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토머스 페인 <상식> 효형출판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한참 늦어졌거나, 캐나다처럼 오랫동안 영 연방국가로 남아 있었다면 세계역사는 사뭇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선언 반년 전인 1775년 말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독립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지도자들조차 완전한 독립을 지향할지,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선에서 갈등과 마찰을 마무리할지 우왕좌왕했다.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도 1770년대 초까지는 독립에 반대했으며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영제국의 호위 아래 정치적 자치와 경제적 번영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군주제와 공화제를 섞은 영국의 정치체제가 최선이라고 여겼다.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는 게 상식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무모한 일 같은 정황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776년 1월10일 토머스 페인이라는 급진주의 사상가가 쓴 ‘상식’(원제 Common Sense)이 출간되자 아메리카 대륙은 단번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46쪽에 불과한 된 소책자(팸플릿)였지만, 이 조그마한 책 한 권이 미국 독립운동에 불을 질렀다. 이 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이 상식이자 역사적 순리라고 역설했다. 그는 상식에 관한 최초의 언급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는 오로지 단순한 사실, 명백한 논거, 평범한 상식만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상식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의 쓰임새에 따라 근본적이고, 객관적이며, 반박불가능한 형태의 인식력과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판단력을 의미한다.

 

  ‘상식’은 군주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민주적 공화제만이 대안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페인은 식민지 아메리카 인민들에게 영국 왕실로부터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공화제에 입각한 새 나라 건설을 촉구했다. 그는 영국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견해의 모순, 세습 군주제의 불합리성, 독립에 따르는 경제적 이익, 독립의 역사적 의의, 대의제에 따른 정치적 대표기관의 구성방법에 이르기까지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펼쳐나간다.


 

   페인은 당시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통박한다. 입헌군주제가 옳지 못한 이유로, 견제를 통해 국왕의 권력을 둔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권력을 정지시킬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영국이 절대군주에 대해 문을 닫아 버리고 자물쇠로 잠갔지만, 동시에 국왕에게 열쇠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유한다. 군주제적 유물과 귀족제적 유물이 새로운 공화적 요소(하원)들과 혼합돼 있어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모순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토머스 페인 초상>

  이 책에는 흥미로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매춘을 일삼는 남자가 자기 아내를 판단할 자격이 없듯이, 부패한 정치제도를 지지하는 선입견에 얽매이면 훌륭한 정치 제도를 식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정부 형태의 제도적 오류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국에서 국왕이란 전쟁이나 일으키고 관직을 주는 일 외에 하는 일이 없으며,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고 서로 싸우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게 페인의 생각이다. 왕의 자리만해도 후손들에게 세습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한 개인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당히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후손들까지 지위를 물려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페인의 지론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영국이 ‘아메리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기의 적으로부터’ 보호한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편다. ‘상식’은 미국이 왜 독립해야 하는가를 입증해야할 의무가 미국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왜 영국에 종속돼야 하는가를 영국인들이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카는 유럽 각지에서 박해받은 사람들의 피난처이기 때문에 미국의 모국은 영국이 아니라 전체 유럽이라고 페인은 생각한다. 영국과 관계를 유지하자는 주장에는, 유아가 이제껏 젖을 먹고 자랐으니까 앞으로도 절대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다름없다고 반박한다.


  영국의 신민으로부터 벗어나더라도 아메리카의 곡물은 유럽의 어느 시장에서나 제값을 부를 수 있고, 어디로부터 물건을 사들이더라도 그 대가는 동일하다는 이유를 들어 독립의 경제적 이득을 설명한다. 또 유럽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메리카의 진정한 이익이라고 설득한다. 영국에 예속될 경우 외려 아메리카 대륙은 곧바로 유럽의 전쟁과 분규에 휘말려 든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과의 ‘화해’가 성립하면 통치권이 여전히 국왕의 수중에 머물러 있어 사실상 노예화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시기’에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는 아메리카에겐 충분한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충분한 무장 군대, 함대를 건설하기에 유리한 위치와 조건, 풍부한 방어물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용감한 업적들은 언제나 미성년기에 있을 때 성취됐다’고 재치 있게 비유한다.

                                                                                                          
  그는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법률이 곧 국왕이어야 하고, 그 밖의 아무 것도 국왕이 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광범하고 평등한 대표권을 갖는 정치체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그릇된 것을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명문이 각별한 눈길을 끈다.

                                                                                          

                                                                                  <상식 초판본>


  폭발력을 지닌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순식간에 미국의 첫 번째 베스트셀러가 됐다. 3개월도 안 돼 10만 부, 1년 만에 15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1년 만에 50만 부가 팔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과장이 섞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가 60여 만 명의 노예, 100만 명 이상의 계약제 외국인 노동자까지 포함해 300만 명 정도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판매기록이다. 글을 아는 대부분의 미국인이 이 책을 읽은 셈이다.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했던 존 펜은 1776년 봄 “여행길 내내 상식과 독립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상식’이 나온 직후, 미국 독립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륙에 가득 찼다. 그 해 7월4일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페인의 주장을 대부분 담았다. 이 책을 발표하기 전에는 독립해야 한다거나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 아니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에 영국 왕은 상원과 하원에 권력의 일부를 나눠주어 당시에는 나름으로 이상적인 군주제로 평가됐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아메리카 사람들은 왕을 부정하지도 독립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조지 3세 왕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왕이란 왕은 다 못마땅하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식’을 꼼꼼히 읽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영국 왕 조지 3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왕, 모든 불합리한 권위, 전 세계의 크고 작은 폭군 모두를 공격하는 글이었다.


  에피소드지만 ‘상식’은 제목 덕을 많이 본 베스트셀러라는 뒷얘기가 전해진다. 페인은 이 책의 제목을 ‘명백한 진리‘(Plain Truth)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제목을 제외하곤 ‘상식’이라는 표현이 세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의사이자 페인의 후원자였던 벤자민 러시의 권유로 밋밋한 ‘명백한 진리’ 대신 ‘상식’으로 바꿨다.


  그렇다고 제목에만 성공요인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문장의 묘미를 아는 페인의 솜씨로 유럽 대륙의 급진적인 철학자들이 강조하던 양식과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중요시하던 상식을 교묘하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게 또 다른 성공요인이었다. 라틴어 문구를 인용하지 않고 어려운 철학을 들먹이지 않은, 페인의 쉬운 문체도 한몫했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상식을 쓴 작가의 펜이 없었다면 (조지) 워싱턴의 칼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애덤스는 처음엔 ‘상식’이 “무지하고 사악하며 근시안적이며 무도한 잡동사니”라고 했을 정도다. ‘상식’은 세계 민주주의의 주요 문헌이 됐다. 페인은 자기 묘비명에 단 한 구절 ‘상식의 작가’라고만 새겨 달라고 했을 만큼 이 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컸다.

 
  페인은 미국 독립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 영국의 급진주의적 민주화 운동에서도 활약상이 두드러져 ‘세계 혁명의 전도사’로도 불린다. 민주주의의 3대 종주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모두에서 현대적 민주주의가 발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선언 11년 뒤 유럽으로 건너간 페인은 프랑스 혁명과 영국 민주화 운동에도 개입한다.

 

  그는 ‘인권’(1791년)이라는 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다. 영국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가 세계 보수주의의 바이블이 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혁명을 비판하자 페인은 ‘인권’으로 반박했다. ‘인권’은 ‘상식’의 개정판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인권’은 조지 왕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라고 부추겨 영국 급진주의 운동의 핵심 문헌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영국에서 반란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페인 체포령이 떨어졌다.

 

 프랑스 명예시민이 된 페인은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의 헌법제정 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사건’의 저자 폴 콜린스는 페인을 ‘걸어다니는 혁명’이라고 일컫는다. 페인의 전기를 쓴 W. E. 우드워드는 “페인은 인간의 자유와 인류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을 세계가 수용할 준비를 갖추기 한 세기 전에 태어났다”며 그의 선견지명을 높이 샀다.


 페인의 사상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해 영향을 미쳤다. ‘상식’이 출간된 후 지금까지 200여 년 동안, 페인은 세계 각국의 급진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수호성 노릇을 해왔다고 ‘상식의 역사’ 저자 소피아 로젠펠드는 말한다. 세계의 수많은 자유주의자, 페미니스트, 민주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를 사상적 선조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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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눈을 뜨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소크라테스처럼, 볼테르처럼, 갈릴레오처럼, 칸트처럼...” 100살을 맞을 때까지 명석한 두뇌를 잃지 않았던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프레촐리니는 그의 저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이렇게 시작한다.

 

   500여 년 전의 마키아벨리를 서슴없이 ‘나의 친구’라고 부르는 베스트셀러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여기에다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나 그 당시 눈을 뜨고 태어난 것은 마키아벨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후세는 그 시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중세라고 부르는 것과 구별해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를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다.” 걸출한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1469~1527)가 정치를 윤리와 도덕에서 분리한 혁명적 사색은 르네상스가 신에서 인간을 독립시킨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적확하게 꿰뚫은 통찰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오랜 세월동안 정치는 윤리나 도덕과 같은 것이었다. 최선의 정치형태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철인정치’라고 설파한 플라톤의 말이 신봉대상인 시대였다. 중세에 접어들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철학자들이 기독교의 생각까지 덧붙이자 정치사상은 점점 더 하늘에 떠 있는 이상주의로 변해갔다. 마키아벨리와 동시대인인 토머스 모어조차 “정치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은 ‘비르투스(덕)’의 문제”라고 갈파했을 정도다.

