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몽타주 기법’의 거장으로 불린다. 구소련 영화 황금기의 전령사인 예이젠시테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투쟁’을 내세운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임도 알토란처럼 받았다. 예이젠시테인이 몽타주로 러시아혁명 열기를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낸 덕분이다. 몽타주 기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둘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이 그것이다. 예이젠시테인은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 원리를 몽타주에서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위기론’도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과도기에서 나온다.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 그것이 위기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상황을 그람시의 위기론에 대입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적폐청산과 개혁의 사명을 띠고 출범한 촛불정부 집권세력은 무능과 위선에다 오만과 독선까지 더해 시대정신의 수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재보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사태의 후폭풍으로 말미암아 민주화 세대의 소명은 황혼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LH 사태가 티핑포인트이긴 하지만, 폭발의 임계점에는 벌써 도달해 있었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론’은 익살맞은 그림 신세나 다름없다. 정권이 바뀌어 윗사람들은 달라졌는데 아랫사람들은 여전히 잘못된 문화적 풍토에 젖어 있다는 그의 언설은 현실인식의 괴리감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86세대 기득권론’을 일축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정치주류교체 시기상조론 역시 자기 세계에 갇힌 개혁세력의 안주(安住)를 반영하는 듯하다. 유 이사장은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도 한국 정치의 주도성이 6월항쟁의 흐름 안에 있으며, 새로운 단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촛불정부 들어 민주화 세대가 내세울 만한 성과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외려 무능으로 꼽을 게 더 많다. 경제 부동산 일자리 같은 생활정치는 무능과 위선이 겹치는 부정적 이중상황이다. 임대차 3법 개정을 주도한 인물들의 위선과 반칙은 대표상품의 하나가 됐다.


 무능과 위선은 ‘조국사태’ 때부터 드러났다. 조 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조국백서’를 펴내는가 하면, 그를 비판하는 ‘조국흑서’ 100권을 내도 여론 40%는 ‘조국린치’라고 생각한다는 철옹성은 문재인정부의 핵심 철학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취임사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방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았다. ‘반조국’ 세력에 대해 “누구든 조 국처럼 기득권에 도전한 사람 중에 먼지 안날 사람만 하라”고 일갈하는 인사도 있었다.


 86세대 출신 진보 주류는 자신들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청년세대에게 ‘전 정부에서 교육을 제대로 못받은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20대에 대한 86세대의 생각을 응축한 상징적 단면이다. ‘우리 편 감싸기’와 ‘남 탓’의 전형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적폐청산의 하나로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검찰개혁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인식을 심어놨다. 조용히 제도개혁으로 마무리하면 박수받을 검찰개혁을 ‘우리 편 수사 막기’라는 나쁜 프레임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자신들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정치호랑이로 키워놓고선 처음부터 정치검사였다고 두들겨댄다. 자신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스스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는 의심까지 사고 있다. ‘귀족 진보’라는 수군거림을 자초했다.


 재보궐선거 이후 차기 지도자를 꿈꾸는 86세대 정치인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돌고 있기도 하다. 여권 내 대표적인 86세대 인사들은 이미 재보궐선거 기간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소환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지지층의 간을 보기 시작했다.


 집권세력의 오만과 독선은 지난해 총선에서 180석에 이르는 거대의석이 발판을 마련해줬다. 민주주의에서 중시해야 할 다원성이 결여된 ‘질적인 후진’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졌다. 1987년 체제 이후 최대 승리가 역설적으로 ‘꼰대 진보시대’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새로운 대안이 뚜렷하지 않아 실질적 민주주의의 위기처럼 느껴진다. 적폐세력의 몰락과 제3세력의 부재가 도드라져 보인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전직 검찰총장을 느닷없이 차기 지도자로 떠올리는 현실이라 한결 당혹스럽다.


