 전 세계 혁명가들의 필독서가 되기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주의당 창설을 위한 각종 이데올로기적 원칙 수립이라는 지대한 역할을 수행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에 결정적인 획을 그었다.

 

   20세기 후반까지 중국의 마오쩌둥,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베트남의 호찌민, 유고슬라비아연방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북한의 김일성에 이르기까지 지구 표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의 정치·사상적 지도자들이 이 책을 읽고 따랐다. 이 책은 자연스레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그것도 부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사회주의 체제는 20세기의 맨 윗자리에 놓일만한 격변이었다.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의 386세대 운동권 바이블이 되기도 한다. 온건진보 정치인이 된 심상정 의원 같은 이는 급진주의자였던 20대 때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째로 암송할 정도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 책에 그토록 열광적이었던 현상은 당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왜,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알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소련·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더불어 20세기 지구촌을 혁명의 열기로 달궜던 레닌과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악마의 다른 이름으로 전락했다. 레닌이 마르크스 사상에서 폭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발굴한 것이 결국 독이 됐다.

                                                                                           

                                                    
   레닌과 ‘무엇을 할 것인가’는 21세기 들어 좌파들에 의해 복권이 시도되고 있는 모습이 간간이 엿보인다. ‘레닌 재장전’이라는 책의 출간은 그 일환이다.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프레데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쟁쟁한 좌파 지식인 17명이 공동 저자다. 2001년 독일 에센의 문화과학연구소가 ‘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국제컨퍼런스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기반이 됐다.


   2013년 봄 사망한 중남미 좌파의 대부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생전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물하겠다고 밝힌 적도 있다. 워너 본펠드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를 비롯한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을 모은 ‘무엇을 할 것인가’는 혁명의 교본으로 쓰였던 레닌의 이 책을 중심으로 레닌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정치이념이 애써 복권을 꿈꾸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을 때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몸부림인 듯하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인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이 명언만큼 아우슈비츠(폴란드 지명 오시비엥침) 수용소의 참극을 잘 웅변하는 말도 찾기 어렵다.

 

   일부 문학인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비약시킨 이 말(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연상한 의도적인 오역이라는 견해도 있다)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떠올려보면 더 이상 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회의(懷疑)와 비탄의 동의어다. 한 신학자는 아도르노의 말을 비틀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아돌프 히틀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아우슈비츠다. 히틀러가 이끈 나치 독일은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상징어가 됐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합하면 600만 명에 이른다는 추계까지 나와 있다.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참극의 역사는 히틀러의 유일한 저서이자 자서전인 ‘나의 투쟁’(원제 Mein Kampf)에서 이미 시작됐다. ‘나의 투쟁’은 머지않아 유럽을 피로 물들일 광기의 전주곡이었다. 철저한 인종주의자·군국주의자·극우 보수주의자인 히틀러는 지독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유대인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자서전 곳곳에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저주의 눈빛이 번뜩인다. “유대인은 유목민도 아니고 늘 다른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일 뿐이다. 더구나 그들이 종종 지금까지 살고 있던 생활권을 버린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때에 따라 악용한 숙주 민족에 의해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독일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나의 투쟁’에 나타난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는 표독하고도 뿌리 깊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에서 눈에 띄는 인종집단 때문에 나는 불쾌했다. 체코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그루지야인 등 여러 민족의 혼합은 혐오스러웠다. 특히 인류의 영원한 박테리아는 더욱 불쾌했다. 유대인, 또 유대인이었다.” “자연은 약한 개체와 강한 개체와의 결합을 원치 않는다. 열등한 민족과 우수한 민족의 결합 또한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결합으로 인해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


  독일 민족의 주류인 아리안 족에 대한 히틀러의 자긍심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아리아 인종은 지적 능력보다는 오히려 자기 능력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점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오늘날 아리아 인종이 세계에서 그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원인은, 다른 민족의 이기적 관념에 대립하여 이상주의적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적으로 우월한 강자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가 그 과업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 세계사적 사명이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독일국민에게 순수혈통 보전을 다그친다. “우리의 투쟁 목적은 우리 인종, 우리 민족의 존립과 증식의 확보, 자손들의 부양, 혈통의 순결성 유지, 조국의 자유와 독립에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 민족이 만물의 창조주에서 위탁받은 사명을 달성할 때까지 생육하는 데 있다.” 그는 후손들에게 인종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이 책은 히틀러가 대중 선동과 선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선전이란 대중이 가슴 속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해, 이를 바탕으로 보다 많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나아가서는 이들의 속마음을 사로잡기에 적당한 심리적 수단을 찾는 것이다.”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대상 가운데 최하 부류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정되어야 한다. 끌어들여야할 대중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도 더욱 낮추어야 한다.” 