 

  공자와 맹자 이래의 동양사회도 정치를 도덕 아래에 두긴 마찬가지였다. 보다 더 도덕적인 사회로 만드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자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군주의 최고 미덕은 덕치였다. 누구나 너그럽고 어진 왕을 이상적으로 묘사했다. 
                                                                

 

 그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치 행위가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규율로부터 결별해야 한다’며 반기를 들고 나온 이가 마키아벨리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원제 Il Principe)은 냉혹한 현실에 바탕을 둔 정치를 역설하며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연 저작으로 꼽힌다. 마키아벨리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도 바로 ‘군주론’때문이다. 이상적인 군주는 착하고 어진 군주가 아니라 때로는 냉혹하고, 필요하다면 군주 스스로 약속을 어기기도 해야 한다는 점을 마키아벨리는 부각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달갑잖은 별명을 얻었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한비자’란 별칭도 따라다닌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군주는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힘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비유일 게다. 널리 알려진 18장의 핵심은 이 대목이다. “나는 야수 중에도 여우와 사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자만으로는 덫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고, 여우만으로는 이리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으나, 여우임으로써 덫을 피할 수 있고, 사자임으로써 이리를 쫓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우적인 성질은 교묘히 사용되어야 한다. 아주 교묘히 속에 감추어놓은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의뭉스럽게 행사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보다 무섭게 여겨지는 편이 군주로서 안전한 선택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무서운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정없이 해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란다. 두려운 지도자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고, 사랑받는 지도자는 국민정서에 부합해 인기를 얻고자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일은 경멸당하거나 얕잡아 보이는 것이라고 상기시킨다.
                                                                    

                                              <마키아벨리 초상화>

 

 기억해 둘만한 부분을 몇 가지만 더 간추려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군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성질을 다 아울러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여러 가지 덕목을 가진 것처럼 보일 필요는 있다. 온정이 넘치고, 신의를 존중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공명정대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버려야 할 때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자비심을 버려야할 때도 있다. 인간성을 한쪽에 밀쳐놓고, 깊은 신앙심도 부득이 잊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의 질투심도 자연히 사라지겠지 하고 바라서는 안 된다. 사악한 마음은 아무리 많은 선물을 해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측근들이 유능하고 성실하면 그 군주도 총명하다고 할 수 있다. 신중하기보다는 과감한 편이 낫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라 그녀에 대해 주도권을 쥐려면 난폭하게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기분은 매우 동요하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나, 그 지지를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특권층의 지지는 서민층의 지지보다 약하다. 오로지 선의만 가지고서는 결코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힘이 없는 선은 악보다 못하다.

 

  세심하게 따져보면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건 냉혹함과 잔인함이 아니라 확실한 권력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3가지 덕목으로 ‘역량’(비르투), ‘행운’(포르투나), ‘시대적 요구’(네체시타)를 꼽았다. 인간의 심성, 군중심리의 본질, 조직의 성격, 리더십, 통치기술 등에 걸쳐 핵심을 꿰뚫는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은 비범하다.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지혜가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현실 체험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사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에 잘 보여 관직에 다시 진출하기 위한 개인적 욕구 때문에 썼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이라는 헌정사가 붙어 있다. 불행하게도 로렌초 데 메디치는 ‘군주론’을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군주론’의 모델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전제군주인 체사레 보르자였다. 로렌초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교양이 낮고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에 관한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의 처세를 보면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점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에게 공직추방이라는 불행이 덮치지 않았던들 ‘군주론’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단테에게 추방이 없었더라면 ‘신곡’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마천이 궁형을 받지 않았으면 ‘사기’가 쓰이지 못했을 것이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목민심서’ 같은 대작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가정과 맥을 같이한다. 마키아벨리는 관직으로선 ‘피렌체 서기관’에 불과했지만, 스스로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라고 했을 만큼 문재(文才)가 탁월했다. 그가 쓴 희곡 ‘만드라골라’는 당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군주론’만큼 이해보다 오해를 더 많이 받은 책도 드물다. 500여 년 동안 마키아벨리파와 반 마키아벨리파 사이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추앙받는 한편, 수없이 해석되고, 반박을 받으면서 역사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수난도 숱하게 많았다. 교황 바오로(파울루스) 5세는 1559년 ‘군주론’을 포함해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을 금서로 지정한다. 선량한 기독교도에게 해로운 요설(饒舌)이라는 이유에서다. 바티칸이 이 책을 금지한 진짜 이유는 치밀하게 서술된 지배자의 어두운 이면과 실체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신적 지배계층인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금서가 그러하듯 금서조치는 도리어 ‘군주론’과 마키아벨리의 성가를 드높여주었다.

 

  계몽군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키아벨리는 틀렸다. 국가보다는 국민의 행복이 중요하다”며 스스로 ‘반(反)마키아벨리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즉위 20년이 지나 경험이 쌓이자 “마키아벨리가 옳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영국 극장의 무대에서는 ‘마키아벨리주의자’를 그 간계를 당할 수 없는 악당의 총합으로 그렸다. 비판론자들은 ‘군주론’에 담긴 사상을 ‘권력 확대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로 해석하고,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정치용어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들은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카스트로, 레닌 같은 독재자들이 광적인 애독자였으며, 나폴레옹이 이 책을 침대 옆에 놓고 잤다는 소문을 한층 부풀려 부정적인 이미지로 윤색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피렌체>

 

 18세기 무렵부터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이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군주론은 공화파의 보전(寶典)”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양면의 거울로 삼아 군주를 가르치는 체하면서 인민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려했다고 본 것이다. 독일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마키아벨리가 국가이성의 본질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라고 호평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멤버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정권에 체포되어 수감 도중 ‘군주론’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가져야 할 모습을 발견하고 ‘마키아벨리에 관한 주석’을 남겼다. “성경 대신 ‘군주론’을 품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국가이성을 왕국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려 했다.


 

  ‘군주론’은 오늘날에 와서 국제정치와 기업경영에 활용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외교정책에서 ‘군주론’의 현실주의 정치노선을 철저히 추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개념을 ‘군주론’ 가운데 사랑과 두려움의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군주론’은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국내 정치 영역보다, 기업이나 조직의 경영에서 유행처럼 응용되곤 한다. 경제·경영 영역은 군주적 냉혹함을 미덕으로 삼아 펼치는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논란 속에서 인간관계 처세서로도 부쩍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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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9년 11월22일 영국에서 504쪽짜리 두꺼운 책 한권이 나오자마자 초판 1,250부가 하루 만에 다 팔려나갔다. 녹색 헝겊표지로 장정한 이 책은 학술서적임에도 당일 매진의 진기록을 남겼다. 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서만 500만 부가 팔렸다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더불어 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판매기록으로 남은 이 책은 곧바로 유럽 지식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스펙테이터’ 신문은 “인류 역사가 글로 기록된 이래 인간을 이처럼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킨 예가 없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 책이 대중에게 파고들어 워털루 역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팔리고 있다며 태산이 무너질 듯 걱정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 책을 도서관에 소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은이는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 중 누가 원숭이요?”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못된 궤변’이라는 종교계의 거친 비난은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거셌다.

 상찬하는 사람들은 주로 합리적인 학자였다. 식물학자 헨리 왓슨은 “선생은 19세기 자연과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가입니다. 선생의 선구적인 생각은 과학의 확고한 진리로 인식될 것입니다”라고 지은이에게 편지를 썼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책은 내 견해에 대해 자연사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반색하며 18년 뒤 출간한 ‘자본론’을 이 책의 저자에게 헌정했다.
                                                             

 

 이처럼 심각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책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원제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이다. 다윈은 이 책에서 모든 생명체는 신의 섭리가 아니라 자연의 선택 과정에 따라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선택이란 자연계에서 생활 조건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지구상에 살아남은 종(種)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적인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이다”란 부분이다.


 

 이 책은 변이, 유전, 경쟁이라는 세 가지 핵심단어로 간추릴 수 있다. 생물의 형질에는 충분한 변이가 존재한다. 생존 경쟁을 거쳐 주어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한 변이가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 진화가 일어나려면 이 세 가지 조건은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 진화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에 따라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힘세고 포악한 종은 멸망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은 생존한다’는 내용이다. 다윈 비판자들이 흔히 지목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는 같은 시대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가 맨 처음 사용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오해와 오용을 낳았다.


 

 다윈은 이 책에서 동물은 4~5개의 조상에서 나온 것이며, 식물도 그와 같거나 더 소수의 조상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기독교 도그마에 억눌렸던 그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윈이 본격적으로 인간을 다룬 것은 12년이 지난 뒤였다.