 돌이켜 보면 문재인정부의 가장 큰 시대적 사명은 87년 체제의 종식이었다. 적폐청산과 기득권의 자아에 도취해 제대로 된 개헌을 면피성 시늉으로 시도하다 말았다. 87년 체제는 군사정권 체제를 끝내기 위한 임시체제 성격이 짙다. 진보진영은 첨단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87년 체제의 산물인 ‘민주 대 반민주’의 이분법 틀에 갇힌 모습이다. 30년을 훌쩍 넘겨 시효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데도 말이다.


 집권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보다 87년 체제의 종식을 마지막 역사적 책무로 삼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대의 숨통을 터주는 것만도 미래세대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정치권 밖의 민주화 세대 응원단도 그 길을 권면해야 옳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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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안팎 부정부패 전문가들의 경종이 메아리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는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국의 부패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다.” 미국 정치학자인 마이클 존스턴 콜게이트대 교수가 수년 전 한국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툭 터놓고 꼬집었던 발언이다.


 존스턴 교수는 국가의 부패유형을 네가지로 나눈다. 1단계인 ‘독재형’은 중국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 주로 나타난다. 2단계 ‘족벌형’ 역시 러시아 필리핀에서 보인다. 3단계인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국가로는 한국과 함께 이탈리아 아르헨티나가 꼽힌다. 4단계 ‘시장 로비형’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이 속한다. 한국 부패문제에 대해서는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존스턴과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기득권층 짬짜미형 부패’라고 부른다.


 ‘가장 뛰어난 자들의 부패가 최악의 부패다’라는 속담이 중세 로마 시대부터 전해오고,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도 그 냄새가 고약하다”라고 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의 부동산투기 의혹 사태를 계기로 속속 다양하게 드러나는 부동산 비리도 ‘엘리트 카르텔형’으로 분류된다. 여당 현직 의원 6명에 이어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의 전직 보좌관, 송철호 울산시장 배우자, 청와대 경호실 과장, 임종성 의원 가족과 지인의 투기 의혹이 폭로되는 걸 보면 이런 유형이 그대로 부각된다. 세종시 공무원들이 스마트국가산업단지 예정지 개발 관련 정보를 미리 입수해 부동산투기를 한 정황이 들통난 것도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다.

                                                                           

  한국의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는 갖가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규제 권력을 가진 공무원이 은퇴 후에 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피규제자를 봐준다. 유력 정치인이 상호 도움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자녀를 특정 기업에 편법으로 취업시킨다. 교수가 동료 교수의 자녀를 실험실 인턴으로 써주고 엉터리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지방 토호 엘리트들의 토착부패는 오래전부터 경고음을 냈으나 법망을 벗어나 있다는 설이 널리 퍼졌다.

 

 낙하산 인사는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중 가장 악성으로 지목된다. 선물 경조사비 밥값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가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 마피아, 정치 마피아를 비롯해 직능별로 결성된 온갖 ‘마피아’들이 결속하는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한국의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는 끼리끼리 문화의 부정적 진화로 나타났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한국을 부족주의 국가로 명명했다. 한국 엘리트의 본질적 속성이 부족주의라는 뜻이다. ‘공정’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공정거래위원회가 해마다 직원 10여명을 대기업에 재취업시켜 주면서 ‘억대 연봉 지침’까지 기업에 정해준 사실을 실례로 들었다.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라는 박근혜정부 못지않게 진보 정권인 문재인정부에서도 ‘운동권 부족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결과가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의 속편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국 사태’ 이후 ‘우리 편은 부정부패에 연루돼도 문제가 없다’며 싸고도는 풍조도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를 키우기 쉬운 토양이 됐다. 최근 2년간 LH가 한달에 한번꼴로 직원들의 부정부패를 적발했으나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동산투기는 한건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이를 증명한다.

