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과잉이 촉발한 지구촌 위기를 그린 영화와 소설이 전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을 그렸지만, 한정된 자원 속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정인구를 유지하는 게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의 신작소설 ‘인페르노’는 주인공인 유전공학자 조브리스트의 입을 빌려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진짜 질병은 인구 과잉”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영화와 소설은 영국 경제학자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문제작 ‘인구론’(원제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설국열차’는 열차의 주인 윌포드의 입을 통해 맬서스의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자원이 제한된 열차 안에서 인구, 식량을 조절하기 위해 계획적인 반란으로 인구수를 줄여가는 플롯은 ‘인구론’의 논리와 빼닮았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인페르노’(지옥 편)에서 영감을 얻어 쓴 브라운의 소설 주인공은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줄이는 생물학적 테러를 기도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구론’의 철저한 신봉자이기도 하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대목이다. 이 공식은 익명으로 출간한 초판에만 나온 뒤 2판부터는 빠졌다. 맬서스의 인구 성장에 대한 가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생존은 인구 규모에 의해 강한 제약을 받는다. 생존 수단이 증가할 때 인구도 증가한다. 인구 증가의 압력은 생산력의 증가를 필요로 한다. 생산력의 증대는 더 큰 인구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생산력의 증대가 인구 성장의 필요 정도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구 성장의 수용력은 한계에 봉착한다. 성행위, 노동, 아이 등을 위한 개인의 비용/수익이 인구의 증가나 감소를 결정한다. 인구가 생존 가능한 규모를 초과하면 자연은 사회 문화적인 잉여(잉여 인구)에 대해 특정한 효과를 부과한다.’


  맬서스는 인간이 무절제한 성욕 때문에 자식을 분별없이 많이 낳아 이를 그대로 둘 경우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우려한다. 그 결과는 빈곤의 악순환이다. 그는 인구 급증을 막는 방법으로 전쟁, 기근, 질병 같은 사망률을 높이는 ‘적극적 억제’와 출산율을 낮추는 ‘예방적 억제’를 들었다. 그가 권고하는 방법은 물론 예방적 억제다. 맬서스가 살던 200여 년 전에는 피임법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을 늦게 하거나 금욕으로 출산을 줄여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맬서스는 특히 하층민들이 성욕을 참지 못하고 국가의 빈민 보조금에 기대어 아이를 많이 낳으려 한다고 전제했다. 그는 국가가 빈민자를 구호해 생활 조건을 개선하면 출산율만 높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 때문에 국가가 극빈자를 구호하거나 개인이 자선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직후여서 도시 빈민이 증가한 것은 물론 전체 인구가 대폭 늘어나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다행히 맬서스의 예측은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빗나갔다. ‘인구론’이 첫 출간된 1798년 이후 200여 년 동안 세계 인구는 6배가량 늘어났지만, 식량 생산량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증가했다. 인구는 피임법의 보편화로 상당수 국가에서 무분별한 출산이 줄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진 않았다. 식량도 농업과 생산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절대적인 부족현상은 면했다. 다만 분배의 불균형만 찾아볼 수 있다.
                                                                 

 

   ‘인구론’은 틀린 예측보다 사회불평등을 옹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져 더 큰 비난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비판의 표적이 됐다. ‘도시의 거리들은 더욱 비좁아져야 하며, 보다 작은 집에 보다 많은 사람이 거주하도록 해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시골의 경우 썩은 물웅덩이 근처에 마을을 짓고, 특히 건강에 유해한 습지대에 새 정착지를 건설하도록 적극 권장해야 한다. 무엇보다 전염병 치료약이 사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사회혼란을 근절할 방안을 기획함으로써 인류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 인도주의적이나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혀있는 이들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만 한다면 연간 사망률은 1:36이나 1:40에서 1:18, 혹은 1:20까지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모두가 너도나도 결혼적령기에 갓 이르자마자 결혼한다 해도 기근으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무임승차한 꼬리칸 탑승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앞쪽 칸 사람들이 군대를 동원해 서슴없이 학살을 저지르는 상황과 흡사하다.


  이 같은 논쟁적인 주장으로 인해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인구론’은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 사회주의자와 계몽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드높았다. 이 때문에 맬서스는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엄청난 비판과 악담에 시달려야 했다.

 

   ‘인구론’은 당시 자본가들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에게는 원군이었다. 빈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같은 데다 사회 복지에 애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빈민 구제와 인구 증가를 모두 지지했던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도 입장을 바꿔 둘 다 반대했다. 그렇지만 맬서스에게 악의나 우생학적인 숨은 의도 같은 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빈곤과 인구 증가 가운데 후자가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기에 작은 해악을 감내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맬서스는 초판을 익명으로 출간하면서 제목도 ‘인구의 원리에 관한 소론: 윌리엄 고드윈, 콩도르세, 그 외 여러 저술가의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개혁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이라는 긴 이름을 붙였다. 파격적인 주장의 반향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2판부터는 유럽 각국의 인구 관련 자료를 망라해 객관성을 보강했다. ‘도덕적 억제’를 통한 인구 문제 해결 가능성도 낙관적으로 바꿨다. 빈민 구제는 관련 법률의 완전 폐지가 아니라 점진적인 폐지가 좋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인구론’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 경제에 낙관적인 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맬서스의 철자를 고쳐 ‘몬스터(Monster·괴물)’라고 불렀을 정도다. 독일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식량 생산력의 비약이라는 변수를 간과한 ‘인구론’을 “세계의 문헌 가운데 가장 멍청한 책”이라고 조롱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말하는 과잉 인구란 자본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기는 상대적 과잉일 뿐이라고 폠훼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절망에 빠진 빈민층을 위로하고 ‘인구론’을 공격하기 위해 구두쇠 스크루지가 개심한다는 명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썼다고 한다.
                                                                 

 

 반면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인구론’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했다. “인구론은 젊은 천재의 작품이다. 인구론의 중요성은 그가 발견한 사실들이 신기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에서 나오는 단순한 법칙을 강조한 데 있었다. 이 책은 사상의 진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케인스는 “만일 리카도가 아니라 맬서스가 19세기 경제학이 뻗어 나온 근간이었더라면, 오늘날 세계는 얼마나 슬기롭고 풍요한 곳으로 되었을 것인가”라며 맬서스를 추어올렸다. 구스타프 콘은 ‘인구론’을 “역사를 통틀어 모든 국가 경제에 토대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연법”이라고 상찬했다.


  ‘인구론’은 빗나간 예측과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20세기 이후 세상을 바꾸는 촉매가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구 폭발을 경험한 개발도상국들이 맬서스의 이론을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경고는 1970~1980년대까지 한국, 중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개발도상국에서 위력을 떨쳤다. 중국의 엄격한 ‘한 자녀 정책’은 인구론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은 사례다. 이 정책은 요리, 한자와 더불어 중국에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는 인구의 증가율을 연 1%로 끌어내렸다. 그럼에도 중국 인구는 현재 13억 명을 넘어섰다. 한국도 이 책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1960년대는 세 자녀 운동, 1970~1980년대 두 자녀 운동으로 인구 억제정책을 폈다. 오늘날에는 저출산을 걱정할 만큼 세상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지구촌 전체로 보면 맬서스의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다. 유엔은 세계 인구가 2011년 70억 명을 돌파해 2025년 81억 명, 2050년에는 96억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인구론’은 1801년 영국 최초의 근대적 인구 조사가 실시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바 있다.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인구 증가와 이로 말미암은 천연자원 고갈,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가 100년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진단해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여기에 ‘신맬서스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구론’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정립에도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모든 동식물에 적용한 것이 자신의 이론이라고 설명했다.

   맬서스가 기술진보의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인구론’에 담긴 통찰과 현실주의적 비판의식은 오늘날에도 간과할 수 없는 긴요성을 지닌다. 레스터 브라운 미국 지구정책연구소장은 “세계 인구를 80억 명으로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면 인류에게 지구가 1.5개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2025년에는 세계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18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식량을 물, 석유 등으로 확대하면 ‘인구론’의 계고장은 더욱 심각해진다. 맬서스를 거짓 예언자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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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유난히 오랫동안 수난을 겪고 있는 인물이 막스 베버다. 금서 목록작성이나 검문검색 때가 되면 웃지 못 할 소극(笑劇)의 무대에 영락없이 오르는 것이 막스 베버의 책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학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하던 경찰은 막스 베버의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발견되면 무조건 압수하곤 했다. 마르크스를 부르던 이름 ‘맑스’와 베버의 ‘막스’를 구분하지 못했던 권력 때문에 일어난 책 수난은 1950년대나 21세기를 가리지 않는다.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상증 원로목사가 1950년대 말 미국 유학을 마친 뒤 배를 타고 귀국 할 때의 일화다. 부산세관을 통관할 즈음 처음 뜯은 상자의 맨 위 책이 하필이면 영어로 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세관원이 “뭐야, 이거 맑스(마르크스)잖아”하며 책을 옆으로 밀쳐놓았다. 마중 나온 친구가 세관원에게 “이건 공산주의자 맑스가 아니고 기독교 막스요”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관원은 막무가내로 기다리라고 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책은 모두 서울 문교부(현재의 교육부)로 가져가 허가를 받아야 하니 며칠 대기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2004년 국군기무사가 병영에 반입할 수 없는 금서를 발표하면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포함시켰다. 경찰청 공안문제연구소가 공산주의 ‘찬양·동조’가 의심된다며 이 책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이름이 비슷한 데다 그의 대표작 ‘자본론’과 책 이름도 흡사했던 게 죄라면 죄다. 그러자 시중에는 “마르크스 때문에 애꿎은 막스 베버가 고생한다”는 우스개까지 나돌았다.

