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란 머리카락은 길어도 사상은 짧은 동물이다.”(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여자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떤 남자보다 우러러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여자가 그런 업적을 이루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쇠렌 키에르케고르) “여자는 죽고 나서 석 달 뒤에 철이 든다.”(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속담) “여자를 만든 것이 알라의 유일한 실수다.”(이슬람 속담) “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한다.”(한국 속담)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공자)

 이처럼 여성에 대한 야박한 평가는 고금과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중세 말기에 등장한 유럽 최초의 여성작가 크리스틴 드 피장이 한탄조로 던진 질문을 이해하고 남는다. “학식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이, 기나긴 명단으로 이어질 그 많은 철학자ㆍ시인ㆍ도덕론자들이 어찌하여 그 많은 논문과 저작들에서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여기고 여성의 행동을 비난하는가?”

 실망스러운 건 계몽시대를 거친 근대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가 정부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여자는 보편적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일시적 기분과 우발적 의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헤겔) 우리를 더욱 절망에 빠뜨리는 건 프랑스 혁명을 잉태시킨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그가 우리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국왕이든, 노예이든, 학자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조차도 우리와 똑같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 여성은 예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이런 주장을 펼쳤을 무렵 ‘여성에게도 동등한 인격과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고 나선 여성이 영국에서 혜성같이 나타났다. 불꽃처럼 살다가 38살에 요절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최초의 여권옹호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가 바로 그다. 급진주의 정치사상가인 울스턴크래프트는 1792년 불멸의 대표작 ‘여성의 권리 옹호’(원제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나 남성이 아니라 이성(理性)’이라고 주창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헌사를 받게 한 이 책은 프랑스 혁명 후 탈레랑 의원이 삼부회에 제출한 교육법안에 대한 반론으로 썼다. 그렇지만 루소의 명저 ‘에밀’ 비판에 절대적인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한때 ‘나는 늘 그를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루소 사상에 심취했다. 루소의 ‘천부인권’ ‘자연법’ 사상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에는 남성만 있을 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울스턴크래프트가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몽사상가들의 열린 생각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먼저 루소의 사상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여성들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남편과 아버지의 결정을 교회의 결정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따라야 한다.’ ‘여성들의 교육은 언제나 남성들과 관련되어야만 한다. 우리 남성들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 우리의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되는 것, 우리가 어릴 때는 우리를 교육하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은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우리의 인생을 안락하고 기분 좋게 하는 것, 이것들은 언제나 여성들의 의무이고, 그들이 어릴 때부터 받아야 하는 교육의 내용이다.’ ‘여성이 한 순간도 독립되어 있다고 스스로 느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쉬고자 할 때는 언제나 보다 유혹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그의 보다 달콤한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여성이, 요염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 루소의 생각은 한마디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에 속하는 일이며, 여성이란 남성에게 순종하도록 교육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울스턴크래프트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가정적인 짐승이 되기만을 충고하는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지독하게 모독하는 것인가!”라며 루소를 비롯한 뭇 남성들에게 통박한다. 그리고선 “남성들이여, 여성들에게 권리를 나눠주라”고 촉구한다. 그는 또 “여성을 자유롭게 하라. 그러면 그들은 즉시 남성처럼 현명하고 덕이 많은 존재가 될 것이다. 진보는 상호적인 것이어야 하고, 인류의 절반이 종속되기를 강요받는 불공평은 억압자에 대한 보복을 수반하기 때문에, 남성의 미덕은 그가 발아래에 기르는 벌레들에 의해 좀먹게 될 것”이라고 고언한다.

 그는 한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이 여성들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할 때다. 다시 말해 여성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야 할 때다. 여성도 인간의 일원으로써 자신들을 개혁하고 세계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동료여성들에게 호소하고 나선다.


 그리고 나선 이렇게 다그친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여, 그처럼 편협한 편견을 뛰어넘도록 하자!...우리의 생각을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만 국한하거나, 우리의 지식을 연인이나 남편의 마음을 알아내는 데 한정하지 말자. 우리의 지성을 증진하게 하고 지금보다 고귀한 상태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위대한 목적 아래, 삶의 모든 의무를 다하자.” “사회는 보다 많은 평등이 자리 잡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덕성은 결코 사회적 기반을 다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숙명적으로 바위 아래에 묶여 있다면 실질적인 평등이 바위 위에 세워질지라도 결코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참정권도 요구한다. 물론 투표권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이 같은 주장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는 영국이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수용한 게 1918년이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돌아간 것이 1928년이라는 사실만 떠올려봐도 알만하다.