   히틀러는 국민의 눈을 가리는 심리 선전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민중의 압도적인 다수는, 냉정한 숙고보다는 차라리 여성처럼 감정적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감정은 복잡하지 않으며, 매우 단순하고 폐쇄적이다. 그들의 감정에는 음영이 거의 없고 오직 대립만 존재할 따름이다. 즉 이쪽 절반은 그렇고 저쪽 절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애정인가 증오인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것뿐이다.”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거짓말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고 나치당원들을 부추긴다. “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된다.” “대중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유명한 ‘대중의 국민화’를 역설한다. “무수한 대중을 국민으로 만드는 일은 소위 객관적 관점을 나약하게 강조하는 어정쩡한 방식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목표를 향해 무자비하고 광적이며 일방적으로 나아가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히틀러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는 까닭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글보다는 말이 사람을 설득시키는 데는 더욱 효과적이며, 세계의 모든 위대한 운동은 위대한 문필가가 아니라 위대한 연설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교설을 일관적·통일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그 원칙적인 것이 영원히 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우리가 함께 수행해 나가는 사업에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은 히틀러의 모든 정치 철학이 녹아있는 ‘나치즘의 경전’으로 평가된다. 그는 반민주적 정치사상과 반유대주의를 설파하는 한편,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게르만족의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한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의회를 증오하고 있었다.” “평화라는 것은 궁상맞은 평화론자와 같은 곡녀(哭女)의 종려나무 잎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보다 높은 문화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지배 민족의 승리의 칼에 의해 수립된다.”


 

   히틀러는 ‘뮌헨 봉기’ 이후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구상해 1925~1927년에 걸쳐 2권으로 출간했다. 그는 출감 후 자기 생각을 비서 루돌프 헤스에게 받아 적게 했다. 당초 제목은 ‘허위, 우열, 비겁에 대한 4년간의 투쟁’이었으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게 좋겠다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제목을 바꿨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직접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뮌헨 봉기로 ‘인기 스타’가 된 기회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라는 나치당 출판부장 막스 아만의 제안에 응했다는 게 첫 번째 설이다. 두 번째 설은 동료였던 그레고르 슈트라서가 히틀러의 감방 동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책을 쓰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형무소에 수감돼 있으면서 끊임없이 ‘개똥철학’ 같은 걸 늘어놓았다고 한다.

   책의 내용과 글 실력은 수준 이하라는 혹평이 뒤따른다. 터무니없는 과장과 성급한 일반화 등이 곳곳에 드러난다. 비문과 오류가 많아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조차 “이해할 수 없고 한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악평했다. 히틀러 스스로 악문(惡文)이며 함량 미달임을 시인했다는 설도 전해온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하지만 이 책은 나치 시절 독일 국민의 필독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이 인기를 끈 것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독일 국민을 결집시키려 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계산이 당시 독일의 처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순수 아리안혈통을 대표하는 게르만민족의 대제국을 건설하자’는 히틀러의 선동이 먹혀든 것이다.


 

   이 책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의 바이블로 삼은 뒤 1000만~2000만부나 팔려나갔다는 설이 전해진다. 나치 정권은 ‘나의 투쟁’을 학생과 병사들에게 배포한 것은 물론 신혼부부들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지녔던 독일의 명장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 책을 직접 선물로 받고 히틀러의 신뢰를 확인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책값은 전액 국가예산에서 지출됐다. 히틀러는 엄청난 인세 수입을 올렸다. 히틀러는 그 돈을 스위스 UBS 은행에 넣어 측근이 관리하게 했다.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은 히틀러의 공식적인 증빙서류에 ‘나의 투쟁’을 팔아서 번 인세가 소득의 전부라고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투쟁’은 세상을 너무나 부정적으로 바꾼 책의 대표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에게 재앙을 불러온 책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독일에서는 1945년 이후 이 책을 출판 금지하고 있다. 법률로 나치를 찬양하는 책의 배포를 엄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진정한 출판금지 이유는 나치 피해자에 대한 배려다.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이 책은 금서로 지정돼 있다.


 

   이와는 달리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3년 1월8일을 생일을 맞아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장급 간부들에게 ‘나의 투쟁’을 선물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김정은이 고위 간부들에게 ‘핵과 경제 병진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을 짧은 기간에 재건한 히틀러의 ‘제3제국’을 잘 연구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와 맞물린 시기였다.