 

 ‘종의 기원’은 이렇게 끝맺는다. ‘생명은 최초에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창조주를 등장시켰으나 이 마지막 결론은 다윈의 탁월한 문장력과 자부심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문체를 자랑하는 소설가 김훈도 다윈의 문장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만연체가 나오는 게 거슬리긴 한다.
                                                                 

 

 ‘종의 기원’은 다윈이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남미 갈라파고스 섬에 가 5주 동안 머무르면서 거북, 새, 고대화석, 산호초 같은 표본을 평생 연구해도 모자랄 만큼 채집해 분석한 결과물이다. 갈라파고스는 스페인어로 ‘거북’이라는 뜻이다. 다윈은 6년 뒤 표본 상자들을 정리하다 똑같은 것이라고 알았던 핀치 새가 사는 섬마다 부리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렇게 태어났다.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경제학자이자 인구통계학자인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모든 동식물에 적용한 것이 자신의 이론이라고 설명했다. 다윈이 ‘인구론’을 읽은 것은 서양 생태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꼽힌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지 2년이 되던 1838년 10월 어느 날 머리를 식힐 참으로 ‘인구론’을 읽었다고 한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겐 재앙이다.’ 그는 여기서 늘 생각해 오던 자신의 이론이 어떻게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엔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다윈은 1858년 6월 말레이 반도에서 배달된 한 편의 논문과 편지를 읽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신자는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라는 사람이었다. 윌리스의 논문에는 진화론의 기본적인 골격이 간략하지만 명쾌하게 정리돼 있었다. 런던의 학계에 연고가 없던 윌리스가 간접적으로 알며 존경하던 다윈에게 자신이 쓴 논문을 보낸 것이다. 윌리스도 맬서스를 읽었다고 한다.


 

 윌리스의 논문이 먼저 발표되면 수십 년에 걸친 다윈의 독창적 연구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과 같은 친구들이 나서 다윈을 구할 방안을 모색했다. 1858년 7월1일 런던에서 권위 있는 린네 학회가 열렸다. 다윈의 글이 먼저, 윌리스의 글이 마지막으로 발표됐다. 사소한 속임수였지만, 사람들은 다윈의 글이 먼저 작성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윌리스는 진화론의 선구자로 다윈을 인정하며 변함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듬해 마침내 ‘종의 기원’이 출간된다.  
                                                                

                                      <다윈이 타고 갈라파고스에 갔던 비글호 항해지도>

 당시 다윈은 20여 년 동안 부지런히 많은 양의 증거를 확보해 자신의 이론을 윌리스보다 훨씬 더 완전하게 다듬어낸 상태였다. 진화론을 발전시킨 공로는 다윈에게 돌려도 큰 문제가 없다. 다윈이 ‘19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발견’을 20년도 넘게 묵힌 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거역하기에는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 위에서 군림하던 신을 몰아냈다는 사실은 사고의 혁명이었다. 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충격은 인간 자체의 위상 격하였다. 다윈은 인간을 철저하게 동물계의 일원으로 여겼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자연 질서의 일부라고 본 것이다. 그 때까지 인간은 창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종의 기원’에는 길게 뻗은 나뭇가지와 비슷한 도표로 진화를 설명하는 계통수 하나가 나온다. 생물종이 단선적으로 진화하지 않고 나뭇가지처럼 공동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가며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고 멸종한다는 사실을 표현한 그림이다. 여기서 인간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무수히 많은 생물체와 똑같이 나뭇가지 중 하나일 뿐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듬해인 1860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협회 정례회의장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둘러싸고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옆자리에 앉은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에게 유인원에서 시작하는 헉슬리의 가계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다윈의 불도그’이라 불리는 헉슬리는 “원숭이가 내 조상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주교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점이 더 부끄럽다”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종의 기원’은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어 정치, 철학, 사회, 문화, 예술 전반을 이전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놀라운 발상은 우주와 만물이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인식도 깨우쳐주었다.


 

 ‘종의 기원’은 그 과정에서 숱한 오해와 오용을 견뎌내야 했다. 곳곳에서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강대국의 식민지 지배 정당화에 악용되기도 했고, 피식민지에서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나 진보의 희망으로 활용됐다. 독일 나치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는 논거로 이 책을 들이댔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지적처럼 진화론만큼 가장 다양하고 가장 많이 왜곡돼 적용된 사례도 흔치 않다.


 

 ‘종의 기원’은 출간된 지 1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창조설을 믿는 기독교와 불화를 겪고 있다. 로마 교황청이 진화론은 가톨릭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영국 성공회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은 2009년 “다윈을 오해해 그에게 잘못된 대응을 한 것을 사과한다”고 밝혔다.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론 가운데 하나는 ‘지적 설계론’이다. 이 이론은 언뜻 과학적인 듯 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이론은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타당성을 잃었다.

 

  프랜시스 크릭과 더불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은 “다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내 어머니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생명과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라고 극찬하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뒷받침했다. 인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현대에 와서 일정 부분 상처 입은 것과 달리 ‘종의 기원’은 여전히 그 가치를 뽐내고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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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광철 2016.07.26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경합니다~ 이마만큼 무서운 거에요 글이라는게. 진심으로 찰스 다윈에게 존경심을 표합니다. 책한권으로, 페이지를 다시 쓴~

  2. 2017.08.25 1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을 이성의 산물로 믿어왔다. 적어도 19세기까지는 과학과 합리성으로 세계를 인식하려했다. 서양철학은 인간의 가장 탁월한 특성으로 성찰하는 능력과 사고, 합리성을 꼽았다. 지식과 판단의 주인은 명징한 ‘의식’이라고 계몽철학자들은 설파했다.

 

  꿈에 대한 생각도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꿈은 신비한 예언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로 이해했다. 꿈을 꾼 사람의 정념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여겼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꿈은 기껏해야 꿈을 꾼 이에게 그가 지은 죄를 보여줄 뿐”이라고 가르쳤다.


 19세기 말 혜성처럼 등장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런 서구 지성계를 단숨에 뒤집어놓았다. 프로이트가 20세기의 문을 여는 순간 세상에 던진 ‘꿈의 해석’((원제 Die Traumdeutung)은 가히 혁명이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무의식’ 세계의 발견을 선언한 것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일거에 무너뜨린 사상사적 전환점이 됐다. 무의식은 꿈이나 최면, 정신분석 등에 의하지 않고선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의식의 작은 세계를 품는 더 큰 세계’라고 표현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성적(性的)이고 무의식적인 쾌락의 원리와 의식적인 현실의 원리를 보여준다. 그는 노이로제 환자들이 들려준 1000개 이상의 꿈을 해석한 결과, 표출되는 생각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에 동조하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아에 의해 억압된 ‘이드’(Id)의 욕망에 관한 생각이다. 정상인은 두 정신을 조화시키지만, 신경증환자는 두 정신 간의 조화를 상실한 인간이라고 프로이트는 진단한다.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어머니에게 갖는 성적인 사랑의 감정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꿈을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있는 무의식적 소망과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결시켰다.

 

 그는 인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성적인 정념의 지배를 받으며, 의식은 이런 정념을 아주 희미하게만 알뿐이라고 믿는다. 프로이트는 그런 성적 활동의 기본 동력을 ‘리비도’(Libido)라고 부른다. 리비도는 생체 에너지의 하나인 성적 에너지다. 신체 전역에 퍼져 있는 리비도는 가장 먼저 어머니의 젖가슴을 빠는 입술 점막에 집중되고, 그 다음에는 똥을 누는 항문 점막 주위에 형성된다고 한다. 리비도는 꿈이라는 폐쇄된 지각에 투영된다.

 

 섹시한 꿈을 꾸면 몽정으로 나타나는 것도 리비도다. 불안한 꿈은 성적인 내용을 가진 꿈이므로 그에 속해 있는 리비도가 불안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성인의 꿈 대부분이 성적인 재료를 다루고 있으며, 이게 꿈의 해석 원리와 완전히 부합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언니의 외아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광경을 본 여자의 꿈은 그녀가 어린 조카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과의 재회를 소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팡이·나무줄기·우산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 칼·단도·창 같이 길고 뾰족한 무기는 남자의 성기를 대리한다. 작은 궤·상자·장포·난로·동굴·배·그릇들은 여체의 상징으로 쓰인다. 층계·사다리·발판이나 그런 곳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행위는 성행위의 상징적 표현이다. 몸에 걸치는 것 가운데 여성의 모자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꿈에서 어린아이와 놀거나 업어주는 것은 흔히 자위행위의 상징이다. 또 거세의 상징적인 표현은 대머리나 머리를 자르는 일, 이가 빠지는 일, 목을 베이는 일 등이다. 꿈속에서 음경의 상징이 둘 이상 나오는 경우에는 거세에 대한 항의로 보아야 한다. 꽃의 상징은 여성의 처녀성, 강간과 관련된 것들을 내포한다.
                                                                                        

                                                                        <실험실에서 애완견과 함께 한 프로이트>

 

 꿈의 동기는 소망이며, 꿈의 내용은 소망충족이라고 프로이트는 단정한다. 이 말이야말로 프로이트의 꿈 해석을 다른 것과 다르게 만든다. 꿈은 과거의 체험을 압축한다. 꿈은 왜곡되어 나타난다. 꿈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 아닌 과거를 알려준다. 꿈은 억눌린 소원의 성취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뿌듯해 했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꿈의 해석은 마음 생활 속의 무의식적인 내용을 알아내기 위한 대도((大道))이다”라고 쓴 대목에서 프로이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길이 꿈의 분석에 있음을 깨닫는다. 1900년에 초판이 나온 뒤 1929년 8판에 이르도록 개정판을 낸 이 책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저작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꿈의 해석’에 목적이 있지 않다. 꿈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투시하는 데 있다. 어제 꾼 꿈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다. 꿈의 발현에 있어 무의식이 작용한다고 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주장은 아니었다.