                                                             


 이 책은 첫 출간 직후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됐다. 18세기 프랑스사 전문가인 미국의 문화사가 린 헌트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가 미국 혁명기의 베스트셀러로서 혁명 발발을 가능케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보다 공화국 초기 미국 시립도서관들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2년 앞선 저작인 ‘인간의 권리옹호’에서 국민들은 나쁜 군주를 제거할 권리가 있으며 당대의 노예제도와 빈민들에 대한 시각이 비도덕적이라고 신랄하게 질타해 필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울스턴크래프트가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무려 1세기가 넘게 걸렸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당시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불온사상이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혁명의 시대에 여성을 정치적 평등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한 자유주의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예상대로 여론은 급진주의자인 그에게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같은 여성인 한 어머니는 잡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 책 때문에 네 명의 내 딸이 타락했다”고 헐뜯었다. ‘여성의 욕망을 인정해야 한다’며 성적 자유를 주장했던 대목은 그를 한층 더 곤경으로 빠뜨렸다.

 당시 신문은 그를 ‘철학적 바람둥이’라고 매도했다. 어떤 사회평론가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그를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고 조롱했다. 그 뒤 세상은 오랫동안 그를 판타지 소설의 효시가 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어머니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의 삶이 워낙 짧았던 데다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로 말미암아 그의 가치가 왜곡된 탓도 컸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이 쓴 책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하며, 파란만장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직업 활동을 하며 직접 생계를 꾸렸다. 여성 교육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는 모범도 보였다. “나는 새로운 종(種)의 시조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본>(1792년판)  

 오늘날의 관점이라면 울스턴크래프트는 온건한 여성운동가에 불과하다.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미흡하고, 종속,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까지 확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들어 이 책의 역사적 비중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참정권론자인 밀리센트 포세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백주년 기념본에서 평가한 한 마디가 이 책의 위상을 명징하게 대변한다. “근대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비조)애덤 스미스에게 기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여성들은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성서’ ‘페미니스트 선언문’으로 불리는 저작이다. 이제 이 책은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정치·교육 등 다양한 분야까지 파급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신동아 2012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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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4775.morningcallcoffeesstand.com/miamiheatjersey.php NBA jersey 2013.07.17 1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슬퍼서 우는거 아니야..바람이 불어서 그래..눈이 셔서..

  2. 재영 2015.03.01 2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이 여자에요 남자에요?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 개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인류 역사가 불복종 행위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확언한다. 프롬은 <불복종에 관하여>란 역작에서 ‘신화’를 동원해 자신의 논리를 풀어나간다. “아담과 이브에 관한 히브리 신화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모든 문명이 불복종의 행위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으로부터 불을 훔침으로써 인류의 진보를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만약 프로메테우스의 범죄행위가 없었더라면 인류 역사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도 불복종으로 인해 벌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후회하지도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 있게 말했다. ‘신들에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겠다.’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선정한 걸 보면 프롬의 통찰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기존 체제에 불복종을 선언한 시위자들은 지난해 벽두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을 필두로 중동을 넘어 지구촌의 정치질서를 다시 짜고 ‘민중의 힘’(피플 파워)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정립했다. 튀니지 국민들은 “우리는 이 정권(벤 알리 대통령 정권)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거리에서 ‘시민불복종’ 행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한 뒤 끝내 뜻을 이루어냈다.

                                                         


 이 같은 현대의 시민불복종운동은 19세기 미국 문필가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월든>과 더불어 소로우의 2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민의 불복종>(원제 Civil Disobedience)은 세계의 역사를 격변시킨 선구적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시민의 불복종>은 50여쪽(편집에 따라 20~30쪽이 되기도 한다)에 불과한 짧은 팸플릿 분량이지만 영향력의 무게는 1천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과 견줄 수 없을 정도다.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 인도독립운동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영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멘토 역할까지 하게 된 한 권의 책이 거대한 역사의 물굽이마저 돌려놓을 수 있음을 명증해 주고 있다.