                                                                   

  대통령의 인사 기준부터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를 타파하기 어렵게 한다. 부동산투기 탈세를 비롯한 인사검증 7대 기준 미준수는 ‘우리끼리는 괜찮다’는 걸 묵인하는 듯하다. 외려 7대 불가 사유 가운데 몇가지가 포함돼야 발탁될 수 있다는 냉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인사청문회에 나갈 고위공직자가 부동산투기 의혹이 불거지면 거의 하나같이 ‘노후대비용’이라고 둘러대고 빠져나간다.


 국제기구가 집계하는 공직사회 부패지표를 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20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한국은 180개국 중 33위를 기록했다. 다소 개선되는 추세이긴 하나 경제력과 전체 국력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37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23위다.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를 낳는 요인은 이기주의에 매몰된 국회와 정당, 비대한 정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법부가 모두 꼽힌다. ‘김영란법’으로 통칭하는 ‘부정청탁금지법’에 마땅히 포함돼야 했으나 핵심인 이해충돌방지법은 국회의원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쏙 빼놓았다. 선거를 앞두고 LH사태의 불길을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부랴부랴 이해충돌방지법도 통과시키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재산공개 대상을 모든 공직자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도 지켜봐야 한다.


 법과 제도를 어느 정도 갖추어도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실행 의지가 관건이다. 권력형 엘리트 부패를 막으려면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편은 괜찮다’는 풍조가 이어지면 그마저 신뢰를 잃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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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 볼리비아의 해군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의 대명사다. 볼리비아는 해군이 지켜야 할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다. 그럼에도 해발 3800m의 티티카카 호수에 해군기지를 두고 수천명의 해군병력과 군함을 보유하고 있다. 군함도 한두척이 아니라 수십척의 초계함, 십여척의 수송선, 훈련선, 병원선, 잠수함까지 있다고 한다. 볼리비아도 한때는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보유했으나 1879년 칠레와 치른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바다를 잃고 말았다.

 

 문재인정부의 일자리 정책 기관은 높은 이름값에 비하면 볼리비아 해군만큼이나 존재감이 떨어져 보인다. IMF 외환위기 이후 22년 만에 닥친 최악의 실업자수와 잇단 대증요법이 이를 입증한다. 정부가 일자리 늘리기 위해 지난해 1년 동안 쏟아부은 돈이 37조원에 달하지만 취업자수는 2018년보다 22만명 가까이 줄었다는 통계는 코로나19 사태를 고려해도 충격적이었다. 그전에도 일자리 위기는 정부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일자리 대통령’을 표방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첫날 ‘업무지시 1호’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했다. 일자리가 문 대통령의 최우선 국정과제임을 선포하는, 기대가 만발한 장면이었다. 문 대통령은 곧이어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 일자리상황판도 만들어 공개했다. 청와대 조직으로 일자리수석비서관도 신설해 희망찬 출발을 알렸다. 청와대 부서 명칭에 ‘일자리’가 들어간 건 사상 최초였다. 하지만 성과가 변변찮은 일자리수석은 세번째 바뀌었다. 전임 일자리수석 가운데 한 사람은 낙하산을 타고 한국조폐공사 사장 자리에 안착했다.

                                                                             

                                                                           