 

   ‘나의 투쟁’은 유럽 경제위기로 이민자 배척 정서가 확산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신나치주의자나 극우세력에 의해 합법적 선전도구로 악용되고 있기도 하다. 2005년을 전후해 터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 책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사실 이 책은 한 인간의 그릇된 집념과 비뚤어진 역사의식, 왜곡된 민족주의가 저지른 죄악을 반면교사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사라니는 이 책이 젊은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한 독일의 책임을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려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neowave 2014.01.07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문학 공부모임 공동체 대안연구공동체입니다. 올해 기획강좌로 서양철학, 사회과학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준비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선생님들 모셨는데 홍보부족으로 아직 참석자 수가 많이 없네요.향후 개별 학자들 강좌로 나가기 전에,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입문강의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모든 강의 참석 불가능하신 분들은 부분참여도 가능합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젊은 날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만났다면, 학자로서의 일생을 비판이론의 주석가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두고 한, 미셸 푸코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과장이 아닙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프롬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자본과 욕망을 포괄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성찰하는 탁월한 이론적 도구였습니다. 이들의 비판이론은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역설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던 자본주의 현실의 통찰과 대안의 모색에 빼어난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은 제대로 착근되지도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다행한 점은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시대, 제3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 새롭게 주목받고, 발터 벤야민이 여러 분야에서 재조명되면서 이 학파의 사상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인류는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인간적 상태가 아닌, 새로운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추구한 개인적 자유의 확산이 이른바 ‘자유의 역설’을 초래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대안은 어떤 것인가.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대학원이 이 땅의 주요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자들을 초청해 비판이론 강의를 시작합니다. 8강으로 예정된 강의는 우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역사를 개괄한 것에 이어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하버마스, 마르쿠제, 프롬, 벤야민, 호네트 등의 사상과 이론을 소개하고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그 함의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내년 2월까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에 대한 그룹 강의가 끝나면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과 발터 벤야민에 대한 본격 강의가 펼쳐집니다. 대안연구공동체가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자를 초청해 진행하는 이번 강의에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 강사 : 문성훈, 박구용, 김원식, 손철성, 고지현

    ♣ 일시 : 2014년 1월9일(목)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9시30분(8강)

    <제4강은 화요일인 1월 28일 같은 시간에 열립니다.>

    ♣ 장소 : 대안연구공동체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4-46 서강빌딩 2층>

    ♣ 내용

    제1강(1월 9일) :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 (문성훈/서울여대교수)

    제2강(1월 16일) : 호르크하이머 (문성훈/서울여대교수)

    제3강(1월 23일) : 아도르노 (박구용/전남대 교수)

    제4강(1월 28일, 화) : 하버마스 (김원식/국가안보연구소 연구위원)

    제5강(2월 6일) : 마르쿠제 (손철성/경북대 교수)

    제6강(2월 13일) : 프롬 (문성훈/서울여대 교수)

    제7강(2월 20일) : 벤야민 (고지현/가천대 연구교수)

    제8강(2월 27일): 호네트 (문성훈/서울여대 교수)

    ♣ 교재 : 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사월의책, 2012.

    ♣ 참여비 : 12만원(8강. 강좌 별 참여는 1강에 2만원)

    ♣ 강사 소개

    고지현

    독일 브레멘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천대 아시아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꿈과 깨어나기?발터 벤야민 파사주 프로젝트의 역사이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공저) 『포스트모던의 테제들』(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베스텐트 2012』(공역) 등이 있다.



    김원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공저로 『철학과 합리성』 『이성의 다양한 목소리』 『베스텐트 2012』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포스트모던의 테제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이성의 힘』 『하버마스와 현대사회』 『지구화 시대의 정의』 등이 있다.




    문성훈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과에서 악셀 호네트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여대 교양학부 현대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며, 『베스텐트』 한국판 책임편집자를 맡고 있다. 저서로 『현대철학의 모험』(공저) 『하버마스가 들려주는 의사소통 이야기』 『이성의 다양한 목소리』(공저) 『미셸 푸코의 비판적 존재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공저) 『포스트모던의 테제들』(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정의의 타자』 『인정투쟁』 등이 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니체 이해의 새로운 지평』(공저) 『우리 안의 타자』 『포스트모던 칸트』(공저) 『소통 인문학』(공저) 『병원 인문학』(공저) 『공정과 정의사회』(공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공저) 『부정의 역사철학』등이 있으며, 역서로 『정신 철학』 『도구적 이성 비판』 등이 있다.



