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최초의 웅혼한 서사시는 첫 구절부터 ‘분노’로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서양 문명의 원초적 가치관을 담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기승전결을 이룬 것은 이채롭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스킬로스의 ‘결박한 프로메테우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같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에도 분노가 핵심으로 등장한다. 전쟁 정치 같은 모든 사회 갈등에 분노가 기폭제로 쓰이기 때문이리라.
사회적인 분노에는 불공정이 가장 폭발적인 뇌관으로 쓰이기 쉽다. 조 국 전 법무부장관,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낙마자를 둘러싼 분노가 대표적이다. 자녀 입학시험에 ‘부모찬스’를 동원하는 권력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분노 게이지를 최고조로 올리는 불쏘시개다.
‘정의의 아이콘’이었던 조 전 장관과 아내 정경심 동양대 전 교수가 자녀입학용 인턴 확인서와 표창장을 위조한 혐의는 문재인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조 전 장관이 박근혜정권 때 최순실씨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특혜 의혹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터여서 ‘내로남불’이 영어단어로 쓰일 정도로 분노를 낳았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과 ‘검사 아빠찬스’는 윤석열정부의 아킬레스건이다. ‘학교폭력’ 문제임에도 정순신 아들은 서울대에 문제없이 합격한 반면, 피해 학생은 극단 선택까지 시도한 상황이어서 공분은 현재 진행형이다.
50억원 뇌물수수와 알선수재 등의 혐의를 받던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은 법망을 피해 무죄를 선고받아 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곽 전 의원의 무죄사유는 ‘아들의 결혼에 의한 독립 생계’였다. 최저임금노동자 월급을 200년간 모아야 하는 금액임에도 5년 10개월 근무하고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것을 상식으로는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는 분노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사법부의 직무유기에 앞서, 곽 전 의원을 제3자 뇌물죄가 아니라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검찰의 의도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함께 터져 나온다.
분노는 선거를 통해 정권을 바꾸기도 한다. 선거에서 승패의 본질은 분노에서 나온다. 윤석열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 조 국 전 장관이라는 얘기가 과장이 아니다. 지난 대선 때 조 국 사태를 비롯한 문재인정부의 불공정에 분노한 20·30대 남성들이 등을 돌렸다.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MZ세대는 불공정에 한층 민감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역설했다. 청년의 날 기념식에선 ‘공정’을 무려 37번이나 말했다. 다짐과는 달리 문재인정부에서 일어난 일은 그 반대여서 국민적 공분이 켜켜이 쌓였다.
‘공정과 상식’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걸었던 윤석열정부도 국민의 분노를 쌓아가고 있는 듯하다. 정순신 사건 외에도 공직인사 과정에서 공정과 상식은 상당 부분 희석됐다. 최근 국민의힘 대표 선출 과정에서 보인 윤 대통령의 불공정한 선거 개입은 민주주의 후퇴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김기현 대표의 경쟁자들은 윤석열정부의 공정성을 허물었다고 치를 떨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검찰수사의 결이 다른 문제는 윤석열정부의 공정과 상식을 민감하게 시험한다. 검찰은 김건희 여사의 각종 의혹을 강도 높은 조사 없이 무혐의로 처분하면서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검찰은 코바나컨텐츠 협찬과 자금횡령 의혹 등 김 여사가 고발된 사건들을 무더기로 무혐의, 불기소 처분했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은 검찰의 수사 공정성이 의심받는 대표적인 사례다. 핵심 피의자를 기소하고도 김 여사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수사 중’이라고 미적거리는 처사는 야당의 특검 도입 움직임과 직결된다.
독일 철학자 패터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를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중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영혼을 충족시키고 용기를 북돋우기 때문에 분노가 없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라고 했다. 불공정은 ’내로남불‘과 함께 문재인정부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민심 분노의 핵심 요인이었다. 정의는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분노할 때 실현됐다.
윤 대통령은 불공정을 단죄한 덕분에 집권했다. 그런 정권이 또 다른 불공정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우를 범하려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든다. 윤석열정부는 ’공정과 상식‘을 약속으로 말미암아 출범할 수 있었기에 자신들의 불공정과 몰상식에는 한결 더 엄격해야 마땅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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