 

 이 책은 심리분석 이론과 실제 적용에 대한 기본적 특징들을 제시해 준다. 예를 들면 꿈의 성적 특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리비도, 소원충족 이론, 자아와 무의식으로 분열된 심리, 노이로제, 상징적 암호화, 억압이론과 실제 증세들, 의식화 방법 같은 것들이다. 그는 “꿈에 의해 전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검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책의 출간은 정신분석이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게 해 준 분기점이 된다. ‘꿈의 해석’은 두말할 필요없이 ‘정신분석학 입문’과 함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모든 혁명적 이론이 그렇듯 처음에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때까지 인간 존재의 주변에 밀쳐두었던 무지, 비합리성, 섹스에 주의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자아가 자신의 집 주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다름없었던 탓이다.
                                                                  

                                                  <프로이트 박물관>

 ‘꿈의 해석’은 출판 직후 일반인들에겐 주목받지 못했다. 1년 동안 초판 600부 가운데 불과 123부만 팔렸고, 소진되기까지 8년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프로이트는 “이러한 통찰력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얻을 수 없다”며 감격했다. 그 사이 권위 있는 학술지에 10편의 서평이 실릴 만큼 학계의 반응은 대조적으로 폭발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제시한 ‘정신분석’은 20세기를 지배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의식의 발견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견주기도 한다. 지동설이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면, 진화론은 인류에게서 불가침의 신성(神性)을 추락시켰다. ‘꿈의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노예임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고,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역사의 중심이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그 인간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었다”는 명언으로 극찬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에 영향을 끼친 인물 50명 가운데 맨 앞자리에 프로이트를 올려놓았다. 무의식의 발견과 꿈의 해석은 서구 문명사와 사상사는 물론 현대인의 생활 자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분석이론이 인문학,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에 미친 충격은 실로 깊고 크다.

 

  지지자든 비판자든 프로이트 이후의 인간 이해는 정신분석이 설정한 인간관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이론은 대중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됐고,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상품은 대중의 사랑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면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등장 이래 영화, 소설, ‘심슨 가족’ 같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이 던진 무의식과 정신분석이론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프로이트 심리분석이론을 혹평하는 이들은 그게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과학성과 거리가 한참 멀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실증주의 학자들은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을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고 매도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적 상상력의 허구로 폄훼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신분석은 그 자체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질환’이라는 독설까지 나왔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말로 하는 프로이트식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의 이론을 역사·종교·미술·도덕·정치 등 사회 전분야로 확대, 적용했기 때문에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부분도 쟁론의 대상이다.

 

 프로이트는 페미니스트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환자에 대한 임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저항의 본질적인 내용은 성적인 것’이라 결론짓고, ‘신경증의 여러 증상들이 성적 감정이나 충동, 이에 대한 정신적 방어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의 평가는 한층 더 냉혹하다. 세계 학계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오래 전에 과학의 영역에서 쫓겨나 임상에서도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꿈의 해석’은 심리학·철학·사회학·교육학·신학·문예학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인식 도구로 따뜻한 대접을 받는다. 인문학자들은 프로이트 이론의 사상사적 가치에 주목해야한다고 맞받아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자’며 그의 명예회복을 선언했을 정도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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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pol.buybluetree.com/ louis vuitton scarf 2013.04.10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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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매력있어, 자기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모르는게 당신매력이야


 

 인간이 만든 가장 나쁜 제도 가운데 하나가 노예제다. 노예제도는 역사발전 단계에서 원시공동체가 해체되면서부터 나타났다. 성경에서도 노예제를 확립된 제도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철학자들조차 선천적 노예 제도를 인정했던 사실은 슬픈 역사를 웅변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인구 가운데 5분의 2가 노예였고, 고대 로마 인구 가운데 4분의 1이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유럽인구 10명 중 1명이 노예로 살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제도 중에서도 역사상 최악의 오점으로 꼽히는 건 대서양을 넘나들며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무려 1200만 명의 노예가 배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원제 Uncle Tom’s Cabin)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흑인 노예들의 잔혹상을 그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해방의 전기가 된 미국 남북전쟁을 촉발한 결정적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더 넓게 보면 흑백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역사를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한 소설이 됐다. 한 편의 문학작품이 세상을 이처럼 단숨에 바꾼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잔인하고 비정한 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해 미국인들의 양심에 호소한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 켄터키 주의 지주 셸비는 노예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업에 실패한 뒤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충직했던 노예 톰과 혼혈 노예 엘리자 사이에 태어난 다섯 살짜리 아들 해리를 노예상인에게 판다. 이 사실을 안 엘리자는 아들 해리를 데리고 목숨을 건 탈출극을 벌인다. 엘리자는 우여곡절 끝에 한 퀘이커교도의 도움으로 자유의 땅 캐나다에 무사히 안착한다. 반면 톰은 하루아침에 가족과 생이별한 채 팔려가는 도중에 같은 배의 승객인 에바의 생명을 구한다. 이것이 인연이 돼 톰은 에바의 아버지 오거스틴 세인트클레어에게 팔려 한동안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에바와 세인트클레어가 잇달아 죽고 나서 냉혈한인 사이먼 리그리의 손으로 넘어간다. 톰은 리그리의 목화밭에서 혹사당하며 원주인의 아들이 다시 매수하려고 찾아오기 직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설에서 시종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는 건 노예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이다. 노예들은 새벽 세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혹사당하는 것은 물론 옥수수 가루로 연명하며 흙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나무에 묶여 매질을 당하기 일쑤인데다 돌멩이나 채찍으로 얻어맞으며 감금된 채 굶어죽기도 한다. 노예 상인에게 자기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밤을 틈타 도망치는 엘리자, 노예 사냥꾼과 대치하며 자신이 자유인임을 비장하게 역설하는 조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자식을 빼앗긴 뒤 그런 인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갓난아기에게 아편을 먹이는 캐시 같은 등장인물은 노예들의 운명을 실감나게 증언한다. 혹사당한 노예가 병에 걸리면 죽을 때까지 부려먹고 나서 새 노예를 사는 게 경제적이라고 말하는 리그리는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사악한 노예주인을 상징한다.

 

 이 같은 극적인 상황 설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 거의 그대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스토는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사건들은 거의 다 실화이며 노예제도의 실상을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셸비 부부의 성격은 작가 스토 부부와 비슷한 점이 많다. 흑인 하녀가 구원을 요청한다는 스토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남편과 스토 부인의 오빠 헨리 워드는 밤중에 이 하녀를 마차에 태워 오하이오 오지의 농장주에게 데려가 감춰줌으로써 추적이 중지될 때까지 실제로 피신시켜주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이 작품을 집필한 직접적인 계기는 1850년 반포된 도망노예법이었다. 이 법은 도망간 흑인노예를 소유주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1793년과 1850년 2차례에 걸쳐 미국 의회가 통과시켰다. 노예의 도망을 도와준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이 법 때문에 노예제를 막연하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북부 사람들은 그 잔악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스토는 1850년부터 워싱턴 D.C.의 노예제도 폐지 운동 기관지 ‘내셔널 이러’에 이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소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명시해 놓았다.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우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그들의 슬픔을 묘사함으로써, 현재의 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정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이 하나님의 저작이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스토는 메인 주 브런즈윅의 한 교회예배에 참석했다. 예배가 끝나고 성가대의 합창이 시작될 무렵, 예배석에 앉아 있던 스토에게 매질을 당해 죽어가는 환상이 보였다. 그 포악한 백인 주인은 자신이 직접 매질을 하지 않고 타락한 두 흑인 감독에게 시켰다. 그 늙은 흑인 성자는 죽어가면서도 두 고문자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 환상 속에서 죽어가는 흑인 성자는 톰 아저씨였고, 고문을 가하는 두 감독은 삼보와 큄보였다. 사악한 노예주인 사이먼 리그리라는 이름도 이때 나왔다.

 

 노예제에 대한 작자의 비판의식은 통렬하기 그지없다. 소설의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주 인도적인 한 법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을 최악으로 학대하는 방법은 그를 목매달아 죽이는 것이다.’ 아니다. 그보다 더 나쁘게 인간을 학대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노예제도이다.”

 

 이 소설은 노예제도 논쟁이 치열하던 1853년 출간 첫해에만 30만부라는, 당시로선 놀라운 판매기록을 남기며 남북전쟁의 불씨를 댕긴다. 북부에서는 출간 즉시 칭송과 찬사가 이어졌으나, 남부에서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노예해방에 반대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1862년 11월 스토 부인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당신이 이 엄청난 전쟁을 촉발시킨 책을 쓴 바로 그 조그마한 여인이로군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대를 초월해 가치를 인정받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더불어 미국 최대 베스트셀러의 하나로 손꼽힌다. 19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 모두 300만부 이상 팔린 공전의 베스트셀러다. 당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집계됐다.

 

  발표된 지 1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독자들의 감동과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32개 국어로 번역된 것은 물론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끊임없이 공연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오랫동안 ‘엉클 톰스 캐빈’이라는 번역서 제목으로 더 알려진 한국에서는 이 이름이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스토 부인은 소설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노예해방운동에 참여한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부의 편을 들어 맹렬한 유세를 펼쳤다. 아들 프레더릭도 북군 대위로 참전했다. 1865년, 마침내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선언되기까지 이 소설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고 노예 해방에 대한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낸 점은 명백하게 인정받는 사실이다.