                                                                                                    


  베버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원제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은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평했듯이 근대사회과학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논쟁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다. 베버의 궁금증은 근대의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왜 유럽에서만 싹터 성공적으로 정착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구의 역사가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20세기 들어서야 식민 지배를 청산한 뒤 근대국가를 세운 제3세계의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물음표의 하나였다. 베버가 찾은 해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다.


   그는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기원을 문명비교 분석방법으로 답을 찾아냈다. 이윤추구 동기에 따라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지리적으로 중국, 인도, 바빌론, 시대적으로 고대와 중세에도 있었지만, 서부 유럽의 경우 이와 구별되는 ‘합리적 자본주의’가 출현했다는 점이 독특하다는 게 베버의 생각이다. 이 같은 합리적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는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라고 베버는 맥을 짚었다.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나, 베버는 자본주의가 태동한 영국의 청교도에 눈길을 뒀다. 청교도의 금욕주의야말로 근대적 자본주의의 촉매라고 여겼다. 금욕주의는 사치와 향락, 태만을 죄악시하는 반면, 부의 축적을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신의 명령으로 받들었다. 베버는 금욕주의가 돈벌이의 윤리적 멍에를 벗겨주고 자본 축적도 가능하게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 단순화하면 종교개혁이 유럽의 합리적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프로테스탄트’란 말은 1529년 2월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를 비롯한 로마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했다. 루터파 교도들이 이때 얻었던 별명인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신교도 전체를 이르는 용어로 굳어졌다. 프로테스탄트는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비롯해 전 유럽으로 퍼졌고, 이민자들을 통해 북아메리카까지 확산됐다.

                                                                                                 

                                                                                   <막스 베버>


   베버는 서양 문명의 핵심적인 특징인 합리성이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논증한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 같은 것들이다.


  합리적 자본주의가 서구에서만 나타난 것에 대해 베버는 ‘소명’과 칼뱅주의 ‘예정교리’에 주목했다. 예정 교리는 이를 수용한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제공했다. 예정 교리는 절대주권자인 신이 자신의 뜻대로, 일부 사람만 구원되도록 예정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직업을 신의 소명이라 믿고, 예정설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경험적 증거, 즉 성실한 노동의 결과물인 자본이 형성되고 축적된다고 했다.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하면서 게으름이 비판을 받고 원죄를 가진 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게 됐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을 구원의 한 방편으로 여긴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했다. 산업혁명 이후 임금노동자가 등장하면서 필요한 만큼만 일하던 시대는 끝났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이 대세였던 유럽에서는 노동을 그리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성 월요일’(St. Monday)이라는 전통이 있었다. 토요일부터 술과 유흥에 빠져 지낸 노동자들이 월요일에도 일에 복귀하지 못한 채 쉬는 게 문화처럼 굳어져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보편적인 생활 패턴이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에 대한 가치관은 지금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더 많은 수입을 위해 지나치게 일을 하기보다는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기 쾌락을 위해 쓰는 게 자연스러웠다. 경쟁도 치열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시민계급의 직업정신’도 낳았다고 베버는 말한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논의의 전제로 삼는다. 반면에 그는 영리욕이나 화폐욕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는 통념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베버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짧게 간추리면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갖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노동에 열중하라’ ‘항상 근검절약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라’이다.
 

   베버의 탁월성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인 사회과학방법론에 따라 설명한데 있다. 당대를 지배하던 가치 중심적 관점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그때까지 일반적인 학문영역에서 분화되지 않았던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로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받게 된다. 베버는 관념적 동기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을 만들어냈다고 정의하지 않고, 단지 관념적·종교적 동기가 근대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역사적 단계가 설립되는 데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역설한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이 같은 자본주의 정신을 찾아냈다고 한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드러난 윤리의 최고선은 과거와 달리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도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행복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모든 단점을 전적으로 벗어나 돈 버는 것’에 있었다. 프랭클린은 근면·성실하고 금욕적이면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베버는 이 책이 나온 뒤 이념과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분파로부터 화살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생산수단의 소유가 아닌 정치·문화적인 영역으로 분석한 베버를 공격했다. 가톨릭 쪽에서는 구교문화를 세속적 향락으로 매도한 베버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들로부터도 열렬한 박수를 받지 못했다. 책 곳곳에 나오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묘사 때문이다.

   이미 중세시대에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복식부기와 다양한 금융기법이 생겨난 지역이 이탈리아의 가톨릭 도시국가였다는 실례를 들어 베버의 논리적 취약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베버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자본주의 정신이 전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든다.

   그럼에도 베버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은 역사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1904~1905년 처음 논문으로 발표된 이후 베버의 견해는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만든 미국이 근대 자본주의의 종주국이 된 것만으로 어느 정도 입증됐다. 미국은 지금도 이른바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주류 계층을 이루고 있다. 독일인들이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강한 것 역시 프로테스탄티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한다.

                                                                                                         

                                                                    <청교도 가정의 모습을 그린 삽>


   20세기 후반 들어 동아시아에서 꽃핀 자본주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론와 거리감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도 직업과 노동에 대한 의식, 삶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측면에 있다는 게 베버의 주장이었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교윤리가 후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미국 하버드대 중국계 교수였던 두웨이밍(杜維明)의 주장이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 같은 새로운 견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파생물이라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베버 사상의 영향 때문에 유교윤리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베버의 문제의식을 동양사회에 접목시키는 시도여서 베버 사회과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연구주제다.


   최근 중국을 이끌어가는 학자들이 즐겨 읽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사실도 이 책이 바꾼 세상을 실증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베버에 천착하는 중국 오피니언 리더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아시아의 발전과 관련된 학문적 연구에 미친 이 책의 영향이 결코 작지 않음을 방증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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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이던 1938년 10월30일 저녁 7시58분, 미국 CBS 라디오에서 드라마를 방송하다 갑자기 뉴스를 전했다.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긴급 뉴스를 전해드립니다.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습니다. 화성인들의 군대가 뉴저지 주의 한 농장 부근에 착륙했습니다. 화성인들이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도로는 피란민 행렬로 북새통입니다. 미국이 혼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뉴욕에서는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시민이 진짜 피란에 나섰다. 뉴저지 주에서는 “유독가스가 퍼졌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20여 가구가 탈출을 시도했다. 피츠버그에서는 절망한 여성이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미국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훗날 600만 명의 청취자 가운데 120만 명이 피란길에 올랐다는 통계까지 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겁먹은 사람들이 화성인의 독가스를 피하려 젖은 타월을 얼굴에 두르고 집을 뛰쳐나갔다. 서부에서는 로키산맥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이 줄을 잇고 일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은 종말이 왔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이 뉴스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화성인의 습격’이라는 드라마의 일부였다. 뉴스를 보내기 전 드라마 제작가 오손 웰스는 성우의 목소리를 빌려 실제 사실이 아니라 드라마라는 점을 몇 차례나 강조했다. 하지만 뉴스 형식을 동원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삽입하자 드라마를 듣던 청취자들이 실제상황으로 착각한 것이다.

 

  매스미디어 역사상 가장 큰 해프닝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당시 23세이던 웰스는 ‘천재적 연출가’ ‘드라마의 신동’으로 불렸다. 웰스는 영화사에 스카우트돼 3년 뒤인 1941년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격찬 받은 ‘시민 케인’을 만들었다.

                                                              

 

  드라마 ‘화성인의 습격’은 영국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공상과학소설 ‘우주전쟁’(원제 The War of the Worlds)을 각색한 것이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라디오용 드라마로 제작됐다. ‘우주전쟁’은 드라마보다 40년 전에, 지금으로부터는 115년 전인 1898년에 첫 출간됐다.

 

  문어처럼 생긴 괴물 화성인들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세워 지구를 침공하는 게 줄거리다. 이 작품은 주인공 ‘나’의 적막하고 불길한 목소리로 시작된다. “19세기 마지막 몇 년, 만약 인간보다 높은 지능을 소유했으면서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결국 죽게 마련인 존재에 의해서 이 세계가 날카롭고 면밀하게 관찰되고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으리라.” 주인공은 ‘유일한 지성체는 자신’이라고 믿는 인간의 오만함과 인간보다 뛰어난 외계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러던 20세기 초 어느 날, 그가 사는 영국의 작은 마을에 화성에서 날아온 실린더 모양의 우주선이 착륙한다. 그들은 화성에 종말이 닥치자 지구를 찾아왔다. 그날 밤 우주선 안에는 거대한 눈과 촉수를 가진 화성인이 숨어 있다가 초록색 열선(熱線)과 독가스를 발사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런던은 곧 초토화된다. 화성의 우주선이 연이어 도착하면서 전투 기계로 무장한 화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해 나간다. 지구에서는 각종 무기로 대항한다. 지구인들은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핵무기까지 등장시키지만, 화성인은 그마저도 쉽게 무력화한다. 생존자들은 지구가 화성인에게 정복당했다고 절망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성인들이 모두 죽어간다. 그들은 지구의 박테리아에 감염돼 죽게 된 것이다. 지구의 미생물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성인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생존자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우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외계인의 침공에 대비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인물들의 심경변화와 행동을 통해 인간의 오만과 무지를 이렇게 비판한다. “인간은 끝없는 안이함으로 그들의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려 이 지구 위를 오갔으며, 자신들의 왕국이 물질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기껏해야 지구상의 인간들은 이런 식의 공상에 빠졌다. ‘화성에도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 몰라. 아마도 우리보단 열등한 존재라, 우리가 사절단이라도 보낸다면 크게 환영할 걸.’”