   대통령이 위원장인 일자리위원회에도 세번째 장관급 부위원장이 들어섰다. 일자리위원회의 존재감 역시 도드라지지 않는다. 출범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회의를 열고 아이디어를 모았으나 내세울 만한 결과물은 드러나지 않는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얘기와는 정반대로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하였노라’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부가 문 대통령의 지시로 올 1분기 중에 공공 부문에서 90만개 이상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모두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땜질식 ‘단기 공공일자리’에 불과하다.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디지털 일자리 사업 규모 6만명 확대와, 공공기관 청년고용의무제 2년 연장을 뼈대로 한 대책을 지난 3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했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자리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건 꼼꼼히 따지지 않더라도 일자리 기구의 존재와 인과관계는 물론 상관관계도 그리 없어 보인다. 일자리는 경제 전반의 문제와 연관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부문별 개혁과 따로 놀아 화음을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강력하게 추진했던 ‘비정규직 제로’는 선언적인 구호임을 고려하더라도 일자리 늘리기에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상징적인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는 고용증가보다 청년층이 가장 민감한 공정성 논란을 불러왔다. 역설적으로 문재인정부 출범 4년 가까이 비정규직이 도리어 94만5000명 늘었다는 통계가 제시되기도 했다. 비정규직으로 잡힌 기간제 근로자가 대규모 포착된 게 기간제 근로자가 실제로 증가한 수치가 아니라 기간제로 답변한 응답자가 증가한 것이라는 정부의 반론이 있었으나 아픈 곳을 찔린 것은 분명하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융통성이 부족한 주 52시간제 시행이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일자리 감소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다수 전문가가 수긍한다. 여권 안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이 ‘을과 을의 전쟁’을 불러왔다는 데 동의한다. 특히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한국 현실에서 노동비용이 올라가자 고용에 치명타를 입혔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정부가 최저 시급 1만원 목표에서 물러났다. 논란이 많은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소득 증가와 내수 촉진, 경기 부양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끌어내는 데 실패해 고용참사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격언은 여기서도 통한다.


 1월 취업자가 1년 전보다 100만명 가까이 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취업자가 원하는 일자리와 기업이 뽑으려는 인력의 수요 공급 불일치 때문이라는 한국은행의 지난주 분석이 정부가 생각을 가다듬게 한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대면 서비스업 일자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크게 줄어든 반면 정보기술(IT) 기업, 제조업 분야 기업에선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수급 불일치(미스매치) 지수가 2배 늘어났다고 한다.


 재정을 통한 고용확대 정책은 단기 임시직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민간경제 활력을 높여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 일자리 위기도 정부의 통합적 정책사고 부족에서 초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컨트롤타워 부재를 실토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칫 문재인정부가 남은 1년여 임기 안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늘리지 못한 ‘일자리 정부’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볼리비아 해군은 존재감은 부족하지만 빼앗긴 땅을 되찾아 태평양으로 진출하겠다는 권토중래 정신을 지녔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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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직한 사회가 작동하는 데는 평등과 공정의 가치가 필수불가결하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모튼 도이치는 두 가치에다 ‘필요 충족’을 더해 좋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세 가지 기본조건이라고 규정짓는다. 평등과 공정은 성격이 비슷한 덕목이지만 차이가 난다. 평등(equality)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조건을 주는 것이다. 출발선부터 조건이 다르면 효용이 없다. 공정(equity)은 각기 다른 사람이 필요한 만큼 주는 공평함을 뜻한다.


 현실에서는 평등보다 공정이 먼저 보장돼야 이상적이다. 먹을 것에 비유하자면 세 사람에게 똑같은 빵을 하나씩 나눠주는 것이 평등이다.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두 사람은 배가 부른 상황이라면 배고픈 이에게 훨씬 많이 돌아가게 하는 게 공정이다. 정의론(justice theory)의 대가인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도 정의로운 사회구현에서 공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의 장기화에 따른 추가 재난지원금 논쟁에서도 평등과 공정을 떠올려 보면 방향을 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에다 ‘필요 충족’까지 살펴보면 한결 명쾌해진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4차 재난지원금의 선별적 지급에다 전 국민 보편지급까지 추가하지 않으려면 사퇴하라고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윽박지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민주당의 전 국민 보편지급 주장을 응원하고 나선 것은 물론 도민 한 사람 당 10만 원씩 2차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이란 명목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편 복지’를 깃발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선거를 앞두고 약발을 확인한 득표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연초에 지적한 대로 코로나 19가 주는 고통의 무게는 평등하지 않다. 지원도 고통에 어느 정도 비례해서 하는 게 공정하다. 미래세대에 엄청난 빚더미를 물려줄 수밖에 없는 재난지원금이 4차에 이어 5차도 꼭 필요하다면 코로나 피해계층에 집중적으로 두껍게 지원하는 게 정의롭고 타당하다. 정부의 방역수칙에 따라 소득감소가 큰 자영업자, 저소득층, 비정규직, 미성년 가구 같은 취약 계층이 선별 지급의 대상이 돼야 바람직스럽다.