 

 노예제도가 분명 해악인데도 붕괴되지 않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노예제 아래에 있는 착한 농장주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18세기 아일랜드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가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던 명언과 상통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에 의해 몇 가지 단점이 지적되고 있긴 하다. 소설의 구성이나 기교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조의 통속적인 소설이라는 게 그 하나다. 게다가 톰 아저씨가 흑인 사도 바울 정도로 격상되어 있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는 비판도 받는다. 작가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문호들은 소설의 기교에 대한 비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진실이 기교를 이긴다는 생각에서다. 레프 톨스토이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이 물처럼 흐르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예술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톰 아저씨가 평생 학문을 연구해온 나보다 더 깊이 있게 신의 뜻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실천한 것을 보고, 나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평했다.

 

  저명한 신학자 찰스 브릭스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는 워싱턴 어빙이나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언어의 정치(精緻)함도, 제임스 쿠퍼의 모험 로맨스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풍경 묘사도, 허먼 멜빌의 모험담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울 만큼 감각적인 요소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도주의나 인간의 철학적 통찰을 다룬 사회소설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깊고 더 고결하고 더 성스러운 공명(共鳴)이 있다”고 진솔하게 평가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형식적인 노예해방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해방은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1965년에 흑백 격리 법률이 폐지되고서야 흑인들은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었다. 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돼 아프리카 노예 퍼즐의 마지막 문제가 풀렸다. 그동안 백인으로만 알려졌던 오바마의 어머니도 400여 년 전 미국 버지니아에 살았던 아프리카계 노예의 11대 후손이라는 게 최근 족보 연구결과 밝혀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가 케냐 출신 흑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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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너무 달라요 2016.11.29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리엇 비쳐 스토부인이 흑인노예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것도 본인자신이 5살때 친어머니를 여의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죠~!!!! 참고로 그녀의 아버지인 리만 비쳐는 장로교 교회목사인데 일생을 세번이나 결혼해 열세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둘은 어릴때 죽었고 그의 첫부인 록산나 비쳐는 리만 비쳐와 동갑이었는데 나이 마흔살에 막내 찰스를 낳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여성해방의 공신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진공청소기를 발명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때로는 더 솔깃하게 들린다. 4대 가사 발명품 덕분에 여성들이 손일을 몰라보게 덜었음은 물론 남성들이 이를 대신하는 시대를 맞았다.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었던 현상이다.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온 뒤 사람들은 마차나 인력거 시대가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20년 전만 해도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만물박사인 백과사전을 들춰봤다. 이젠 백과사전을 출판해봐야 아무도 사지 않는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면 돈 한 푼들이지 않고도 무슨 정보든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있어서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의 체계가 바뀌는 것을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말을 이젠 누구나 할 정도로 ‘패러다임’은 일상용어가 됐다.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전문적인 학술용어가 친숙하게 된 건 꼭 50년 전 출간된 한 권의 책 덕분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원제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이름의 책이다.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재치 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하버드대 물리학과 최우등 졸업생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수재라는 상찬을 당연하게 들어온 토머스 쿤(1922~1996)이라는 이 젊은이가 세계 지성사를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내다본 이는 별로 없었다. 쿤은 한 권의 책으로 지구촌의 자연과학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사회과학계, 아니 모든 지식 분야에 새로운 금자탑을 세웠다. 그가 세상을 바꾸고 주목을 받는 데는 낱말 하나로 충분했다. 바로 ‘과학 혁명의 구조’의 화두인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은 그의 이름과 늘 짝지어 다닌다.

 패러다임은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과학사의 특정한 시기에는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전체 과학자 집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범적인 틀이 있다. 이 모범적인 틀이 패러다임이다. 쿤은 패러다임을 과학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또는 가치의 전체적 집합체라고 정의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 틀, 얼개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쿤이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paradeigma)에서 유래한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적 술어인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도 나온다. 현대어에서는 언어 학습의 ‘표준예’(exemplar)라는 뜻으로 사용됐고, 쿤은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용어와 개념을 따왔다.
                                                           

                                                      <토머스 쿤>

 

 하버드대 물리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을 당시 첫 강의를 맡은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원문으로 읽었다. 그는 현인의 반열에 오른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이처럼 황당한 이론을 전개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운동이나 물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운동은 ‘상태의 변화’였으며, 뉴턴에게는 ‘상태’를 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린’ 것이 아니라 뉴턴과 ‘다르다’의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패러다임)이 근대물리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자 쿤은 근대물리학이 만든 패러다임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녔던 패러다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생각의 틀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지혜다. 이 깨달음은 쿤이 패러다임에 초점을 맞춰 과학사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계기가 됐다.

 쿤은 패러다임에도 일생이 있다고 설명한다. 특정 패러다임은 한창 성가를 올리다가도 위기를 맞고 새 패러다임으로 교체가 된다. 이 과정을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과학혁명이라는 낱말도 쿤이 조어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알렉상드르 코이레가 1939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과학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에서 뉴턴 과학으로 전환한 대격변을 말한다.

 

  쿤은 과학 혁명이 정상과학(normal science)→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이라는 흐름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과학 발전이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과학자 사회가 수용한 패러다임을 정교하게 만드는 정상과학과 이런 정상과학이 위기를 맞으면서 다른 정상과학으로 바뀌는 급격한 과학혁명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쿤은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과학활동을 정상과학이라고 규정했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현상의 빈번한 출현에 따라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

 그의 과학혁명 개념은 정치혁명과 흡사하다. 쿤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아이작 뉴턴, 앙투안 라부아지에, 찰스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온 과학자들을 정치혁명가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다. “정치 혁명의 목적이 기존 제도를 파괴하기 때문에 기존 정치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과학 혁명에서도 경쟁하는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은 양립이 불가능하다.” 과학 발전이 조금씩 개량되거나 진전되어 일어나기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누르고 비약으로 일어나는 일이 많다는 의미다.

                                                                 

 쿤은 이를 ‘게슈탈트 전환’이나 종교의 ‘개종’(conversion)에 비유한다. ‘게슈탈트 전환’은 이미지나 형태가 그 자체로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음에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바뀌는 것을 일컫는다. 쿤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 있는 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비약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낡은 패러다임은 같은 기준으로 잴 수 없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의 장·단점을 비교하거나 어느 쪽이 우월한지 판단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는 얘기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옛 패러다임에 비해 보다 정확하거나 타당하고 보다 진리에 가까운 게 아니라 보다 유용한 것일 뿐이라는 견해다.

 그는 과학적 진리에 관해서도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말을 빌려 흥미롭게 설명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는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자들이 죽고 새로운 진리를 신봉하는 세대가 주류가 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이 책이 나오자마자 격렬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모호성 탓이다. 언어학자 마가렛 매스터먼은 쿤이 패러다임을 무려 22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고 꼬집었다. 패러다임이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담는 보자기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스레 숱한 반론과 논쟁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논쟁이 1965년 7월 영국 베드포드대학에서 열린 토론회였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명성 높은 칼 포퍼와 쿤이 벌인 이 토론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의 가장 유명한 과학철학 논쟁으로 꼽힌다. 쿤은 과학 탐구가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론과 맞지 않은 변칙사례가 나올 때마다 패러다임을 폐기한다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맞서 포퍼는 어떤 패러다임이나 이론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주저 없이 대안 이론을 모색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쿤이 패러다임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포퍼는 패러다임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어떤 과학철학자는 쿤이 과학을 ‘군중심리’로 격하했다고 분노어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논란이 쿤의 위상을 떨어뜨리기는커녕 외려 명성과 권위를 한결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첫 출간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 당시 과학철학은 지식 축적을 통해 진보한다는 논리실증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과학활동이 인간의 인식·가치·마음 등과 분리되어 자연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직접 경험으로 관찰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쿤의 독창적 이론은 과학이론의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실제 과학자들의 활동과 과학사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과학철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박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 곳은 과학계가 아니라 비과학 분야였다. 과학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 책은 과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으며 과학을 둘러싼 신비의 그림자를 걷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 덕분에 과학은 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찾아내는 활동이 아니라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복잡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자 그 결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쿤의 ‘다름’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적 상대주의, 다문화주의, 다양한 학파의 평화적 공존에도 긍정적인 힘을 미쳤다. 쿤이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창조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을 근거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웃지못할 현상도 빚어졌다. 창조설이 진화론과 다를 뿐 틀린 과학은 아니라는 논리를 이 책으로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려운 학문서적임에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100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쿤의 이름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대학입시 논술시험 덕분에 쿤과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고 대학을 들어오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을 정도다. ‘여행의 뉴패러다임’이라는 상품명이 등장할 만큼 일상생활에서조차 보편화됐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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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501.jasonjordans.com/nikefree.php nike free run 2013.07.18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죽을걸 알면서도 살잖아 .사랑은 원래 유치한거에요


 중국의 첫 항공모함 ‘바랴크’가 오는 8월1일 인민해방군 창군기념일에 정식 취역한다. 6만7000톤급의 바랴크는 작전반경이 1000㎞에 달한다. 바랴크호는 황해는 물론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서태평양 지역을 누빈다. 중국은 2020년까지 최대 5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해 400척의 함정을 보유할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른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이미 2006년 ‘중국의 대양해군’을 선언했다. 중국의 국가해양국도 2010년 ‘중국해양발전보고’에서 해양파워의 구축은 21세기 중국의 역사적 책무이며, 향후 10년은 이 임무를 실현하는 역사적 단계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인도는 지난 4월4일 러시아제 신형 핵잠수함 INS ‘차크라’를 진수해 핵잠수함을 운용하는 6번째 나라가 됐다. 기존의 해양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에 대응해 태평양 함대의 전진배치와 강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일본 역시 중국의 급속한 해양력 팽창에 맞서 헬기 항공모함과 잠수함 건조 등으로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국제정치의 격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현상들이다. 이 격언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고 했던 영국의 군인출신 탐험가 월터 롤리의 명언을 축약한 것이다.
                  