 

  소설은 인간의 잔혹성도 신랄하게 꼬집는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젠 사라지고 없는 들소나 도도새 따위의 동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열등한 생물들에게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고 철저한 파멸을 야기시켰던가 하는 것 말이다. 호주 타즈메이니어인들은, 영락없이 인간과 같았음에도, 유럽에서 이주해 온 자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불과 50년 만에 완전히 멸종당하고 말았다. 만약 화성인들이 이와 같은 생각으로 전쟁을 걸어온다면, 우리가 무슨 자비의 전도사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1898년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운하도 있다’고 관측 결과를 발표한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의 주장에 감화를 받아 바로 그해 이 소설을 쓰게 됐다. 로웰은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는 용어를 만들어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로웰에 앞서 1877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지오바니 시아파넬리가 화성표면에서 선(線)을 발견한 이래 외계인이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행성으로 회자돼 왔다. 로웰은 ‘이 선들은 화성인들이 도시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개설한 운하’라는 견해를 최초로 내놓았다.

 

  문명비평가이기도 한 웰스가 소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건 단순히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가 초래할 수 있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외계 생명체들의 행태를 빗대어 인간의 만행을 비판하려 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과학 문명에 대한 맹신과 영국 같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도 비판하고 있다. 웰스는 당시 유럽이 전 세계를 약탈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화성인을 단순히 감정 없는 침입자로 묘사했다. 이 소설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우주전쟁’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 문학작품이다.

 

  웰스는 이미 1895년 ‘타임머신’, 1987년 ‘투명인간’이란 SF소설을 발표해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타임머신’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작가이기도 하다. 웰스는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프랑스 작가 쥘 베른과 더불어 공상과학소설의 개척자로 불린다. 베른은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리’ ‘달나라 일주’라는 작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두 작가는 ‘미래와 상상’을 소설 속에 그려내고 있는 공통점을 지녔다. 두 사람 모두 100여 년 전에 작품 활동을 했음에도 20세기와 21세기의 작가들을 제치고 열독 상위권에 올라 있다는 것은 줄거리의 흥미진진함과 소설 속의 온갖 장치가 현대 소설을 읽는 느낌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두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확연히 다르다. 베른이 인류와 문명을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웰스는 인류 문명에 대한 지독한 비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른이 당대의 과학적 지식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 실현 가능한 발명품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킨 데 비해 웰스는 온갖 장치를 ‘상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꾸몄다. 베른은 “나는 그의 상상력 넘치는 천재성을 한없이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웰스를 격찬했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우주전쟁>

 

  웰스의 ‘우주 전쟁’은 발표되자마자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 긴 촉수로 인간을 휘어잡아 죽이는 외계 생명체, 바퀴 대신 발이 달린 거대한 로봇, 철제 무기를 녹이는 외계의 광선포, 열선에 의해 녹아내린 도시 같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지난 100여 년간 소설과 영화에서 수없이 변주돼 왔다. 오늘날까지 SF 장르에서 가장 사랑받는 행성 간의 전쟁, 레이저 빔, 원자폭탄, 외계의 내습 같은 소재는 한결같이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SF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의 생김새가 대부분 문어와 비슷하게 그려지는 것은 ‘우주전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생소하게 들렸을 최첨단 무기는 상당부분 현실화했다. 시대를 앞서갔던 작가 웰스는 핵폭탄에 관한 이론이 나오기 훨씬 전에 원자폭탄 전쟁을 예견했다. 반전활동가, 평화적 세계통합을 꿈꾸는 유토피안으로 살았던 사회주의자 웰스는 자신의 예언이 태평양 전쟁에서 비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생전에 목격했다. 웰스는 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 독일 패망, 유럽연합, 프리섹스 등을 족집게처럼 맞혔다.

 

  이 소설은 SF를 문학의 반열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대 환상문학의 대가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웰스는 모든 공상과학소설을 반세기 앞서 예시하고, 그것을 넘어선다”고 격찬한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우리의 세계와 사상은 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웰스는 무엇보다 사상과 상상력의 해방자라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찬양한다.

 

  이 소설은 문학 장르뿐만 아니라 발명가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소설 ‘우주전쟁’은 1938년 오손 웰스에 의해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된 이후 1953년에는 조지 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해 2005년 개봉한 영화 ‘우주전쟁’ 역시 웰스 소설의 각본이다. 스필버그는 “웰스는 시대를 앞선 상상력을 가진 인물이다. 내 영화 ‘우주전쟁’은 그에 대한 존경과 헌사의 표현”이라고 숭앙했다. 1988년에는 TV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화성침공’이란 영화를 만든 팀 버튼 등 수많은 영화감독과 엔터테이너들은 가장 큰 영감을 받은 문학작품으로 소설 ‘우주전쟁’을 꼽았다. 이 소설은 ‘스타십 트루퍼스’, ‘인디펜던스데이’ 등 다수의 대형 극영화들의 모티브도 됐다.

 

  ‘우주전쟁’은 문화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6년 세계 최초로 액체추진 로켓 발사 시험에 성공한 로버트 고다드는 이 소설에서 화성인들이 타고 온 물체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소설 속에 등장한 생물학 무기, 레이저 총, 탱크는 20세기 들어와 실제로 제작됐다. 미 항공우주국의 화성탐사선 발사계획도 이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과학적 상상을 통해 사회문제를 제기했던 웰스의 사상은 많은 후진 작가들에게 이어져 SF가 단지 ‘공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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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호화·사치생활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악의적으로 덧씌워진 얘기의 하나다. 혁명세력이 왕실에 대한 불신을 증폭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와 흡사한 말이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어떤 공주가 농부들로부터 빵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브리오슈(버터를 듬뿍 사용해 만든 단과자빵)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일화다. 여기서도 공주는 뻔뻔한 여자로 매도되지는 않는다. 공주가 알고 있는 빵이름이 브리오슈뿐이었던 데다 호의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빵이 없으면 와인을 마시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와인을 마시려는데 빵이 없었다. 그 순간, 루소는 공주의 이 삽화를 떠올리고선 브리오슈와 함께 와인을 마신 일을 ‘고백록’에 썼다. 루소가 ‘고백록’을 쓴 것은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에게 시집오기 전의 일이다.

  앙투아네트는 루소의 영향으로 전원생활을 동경했다. 농민들의 진짜 생활은 알지 못한 채 일반 농가를 재현하고 직접 소젖을 짜기도 했다. 루소 때문에 귀부인들도 아이에게 모유를 직접 먹이는 풍습이 생기자 그녀는 기발한 착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공원에 손님들을 불러 자신의 젖가슴을 본떠 만든 도자기 잔에 우유를 따라주곤 했다. 그녀는 훗날 제네바에 있는 루소의 묘지를 찾아갈 정도였다. 루소가 쓴 책 한권 때문에 자신이 혁명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프랑스 혁명 지도부의 정전(正典)이 된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원제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10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루소는 결코 혁명을 사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유, 평등, 주권, 일반의지 같은 ‘사회계약론’의 핵심 단어들은 혁명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절대왕정에 정면으로 맞선 프랑스혁명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한 마디는 사실상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루소는 이 책의 거의 모든 장에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루소는 무엇보다 자유의 절대화를 부르짖었다.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의 권리, 나아가서는 그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인간의 권리’란 말은 이 책에 처음 등장한 뒤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타고난 자유를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사회계약의 목적이라고 루소는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자유를 자연 상태에서 누리는 ‘자연적 자유’, 사회계약 이후 시민 상태에서 누리는 ‘시민적 자유’, 인간이 진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는 ‘도덕적 자유’로 구분한다.

                                                                                                  

                                                                                  <루소 초상화>


   루소는 ‘사회계약’을 국가성립의 기초라고 여겼다. 국가는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단체이며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계약으로 탄생한 국가는 구성원 개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 이익에 반하는 이해를 갖지 않고, 가질 수도 없다고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의 특성이 힘과 자유의 전면적 양도에 있다고 판단했다. 국가는 그 신성한 계약에 의해 성립하며 이에 반하는 일은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저마다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삼아 일반의지의 최고지도 아래 둔다. 그리고 우리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전체와 나누어질 수 없는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사회계약의 본질이다. 사회계약이란 인민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자기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 완전히 양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탄생하는 것이 개인 의지의 집합체인 ‘일반의지’다.


   ‘사회계약론’에서 열쇳말은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는 ‘국민의 뜻’이다. 오늘날 선거는 한 사회의 일반의지가 드러나는 계기다. “일반의지는 공통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이지만,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 고려하는 특수의지의 총화이다.” 일반의지는 독립의 힘이고 민중의 의지다. 일반의지가 글로 표현된 것이 법이다. 사람들이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 법이며, 그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리에 루소 사상의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일반의지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합의하는 거대한 공동체는 무해한 경우라면 집단적 행복의 유토피아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공동체란 ‘당이 언제나 옳다’는 강령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되는 전체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루소가 자유국가 이념의 아버지이면서 민중 독재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야누스의 모습을 떠안았다.

                                                                                               

                                                                  < 제네바 루소 공원의 루소 동상>


   루소의 일반의지는 주권과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 주권은 입법하는 것이며, 법은 일반의지의 공정한 작용이다. 주권의 본질은 세 가지다. 첫째, 주권은 양도할 수 없다. 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이고, 그 의지는 양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도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주권이 아니라 힘이나 권력이다. 둘째, 주권은 분할할 수 없다. 일반의지의 행사가 주권이어서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분할한다면 그것은 특수의지가 되며, 그것의 행사는 주권이 될 수 없다. 셋째, 일반적 약속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권은 사회계약에 의해 정치체가 부여받은 모든 성원에 대한 절대적인 힘이다.