 

  공무원, 공공기관 노동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처럼 사실상 소득감소가 없는 계층까지 또다시 위로금을 주는 것은 불평등과 불공정을 심화시킬 뿐이다. 지난해 5월 지급한 1차 재난지원금에 대해 정부가 자발적 기부를 독려했으나 전체 지급 규모의 2%에도 못 미쳤다.


 경기부양과 소비 진작을 중요한 명분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지난해 총선을 계기로 지급한 1차 전 국민 재난지원금의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난 주말(5일) 비대면으로 열린 한국경제학회 공동학술대회에서 경기연구원은 1차 재난지원금 추가 소비 효과가 29.2%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0만 원을 지급하면 실제 소비가 늘어나는 건 2만9000원에 그친다는 뜻이다.

 

  이재명 지사의 싱크탱크 격인 이 연구원은 10만 원의 재난지원금으로 18만5000원의 소비가 이뤄졌다던 이 지사의 주장과 판이한 수치를 내놨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1차 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26.2~36.1%의 매출 증대 효과만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앞으로도 보편 지원보다는 선별 지원이 더 효율적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우세하다.

                                                                       


 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보편지급이 진보정권의 의제라는 주장도 허구다.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뜨거웠던 학교 무상급식 논쟁에서 진보는 보편 복지, 보수는 선별 복지였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보편적 복지국가 담론을 선도하고 있는 진보학자 이상이 제주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보편지급’이라고 일컫는 걸 엉터리 용어 사용이라고 꼬집는다. 보편지급이 아니라 ‘획일 지급’이나 ‘무차별 지급’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다. 보편적 복지와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은 오히려 철학적으로 충돌한다고도 했다.


 전 국민 현금지급은 복지 효과도 적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득하위 50%에게 두껍게 몰아주는 것이 소득재분배 효과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다.


 모튼 도이치의 ‘필요 충족’ 조건을 보더라도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학생 급식과 달리 보편적 필요성이 약하다. 영업제한 정책 등으로 직접 피해를 보는 계층에 맞춤 지원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복지선진국 유럽국가들도 필요 충족 조건에 따라 맞춤형 선별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곳간지기’로 비하하며 돈을 아낌없이 풀라고 겁박하지만, 4차 재난지원금에도 올해 예정된 94조 원의 적자 국채 발행 규모를 훨씬 초과하는 나랏빚이 필요하다. 영업제한으로 막대한 손실을 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조차 두껍게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사정임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상위 계층에게까지 재난지원금을 줘야 할 명분은 찾기 어렵다. 모든 재난지원금은 경제적 피해가 기준이 돼야 한다.


 코로나 19 사태에 비견되는 대공황 때 ‘결핍(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개념을 도입해 미국의 사회복지를 강화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표명은 변함없이 유효하다. “진보의 시험대는 풍족한 사람들에게 더 얹어주느냐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이들에게 충분히 주느냐에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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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직속 국가청렴위원회가 황당한 언론관을 드러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국민권익위원회 전신인 청렴위는 2007년 ‘언론이 국가기관의 비리를 취재·보도하면 국가 이미지가 나빠진다’며 취재에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청렴위나 권익위는 국가기관과 공직자의 비리를 적극 고발해 부패와 반칙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중앙행정기관이다. 그럼에도 청렴위가 외려 설치 목적에 반해 국가기관의 비리를 은폐하려는 것처럼 비쳐 논란을 불러왔다. 투명하게 밝혀야 할 부정부패를 감추면 청렴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발상이라는 질타가 뒤따랐다.