    손철성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고전과 논리적 글쓰기』 『유토피아, 희망의 원리』 『허버트 마르쿠제』 『독일 이데올로기 연구』 『헤겔&마르크스? 역사를 움직이는 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테러 시대의 철학』 『자유주의』 등이 있다.

    <참여 희망자는 참여비를 입금(우리은행 1002-749-668379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한 뒤 참여과목, 성명, 휴대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paideia21@gmail.com으로 보내 주십시오.>


    카페주소 : http://cafe.naver.com/paideia21

    [출처] [특별강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문성훈, 박구용, 김원식, 손철성, 고지현) (대안연구공동체(CAS))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총평하는 말도 없다. “모든 서양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저명한 영국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명언이다.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이 내놓은 단평의 무게도 이에 못지않다.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 서양 사상에 미친 플라톤의 영향은 그만큼 지대하다.


  플라톤은 기원전 4~5세기에 살았으면서도 30편이 넘는 저작을 남긴,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가 직접 쓴 것으로 확인된 것만 25편에 이른다. 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건 단연 ‘국가론’(원제 Politiea)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과 정의관이 담겨 있는 정수(精髓)다. ‘국가론’은 형이상학, 정치학, 심리학, 윤리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의 모든 분야에 가지를 뻗어나갔다. ‘국가론’은 인류의 공동생활체를 사상 처음 정리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인간이 ‘어떻게 모여 살아가는 게 좋은가’를 인도해 준 최초의 책인 셈이다.


  플라톤은 이 책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하려면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른바 ‘철인정치’다. 플라톤은 국가구성원을 사람의 몸 가운데 머리, 가슴, 배로 비유했다. 머리는 통치자, 가슴은 용기와 기개를 상징하는 군인, 배는 절제가 필요한 생산자다. 머리는 이성을 추구하고, 가슴은 감정 표현을 원하며, 배는 욕구가 채워지기를 희구한다. 국가나 사람도 이것이 잘 충족되고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인 상태, 정의로운 상태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을 세 부류로 설정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이득을 사랑하는 자, 명예를 사랑하는 자가 그것이다. 국가가 멸망했을 때 그들의 행동 양태를 플라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득을 사랑하는 자는 침략자에게 붙어 자신의 이익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나 취향에 젖어 수수방관할 것이다. 반면에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한 목숨을 가벼이 여겨 오로지 ‘백일청천 아래 부끄러움이 없는가’를 가장 귀한 가치로 삼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울 것이다.”


  플라톤은 현상의 세계는 ‘선’(善)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오직 이데아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파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도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육체를 멀리하고 이성적인 물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데아는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뜻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물에는 각기 그 이데아가 있다. 사물의 수만큼 이데아도 다양하다. 삼각형에는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고 아름다움에는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있다. 이데아는 모두 완전하고 좋은 것이어서 모든 이데아는 ‘선(善)의 이데아’로 귀결된다. 이 이데아는 육체의 눈으로는 인식할 수 없고, 마음의 눈, 순수한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유명한 ‘동굴의 비유’로 설명을 한다. 동굴 안은 가시적인 현상의 세계를,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각기 비유한 것이다. 동굴 속 죄수는 등 뒤에 있는 불빛에 의해 앞면 벽에 비치는 사람이나 동물의 그림자를 실재라고 여긴다. 죄수는 석방된 뒤에 불빛에 의해서 생겼던 그림자의 본체를 보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림자 쪽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죄수들이란 욕심에 절어 동굴 밖을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만 목을 매는 사람을 일컫는다.


 

   가난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이데아’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예화는 해학적이다.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의 집에서 방을 둘러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이 방에는 의자와 술잔이 있을 뿐, 내 눈에 의자의 ‘이데아’나 술잔의 ‘이데아’는 보이지 않는군.” 플라톤이 응수했다. “아마 그럴 것이네. 자네 정신의 눈에는 의자와 술잔이 보일 뿐, ‘이데아’까지 보일 턱이 없지.”

                                                                                              


   ‘국가론’은 인류 최초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를 규정한 책이기도 하다. ‘국가론’은 원래 ‘정의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국가론’이라는 제목도 ‘정체’(政體)라고 옮겨야 맞다. 일본사람들이 ‘국가론’이라고 번역한 걸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굳어졌다.