 소로우는 6년 동안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하루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세금납부를 거부한 것은 흑인 노예제도를 고수한 데다 멕시코 침략전쟁까지 일으킨 당시 미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소로우는 개인의 자유에 대립되는 국가 권력의 함의를 진중하게 성찰하게 됐다. 결과는 대중 강연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 강연문을 일부 고쳐 <미학>지에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했다. 이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시민의 불복종>이란 제목의 책과 개념어로 더 널리 전파되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정당하지 못한 정부에 도덕적으로 반대하는 개인은 저항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일깨워준다. 소로우는 정부가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법을 어기라고 단호하게 충언한다.


 책에는 핍박받는 이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명구들로 가득하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감옥에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곳은 역시 감옥뿐이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정부의 성격과 처사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충성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없이 정부의 가장 성실한 후원자들이고, 따라서 개혁에 가장 심각한 장애가 될 경우가 많다.” “오늘날 이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 나는 대답한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이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책은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빨리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말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이상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로우의 다른 저작들이 그랬듯이 당대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글에 담긴 메시지와 소로우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턱없이 야박했던 탓이다. 그의 멘토였던 랠프 왈도 에머슨과의 불화, 멕시코 침략전쟁으로 불거진 미국의 애국주의적 분위기 등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세계를 뒤흔든 시민 불복종>의 저자 앤드루 커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가 자기 나라에서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격언의 본보기를 찾는다면 소로우 만큼 딱 들어맞는 경우도 없으리라. 그 때도 소로우는 주로 자립적인 삶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옹호하는 낭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소로우의 이념과 철학은 50년 뒤인 19세기 말 톨스토이의 눈에 띄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든다. 20세기 초에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간디에게 무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톨스토이는 “왜 당신네 미국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군인들 말만 듣고 소로우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요?”라고 타박했을 만큼 소로우를 숭앙했다.


 이 책이 세계 역사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간디를 통해서였다. 간디는 이 책이 자신의 이념을 세워 준 교과서와 같은 저작이라며 소중히 여겼다. 간디는 “나는 소로우에게서 한 분의 위대한 스승을 발견했으며 <시민의 불복종>에서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땄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간디가 펼친 운동은 ‘사티아그라하’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진실의 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티아그라하는 비폭력저항운동이었다. 간디는 1907년 자신이 편집하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의 견해>에 <시민의 불복종>을 발췌해 싣기도 했다.


 미국에서 ‘시민불복종’이 정치사상과 법철학의 주제로 떠오르고, 일상적인 낱말로 자리잡은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이 무렵 소로우의 성가를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학에서 <시민의 불복종>을 접한 킹은 더없이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킹이 흑인민권운동과 <시민의 불복종>의 관계를 인식한 것은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벌어진 버스 안타기 운동을 통해 민권운동이 시작된 직후였다.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여성이 불을 붙인 투쟁이었다.


 킹이 저술과 연설에서 <시민의 불복종>을 자주 언급하면서 소로우는 흑인민권운동, 더 나아가 1960년대의 반체제·저항문화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계됐다.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큼이나 도덕적인 의무이다. 소로우만큼 이러한 사상을 유창하게 열정적으로 전파한 사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소로우의 저술과 그가 몸소 보여준 행동 덕분에 우리는 창조적인 항의라는 유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은 영국의 노동운동가들, 나치 점령하의 레지스탕스 대원들, 베트남전 반대 운동가,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중국 대학생들, 부도덕한 정권을 무너뜨렸던 필리핀 국민 등 불의의 권력과 싸우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반전 시위대, 환경운동가, 평화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나체주의자, 히피 등이 서로 앞 다투어 소로우를 자기 이념의 일원으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소로우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은 그가 비폭력주의자라는 호칭이다. 소로우가 비폭력주의자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은 본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시민운동 진영에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부터다. 소로우가 살았던 19세기 시민불복종운동에서 비폭력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소로우는 실제보다 간디와 킹 목사에 훨씬 더 가까운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집 모형>
 
 <시민의 불복종>은 <월든>만큼이나 소로우의 명성에 기둥이 되었다. 1968년에 나온 판본은 통상적인 순서를 바꿔 <시민불복종&월든>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1967년에서 1972년 사이 미국에서는 신학자, 역사학자, 정치사상가, 법이론가, 연구원, 대법원 판사들이 ‘시민불복종’이란 말이 들어간 제목을 붙여 1백여 권의 책을 출간했을 만큼 유행의 중심에 섰다. <시민의 불복종>은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수십 종의 판본이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각급 학교의 커리큘럼에 들어 있다.