 적폐청산 이후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이 보여주는 행태는 도덕적 우월감 강박관념에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 국 법무부장관 임명 과정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검찰개혁 드라이브와 관련한 정치행위는 궁극적으로 정권비리 수사 막기와 다름없다는 오해를 풀기 어려워 보인다. 월성 1호기 원전 경제성평가 조작의혹 감사 때 나타난 여권의 압박도 같은 차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과 최재형 감사원장을 포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권 차원에서 본질이 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 조 국 일가 비리,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 사건,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 같은 민감사안 수사 방해는 찾아보기 드물 만큼 노골적이었다는 여론이 많다.

                                                                        


 검찰총장 쳐내기 실패로 끝난 법무부장관의 무리수, 수사팀 해체로 이어진 검찰인사가 이를 입증하고 남는다. 추 장관이 지난해 두 차례 단행한 검찰간부 인사는 ‘살아있는 권력 수사는 하지 말라’는 의중을 검찰조직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 총장의 신임을 받는 인사들이 일제히 지방이나 한직으로 밀려난 반면, 추 장관 라인 검사와 정권에 협조적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한결같이 영전했기 때문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으로 송철호 시장 등 13명이 기소됐으나 핵심 관련자 수사는 중단된 상태다. 수사팀은 추 장관의 인사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지난해 1월 29일 검찰이 기소한 뒤 1년이 다 됐으나 재판이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사법부마저 의심받는 사건으로 바뀌었다. 1조6000억원 금융사기인 라임자산운용 비리 의혹 사건, 5000억원대 피해를 낸 옵티머스 펀드 정관계 로비의혹 사건 수사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 검찰이 최근 김재현 옵티머스 자산운용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추가로 불구속기소했지만 로비 대상자들에 대한 수사확대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라임사태 등 금융사건에 정관계 인사들이 연루돼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추 장관이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증권범죄합수단 폐지 후 검찰의 증권범죄사건 처리 비율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통계가 최근 나왔다.

                                                                          

 대통령과 특수관계로 알려진 이상직 전 민주당 의원 사건은 전형적인 꼬리자르기로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불법이나 도덕성 의혹이 제기되면 탈당을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권 관행으로 굳어지는 듯하다. 이 의원은 이스타항공 임금체불과 ‘먹튀’ 논란이 불거지자 탈당했다.

                                                                                


 사상 초유의 검찰총장 징계가 실패하자 여권은 또 다른 안전장치로 검찰 수사권 폐지라는 극약 처방까지 준비하고 있다. 민주당은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올해 1월부터 검찰에 남은 6대 범죄 수사권마저 경찰로 넘기거나 별도 수사기구를 만들어 이관하기로 했다. 애초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단행한 수사권 조정까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담긴 것 같다.


 이용구 법무차관 택시기사 폭행사건이 봐주기 의혹의 도마 위에 오른 걸 보면 올해부터 더 막강해진 경찰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진 상태다. 감춰야 할 비리가 얼마나 많아 이처럼 무리하게 나서느냐는 눈빛이 날카롭다.
 감사원이 에너지전환 정책 수립 절차 추가 감사에 착수하자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감사원장을 거칠게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지원사격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대통령 친인척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이상 공무원 비위 행위를 감시할 목적으로 설치한 특별감찰관실은 유명무실하다. 대통령이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아서다. 특별감찰관은 2014년 여야 합의로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신설한 기구다. 특별감찰관이 있었으면 적지 않은 청와대 의혹 사건의 예방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박 전 대통령도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내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비극은 막았을 게다.


 이제 막 출범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대통령과 측근 비리 처벌을 방지하는 퇴임 후 보장 보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각도 상존한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일갈했다. 2016년 서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은 어두운 곳을 비추라고 타올랐다. 더러운 곳을 가리고 어두운 곳을 감추면 세상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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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맹주’인 미국 역사상 최악 대통령으로 제임스 뷰캐넌(15대, 1857~1861), 앤드루 존슨(17대, 1865~1869)과 워런 하딩(29대, 1921~1923)이 꼽힌다. 세 사람은 평가기관에 따라 순서가 다소 바뀌지만 거의 어김없이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뷰캐넌과 존슨은 공교롭게도 부동의 최고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전임자와 후임자다. 가왕 조용필 바로 앞뒤에 노래를 부르는 아마추어 가수와 같은 불운아여서가 아니라 실제로 무능한 지도자였다.