                                         

 

 이 격언을 누구보다 역설하며 미국을 오늘날의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미 해군 제독과 해군대학교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이다. 그가 1890년에 출간한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원제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은 말 그대로 세계역사를 바꿔놓았다. 이 책은 해양 역사와 전략을 입체적이고 명쾌하게 추적해 오늘날 세계 어느 곳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 미국 해양력을 건설한 이론적 바탕이 됐다. 일반인들에겐 그의 이름과 이 책이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국제정치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책은 1660년부터 1783년까지 일어난 일곱 번의 전쟁과 30여 차례의 해전을 치밀하면서도 생생하게 분석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대서양 연안의 유럽 4대 해양강국과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해양사를 꼼꼼하게 해부했다. 마한은 특히 어떻게 ‘대영제국’이 건설됐는지를 되짚어 미국도 바다로 눈을 돌려 해양력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프랑스가 영국에 결정적으로 뒤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들처럼 정열적으로 바다에 나서지 않았으며, 나간다하더라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프랑스인이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연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프랑스 기후가 매우 쾌적했으며 또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자연으로부터 얻을 것이 거의 없었고, 제조업이 발달하기까지는 수출할만한 것도 변변치 않았다. 그처럼 많은 분야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부지런한 국민성과 해양활동에 적합한 다른 조건들이 어울려 영국인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무엇보다 ‘태양왕’이란 별명을 지닌 루이 14세가 허영과 오만으로 잘못된 해양 정책을 취한 것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루이 14세의 후반기는 해양력의 기반과 무역, 무역이 가져다주는 부의 약화가 해양력을 쇠퇴시킨다는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마한은 지적한다.

 당시 한 프랑스 해군장교의 촌평이 이를 증언한다. “해군이 보여주었던 경이감이나 위대한 업적들은 이미 잊혀져버렸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해군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과 훨씬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던 육군이 국민의 호감과 동정을 받았다. 프랑스의 흥망성쇠가 라인 강 유역에 달려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널리 퍼졌으며, 해군에게 등을 돌린 반감은 영국을 강국으로, 우리나라를 약소국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1672년 대륙확장노선을 선택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이 개인적인 노력으로 바다를 다시 차지하려고 애쓰던 바로 그 순간에 바다를 포기해 버렸다”는 말이 한층 아프게 다가온다.

 

  만약 1743년 이후 20년 동안 영국 함대 대신 프랑스 함대가 인도 반도 주변의 해안, 인도와 유럽 사이의 바다를 지배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으리라는 견해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해양력을 행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인도와 캐나다를 잃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은 한동안 경쟁자가 없이 해군함정으로 대양의 통상로를 지배했다고 마한은 눈여겨봤다.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은 멀리 떨어지고 풍요로운 지방과 교역하는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영국의 해양력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바로 직전에 형성되기 시작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동안에 완성됐다. 이때부터 영국군함은 세계적인 분쟁이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확고하고 강력한 기지를 갖게 됐다고 한다.

 네덜란드를 풍전등화의 위험한 상황에서 구제했던 것도 바로 해양력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어느 한쪽보다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가 이 두 나라의 단독공격과 2년간 계속된 두 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도 파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그 지위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고 마한은 찬탄한다. 마한은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의 정책은 해양력을 꾸준히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한때 무적함대로 불리던 스페인이 지브롤터를 잃음으로써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겨 버렸고, 스페인의 지중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도 합동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없게 됐다고 지은이는 애석해 한다. 이 책은 근대 세계사에서 힘깨나 쓰던 나라는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음을 증언한다.

 마한은 당시 미국도 바다로부터 등을 돌려왔다면서 멀리 있는 국가까지는 미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국의 주요 출입로를 지켜줄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 정부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독립전쟁도 프랑스 해군의 원군이 없었더라면, 아메리카 식민지군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조지 워싱턴의 능력과 전문성도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마한은 단언한다. 
                                                              

                        <지난 6월27일 서해상에서 한미일 연합훈련을 마친 미국 조지워싱턴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해 있다.>

 

   이 책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루스벨트는 이 책을 읽고 마한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 2일간 저는 정말 바쁜 와중에서도 귀하의 책을 읽는 데 시간의 반을 소비했습니다...저는 쉬지 않고 읽었습니다...아주 훌륭하고 경탄할만한 책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해군의 고전이 되지 않는다면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루스벨트는 마한의 생각에 감탄하며 해군부 차관 때부터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았다. 루스벨트는 세계 굴지의 경제력에 비해 형편없는 미국 해군력을 늘 개탄하며, 해양세력으로 거듭나야 번영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해양력은 마한의 철학을 바탕으로 루스벨트가 초석을 다졌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당시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미국 해군대학을 존속시키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책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큰 자극제가 됐다. 마한 역시 제국주의자에다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중동’(Middle East)이란 용어도 그가 만들어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은 미국보다 먼저 마한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적 해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마한의 생각에 따라 1898년부터 6년 동안 8척의 전함을 만들었으며, 1900년에는 엄청난 규모의 해군을 양성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나는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있다”고 그의 동료에게 썼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엄청난 반응이 나왔다. 찰스 베레스포드 대령은 1891년 1월 이런 글을 마한에게 보내왔다. “만일 저에게 힘이 있다면, 저는 귀하의 책을 영국 본토와 식민지의 모든 가정의 식탁에 놓아두도록 명령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우리의 해양력이 웅대한 제국의 기초를 어떻게 닦아나갔는지 모든 국민에게 가르치도록 지시할 것입니다.” 독일 헤르베르트 로진스키는 마한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놓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일본은 마한의 이론을 따랐던 대표적인 나라다. 아키야먀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 같은 국수주의자들이 마한의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고 이 책의 번역자인 김주식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예비역 해군대령)이 밝혔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하는 계획을 수립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령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 마한에게 직접 배웠을 정도다. 이 책은 첫 출간과 거의 동시에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군사·해군 교육기관의 교과서로 채택됐다. 오늘날 일본 해상자위대 간부학교에서도 마한의 이론에 관한 강의를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이 한국 해군장교의 필독서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마한이 세상을 떠난 뒤 언론의 부음기사만 봐도 그의 위상이 한 눈에 드러난다. 프랑스 피가로는 “마한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생전에 수정했다...이 지극한 역사학자이자 전략의 대가가 새 시대의 도래를 마련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공식은 새로운 역사시대를 도입하는 입법의 기초였다”고 평가했다. 영국,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의 주요 신문들도 이와 비슷한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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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oou.raybansunglassesoutd.com/ cheap ray ban sunglasses 2013.04.11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였을때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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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내가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예요,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예요.


 

판사: 피고인의 직업은?
피고인: 프롤레타리아다.
판사: 그건 직업이 아니지 않은가?
피고인: 뭐? 직업이 아니라고? 그것은 노동으로 살아가며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3천만 프랑스인의 직업이다.


 1832년 1월 프랑스 법정에서 나눈 판사와 피고인의 첫머리 심문 문답이다. 피고인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지지하며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급진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였다. 프롤레타리아 세상으로 바꾸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플랑키는 1830년 7월혁명이래 거의 모든 혁명과 시위에 가담해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3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훗날 블랑키의 사상에 공감하고 그와 깊이 교유하던 카를 마르크스라는 20대 유대계 독일 청년은 프랑스에서도 기피인물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고 만다.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노동자들을 위한 걸작 ‘자본론’(원제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1권을 1867년에 출간한다. 15년간 뼈를 깎는 각고의 산물이었다. 여섯 아이들 가운데 셋이 죽었고, 부인과 큰 딸은 병에 걸려 신음했으나 자본론 저작을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이 이루 형언할 수없이 비참하게 생활하는데도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했다.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얘야, 그저 자본에 대해 쓰지만 말고 자본을 조금이라도 모으면 안 되겠니?”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책의 원고를 써 나갔다. 하지만 1권을 출간 뒤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펴 내지 못한 2,3권은 절친이자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원고를 모으고 편집해서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스스로 공언한다. ‘자본론’이 노동자 계급의 ‘성경’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론’은 노동자들이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표현의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극단이다’처럼 난해한 문장과 도식, 추상적인 개념과 복잡한 숫자 계산으로 점철돼 웬만한 지식인이 아니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게다가 분량도 만만찮다. 대개 처음에 나오는 ‘상품과 화폐’ 부분에서 좌절하고 책을 덮는 경우가 숱하다.

 ‘자본론’은 흔히 오해하듯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다룬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 원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전망한 책이다.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변동법칙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노동자 계급이 언제나 자본가 계급에 의해 억압되는 까닭과 자본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전환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만 보면 그의 전망이 빗나갔지만,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도 설파한다.