   루소의 주권론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루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유명한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배워 유물 변증법을 창안했듯이 루소는 홉스의 주권론을 인민주권론으로 승화시켰다. 홉스의 이론을 루소가 이어받아 혁명적인 민주주의 이론으로 재탄생시킨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야말로 루소의 천재적인 착안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적 권위는 본질적으로 국민 안에 있다는 게 루소 정치사상의 핵심이다. 여기서 정치적 권위는 다름 아닌 주권을 가리킨다. 정부나 국가 행정은 주권에 종속된 기관이며, 행정기능이 위임된 위원회 같은 것에 불과하다. 국가를 구성하는 법률은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하고, 정부는 법률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 만약 정부의 통치가 일반의지에 반할 경우, 국민은 언제든지 의회를 소집해 행정가를 소환할 수 있다.

 

   루소는 국가와 사인(私人)의 관계를 규정하는 헌법(공법), 사인과 사인의 문제를 다루는 민법 등을 형법과 구별하면서 형법에 대해서는 ‘법을 지키게 하는 법’이라고 정의했다. 루소는 민주주의가 항상 공동선을 보장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외부 기구는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공평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은 루소가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이 담긴 게 ‘사회계약론’이다. 그가 고창(高唱)한 뜻은 자연 상태의 자유와 평등, 건강한 도덕심을 회복하는 길을 찾자는데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지금에야 상식처럼 들리지만, 당시 지배계급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책이 출간되자 파리 고등법원에서 압수명령과 더불어 루소에 대한 체포명령이 떨어진 게 이를 입증한다.

 

   이 책은 1762년1월18일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판됐다. 책이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내에 반입되지 못했고, 은밀하게 들여온 책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프랑스 혁명으로 감옥에 갇힌 루이16세가 “나의 왕국을 무너뜨린 놈은 루소와 볼테르 두 놈”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당시 ‘일반의지’ ‘사회계약’이라는 말은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책의 들머리에 나오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는 문구는 그 뒤 수많은 반체제 운동가들이 슬로건으로 숱하게 사용해 책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프랑스 대혁명은 이 책에 담긴 이념을 빌려왔다. ‘모든 주권은 국민 안에 있다’는 것과 ‘법은 전체의사의 표현’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책은 프랑스 대혁명은 물론 유럽 곳곳에서 근대정치 태동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미국 독립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회계약론 1762년 판본>
   한편으로는 루소가 창안한 멋진 정치공동체의 모델이 전제한 사회와 국가의 관계가 현실세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이 드러나 수많은 비판을 낳았다. ‘루소가 민주주의 스승인가 전체주의 창시자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 시대인 19세기에는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벤자멩 콩스탕은 “사회계약론은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의 가장 끔직한 보조자로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루소는 결코 전체주의 정권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일반의지라는 이념이 많은 문제의 소지를 담고 있어 애초 취지와 다른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논란을 뛰어넘어 그의 정치철학은 현실정치, 21세기의 지구촌에서도 꾸준히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근대사의 문을 열어준 과학의 천재가 아이작 뉴턴이라면 인문학의 천재는 루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미국의 저명한 문예잡지 ‘애틀랜틱 먼슬리’는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다양한 ‘계약’을 통해 평화를 유지해오고 있기도 하다. ‘사회계약론’은 지금도 ‘이 타락한 인간사회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구성할 때 인간이 자연 상태의 선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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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2146년, 한 우주비행사가 광속으로 우주여행을 떠나 10분을 머물다 지구로 돌아온다. 그 동안 지구에서는 무려 80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에겐 지구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그가 살던 곳이 엄청나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옛날 걸어본 듯한 길을 되짚어 간다. 그가 도착한 집에는 한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이 비행사를 2층으로 안내한다. 거기엔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백발노인이 누워 있다. 노인은 비행사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그윽한 눈초리로 바라보다 뜨겁게 포옹한다.


 

    백발노인은 우주비행사의 아들이다. 젊은 비행사는 자신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들을 보고 어쩔 줄 모른다.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아들은 아버지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말한다. 시간을 테마로 한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첼로’(Ten Minutes Older: The Cello) 중 마이클 레드퍼드 감독의 10분짜리 작품 ‘별에 중독되어’(Addicted To The Stars)의 줄거리다. 한 사람에게 10분이라는 시간이 어떤 이의 한 평생이 되는 역설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기댄 놀라운 시간여행의 상상력에 따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있자 “미인과 함께 있으면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흥미로운 비유로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저작 ‘상대성이론: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원제 Uber die spezielle und die allgemeine Relativitatstheorie)은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관측하는 입장에 따라 바뀐다는 게 뼈대다. 그 동안 시간과 공간은 전 우주에 걸쳐 오직 하나뿐이며, 같은 공간에 펼쳐 있을 뿐이라는 믿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같은 공간에 있고, 모든 사건은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뿐인 동일한 시간이 적용된다. 이 같은 고정관념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뿌리째 바뀌게 됐다. ‘4차원 시공간’ 개념도 그렇게 생겨났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시간은 물체의 이동속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한다. 물체가 빛의 속도로 움직일 때 시간은 정지한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움직이면 시간은 거꾸로 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달 표면에 있는 사람이 보면 우주선 안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우주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빨라지는 것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과 정지해 있는 우주선의 길이는 원래 같다. 하지만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우주선은 길이가 줄어든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체의 길이도 상대적이다. 물체는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가속하기 어려워진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질량은 커진다. 
                                                                      

                                                     <말년의 아인슈타인>

 

  어떤 초문명의 기술로도 넘을 수 없는 속도의 한계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 속도의 한계는 빛의 속도다. 빛의 속도는 관측하는 장소의 속도나 광원의 운동속도에 관계없이 언제나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일정하다. 얼마 전 국제적 과학연구그룹인 오페라(OPERA) 팀이 ‘빛보다 빠른 물질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가 1년도 안 돼 철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해프닝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줬다. 현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방정식인 E=mc2은 특수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결과다.


   일반상대성이론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빛은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 물체도 아니고 무게도 없는 빛이 중력에 의해 나아가는 코스가 바뀐다. 불가사의하지만 실제로 태양 뒤편의 별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 근처에서 휘어지는 것이 확인됐다. 이 휘어짐은 진공상태에서도 일어나지만, 물속에서 일어나는 빛의 굴절과는 다르다. 빛이 휘는 것은 공간이 휘기 때문에 일어난다. 중력은 시간의 흐름에도 영향을 끼친다. 중력에 의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빛을 휘게 할 뿐만 아니라 삼켜버릴 정도로 중력이 강한 ‘블랙홀’ 근처에서는 시간이 거의 정지해버린다. 우주선이 블랙홀 근처까지 날아가 잠시 머물렀다가 돌아오는 것을 상상해 보자. 머무는 장소를 잘 선택하면 여행자는 1년 밖에 보내지 않았는데도 지구에서는 100년이 지나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블랙홀’이 ‘미래의 타임머신’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영화 ‘별에 중독되어’도 이 현상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공간’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전적으로 피해야 하며, 공간으로부터는 어떠한 사소한 개념조차 구성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 가지 현상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규명했다. 첫째, 수성이 태양 둘레를 공전할 때 공전궤도가 세차운동(歲差運動·Precession)하는 값을 정확하게 밝혔다. 둘째,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 부근을 지날 때 태양의 만유인력에 의해 휘는 것이다. 셋째, 중력 적색 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매우 큰 질량을 가진 별에서 나오는 빛은 파장이 증가한다.
                                                                         

                                                    <아인슈타인의 책상>

 

   일반상대성이론은 수성의 근일점(타원궤도 중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워지는 점)이 100년마다 43초씩 이동하는 현상을 설명해냈다. 1960년에는 금성의 근일점이 100년에 8초씩 이동한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을 뒷받침했다. 중력에 의해 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은 1919년 5월29일 태양의 일식 때 확인됐다. 이 실험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예측은 1% 이하의 오차로 적중했다. 중력 적색 편이는 1964년에 실험으로 확인했다.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의 차이점은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조건이 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중력의 영향이 없다’ ‘관측자가 가속도 운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다. 일반상대성이론은 그런 제약을 없애고 더욱 일반적인 상황에 적용되도록 발전시킨 이론이다. 일반이론은 특수이론을 그 속에 포함한다. 일반이론에서는 반드시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이 느려진다.


  이 책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 발표된 뒤 1916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됐다. 그 무렵, 상대성이론을 이해한 과학자는 세계에서 12명밖에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선지 아인슈타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학으로서뿐 아니라 철학적인 관점에서 상대성이론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를 위해 나는 이 책을 쓰게 됐다. 이론물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수학을 모르는 독자들이 상대성이론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이 책은 의도되었다.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은 독자라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 동상>


  아인슈타인에게는 16살 때부터 사로잡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광선과 나란히 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일 내가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내 얼굴이 거울에 비칠까?’라는 의문이었다. 상대성이론의 발견으로 그가 내린 결론은 ‘만일 빛이 소리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면 광속으로 날아가는 얼굴에서 나온 빛은 거울에 도달하지 못한다’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던 무명시절에 알아냈다. 그가 특허 심사관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시계에 대한 특허가 매우 자주 접수됐다. 당시 도시를 잇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러 도시들 간에 시간을 맞추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도시는 정지해 있는 좌표계이므로 두 도시 사이에 시간을 맞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중 하나의 좌표계가 움직이고 있다면 정지한 좌표계와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을 어떻게 맞출까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어느 한 좌표계에서 ‘동시’라고 말 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른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표도 생겼다.

 

   1905년 5월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근무가 끝난 뒤 친구 베소의 집에 들렀다. 그는 빛과 관성계(慣性系)에 대한 문제를 한참 동안 토론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인슈타인은 베소를 다시 찾아와서 “고마워, 어제 그 문제 완전히 다 풀렸어”라고 말을 건넸다. 그때부터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쓰기까지는 불과 5주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고 한다.