  ‘국가론’ 맨 앞쪽에는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개념을 놓고 소피스트들과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주인 폴레마르코스가 말한다. “선한 자를 이롭게 하고 악한 자를 해롭게 하는 게 정의입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반론을 제기한다. “대상이 악하다고 해서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 과연 정의일까?” 그 때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가 나서 논점을 흐린다. “정의는 다스리는 자의 이익입니다. 다스리는 자가 옳다고 정한 규칙을 따르면 그것이 결국 옳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크라테스가 나선다. “정의로운 다스림의 본질은 다스림을 받는 자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네. 또한 다스림으로 이익을 얻는다면 올바른 다스림이라고 볼 수는 없지. 정의란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나 개인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것이지. 제화공은 구두 만드는 일에, 목수는 집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의네. 하지만 정의란 외면적인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것과 관련돼 있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을 잘 조절하고 지배와 복종, 협력을 마치 조화로운 음정을 통해 아름다운 선율을 이끌어내듯이 변주해내는 일이지.” 2400년 전에 벌어진 이 토론은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를 연상케 한다. 샌델의 ‘정의’는 ‘국가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가론’은 모든 청소년들에게 기하학, 수학, 수사학, 철학 등을 가르치기에 앞서 시가(詩歌)와 체육을 기본으로 교육할 것을 주창한다. 체육은 신체를 강하게 만들어 용맹의 덕을 갖게 해주고 음악은 감정을 길들여 절제의 덕을 배우도록 해 준다는 게 배경설명이다. 플라톤은 시가와 체육 수업에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조화로운 수업을 하도록 권면한다. 편향된 지식과 감성이 가져올 위험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생긴 공공교육기관이 김나시온이다. 훗날 체육관(Gymnasium)의 어원이 된 김나시온은 체육수업을 매우 중요시하는 서양의 교육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 자신이 레슬링 선수였다. 올림픽과 더불어 그리스 4대 제전이었던 이스트미아 경기대회에 출전해 두 차례나 우승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본명이 아리스토클레스였던 그가 ‘떡 벌어진 어깨’를 뜻하는 플라톤으로 바뀐 것도 이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으로 통치자와 그를 돕는 수호자 집단의 사유재산 금지를 주장했다. 아내와 자녀까지 공동소유 대상에 포함시킬 만큼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탐욕의 원천인 사유재산과 사적 인연이 국가를 타락시킨다고 여겼다. 전 세계에 혁명의 열병을 앓게 만든 공산주의도 사상적 기원은 ‘국가론’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공유재산제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사회공동체를 꿈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역시 플라톤의 ‘국가론’이 모델인 셈이다.


   정치가를 꿈꾼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직접 민주주의의 중우(衆愚)정치 때문에 독배를 받아 사형당하는 모습을 지켜 본 뒤 현실 정치를 포기하고 철학과 후학 양성의 뜻을 세웠다. 플라톤은 진정으로 훌륭한 정치가 뭔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국가론’을 썼다. 이 책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대화체 형식으로 구성된 것도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이다. 유명한 대화체는 그가 선보인 독창적 저서 기법이다.

                                                                                               

                                                     <아테네 아카데미아 앞에 서 있는 소크라테스 상>

  
   그가 세운 교육기관 ‘아카데미아’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플라톤은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허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허상의 세계를 실재 세계로 인도해주는 학문인 수학을 중시했다. 아카데미아는 인류의 지성사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플라톤이 42세에 세운 아카데미아는 이후 1000년이나 지속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서기 529년 문을 닫는다.


   ‘국가론’은 이른바 ‘고상한 거짓말’을 필요악으로 거론했다.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고귀한 거짓말’에 의해 국민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신화가 필요하다는 논지다. 여기에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네 가지 덕목이 규정되고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철학적 방법론까지 전개된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눴다.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철인 정치나 이분법 때문에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금까지 숱한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국가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맥으로 남아 있다.


   ‘국가론’은 한 때 비극작가를 꿈꾸기도 했던 플라톤의 유려한 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와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이라는 책에서 “그리스어에서는 플라톤을 모방하고, 라틴어에서는 키케로를 모방해 자기 문체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고 권장한다. 그만큼 플라톤은 글쓰기에서도 탁월했다.


   ‘국가론’은 여전히 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지도층의 규범이 돼야할 보편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한국 국회도서관 대출 4위에 올라 있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미국의 명문고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사립학교 초등생들도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정도다. 철학자 에머슨이 “도서관은 불타도 좋으나 플라톤의 ‘국가론’이 불타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도 이 책의 위상을 웅변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