 ‘자본론’의 핵심은 잉여가치론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과의 차액을 뜻한다. 1만 원짜리 빵 8개를 만드는 노동자가 3만원을 받는다면 잉여가치는 5만원인 셈이다. 이 경우 빵을 만드는 노동자의 하루 8시간 노동 가운데 3시간만 자신을 위한 노동이며,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고 마르크스는 구분 짓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의 연장을 통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라고 불렀다. 생산력의 발달은 노동생산성을 높여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을 가능하게 한다. 필요노동을 단축시키는 대신 잉여노동을 연장하는 방식이다.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이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그는 자본가가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착취의 고리로 자본주의를 바라본다.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착취를 당한다는 논리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라는 하나의 파이를 두고 서로 다툰다. 자본의 속성상 착한 자본은 없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자본론’의 출발점은 상품이다. 첫 문장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그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을 말한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지니고 있는 유용한 성질, 상품의 쓰임새다. 이를테면 공기는 사용가치만 있을 뿐 교환가치는 없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의 실체는 노동이다. 가치의 본질은 곧 노동이다. 본질적으로 상품은 노동생산물이어서 가치를 지닌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잉여 노동인구는 이른바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해 생산과정에서 추방당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 자본가는 더욱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끊임없이 도입해 실업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 계급의 세력을 약화시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착취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경제공황은 특정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게 마르크스의 견해다. 마르크스는 분업과 기계의 등장이 어떻게 노동의 소외와 착취를 가중시키는지도 자세하게 묘파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태어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자본론’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
                                                          

                                                       <카를 마르크스>

 

 서구 문화와 종교의 핵심이 된 ‘성경’을 제외하고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자본론’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그리 없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실천력을 얻어 날개를 달며 단숨에 세계의 틀을 바꿔놓았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이 20세기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사후 1세기 동안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국가와 정부의 통치아래 살았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철권통치자들은 물론 체 게바라 같은 자유투사들도 ‘자본론’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반면에 마르크스의 적대자들은 악마의 화신으로 여겼다. 이 책을 혹평하는 유명 경제학자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 시대를 풍미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자본론’이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자본론’을 영감의 보고(寶庫)요 만세반석(萬世盤石)으로 우러러 보는 수많은 이들 중에는 바보가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시인한다. 그러나 이 따위 책이 어찌하여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 아연해진다.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죽은 경제학자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론’은 사형선고를 받았는가? 소련이 해체된 이래 그 위상은 지난날에 비해 약해졌지만, 막강한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어떤 의미에서든 모두 마르크스의 승계자다. 마르크스 없는 미래란 없다”고 단언한다. 2005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마르크스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선정했다. 철학자 제라르 그라넬은 ‘자본론’을 가리켜 ‘흔들리지 않는 천둥’이라고 표현했다.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 천둥소리는 그 뒤 끊임없이 증폭돼 오늘날에는 우리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가 됐다는 뜻이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시위자들도 “자본론이 옳았다!”고 외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곳 근무자들의 일부도 마찬가지다.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확신이 커진다. 나는 마르크스의 접근방식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무차별적으로 확산시키는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과 상통하며, 이 때문에 ‘자본론’은 여전히 새로운 사고를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역설한다.

 공교롭게도 우파 사상가들조차 최근 들어 마르크스가 실은 자본주의자라며 그의 사상을 수용한다. 보수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세계 경제위기 때 ‘자본론’을 읽고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기도 했다.

 책의 판매량도 이를 실증한다. 2008년 세계공황 이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갈증으로 ‘자본론’의 관심이 급증했다. 최근 독일에선 이 책의 매출이 3배나 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선 이 책의 만화 버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서도 ‘자본론’ 특강에 일반인들이 몰려들고, 서점가에서 역시 관심도를 상당부분 만회했다고 한다. 2008년 4월 ‘교수신문’이 교수·지식인 103명 대상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을 조사한 결과, 압도적 1위로 꼽힌 것이 ‘자본론’이다.

 가히 ‘자본론 르네상스’라 부를만하다. 어떤 이는 묘비명 뒤로 사라졌던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왔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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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gd.gencbeyin.net/ discount oakley sunglasses 2013.04.08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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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을 봐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며시 흔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거야.


 

 지난 1월초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2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애덤 스미스가 ‘세계 자본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어 시선을 모았다.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다보스 포럼 연차총회를 눈앞에 앞두고서였다. 실제 글쓴이는 영국 투자그룹 칼라일의 공동 창업자인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이었다.


 “여러 나라가 흔들리고, 시위는 흥분되고, 실업률은 오르고, 적자는 늘어만 가니 자본주의 장점들은 의문을 받고 있구려. 내 지난 수백 년간 지켜본 바 자본주의를 앞으로 수백 년 더 지속시키기 위해, 아니면 적어도 지난해보다 올해 더 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펜을 들었소... 자본주의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가 단지 다른 대체물보다 더 낫다고 했을 뿐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 자본주의 단점을 치유할 단순한 처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을 얘기하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들불처럼 번진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시위가 상징하듯 자본주의 위기론이 여전히 팽배한 것을 의식한 글이다. 루벤스타인이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빌린 건 그가 ‘자본주의의 비조’로 숭앙 받고 있어서다. 스미스의 대표작인 ‘국부론’이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이론적 효시가 됐기 때문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본디 ‘국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원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국부론’은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만든 기념비적 노작이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기도 하다.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시장이 자기 통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개인의 이기심은 시장의 가격조정 메커니즘을 통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고 공공의 이익을 촉진한다고 스미스는 생각했다. 이처럼 중요한 말이 600여 쪽 분량의 ‘국부론’에서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신기하다. 마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책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단 한번 언급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과 비슷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것이다.

 ‘국부론’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대목은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경제행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점을 흥미롭게 표현한 부분이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이 책은 사회의 번영을 촉진하는 두 가지 원리로 분업과 자본축적을 든다. 국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철학이다. 스미스는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둔다.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모든 공정을 혼자 행하는 것보다 공정별로 나누어 각자가 전문적 업무를 수행하는 편이 공장 전체로 볼 때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핀 생산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스미스는 분업과 이에 따르는 기계의 채용을 위해서는 자본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경쟁에 의해 자본축적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의 바른 길이라고 썼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시장이론의 핵심인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은 후대에 자본주의를 자유무역주의로 탈바꿈시키는데 사용됐다. 일부에선 정부 규제를 없애 무제한으로 개인의 이윤추구 자유를 주장하는 데까지 악용하고 있다. 자유방임주의를 돈을 벌기위해 기업과 기업인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현상도 나타난다.

 스미스 이후 주류경제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보다 체계화하고 계량화하는데 주력했다. 로잔학파의 일반균형이론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적 증거를, 밀턴 프리드먼은 완벽한 시장경제에 대한 맹신을 퍼뜨렸다. ‘시장 성공 경제학’에만 관심을 뒀을 뿐 ‘시장 실패 경제학’에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스미스를 시장 만능주의자로 보는 건 오해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외친 것은 자유시장이 윤리적이란 얘기가 아니라 대자본의 탐욕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경제행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했다. 여기서 개인은 사회에서 분리된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공감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다. 
                                                                

                                                   <애덤 스미스 초상화>

 

 스미스의 또 다른 명저 ‘도덕감정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먼저 지었다. ‘도덕감정론’은 개인의 이기심을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파악한 건 맞지만, 이때의 개인은 타인과 서로 공감하는 도덕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고 본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주장한 공감의 원리는 ‘국부론’에서 시장의 원리로 확장된다. 공감의 원리와 시장의 원리는 스미스의 철학체계에서 모두 인간의 본성에 연유한다. ‘국부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도덕감정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 에든버러에 있는 그의 무덤에 새겨진 짤막한 비문이 이 점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가 여기에 잠들다.” ‘도덕감정론’이 그 유명한 ‘국부론’보다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덕감정론’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딱 한번 나온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큼 사회적 책임이라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을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스미스는 평생 단 2권의 명저만 저술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도덕감정론’을 구약성서, ‘국부론’을 신약성서에 비유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앞서 출간한 ‘도덕감정론’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며, 이타심이 없는 이기심의 위험성을 역설했다.

 마르크스경제학의 일인자이자 ‘국부론’ 번역자이기도 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주류경제학자들이 이해하는 것과 달리 ‘국부론’은 시장만능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국부론’을 흔히 자유방임주의,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책으로 알고 있지만, 김 교수는 “특권층의 특권을 없애고 노동의 가치를 높게 본 책”이라고 했다. 그는 “국부론의 국부는 국민 전체의 부”라면서 “특권이 사라지고 모두가 정부 규제를 받지 않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방임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당초 중상주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국부론’을 썼다. 중상주의 체제는 금과 은 등의 화폐를 부와 동일시하고, 화폐를 증대시키기 위해 국제무역에서 흑자를 낳는 정책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경제학이다. 중상주의 정책의 가장 큰 해악은 각 나라 국민 간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무역을 분쟁의 원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국부론’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18세기가 저물기 전에 유럽의 주요 언어들로 번역됐다. 19세기 전반까지 그의 뒤를 이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은 모두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후 곧바로 이를 계승, 발전시킨 경제학자가 데이비드 리카도와 ‘인구론’의 저자 토머스 맬서스다. 기껏해야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적 대공황이 닥치자 ‘보이지 않는 손’의 위기대처 능력에 의문을 품고 궤도수정을 시작했을 정도다.

 ‘국부론’은 노동가치설을 처음 제시해 마르크스경제학의 탄생에도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에 기여함이 없이 노동자들의 생산품 일부를 가져간다고 설명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에 바탕이 됐다. 찰스 다윈이 ‘국부론’에서 큰 영감을 얻어 인류 역사를 바꾼 ‘진화론’을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도 학계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에서 성공한 자본주의는 유럽대륙과 미국, 아시아로 전파됐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하나의 모델이 이식된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엽까지 고립돼 있던 섬나라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들’은 종속이론의 비관적 예측을 깨뜨렸다. 공산국가 중국이 자본주의로 변신한 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친화성’이라는 고전적 명제까지 흔들었다.