 뷰캐넌은 노예제 옹호하고 나라를 분열시켜 남북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민주당 소속 부통령이었던 존슨은 공화당 대통령 링컨이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해 유일무이하게 선거 없이 정권교체를 한 인물이다. 존슨은 의회권력을 쥐고 있던 공화당에 맞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론분열만 일으켰다. 이처럼 최악 대통령의 특징은 국가통합을 해치고 분열을 조장한 지도자들이다.


 하딩은 가장 무능하고 부패한 막장 행적으로 일관한 최악 1위 대통령이었다. 하딩은 포커게임 술 골프 여자사냥만 즐기다 재임 중 돌연사했다. 친척과 포커 친구들을 요직에 대거 앉혀 수많은 독직사건을 일으켰다. 경제위기 앞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대공황의 물길을 텄다. 금주법을 만들어 놓고는 압수한 밀주를 백악관에 들여와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워런 하딩 미국 29대 대통령>

 

 그는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공화당 후보로 옹립되고 선출됐다. 큰 키와 로마인 조각 같은 얼굴에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유권자 마음을 사로잡아 60%라는 경이로운 득표율로 당선됐다. 하지만 외모만 보고 사람을 선택하는 잘못을 일컫는 ‘워런 하딩의 오류’라는 심리학 용어의 모델이 됐다. 그는 “나는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맡지 않았어야 했다”고 친구에게 털어놨다고 한다.


 이런 최악의 대통령들을 제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커졌다. 트럼프는 이미 2018년 미국정치학회(APSA)가 뽑은 가장 나쁜 대통령 1위로 올라섰다.


 트럼프의 최대 과오는 미국의 핵심 가치인 민주주의를 유린한 일이다. 임기 내내 이어진 그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는 거짓과 선동을 동반한 대선불복에서 정점을 찍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대선 결과를 불법적으로 뒤집기 위해 민주주의 상징인 연방 의사당을 점령한 것은 최악의 반동이다. 이전까지 44명의 대통령 가운데 누구도 민주주의 정신을 무너뜨린 사례는 없었다.


 트럼프의 거짓선동 정치 폐해는 2016년 대선 때부터 전세계적인 파장을 몰고왔다. ‘가짜뉴스’ ‘탈진실’이라는 용어가 지구촌에 들불처럼 번진 것도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2016년부터였다. 언론 팩트체크팀이 매일 트럼프 발언을 검증하는 희한한 일도 벌어졌다. 워싱턴포스트 팩트체크팀이 2017년 1월 취임일부터 지난해 9월 중순까지 집계한 트럼프의 거짓주장만 무려 2만3000여건이었다. 5분에 한번꼴로 거짓말을 했다는 통계다.


 미국 역사학자 700여명이 역대 대통령 순위 평가보고서를 내면서 밝힌 사실 하나가 눈길을 끈다. 성공한 대통령일수록 정직성이 높았다. 능력과 정직성은 별개가 아니며 사회를 통합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지도자의 정직성이라고 학자들은 결론 내렸다. 국민을 속이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보고서는 트럼프에 대입해도 틀리지 않는다.

                                                                       


 극우 포퓰리즘을 동원한 극단적인 편가르기 정치가 광적인 수준에 이른 것도 트럼프 때였다. 남북전쟁 이래 이처럼 나라를 분열시킨 적은 없었다. 아무리 거짓말투성이고 국정이 엉망이어도 ‘묻지마 지지’를 보내는 광신적 팬덤정치는 ‘트럼피즘’으로 살아남아 미국 민주주의의 기생충이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소름을 끼치게 한다.