 한국에서도 1986년 KBS시청료 거부운동, 2004년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등 크고 작은 시민운동이 <시민의 불복종>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소로우의 외침은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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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raybanslunettesdesoleil.com/ lunettes ray ban 2013.04.23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을 감아봐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거야.


  산업혁명 직후인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일자리를 앗아가는 방직기계를 파괴하자는 러다이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정보혁명과 더불어 디지털시대가 도래하자 지구촌에서는 네오러다이트운동(neo-luddite movement)이 들불처럼, 그러나 낮은 목소리로 번져갔다. 네오러다이트 운동가들은 첨단기계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기술혁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우러져 인간답게 사는 걸 목표로 삼았다. ‘빨리빨리’라는 말이 표징하는 속도의 시대에 맞서 ‘반기술·인간성 회복’을 기치로 ‘느리고 단순하게 살기’를 추구한 것이다. ‘속도가 빨라지면 생각은 짧아진다’는 경구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물리현상에서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듯, 사회현상도 예외가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이런 네오러다이트 생활운동의 중심에는 미국의 스코트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가 있었다. 스코트는 경제학 교수였고 헬렌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운동인 신지학(神智學·Theosophy)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년의 나이에 거대도시 뉴욕의 문명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버몬트 주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니어링 부부의 ‘단순하면서도 충만한 삶’에 대한 실험은 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문명을 떠나 사는 동안 그들 부부는 문명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높이 떠올랐다. 네오러다이트 운동이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활성화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버몬트 주 숲 속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체험한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한 ‘조화로운 삶’(도서출판 보리·원제 Living the Good Life)은 검박한 자연주의 삶을 추구하는 세계인들에겐 ‘교범’이자 ‘지침서’가 됐다. 버몬트는 ‘가지 않은 길’로 널리 알려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만년에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니어링 부부의 자연주의 삶의 철학은 랠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닮았다. 하지만 아직 도시화가 덜 진행되고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에머슨·소로의 19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니어링 부부는 둘 다 농사라곤 아무 것도 모르던 도시내기였다.


 니어링 부부가 버몬트 시골로 들어간 것은 네오러다이트 운동이 싹트기 전인 1932년,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의 일이다. 한국인 대다수가 아직 농경사회에서 엄혹한 일제 강점기를 보내던 사실을 반추해 보면 니어링 부부의 결단은 선구자적 모험이다. ‘조화로운 삶’이 첫 출간된 1954년으로 따져 봐도 한반도의 사람들은 삶의 여유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던 6·25전쟁 직후였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서 돌집을 지어 살면서 ‘단풍나무 시럽 만드는 법’을 글로 썼다. 출판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의 남편이 경영하는 ‘존 데일리 출판사’에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펄 벅 부부가 니어링 부부의 거처로 찾아왔다. 그곳 풍광을 보고 감탄한 펄 벅 부부는 버몬트 농장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면해서 나온 책이 ‘조화로운 삶’이다. 이들의 경험담 속에는 전원생활의 기술, 경제, 사회, 심리적인 면이 두루 담겼다. 땀과 영혼으로 쓴 전원일기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스코트와 헬렌이 도회를 떠날 때는 세 가지 목표를 품고 있었다. 독립된 경제 꾸리기, 건강,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네 가지 기본 가치는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였다. 좀 더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평화주의, 채식주의, 환경주의다.


 구체적인 원칙도 세웠다. 채식주의를 지킨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자족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나눠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반나절만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한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은행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는다. 자연에 있는 돌과 바위로 집을 짓는다. 방문객이 찾아와도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누구든 자기가 먹은 그릇은 설거지하게 한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손일을 한다. 최저 생계비가 마련되면, 먹고 남는 채소나 과일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준다. 하루에 한 번씩은 철학, 삶과 죽음, 명상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우리 집이라는 작은 조직체의 헌법과 같은 것이었다”고 표현한다.


