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유럽인들에게 ‘세계’는 자신들이 살고 있던 유럽과, 종교적 대립관계이던 이슬람 문화권이 사실상 전부였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했을 때 별을 보고 찾아와 세 가지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다고 성경에 기록된 동방박사도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지역 쯤에서 왔다고 그들은 인식했다. 아랍권을 넘어선 ‘동방’은 단지 구전으로 들려오는 상상의 땅일 뿐이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왕조인 몽골제국이 엄존했음에도 그렇다.
부유한 베네치아 보석상인 니콜로 폴로와 동생 마테오 폴로는 1260년 다른 상인들과 함께 동방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과 투르키스탄의 부하라 등을 거쳐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 근처에 자리한 쿠빌라이 칸의 왕궁에도 초대받았다. 9년 만에 베네치아로 돌아온 니콜로 폴로 형제는 2년 뒤인 1271년 열다섯 살에 불과한 아들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다시 동방여행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나선 소년 마르코 폴로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면서 프레스터 존이 산다는 상상 속의 동방을 목격한다. 유럽의 민간에는 이슬람권 너머에 예수를 믿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존재한다는 신화가 퍼지고 있었다. 몽골군이 포로들을 학살할 때 주로 십자가형을 많이 쓴 것이 와전돼 동양에 기독교 국가가 나타나 이교도를 물리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을 지나 중국 땅까지 들어간 마르코 폴로는 보는 것마다 진기함에 놀란다. 거대한 도시와 기이한 풍습, 화려무비한 궁정생활, 어마어마한 금은보화와 각종 특산품, 신화에나 나올 듯한 신비스런 짐승들...
무려 25년간의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3년 후 제노바와 동방무역로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바람에 감옥 신세를 진다. 그는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모험·연애소설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자신이 겪은 엄청난 모험담을 털어놓는다. 루스티첼로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받아 써 출판한다. 고전 ‘동방견문록’(원제 Divisament dou Monde)은 이렇게 탄생했다. 원래 제목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세계의 서술’이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어 번역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머릿속에는 지금과 같은 동·서양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그렇듯 내용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기보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시아 여러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로 여겨 영역본을 ‘Travels of Marco Polo’라고 이름 지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가파라유기’(馬可波羅游記)나 ‘마가파라행기’(馬可波羅行記)라고 쓴다.
이 책은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놀라움을 넘어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를 허풍쟁이로 여겼다. 어느 것에든 ‘수백만의…’하며 수를 부풀리는 그에게 ‘백만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책의 이탈리아어 제목이 ‘일 밀리오네’(Il Milione·백만이라는 뜻)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숫자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사실까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지 않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아랍 상인들에게 정보를 주워듣고 얘기를 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마르코 폴로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그 같은 의심이 들 때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만 17년 년간 살며 체험한 게 사실이라면, 한자나 젓가락 사용, 차(茶) 마시는 풍습, 전족(纏足), 만리장성, 인쇄술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무용담과 로맨스 작가였던 루스티첼로의 덧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들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과장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 일행을 환영하는 장면은 아서 왕 전설에서 트리스탄이 처음 궁정으로 왔을 때의 장면을 루스티첼로가 그대로 따와 고쳤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마르코 폴로가 양주(揚州)라는 도시를 3년 동안 통치했다고 얘기한 부분도 중국 자료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주장대로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받으며 관리까지 지냈다면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 가운데 명백한 자기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가 주선해 제작한 투석기로 몽골군이 중국 남부의 요새 양양(襄陽)을 함락시켰다고 했지만, 이 도시는 마르코 폴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상당 부분이 최근 들어서는 사실로 확인되거나 추정할만한 근거가 드러나고 있다. 배에 탄 사람을 잡아먹을 기회를 엿보며 강 속을 헤엄쳐 다니는 진짜 용(인도 악어), 몸집이 크고 줄무늬가 있는 사자(호랑이), 갑옷을 입은 괴물(코뿔소), 등에 궁수를 태우고 다니는 코끼리 부대, 깃털 길이가 3.5미터나 되는 새(큰바다오리), 불에 타지 않는 천(석면), 나무처럼 타는 검은 돌(석탄), 돈으로 사용되는 종이(지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직접 가지 않았다는 의문부호 가운데 하나인 만리장성은 실제로 1500년경의 명나라 때까지 현재의 모습을 채 갖추지 못했다는 학설이 인정받고 있다. 또 프랑스를 여행하고 온 사람의 글에서 에펠탑이나 샹송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거짓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반론도 나온다.
마르코 폴로가 여러 산맥을 여행하면서 한 정상에 ‘노아의 방주’가 있는 걸 보았다고 주장한 부분도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통과한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이 바로 ‘노아의 방주’였다는 설이 이를 말해준다. 원유의 특징을 지닌 물질에 관한 이야기도 중동 산유국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고원지대에서 물이 천천히 끓는다고 얘기한 대목도 당시엔 허풍선이의 대명사처럼 통했으나, 고원지대에서는 대기압 때문에 끓는 점이 낮아져 등반가들이 물을 끓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몽케 칸의 시신이 알타이 산에 묻힐 때 2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사자와 함께 저승길에 동행하도록 죽임을 당했다는 마르코 폴로의 얘기 역시 독자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이 괴이한 이야기를 뒷받침할만한 중국 사료가 발견됐다.
북극곰의 존재 사실도 마르코 폴로가 최초로 서양에 전했다. 낯선 여행자들에게 기꺼이 아내나 딸을 내주어 동침하게 하는 풍습을 지닌 지방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 책은 ‘그것을 보지 않고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들어도 믿기 힘들 정도다’와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의 말이 얼마나 신뢰를 얻지 못했는지는 이 책이 발간된 지 50년이 지난 132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세계지도에서 아시아 지역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임종을 지켜보던 한 신부는 이 책에 나온 얘기 가운데 취소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화는 당대인들의 온갖 의심과 비방에도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이 책은 들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황제, 국왕, 공작, 후작, 기사, 시민, 그리고 여러 시대의 사람들과 세계 여러 지역들의 신기한 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가져가서 읽어달라고 청하시오.”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쓴 루스티첼로는 13세기 당시의 낮은 문자 해독률을 감안해 이 같이 권한 것으로 보인다.
‘동방견문록’은 유럽에서 한동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이라고 할 정도로 중세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당대에만 10여개 언어로 번역돼 읽혔다. 프랑스어로 된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138개의 이본이 발견됐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몇 종의 다른 ‘동방여행기’들이 씌어졌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파 수도사였던 프라노 카르피니의 ‘몽골 기행’, 윌리엄 루브룩의 ‘여행기’, 작자 미상의 ‘맨더빌 여행기’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유럽의 비유럽,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식민 지배의 시발점이자 정복과 노예 무역시대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여러 세기 동안 서양에서 아시아에 대해 알 수 있는 지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자 상상력의 보고(寶庫)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애초 목적은 달랐지만,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여행 계획을 짜는 데 이 책의 지리학적 정보를 가장 잘 활용했다. 콜럼버스는 이 책을 항해 내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최초 일주도 ‘동방견문록’ 없이 나오기 어려웠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마르코 폴로와 콜럼버스를 존경하며 세계 일주를 꿈꿨다. 마르코 폴로는 항해에 도움이 될 정도로 상세하게 얘기를 풀어놨다. 무역풍과 계절풍, 여름과 겨울에 인도와 걸프만 사이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술했다.
서양에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해도(海圖)의 제작도 몰라보게 활발해졌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의 여행코스를 따라 아시아를 횡단하며 이국의 풍물과 풍속을 체험하고, 글과 사진으로 발표하는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5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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