   뉴턴에게 24~25살 때 ‘기적의 해’가 있었듯이 아인슈타인이 26살 때인 1905년도 ‘기적의 해’로 불린다.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가설, 브라운운동 이론,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 등 주요 4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한 해여서다. 이 4개 논문은 공간, 시간, 물질에 대한 물리학의 관점을 바꿔 놓았다.


   상대성이론은 그때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올바른 이론으로 받아들여진 뉴턴역학을 대체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원자력 발전 등으로 인류의 생활에도 폭풍을 몰고 왔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의 유명한 공식 E=mc2은 핵무기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핵무기는 인류의 사고에 격변을 몰고 왔다. 상대성이론은 과학은 물론 철학, 영화와 애니메이션, 미술, 사진, 문학, 음악, 건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 같은 종교인도 생전에 상대성이론을 연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때문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새천년 직전인 1999년 아인슈타인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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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일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風雪)로 뒤덮어 주시오/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꽃이 피지 않도록/하루의 일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검은 신이여/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박인환 시인은 ‘검은 신(神)이여’에서 6·25전쟁이 남긴 절망감을 절규하듯 토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갈파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입증이라도 하듯 전쟁의 검은 신은 지구촌에서 떠날 줄 모른다. 6·25전쟁 63주년을 맞는 한반도에서도 전쟁의 그림자가 또 다시 희미하게나마 어슬렁거리고 다닌다.


  프로이센의 천재군인이었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는 이런 전쟁의 본질을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정치)의 연속”이라는 함축어로 풀어냈다. 전쟁에 관한 최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원제 Vom Kriege)에서 가장 유명한 이 표현은 국가의 정치적 목적, 정책 목표가 전쟁 수행을 통제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여기서 ‘정책’과 ‘정치’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독일어에서 ‘Politik’이라는 낱말이 두 가지 뜻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현대국가에서 적용된다. 이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한층 선호한 명제이기도 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이와 관련된 명언도 이 책에 남겼다. “전쟁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대신에 전투로 하는 정치다.” “전쟁은 반드시 정치의 성격을 지녀야 하며 정치의 척도로 재야한다.”


  군사적 관점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인정받는 전쟁에 관한 본질적 설명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규정한 정의다. “전쟁은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실행하도록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다른 사회현상과 구별되는 전쟁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폭력성’이다. 이 정의에는 그가 전쟁의 세 가지 요소로 지목하는 수단, 목표, 목적이 모두 포함돼 있다.

 

   물리적 폭력이 전쟁의 수단이라면,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해 관철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며, 그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 적이 저항할 수 없도록 굴복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목표와 목적을 명확히 나누고 있다. 전쟁의 목표는 진정한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클라우제비츠의 ‘폭력성’에 관한 정의는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에게 명분을 제공했다는 비판자들도 없지 않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오른쪽)>


 정치적인 전쟁개념은 이 책에서 삼위일체 전쟁이론으로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폭력성과 우연성, 합리성의 균형을 의미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은 정말 카멜레온 같다. 전쟁은 각각의 구체적인 경우마다 자신의 특성을 조금씩 바꾸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전체 현상에 따라, 그리고 전쟁에 널리 퍼져 있는 경향과 관련해서 볼 때 기묘한 삼중성을 띠기도 한다.

 

  삼중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전쟁의 요소인 증오와 적대감의 원초적 폭력성인데 이는 맹목적 본능과 같다. 둘째, 개연성과 우연의 도박인데, 이것은 전쟁을 자유로운 정신활동으로 만든다. 셋째, 정치적 도구라는 종속성인데 이로 말미암아 전쟁은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폭력성은 국민의 열정으로 표출된다. 우연성은 군대의 전략으로 나타난다. 합리성은 정부의 정책으로 드러난다. 이 전쟁 개념은 국민, 군대, 정부의 3요소가 잘 조화된 전쟁이론으로서 어느 하나라도 균형을 잃으면 와해돼 버리고 만다. 삼위일체로 구성된 전쟁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큰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전쟁양상은 바뀔 수 있다.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1841~1929)가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겨놓기엔 너무나 심각한 문제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정치인이 한다”고 정의한 것도 ‘전쟁론’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클라우제비츠는 우연성이 많은 전쟁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한다. 군사행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중 4분의 3은 지극히 애매하고 불확실한 구름에 잠겨 있다. 전쟁은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전쟁의 진정한 상태에 관한 정보가 항상 불완전하며, 빈번히 부정확하다는 점을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안개’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설명한다. ‘전쟁의 안개’라는 수사는 전쟁에 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이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전쟁의 불확실성에는 ‘마찰’ 개념도 더불어 작용한다. 전쟁에서 마찰은 ‘전쟁의 안개’란 개념과 쌍벽을 이룬다. 마찰이란 개념은 ‘머피의 법칙’과 흡사하다. 잘못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잘못될 것이며, 최악의 순간에 그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나폴레옹이 1796년 이탈리아 전쟁에서부터 1815년 워털루 전쟁 때까지 벌인 거의 모든 전쟁이 사례로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은 다각도에서 집중적으로 분석된다. “이전의 모든 평범한 전쟁수단은 보나파르트의 승리와 대담성으로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1급의 국가들이 보나파르트의 단 한 번의 타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전쟁의 개념을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전쟁으로 바꿔놓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정신적 요소를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쟁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심리적·정신적 상태가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뜻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위대한 영웅과 위대한 서사시를 남기는 게 아니라, 욕심과 자만에서 탄생되며, 남기는 건 눈물과 고통, 피만 남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고 교훈적인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전쟁론’의 마지막 문장도 계고문 같다.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책은 고대 중국 병법서인 ‘손자병법’과 비교되곤 한다. 동서양에서 쌍벽을 이루는 두 책은 공통점이 많으면서도 차이점도 적지 않다. ‘전쟁론’은 전쟁이론, 군사이론을 넘어 정치이론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일종의 정치철학서다. 물론 지휘관으로써 갖추어야할 성격과 태도를 일깨워주고, 위기의 순간에 직관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손자병법’은 군대를 운용하고 이끌어나가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손자병법’은 전쟁의 본질보다 전쟁의 대비, 수행, 억제에 관한 내용이 많아 군의 일선 지휘관들에게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전쟁론’은 전쟁의 철학·사상적 측면을 폭넓게 탐구했다. 이 책은 수많은 철학서적과 법학, 과학, 예술 등 인간 활동의 거의 전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독서의 힘으로부터 나왔다. 헤겔과 칸트 같은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의 영향이 책 속에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전쟁론’은 클라우제비츠가 죽은 뒤 1년 여만에 아내 마리가 협력자들과 초고상태인 유고(遺稿)를 정리해 발간한 미완의 대작인데다 난해한 편이다. 19세기의 군사학자 골마르 폰 데어 골츠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흥미롭게 비유하며 평가한다. “클라우제비츠 이후에 전쟁을 논하려는 군사이론가는 마치 괴테 이후에 파우스트를 쓰거나 셰익스피어 이후에 햄릿을 쓰려는 작가처럼 모험을 무릅쓰는 것과 같다.”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 장군은 ‘전쟁론’에 대해 “과거로부터의 한 줄기 빛이 오늘날의 군사적 난관들에 서광을 비춰주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또 “직업군인인 내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구한 가장 큰 교훈은, 군인이 아무리 애국심과 용기와 전문성을 지녔더라도 단지 삼각대의 다리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군대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세 개의 다리가 더불어 받쳐주지 않는다면, 전쟁이라는 과업은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콜린 파월>


   ‘전쟁과 함께 정치적인 교류는 끊어지고 전쟁 상태는 그 자체의 법칙에 따른다’는 게 19세기 초까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런 사고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전쟁은 그 자신의 문법은 가지고 있으나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전쟁을 지배하는 정치다.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구소련 지도자들이 클라우제비츠를 받아들인 것은 그의 전쟁철학이 전체주의적 정부에게도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방증한다. 카를 마르크스조차 “클라우제비츠는 지혜의 경지에 이르는 상식을 지니고 있다”고 극찬했다. 마오쩌둥,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들도 이 책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북한,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군을 당의 통제아래 두는 것도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론’의 가장 큰 영향 가운데 하나는 현대국가에서 국방의 ‘문민통제’ 가치를 일깨워준 점이다. 6·25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중공군의 참전을 계기로 중국 본토의 봉쇄와 폭격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자 확전을 염려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한 게 실례다.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한 미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전장 지휘관인 맥아더와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국방장관을 민간인 출신으로 임명한다.


   애덤 스미스가 근대 국민국가의 경제학을 창설했듯이, 클라우제비츠가 근대 국민국가의 전쟁이론을 창안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쟁론’은 이제 국제정치를 넘어 기업경영 분야에서도 활용되면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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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유럽인들에게 ‘세계’는 자신들이 살고 있던 유럽과, 종교적 대립관계이던 이슬람 문화권이 사실상 전부였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했을 때 별을 보고 찾아와 세 가지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다고 성경에 기록된 동방박사도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지역 쯤에서 왔다고 그들은 인식했다. 아랍권을 넘어선 ‘동방’은 단지 구전으로 들려오는 상상의 땅일 뿐이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왕조인 몽골제국이 엄존했음에도 그렇다.