 니어링 부부에게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척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었다. 니어링 부부는 자신들의 삶의 중요성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버몬트 계획을 실천하며 산 스무 해 동안에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캘리포니아대를 스무 해 다니면서 알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더 많이 배웠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니어링 부부는 속편인 ‘조화로운 삶의 지속’(원제 Continuing the Good Life)에서 자신들을 따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의사항을 전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내린 결정이고, 그 결정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고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르는 결정이어야 한다. 처음 3년을 보내기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적어도 그만큼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 스키장이 생기고 관광객과 방문객이 늘어나자, 공들여 지은 돌집과 멋진 밭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시골로 이사했다. 메인 주의 한적한 바닷가에 뿌리를 내리고 26년간 살면서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썼다.

                                                           


 사람들은 니어링 부부에게 자주 이렇게 묻곤 했다. “이렇게 외진 시골로 도망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왜 복잡한 대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행과 고뇌를 나누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한결 같았다. “도시 공동체의 붕괴로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자기 행동의 기준이 되는 이론들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니어링 부부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가장 조화로운 삶은 이론과 실천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 사는 20년 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살았다. 뿐만 아니라 스코트는 100살까지 장수했고, 헬렌도 91세를 누렸다. 이 모두가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을 실천해 얻은 축복이다.


 ‘조화로운 삶’은 1954년 처음 출간될 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소로의 ‘월든’과 비교되곤 했다.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진정한 자유를 전하는 이야기여서 20세기 판 ‘월든’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월든’이 나온 지 꼭 100년 만에 출판된 데다 니어링 부부가 소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초기보다 1970년대 이후 폭발적인 시선을 받았다. 1974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무엇보다 1960년대 말 세계를 휩쓴 ‘68혁명’을 겪은 젊은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 초 이 책이 20만부 넘게 팔리고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교과서처럼 새롭게 조명되었다. 자연히 니어링 부부는 삶에 불만을 가진 중산층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해마다 삶에 지친 수천 명의 부르주아 젊은이들이 메인 주 농장을 방문하면서 니어링은 대항문화의 영웅이 된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1960년대 정치사회운동에서 자신을 불태웠다가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대안에 희망을 잃으면서 내면으로 정향을 돌렸다.


 베스트셀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이자 ‘느림의 철학자’인 피에르 상소 같은 이도 니어링 부부의 삶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시티 운동 역시 니어링 부부가 영향을 미쳤다. 슬로푸드 운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출판돼 각광받은 것은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한 수행자 법정 스님도 니어링 부부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했다. ‘조화로운 삶’은 동아일보가 2000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동경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많은 추종자들이 스코트 니어링에게 매력을 느꼈으나 그의 인생 역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그는 1930년 사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좌파 성향의 공적인 관계를 모두 단절했다. 젊은 시절 톨스토이를 숭배했던 스코트의 사상은 사회 구원, 초월주의, 실용주의, 자연주의, 유토피아주의, 19세기 사회주의, 20세기 공산주의 따위가 버무려진 혼합체였다. 경제학자에서 톨스토이주의자로,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 후 자작농으로 마감한 게 스코트의 일생이었다. 스코트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쓴 존 살트마쉬는 “소로와 마찬가지로 니어링의 의도는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 수탉처럼 이웃을 깨우기 위해 힘차게 홰를 치는 것’이었다”고 자리매김한다. 니어링 부부의 이야기는 조화로운 삶을 살며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경제성이 조화를 이루면 의미 있는 사회 변화를 꾀할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끝없이 늘려 가는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명구를 떠올리게 하면서 말이다. 스코트 니어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백 번째 생일날 이웃 사람들이 선물한 글귀가 웅변해 준다. “당신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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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op.opybeatsbydrdrexb.com/ beats by dre 2013.04.09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추어는 남을 상대로 싸우지만 프로는 자신을 상대로 싸운다.