 ‘국부론’을 바탕으로 태동한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창조적 파괴를 통해 업그레이드됐다. 무너질 뻔한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토대는 당분간 확고해 보인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정책과 인간의 탐욕을 탓하라.”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의 데이비드 로스코프 대기자는 최근 대기업과 정부의 경쟁을 그린 ‘파워 주식회사’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책을 펴냈다. 로스코프는 20세기의 지구촌에서 벌어진 대투쟁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21세기의 큰 투쟁은 어느 버전의 자본주의가 승리할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관건은 어느 버전이 성장에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많이 모방될 것인가이다. 미국식 자본주의, 유럽의 안전망 자본주의, 중국식 자본주의, 인도와 브라질식의 민주적 발전 자본주의, 아니면 싱가포르와 이스라엘 같은 기업적 소국 자본주의? 실험은 지속될 게 틀림없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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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매력있어, 자기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모르는게 당신매력이야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일어나기 며칠 전, 저명한 과학저널 ‘네이처’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300년 안에 지구촌 생물 종의 75% 이상이 사라지는 ‘대멸종’을 맞을 수 있다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안토니 바르노스키 교수의 경고장이 담겨 있었다. 작년 6월에는 전 세계 바다 생태계가 전례 없는 대규모 멸종 단계에 진입할 위험이 커졌다는 국제해양생태계연구프로그램(IPSO)의 새로운 보고서가 유엔에 제출됐다. 이 보고서는 여러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바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한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고 전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어류 남획과 농가에서 흘러나온 화학비료 등에 따른 오염, 이산화탄소 배출이 낳은 해양 산성화, 기후변화가 여기에 포함된다.

 지구는 50억년 동안 이미 다섯 차례나 ‘생물 대멸종’을 겪었다. 여섯 번째 대멸종 위기의 문제점은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는 데 있다. 다섯 번의 대멸종은 운석이나 혜성충돌, 빙하기와 같은 자연 현상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온난화, 서식지 파괴, 바이러스 전파 같은 인간적인 요인이 초래한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지구촌에서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주원인도 지구 온난화라는 분석이 나온 지 오래다.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이를 흥미롭게 비유한다. “돈 벌자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건 저녁밥을 지으려 루브르 박물관 그림들을 태우는 격이다.”
                                                 

   

 이 같은 인류의 난개발과 환경파괴에 사실상 처음 경보를 발한 것은 꼭 50년 전에 한 여성 생물학자가 쓴 도전적인 책이다. 오늘날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된 ‘침묵의 봄’(원제 Silent Spring)은 지은이 레이첼 카슨(1907-1964)을 ‘환경 운동의 어머니’ 반열에 올려놓았다. 1962년 출판된 이 책은 환경보호에 대한 전 세계인의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전기(轉機)가 됐다.

 카슨이 ‘침묵의 봄’을 쓰게 된 결정적 동기는 조류학자이자 친구인 올가 허킨스가 보낸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허킨스의 편지에는 소중한 세상에서 생명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었다. 카슨은 친구의 이야기에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아 살충제와 같은 화학물질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침묵의 봄’은 화학물질로 인한 자연생태계의 오염을 충격적인 사례를 들어 고발한다. 지은이는 시종일관 생명과 자연은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당시 ‘기적의 살충제’로 불리던 DDT의 치명적 폐해에 할애한다. DDT는 말라리아 때문에 해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했던 인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DDT 만큼 값싸고 효과적인 살충제는 없었다. 살충제 DDT를 개발한 파울 뮐러는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 만능 살충제에 카슨이 칼을 겨누었다. 그렇지만 카슨이 이 책에서 언급한 첫 번째 화학물질은 DDT가 아니라 방사능 요소인 스트론튬 90이다. 카슨이 비밀 핵실험과 핵무기 비축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책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눈을 떠보니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한 장면으로 막을 연다. “봄을 알리는 철새들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때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가득 찼던 아침을 맞는 것은 어색한 고요함뿐이다. 노래하던 새들은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그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던 화려한 생기와 아름다움, 감흥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빨리 사라져 버렸다.” 새들은 살충제·제초제 같은 화학물질에 오염돼 죽어버렸다.

 살충제로 바퀴벌레를 잡으려고 했던 어느 미국 부부의 일화는 끔찍하다. 베네수엘라로 이주한 이 부부는 집에 바퀴벌레가 많아 엔드린이 포함된 살충제를 뿌렸다. 이들은 한참 지나 살충제를 잘 닦아낸 뒤 강아지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그 독성을 견디지 못한 강아지가 갑자기 토하며 발작을 하다 죽었다. 아이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은 유독물질이 모체에서 자식 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사례들이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카슨은 화학방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곤충학자들이 많다는 미스터리도 폭로한다. “이 학자들의 배경을 조사해보면 화학회사들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전문가로서의 명성, 때로는 자신의 직업 자체가 화학방제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이들의 성향을 알게 된다면 살충제가 무해하다는 주장을 믿을 수 있겠는가?”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자신인데도 잘못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이 책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두 갈래 길을 비유하며 마무리한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새롭고 창의적인 접근법은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침묵의 봄’은 딱딱하기 쉬운 과학적 내용을 문학적 감수성을 가미해 서정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리스 신화가 인용되고, 시적 수사학도 곳곳에 등장한다. 환경 전문가인 알렉스 맥길리브레이가 이 책을 ‘과학과 문학이라는 두 장르가 결합해 탄생한 일종의 하이브리드’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카슨이 원래 작가를 꿈꾸며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을 바꿔 생물학을 공부한 덕분이다. 그러면서도 ‘침묵의 봄’은 비판적 사고와 통합능력을 보여준 결정체로 평가받는다.

 카슨이 위대한 점은 그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증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고발해 사회제도를 변혁시켰다는 데 있다. ‘침묵의 봄’은 환경운동이 모든 나라의 사회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채찍질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환경문제를 다루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곧이어 미국 의회도 결국 DDT가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증거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환경보호국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이 책 때문이었다.  

 1970년 ‘지구의 날’(4월22일)이 제정된 것 역시 이 책 덕분이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환경윤리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 선언’까지 이끌어내는 동력이 됐다. 환경과 개발에 관한 기본원칙을 담은 ‘리우 선언’은 ‘지속가능한 개발’의 정신을 뿌리내리게 했다.

 ‘불편한 진실’을 쓴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자신이 환경운동을 펼치는데 ‘침묵의 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카슨은 환경운동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9년 미국 생물학연구소는 생물학자 191명을 대상을 설문조사를 했다. 자신의 연구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고전을 꼽으라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침묵의 봄’이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유진 오덤의 ‘생태학’이었다. 이 조사에서 ‘침묵의 봄’은 찰스 다윈 ‘종의 기원’이나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보다 앞섰다.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침묵의 봄’을 읽고 생물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책은 미국 랜덤하우스 출판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논픽션 중 5위에 올랐다. 세계를 대표하는 100인의 석학들이 선정한 ‘20세기를 움직인 10권의 책’에서는 4위였다.

 이 책은 전 세계 10여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도 꾸준히 애독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냉전시절 소련에서는 ‘침묵의 봄’을 비밀리에 번역해 읽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199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환경운동이 움트기 시작했으나, 선구적 시민단체의 하나인 한국환경재단은 ‘레이첼 카슨 홀’을 만들어 그 업적을 기리고 있을 정도다.

 ‘침묵의 봄’은 하마터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뉴요커’에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출간할 무렵 농약제조업체와 화학업계 등이 각종 모략으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벨시콜이라는 화학회사는 출간 전에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휴턴미플린 출판사는 보험을 추가로 든 후에야 이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전국해충방제협회는 카슨을 조롱하는 노래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도리어 ‘침묵의 봄’을 더욱 널리 홍보해 주고 말았다. 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당시 큰돈을 벌던 화학회사와 이를 방조한 공무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광고에 민감한 일부 언론도 공룡 같은 화학회사들의 입맛에 맞춰 카슨에 적대적인 글을 써댔다. 일부 관료들은 심지어 카슨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DDT에 관한한 카슨의 주장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완벽하게 결론이 난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서 예측한 미래가 다소 빗나갔기 때문이다. 생명이 사라진, 텅 빈 지구와 DDT로 인한 암의 증가는 입증되지 않았다.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는 나라에서는 지금도 DDT를 사용한다. DDT의 환경오염보다 말라리아로 말미암은 사망이 더 참혹해 어쩔 수 없어서다. 이제 어떤 이들은 ‘침묵의 봄’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비판한다. 그러자 세계보건기구(WHO)도 2006년 DDT를 실내 벽면이나 건물 지붕, 축사 등에 뿌리는 것을 권장한다고 발표했다. DDT의 복권이다.

 그렇다고 카슨의 업적을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없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이 스스로 일군 문명에 대한 반성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준 데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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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uuo.coachfactoryoutletsf.com/ coach usa 2013.04.10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추어는 남을 상대로 싸우지만 프로는 자신을 상대로 싸운다.

  2. Favicon of http://fbfdghgjmh.blogspot.com/ louboutins 2013.04.21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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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강승원 2014.07.09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의 봄을 읽고 있다가 들렀습니다~
    덕분에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책의 한계점에 대해서 써놓으신 부분이 인상이 깊네요.

  4. 부랑자 2015.09.08 0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