  부유한 베네치아 보석상인 니콜로 폴로와 동생 마테오 폴로는 1260년 다른 상인들과 함께 동방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과 투르키스탄의 부하라 등을 거쳐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 근처에 자리한 쿠빌라이 칸의 왕궁에도 초대받았다. 9년 만에 베네치아로 돌아온 니콜로 폴로 형제는 2년 뒤인 1271년 열다섯 살에 불과한 아들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다시 동방여행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나선 소년 마르코 폴로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면서 프레스터 존이 산다는 상상 속의 동방을 목격한다. 유럽의 민간에는 이슬람권 너머에 예수를 믿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존재한다는 신화가 퍼지고 있었다. 몽골군이 포로들을 학살할 때 주로 십자가형을 많이 쓴 것이 와전돼 동양에 기독교 국가가 나타나 이교도를 물리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을 지나 중국 땅까지 들어간 마르코 폴로는 보는 것마다 진기함에 놀란다. 거대한 도시와 기이한 풍습, 화려무비한 궁정생활, 어마어마한 금은보화와 각종 특산품, 신화에나 나올 듯한 신비스런 짐승들...
                                                               

 

  무려 25년간의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3년 후 제노바와 동방무역로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바람에 감옥 신세를 진다. 그는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모험·연애소설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자신이 겪은 엄청난 모험담을 털어놓는다. 루스티첼로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받아 써 출판한다. 고전 ‘동방견문록’(원제 Divisament dou Monde)은 이렇게 탄생했다. 원래 제목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세계의 서술’이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어 번역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머릿속에는 지금과 같은 동·서양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그렇듯 내용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기보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시아 여러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로 여겨 영역본을 ‘Travels of Marco Polo’라고 이름 지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가파라유기’(馬可波羅游記)나 ‘마가파라행기’(馬可波羅行記)라고 쓴다.

  이 책은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놀라움을 넘어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를 허풍쟁이로 여겼다. 어느 것에든 ‘수백만의…’하며 수를 부풀리는 그에게 ‘백만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책의 이탈리아어 제목이 ‘일 밀리오네’(Il Milione·백만이라는 뜻)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숫자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사실까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지 않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아랍 상인들에게 정보를 주워듣고 얘기를 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마르코 폴로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그 같은 의심이 들 때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만 17년 년간 살며 체험한 게 사실이라면, 한자나 젓가락 사용, 차(茶) 마시는 풍습, 전족(纏足), 만리장성, 인쇄술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무용담과 로맨스 작가였던 루스티첼로의 덧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들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과장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 일행을 환영하는 장면은 아서 왕 전설에서 트리스탄이 처음 궁정으로 왔을 때의 장면을 루스티첼로가 그대로 따와 고쳤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마르코 폴로가 양주(揚州)라는 도시를 3년 동안 통치했다고 얘기한 부분도 중국 자료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주장대로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받으며 관리까지 지냈다면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 가운데 명백한 자기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가 주선해 제작한 투석기로 몽골군이 중국 남부의 요새 양양(襄陽)을 함락시켰다고 했지만, 이 도시는 마르코 폴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상당 부분이 최근 들어서는 사실로 확인되거나 추정할만한 근거가 드러나고 있다. 배에 탄 사람을 잡아먹을 기회를 엿보며 강 속을 헤엄쳐 다니는 진짜 용(인도 악어), 몸집이 크고 줄무늬가 있는 사자(호랑이), 갑옷을 입은 괴물(코뿔소), 등에 궁수를 태우고 다니는 코끼리 부대, 깃털 길이가 3.5미터나 되는 새(큰바다오리), 불에 타지 않는 천(석면), 나무처럼 타는 검은 돌(석탄), 돈으로 사용되는 종이(지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직접 가지 않았다는 의문부호 가운데 하나인 만리장성은 실제로 1500년경의 명나라 때까지 현재의 모습을 채 갖추지 못했다는 학설이 인정받고 있다. 또 프랑스를 여행하고 온 사람의 글에서 에펠탑이나 샹송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거짓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반론도 나온다.  
                                                                 

  마르코 폴로가 여러 산맥을 여행하면서 한 정상에 ‘노아의 방주’가 있는 걸 보았다고 주장한 부분도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통과한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이 바로 ‘노아의 방주’였다는 설이 이를 말해준다. 원유의 특징을 지닌 물질에 관한 이야기도 중동 산유국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고원지대에서 물이 천천히 끓는다고 얘기한 대목도 당시엔 허풍선이의 대명사처럼 통했으나, 고원지대에서는 대기압 때문에 끓는 점이 낮아져 등반가들이 물을 끓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몽케 칸의 시신이 알타이 산에 묻힐 때 2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사자와 함께 저승길에 동행하도록 죽임을 당했다는 마르코 폴로의 얘기 역시 독자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이 괴이한 이야기를 뒷받침할만한 중국 사료가 발견됐다.

  북극곰의 존재 사실도 마르코 폴로가 최초로 서양에 전했다. 낯선 여행자들에게 기꺼이 아내나 딸을 내주어 동침하게 하는 풍습을 지닌 지방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 책은 ‘그것을 보지 않고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들어도 믿기 힘들 정도다’와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의 말이 얼마나 신뢰를 얻지 못했는지는 이 책이 발간된 지 50년이 지난 132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세계지도에서 아시아 지역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임종을 지켜보던 한 신부는 이 책에 나온 얘기 가운데 취소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화는 당대인들의 온갖 의심과 비방에도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이 책은 들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황제, 국왕, 공작, 후작, 기사, 시민, 그리고 여러 시대의 사람들과 세계 여러 지역들의 신기한 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가져가서 읽어달라고 청하시오.”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쓴 루스티첼로는 13세기 당시의 낮은 문자 해독률을 감안해 이 같이 권한 것으로 보인다.

  ‘동방견문록’은 유럽에서 한동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이라고 할 정도로 중세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당대에만 10여개 언어로 번역돼 읽혔다. 프랑스어로 된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138개의 이본이 발견됐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몇 종의 다른 ‘동방여행기’들이 씌어졌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파 수도사였던 프라노 카르피니의 ‘몽골 기행’, 윌리엄 루브룩의 ‘여행기’, 작자 미상의 ‘맨더빌 여행기’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유럽의 비유럽,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식민 지배의 시발점이자 정복과 노예 무역시대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여러 세기 동안 서양에서 아시아에 대해 알 수 있는 지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자 상상력의 보고(寶庫)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애초 목적은 달랐지만,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여행 계획을 짜는 데 이 책의 지리학적 정보를 가장 잘 활용했다. 콜럼버스는 이 책을 항해 내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최초 일주도 ‘동방견문록’ 없이 나오기 어려웠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마르코 폴로와 콜럼버스를 존경하며 세계 일주를 꿈꿨다. 마르코 폴로는 항해에 도움이 될 정도로 상세하게 얘기를 풀어놨다. 무역풍과 계절풍, 여름과 겨울에 인도와 걸프만 사이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술했다.

  서양에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해도(海圖)의 제작도 몰라보게 활발해졌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의 여행코스를 따라 아시아를 횡단하며 이국의 풍물과 풍속을 체험하고, 글과 사진으로 발표하는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5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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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요.”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목격한 로렌스 하이에크 박사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프라이부르크대 병원에 누워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단 한마디로 받아넘겼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아버지 하이에크는 이미 오래 전에 사회주의 몰락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3월23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과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결단한 덩샤오핑은 1978년 노령의 하이에크를 초청했다. “어떻게 하면 중국 인민을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덩샤오핑의 물음에 하이에크는 이렇게 답했다.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 뒤 중국은 집단농장에서 생산해 똑같이 분배하던 방식을 바꿨다. 국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 생산량의 일부만 정부에 내도록 했다. 농산물의 자유시장을 허용한 지 3년 만에 중국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를 인류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의 붕괴를 예견한 것은 1944년에 출간한 대표작 ‘노예의 길’(원제 The Road to Serfdom)에서였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는 나쁜 이념이자 진보를 가장한 ‘악’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하이에크는 ‘이념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자신이 경제학자이지만 ‘노예의 길’은 ‘정치서적’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위적 질서’로 바꾸려 들면 애초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향력이 커져 막강한 힘을 지닌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들이댄다. 그는 ‘국가를 항상 지상의 지옥으로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결과였다’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휄더린의 풍자를 인용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꼬집었다. 하이에크는 훗날 이를 인간의 ‘치명적 자만’이라고 명명한다. 말년에 펴낸 그의 또 다른 역작 ‘법·입법·자유’도 이 같은 자생적 질서론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회 철학을 펼쳐 보인 것이다.


  ‘노예의 길’은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퇴행적일 뿐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사람들을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견해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평등을 강조하고 있으나 억압과 노예상태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공격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위대한 유토피아’라고 일컫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달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결코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체제를 낳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자유는 다른 어느 곳에서 만큼이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자유롭게 쓰이는 단어이다. 정말 우리가 이해하는 본래 의미의 자유가 파괴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항상 사람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자유의 이름으로 파괴됐다. 우리는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자유의 의미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경종으로 삼아 우리에게 ‘과거의 자유 대신 새로운 자유’를 약속하며, 유혹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궁극적 가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라고 그는 역설한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단이어서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라는 게 하이에크의 지론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하이에크는 히틀러의 독재와 소련에서 벌어진 전체주의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색채로 물들어가는 영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결의로 ‘노예의 길’을 썼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에게 헌정하는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통한다며 파시즘과 사회주의에 맹공을 퍼붓는다.


  “사회주의는 때로는 단지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정의, 더 큰 평등과 안전이라는 이상을 묘사하거나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또한 대개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하는 특정한 방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그 목적을 충분하고도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사회주의란 사기업제도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대신 그 자리에 중앙계획당국이 들어서는 ‘계획경제’체제의 창설을 뜻한다.”