  2. 감사합니다 2016.11.16 16: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감사합니다 책도구매하려고합니당



 <장면 1> 학교에서 상을 받은 딸이 엄마한테 문자를 보내 자랑했다. “엄마ㅋㅋ나오늘상받았어ㅋㅋㅋ” 엄마한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엄마는 문자메시지에 익숙지 않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웃으며 물었다. “상 받은 거 축하해. 근데 ㅋㅋ가 뭐냐?“ “아, 그건 분위기를 전환할 때 쓰는 거야.” 며칠 뒤, 수업중인 딸에게 엄마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ㅋㅋㅋ” 딸은 기절할 뻔했다.
 <장면 2> 손자가 도토리가 없다며 느닷없이 할머니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재래시장에 가서 진짜 도토리를 사 왔다.

 디지털 시대를 풍자하는 우화다. 그것도 한참 전에 나온 얘기다. 아직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심각한 아날로그 세대다.
 젊은 부모들조차도 자녀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디지털 세대 차이는 하루가 다르게 더 커져만 간다. 요즘의 세대 갈등은 단순히 나이의 차이가 아니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다.
                                                     

 디지털 혁명은 이미 16년 전인 1995년 MIT 미디어랩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교수가 전 세계인들에게 예언하면서 시작됐다. ‘디지털 전도사’란 별명이 붙은 네그로폰테는 당시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묵시록을 들려주며 ‘복음 전도’에 나섰다. 16년 전이라면 디지털시계로 ‘석기시대’를 갓 지난 시절이다. 그가 쓴 ‘디지털이다’(커뮤니케이션북스·원제 Being Digital)는 ‘디지털 바이블’인양 들불처럼 지구촌으로 퍼져나갔다. 지금 보면 지은이의 예상을 뛰어넘는 현실이 존재할 만큼 급변한 상황도 전개되고 있으나 진행형인 부분도 있어 여전히 유효하다. 

 네그로폰테는 이 책에서 “앞으로 세상의 최소단위는 원자(atom)가 아니라 비트(bit)”라며 디지털세상의 도래를 선언했다. 한마디로 간추리면 이렇다. ‘아톰에서 0과 1의 연산체계인 비트로 변화하는 것은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지은이는 자신이 말하는 ‘디지털화’란 단순히 아날로그의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에비앙 생수 한 병을 화두로 삼아 아톰(원자)과 비트의 차이를 풀어나가며, 세계가 디지털화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를 설명한다. 알프스 산맥에서 생산되는 빙하수가 대서양을 건너 자신의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에비앙 생수가 아톰이라면, 영국의 파운드화는 비트로 변환되어 순식간에 자신의 계좌로 이체되어 들어간다. 몇 푼 되지 않는 에비앙 생수 한 병은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손과 땀이 필요하지만 비트경제에서는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수십억 달러의 가치가 이전된다. 이제 상식적인 얘기가 됐지만 비트로 이뤄지는 디지털 정보나 지식은 물질로 만들어지는 아날로그 상품보다 훨씬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게다가 빠르기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도서관에 비유하자면 책이라는 원자를 빌리고 나면 원자는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서가의 빈자리뿐이다. 도서관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단지 원자를 비트로 바꾸면 모든 책들이 컴퓨터 파일로 디지털화된다. 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다면 비트를 빌려가도 비트는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 다르다. 책은 한 사람만 빌려 볼 수 있지만 비트는 수만 명이 한꺼번에 빌려 볼 수도 있다.


 비트는 그저 무언가를 나타내는 0과 1일뿐 크기도 없고 색깔도 없다. 형태도 없고 질량도 없다. 더구나 비트는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 비트는 손쉽게 혼합된다. 멀티미디어란 매우 복잡한 것처럼 들리지만 비트를 섞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멀티미디어라는 것은 음악 비트와 영화 비트, 문자 비트를 하나로 섞은 것일 뿐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당시만 해도 비트의 경제적 가치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사이버 아이템을 매일 사고팔며 자신의 ‘아바타’를 가꾸기 위해 한 달 용돈도 마다하지 않는 요즘의 누리꾼들을 보면 더 이상 아톰과 비트의 차이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이 책은 다가온 정보화 사회의 핵심 요소인 비트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친숙하게 접해왔던 아톰이 변화한 것임을 알려준다. 네그로폰테만 이같은 견해를 펼친 건 아니지만 비트의 세계로 인도하는 전도 행위의 열정과 탁월성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이 책은 ‘Being Digital’이란 존재론적인 원제가 시사하듯 ‘디지털시대의 존재론’으로 일컬어진다. 저자는 훗날 굳이 제목에 Being이란 단어를 쓴 이유를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생활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기술이 디지털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디지털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 존재론까지 사유한 그가 ‘21세기의 하이데거’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에선 ‘더 적은 것이 더 많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 같은 역설적인 현상도 전개된다고 소개한다.


 저자는 디지털 혁명을 낙관적으로 내다본다. 그의 낙관주의는 디지털화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분권화의 특성에 기인한다. 물론 지은이도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하고 있긴 하다. “모든 기술, 혹은 과학의 선물은 어두운 면을 갖고 있다. 디지털 세상도 마찬가지다. 지적 재산권남용, 프라이버시 침해, 디지털 문화 파괴주의, 소프트웨어 해적질, 데이터 도둑질 등을 경험할 것이다.”


 그럼에도 디지털 세상의 강력한 네 가지 특질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바로 탈중심화(decentralizing), 세계화(globalizing), 조화력(harmonizing), 분권화(empowering)가 그것이다. 이런 특질을 바탕으로 디지털이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벽돌이 될 것이란 희망을 저자는 펼쳐 보인다. 결국 네그로폰테의 복음은 “독재여 안녕!, 비트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로 수렴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시간’이라고 평가한다. 그 뒤 이 시간에 맞춘 시계도 시판됐지만 공용화에 이르진 못했다.


 그가 디지털시대를 낙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얼굴을 마주보며 나누는 인간과 인간의 대화에 가까운’ 인터페이스를 꿈꾸기 때문이다.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진정한 사용자 중심의 인터페이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언제나 휴머니즘 입장에서 컴퓨터를 대하고 있는 모습이 이 책에서도 역력하게 드러난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주축이 돼 이루어질 미래의 세계는 기계적인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중심이 되는 감성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그는 여기에다 단순성을 덧붙여 강조한다. 이 때문에 “네그로폰테가 멀티미디어의 전도사라면 빌 게이츠는 그의 복음을 따르는 비즈니스맨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누군가 칼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일어나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자본론’ 대신 ‘정보론’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시각에서 ‘디지털이다’를 ‘디지털시대의 자본론’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은이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네그로폰테의 생각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공학자 새뮤얼 플로먼은 “네그로폰테는 디지털 세계를 아날로그 영역과 대비시키고 있으나 아날로그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했고, 교육적이고 환상적인 반면 너무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네그로폰테와 MIT 미디어랩에서 함께 일한 윌리엄 미첼 교수는 이 책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비트’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정보혁명으로 등장한 비트가 공간혁명의 상징인 물리적 도시를 죽였다’는 게 그의 견해다.

 이 책에는 한국이 딱 한번 등장한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설명하는 사례로 한국과 일본이 더불어 언급된다. 네그로폰테는 한국이 창의적이고 유연한 교육의 길 대신 주입식 암기교육에 극단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도 그런 뜻을 담았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는 비전아래 “미쳤다”는 세간의 조롱과 의구심을 떨쳐버렸다. 미디어랩 설립 당시 그는 “출판과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산업이 디지털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 갈 것”이라며 동지를 구하러 돌아다녔지만 비웃음을 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곧 현실로 다가왔고, 하나의 콘텐트를 다양한 채널과 플랫폼을 통해 가공하는(One Source Multi-use) 개념이 상식처럼 돼 버렸다.


 그는 “빵보다 노트북이 더 중요하다”면서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값싼 100달러짜리 PC 보급 운동을 펼쳤다. 북한 어린이들에게도 OLPC(One Laptop Per Child) 운동의 혜택을 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2010년엔 ‘인터넷’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자도 16년 전 ‘디지털이다’를 썼을 때와 지금은 상전벽해처럼 달라졌다고 회고한다. “미래에는 아마도 학술적으로도 더 많은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고 또 ‘색다른 사람들’이 지형을 바꿀 것이다.” 이미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 네트워크와 만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이 조성되면서 역전현상이 일어나 비트가 다시 아톰과 결합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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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4709.cicnewsst.com toms outlet 2013.07.18 0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나는 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