  그는 ‘대개의 계획주의자들은 지시경제가 다소 독재적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경고음을 울린다. 그는 경쟁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겐 이렇게 반박한다. “경쟁 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이 책은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다.”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경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말도 남겼다. “‘경제학을 저주하고 멋진 세상을 건설하자.’ 이렇게 말하면 고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그저 무책임한 말일뿐이다.”


  이 책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강성노조와 공공부문 방만이라는 ‘영국병’을 고친 대처리즘의 숨은 공신으로 알려진 영국 경제문제연구소와 관련된 얘기다. 이 연구소를 창설한 앤서니 피셔는 ‘노예의 길’을 읽고 자유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하이에크를 찾아갔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가 정치에 입문하면 어떨까요?” 하이에크는 “아니오. 사회의 진로는 오직 사상의 변화에 의해서만 이뤄집니다. 당신이 먼저 합리적 주장으로 지식인, 교사, 작가들을 설득하고 이런 사상이 그들의 영향으로 보편화될 때 정치인들은 따라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피셔는 1955년 양계사업으로 번 돈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연구소 만드는데 투자했다.


  ‘노예의 길’은 출간되자마자 영국은 물론 미국 등지에서도 하이에크가 순회강연을 해야할만큼 주목받았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 케인스도 깊은 공감의 뜻을 전했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당신의 견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내가 당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


  하지만 이 책과 하이에크는 케인스라는 거목의 그늘에서 30년 넘게 찬밥 신세로 지내야 했다. 1930년대 말 세계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자본주의 세계의 정책과 지식 분야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는 물론 정치 지도자들도 누구나 케인스를 호명했을 뿐이다.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 탓이며,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쾌한 케인스 이론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시대여서다. 시대착오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시장 옹호자로 냉대 받으면서도 하이에크는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세상을 설득해 나갔다.


  1970년대 초 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 케인스 이론이 더 이상 효험이 없어지자 하이에크의 경제철학이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태동한 신자유주의 물결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라는 수원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공로로 그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이에크의 사상은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예의 길’은 옥스퍼드대학생이던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당시 이름은 마거릿 로버츠)의 손에 들어가 40년 뒤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촉매가 됐다. 대처 총리는 1989년 하이에크의 90회 생일에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작업과 사상이 우리에게 준 지도력과 영감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그곳의 민영화정책도 ‘노예의 길’과 만난다. 케인스가 그랬듯이 하이에크도 30여 년간 세계경제 흐름을 주도했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이에크의 성가가 다소 가라앉고 케인스가 복권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010년 주요 선진국들의 정부부채 위기가 몰아치자 하이에크 진영의 반격이 재개됐다. 이처럼 케인스의 ‘정부’ 대 하이에크의 ‘시장’ 전쟁은 쉽사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케인스주의자들이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생긴 시장의 실패를 들먹이면, 하이에크주의자들은 금융위기는 정부 개입에 따른 정책의 실패라고 맞받는다. 하이에크는 생전에 케인스와 자신의 차이를 익살스럽게 설명한 적이 있다. “케인스가 많은 것을 아는 여우라면, 나는 오직 한 가지 큰 사실만 아는 고슴도치다.”


  하이에크에 대해서 두 가지 시각이 병존한다. 보수 진영은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로서 그를 환영한다. 좌파 진영은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적 기반마저 허무는 우를 범한 ‘시장 근본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하이에크를 더욱 아프게 하는 건 나쁜 정부의 개입과 좋은 정부의 개입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치나 공산주의 같은 극단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북한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노예의 길’은 여전히 정부의 역할과 시장, 자유의 중요성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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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타임스는 1929년 1월1일 신년 사설에서 미국 경제의 장래를 장밋빛으로 그렸다. “미국은 지난 12개월 동안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한다면 새해는 축복과 희망의 해가 될 것이다.” 그 해 가을에 접어들어서도 당시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어빙 피셔 예일대 교수는 “주가가 항구적인 고원에 올랐다. 미국은 견고한 번영의 길에서 전진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예일대 재무처장을 맡고 있던 피셔는 학교 재산을 몽땅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24일 뉴욕 증권시장의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세계대공황의 서막이 올랐다. 이른바 ‘검은 목요일’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을 엄청난 경기침체와 대량 실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식민지 시장에 의존하는 경제블럭과 군국주의권으로 나누어진 자본주의국가들의 대립이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파멸의 조짐까지 보였다.

 

  경기를 회복하기 위해 정부가 무슨 일이든 해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경제학자나 관료, 정치가들은 어느 누구도 대공황의 원인 분석과 회생방안에 대해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다수 주류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도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공황의 와중에 영국의 중견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유효수요이론’을 비방(秘方)으로 내놓았다. 1936년 2월이었다. 처방전은 ‘고용·이자·화폐의 일반이론’(원제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라는 명저에 담겨 있었다. 유효수요이론은 소비와 투자로 이루어지는 유효수요의 크기에 따라 경제활동의 수준이 정해진다는 견해다. 케인스의 묘방은 정부의 과감한 개입으로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주류 고전경제학자들의 지론인 자유방임주의로는 완전고용의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이나 재정 정책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케인스 경제이론을 흔히 ‘유효수요이론’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케인스는 흥미로운 비유로 유효수요이론과 정부지출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재무부가 낡은 병에 은행권(지폐)을 가득 채워 폐탄광에 적당한 깊이로 묻은 뒤 도시의 쓰레기를 표면에 이르기까지 덮어라. 그 뒤 온갖 시련을 이겨낸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에 따라 개인 기업에게 그 은행권을 다시 파내는 일을 맡긴다면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파급효과 덕분에 공동체의 실질소득과 그 자본의 부(富)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사실 주택 같은 것을 짓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만, 그렇게 하는 데 정치적이거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케인스가 정부의 책무를 강조했지만, 정부가 전지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이 있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국가의 개입이냐의 문제다.

                                                                                          

                                                                            <케인스 부부>

 

 그는 이 책에서 경제가 나빠졌을 때 임금을 깎는 것은 최악의 정책이라고 일갈했다. 수요를 늘려야 하는데 임금을 깎으면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완전 고용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실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공사업 같은 국가투자로 완전고용을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다.

 

  당시 경제학을 지배하던 고전경제학파는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에 따라 일시적인 마찰 실업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대체로 완전고용을 실현한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달리 케인스는 노동시장이 화폐임금의 하방경직성(下方硬直性)이나 노동자의 화폐환상 때문에 완전고용에 실패할 수 있으며, 기업의 사업전망이 비관적이어서 기대이윤이 지나치게 낮을 때는 자본시장이 실패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하방경직성은 수요공급법칙에 따라 본래 내려야 할 가격이 내리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케인스는 수학적 기대치가 아닌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면서 이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고 이름 지었다. 인간의 비경제적 본성을 가리키기 위해 케인스가 이 책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고전 경제학의 핵심 용어이듯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안정성을 설명하는 새로운 시각의 핵심 용어다. 케인스는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합리적인 경제적 동기에 따라 이뤄지지만, 한편으로는 ‘야성적 충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파악했다. 케인스는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합리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오는 것은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 책은 주식투자를 미인투표에 비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문적인 투자자는 100장의 얼굴사진을 제시하고 시합의 참여자들에게 얼굴이 예쁜 순서로 6장씩 골라내게 한 다음 참여자 전체의 평균적인 선호에 가장 부합하는 선택을 한 참여자에게 상금을 주는 신문 지상의 시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참여자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참여자들의 취향에 가장 잘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얼굴을 선택해야 한다.”

                                                                

  케인스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사회철학’에서 자신의 이론이 지향하는 사회개혁 방향 제시했다. 그는 ‘이자생활자의 안락사’라는 용어까지 구사해가며 금융자본을 견제했고, 사회적으로 무익하거나 낭비적인 공공사업보다는 소득재분배의 경제부양 효과를 선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나는 자본주의의 이자생활자적 측면은 제가 할 일을 다 한 뒤에는 사라져버릴 하나의 과도적 단계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자생활자적 측면이 사라지면 자본주의 안에 있는 그 밖의 다른 많은 것들이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자생활자와 기능을 상실한 투자자의 안락사는 결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케인스가 책 제목에 ‘일반이론’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거시 경제시장의 원리가 일반적인 이론이고, 고전경제학파가 말하는 자율적인 시장에 의한 조화는 매우 특수한 이론이라는 것을 한층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케인스는 이론적으로 완전하고 고결한 경제학보다 현실 세상을 좀 더 잘 예측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경제학을 이 책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케인스는 이 책이 발간되기 1년 전 친구인 버나드 쇼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나는 사람들이 경제적 문제를 생각하는 방식을, 당장은 아니지만 추측건대 앞으로 10년 안에, 거의 완전히 바꿔 놓을 경제 이론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믿네”라고 썼다. 이 예측은 적중했다.

 

 이 책은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과를 낳았다. 케인스가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것도 이 책 때문이다. 이 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뉴딜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케인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책이 정책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걸 보지 못했다. 출간된 뒤 얼마 안 있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전시체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케인스 이론은 30여 년간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적인 경제사상으로 군림했다. 이 책으로 ‘케인스 혁명’이라는 말이 탄생했으며, ‘수정 자본주의’라는 용어도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더불어 3대 경제학 바이블로 꼽힌다. 케인스가 자본주의를 구했다고 말할 정도다.

 

  케인스만큼 미국 역대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토드 부크홀츠 하버드대 교수는 “로널드 레이건이 애덤 스미스가 그려진 넥타이를 매었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리처드 닉슨에 이르는 미국의 모든 대통령이 케인스 넥타이를 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상찬한다.

 

  이 책은 경기침체 때마다 미국 대통령이 애용하는 ‘만병통치약’이 됐다. 불경기가 오면 정부는 연방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인하해 경제가 회생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재정적자를 냈다. 반대로 상품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만큼 급증해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정부는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려 수요를 안정시켜 나갔다. 케인즈의 처방은 다른 주요 국가에서도 채택돼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세계경제는 장기호황을 누렸다. 대공황 이후 이 이론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1965년 마지막 날 시사주간지 ‘타임’은 커버스토리에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유명한 제목을 달았다. 1971년 보수주의자인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나는 이제 경제정책에서 케인스주의자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정부 관료들은 “경제학자 다섯 명이 모인 자리에 대립되는 의견 여섯 개가 나왔다면 그 가운데 두 개는 케인스가 주장한 것이 분명할거야!”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케인스의 최고 라이벌이자 신자유주의의 기수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케인스 사후 “그는 내가 알았던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나는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털어놨다. 사실 케인스는 경제학 학위를 받은 적이 없으며, 학위라고는 수학 학사 학위가 전부였다.

 

  1970년대 후반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케인스이론은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밀려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30여 년이 지난 후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몰려오자 케인스가 갑자기 복권됐다. 시장 친화력을 강조하는 관료는 물론 시장주의자·신자유주의의 첨병이던 월가의 투자은행들조차 케인스를 읊어댔다. 이 정도면 가히 롤러코스트를 탄 케인스다. 케인스 전기를 쓴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케인스 사상은 세계가 필요로 하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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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나는 너를 생각한다.


 

 사과만큼 인류 역사를 많이 바꾼 과일도 찾아보기 어려울 게다. 어떤 이는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를 꼽고, 또 어떤 사람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네 개의 사과를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일곱 개의 사과가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최신버전을 제시한다. 일곱 개에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파리스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아이작 뉴턴의 사과, 폴 세잔의 사과, 백설 공주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 로고 사과가 들어간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와 아담의 사과는 원죄의식의 근원으로 작동하면서 기독교 문명을 탄생시켰다. 비너스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게 한 파리스의 황금사과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다. 궁사 빌헬름 텔이 벌칙으로 명중시킨 사과는 스위스 독립전쟁을 촉발한다. 폴 세잔이 그린 정물화 사과는 사물의 질서를 재창조해 현대 미술의 출발을 알린 팡파르다. 동화 속 백설공주가 한 입 베어 먹은 독 사과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울리고 웃긴 것은 물론 애플사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한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 로고 사과는 세계 최초의 PC 상징이면서 스마트 혁명의 선두에 서 있다. 뉴턴의 사과는 만유인력의 발견을 계기로 근대과학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고 산업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뉴턴의 사과에 얽힌 전설은 진실 여부로 수많은 비본질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논란이 일자 뉴턴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사과나무 아래서 만유인력을 생각해낸 건 사실이라고 적어도 네 번은 말했다는 설까지 전해진다. 뉴턴의 고향 울즈소프의 과수원에서 가지를 친 묘목으로 기른 사과나무는 한국 표준과학연구원 정원에서도 자라고 있다.

                                                                                                


  만유인력의 원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책이 ‘프린키피아’(원제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번역되는 이 책은 훗날 ‘원리’라는 뜻의 라틴어 약칭 ‘프린키피아’로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프린키피아’는 모두 3권으로 이뤄졌다. 1권은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같은 유명한 운동법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2권은 데카르트식 우주관과 케플러 법칙들이 서로 모순됨을 수학적으로 증명한다. 유체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는 유체의 저항 때문에 타원 모양을 그리며 운동할 수 없다는 게 뼈대다. 뉴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만유인력’의 법칙은 3권에 등장한다.


  과학자들은 이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힘=질량X가속도(F=ma)’라고 부르는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역학체계를 다룬 내용인 반면, 가속도의 법칙은 뉴턴이 창안해 낸 새로운 내용이다. 모든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가속도가 존재한다는 이 법칙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법칙은 비행기를 하늘로 띄운 날개 양력을 설명해낸 ‘베르누이 정리’의 기초가 됐다. 지진해일(쓰나미) 현상, 혈액의 흐름, 빅뱅을 설명할 때도 ‘F=ma’는 가장 유효한 법칙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수학으로 우주 만물을 설명한다.

 
  태양과 달, 지구가 같은 물리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뉴턴의 주장은 사회 통념, 더 나아가 인류의 우주관을 바꿔놓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뉴턴은 ‘보편중력’이라는 개념으로 태양과 달, 지구의 인력을 설명했고, 밀물과 썰물의 원리도 찾아냈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법칙은 땅에서만 가능할 뿐 하늘(우주)이나 바다 속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움직임이었다. ‘원형의 궤도를 돌고 있는 달은 결코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다. 사과는 떨어지는 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젊은 뉴턴은 줄곧 이 문제에 골몰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달이 접선 방향으로 자꾸만 날아가려 하지만, 지구의 인력에 의해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원형궤도상을 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공위성 발사 원리도 만유인력을 이용한 것이다.


  뉴턴의 위대함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미분과 적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프린키피아’의 높은 수학적 완성도는 미적분 덕분이었다. 뉴턴은 스승인 아이작 배로의 수학연구를 본받아 여러 무한급수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연구해 미적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뉴턴에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닫게 해준 유명한 사과나무의 후손.

                                                  케임브리지대의 ‘식물학 정원’에 있다.

                                                  원래 사과나무는 1815-1820년 사이에 죽었다.


  뉴턴은 만년에 “내가 완성한 연구는 모두 흑사병이 퍼지고 있던 1665년부터 1666년까지의 2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만큼 수학과 철학에 마음을 두고 중요한 발견을 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과 이야기도 이때의 일화다. 1665년 영국에는 페스트가 창궐했다.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도 휴교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뉴턴은 이때부터 2년 동안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한꺼번에 22가지 연구에 몰두한다. ‘프린키피아’에 담긴 모든 이론은 이 때 밝혀낸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네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를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뉴턴은 이런 유명한 말은 남겼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건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뉴턴의 사상적 거인은 세 사람이다.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가 뉴턴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과학자들이다. 갈릴레이의 역학이론과 케플러의 세 가지 행성운동 법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없었다면 ‘프린키피아’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이었다. 실제로 ‘프린키피아’는 케플러의 법칙이 수학적으로 성립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역학을 재해석하려던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의 사상적 스승을 뉴턴에게 연결해 준 사람이 배로였다.


  평생 독신으로 산 뉴턴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한국표준연구원에서 자라는 뉴턴의 사과나무에 사과가 탐스럽게 열렸다.

                               이 사과나무는 1980년 미국 연방표준국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데는 혜성을 발견한 에드먼드 핼리의 공이 컸다. 핼리는 1684년 8월, 뉴턴을 찾아가서 케플러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후크, 핼리, 이 세 사람은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역으로 비례한다는 가설로 케플러의 법칙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실제로 증명을 할 수 없었다. 핼리가 물었다. “만약 태양에 끌리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행성은 어떤 모양의 궤도를 그리면서 돌게 될까?” 뉴턴이 답했다. “그거야, 타원이지. 내가 계산해본 적이 있거든.”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한 종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깔끔하게 증명해 핼리에게 편지로 보냈다. 핼리는 뉴턴에게 그것을 발표하도록 간곡하게 권했다. 뉴턴은 이를 못 이겨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책으로 출판한 것도 핼리의 성화 때문이었다. 책 발행 비용까지 핼리가 부담했다.


  1687년 7월5일 ‘프린키피아’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초판 1천권도 다 팔리지 않았다. 이는 워낙 내용이 어려워 당대의 과학자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 서술한데다 라틴어로 써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프린키피아’가 널리 알려진 것은 출간 1년을 훌쩍 넘긴 뒤부터였다.

                                                                                        

                                                                             <뉴턴의 초상화>


  ‘프린키피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리학 책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물리학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세계과학사 전체로도 이보다 영향력이 더 큰 책은 아직 없다고 한다.


  유럽은 오랜 세월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역학이 물리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천문학을 호령하고 있었다. 이들의 권위는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과학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2천년간 절대적인 진리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서는 강제운동을 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오로지 접촉을 통해 전달된다고 보았다. 천제 역시 원운동을 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힘이 필요 없다고 여겼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인류는 마침내 10만 년의 몽매한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우주 전체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날에도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필요한 극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뉴턴의 이론이면 충분하다.

                                                                                          

                                                  뉴턴이 소장했던 <프린키피아> 1판의 속표지.

                                                  뉴턴이 제2판을 위해 수정한 부분이 보인다.

                                                  속표지 중하단의 ‘Julii 5. 1686’은 왕립학회의 출판허가 날짜다.


  ‘프린키피아’는 단지 세상의 원리와 우주관만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계몽사상은 뉴턴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철학자들은 뉴턴의 자연철학에 힘입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문화적 현상에서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뉴턴은 ‘과학의 시작’일뿐만 아니라 ‘근대성의 시작’이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뉴턴’이라 불린 물리학자 라플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우주를 설명할 때 신이라는 가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창세기의 구절을 빌려와 추모 시로 뉴턴을 칭송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는데 신이 ‘뉴턴이 있으라!’하시매 세상이 밝아졌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뉴턴의 삶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볼테르는 ‘1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일컬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천재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세프 라그랑주에게 물었다. “나와 뉴턴 중 누가 더 위대하오.” 그러자 라그랑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뉴턴 같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발견할 세계도 하나뿐입니다.”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는 여러 명 나왔지만 뉴턴 같은 과학자는 단 한 명밖에 출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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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4549saxbycoffer.com/oakleysunglasses.php Cheap Oakley sunglasses 2013.07.14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반짝반짝 빛이 나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빛은 사라저버릴거야,지금 우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