 친조카가 소시오패스로 규정했듯이 트럼프는 애초부터 공인의식이나 정치철학 따위는 없었다. 대통령은커녕 어떤 공직도 맡아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선 정부의 기반인 제도와 규칙에 대한 존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 하루아침에 해임하고 마는 인사 전횡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상식과 규율까지 깡그리 무시했다. 돌출행동과 자극적인 언사만이 그의 등록상표로 남았다.


 트럼프는 코로나19 사태로 1948년 공식 실업률 집계 이후 최고치인 14.7%의 실업률 기록을 남겼다. 코로나19로 사망한 미국인이 37만명을 넘었으나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골프나 치러 다녔다. 1945년 이후 미국의 모든 전쟁 사망자보다 많다. 트럼프는 재직 중 두번 탄핵소추되는 최초의 대통령으로도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제도가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어렵사리 쌓아 올린 민주주의도 ‘아시타비(我是他非) 정치 지도자’와 묻지마 지지자들이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음을 트럼프가 실증해 보였다. 남의 일만 아닌 듯하다. 독일 역사학자 한스 위테크는 “신은 누군가를 멸망시키기에 앞서 뜨거운 권력을 누리게 한다”고 경고했다. ‘선출된 권력의 오만’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한국의 집권세력도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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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모든 나라가 방역에 최우선 순위를 두면서도 경제 방어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방역과 경제 방어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두마리 토끼잡기에 견줄 만큼 지난한 과제다.


 대만은 올해 주요국 가운데 두가지 모두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경이적인 나라다. 방역 모범국 대만에서 8개월여 만인 지난 22일 처음 지역감염자 1명이 발생해 엄청난 뉴스가 됐다. 대만은 27일 존스홉킨스대 집계기준으로 코로나19 확진자수 780명, 사망자 7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 해외 유입자다. 대만은 확진자 5만6872명 사망자 808명인 한국의 1% 안팎 수준이다.


 대만이 뉴질랜드처럼 작은 섬나라여서 상대적으로 통제가 쉬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총인구수(2020년 기준)로는 한국 5178만명, 대만 2381만명 이지만, 인구밀도는 대만이 한국보다 1.3배나 높아 코로나19에 더 취약한 구조다.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대만은 주요 선진국들과 달리 경제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외려 전자제품 반도체 생활용품 주문이 해외로부터 밀려들어 휘파람을 불고 다닌다. 가장 선방한 축에 속한다고 자랑하는 한국의 올해 예상 경제성장 전망치가 -1%인 데 비해 대만은 2.54%로 주요국가 중 1위를 차지할 게 거의 확실하다. 1991년 이후 29년 만에 중국 본토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는 덤도 얻었다.

                                                                          

  블룸버그통신이 발표한 12월 봉쇄(록다운) 심각도 점수에서도 대만은 19점으로 22점인 뉴질랜드를 제치고 1위다. 한국은 63점으로 24위다. 1, 2위 두 나라는 거의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대만 국민은 여러가지 모임을 할 수 있는 데다 스포츠 경기와 공연도 관람한다. 식당, 백화점, 호텔 숙박도 제한이 없다. 자연히 내수경기가 활성화할 수밖에 없다. 경제회생을 위한 정부 추가경정예산 규모도 한국의 1/4 수준이다. 대만의 내년 경제성장 전망 역시 4%로 장밋빛에 가깝다.


 대만의 코로나 방역은 한국과 차이가 조금 난다. 우선 지휘체계를 일원화한 게 두드러진다. 대만은 한국의 보건복지부장관 격인 위생복리부장이 중앙감염병지휘센터장을 겸해 단일지휘체계를 유지한다. 한국은 국무총리가 본부장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보건복지부장관이 본부장인 중앙사고수습본부, 질병관리청장이 본부장인 중앙방역대책본부를 따로 운영한다.


 대만이 단일지휘체계를 갖춘 것은 2003 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옥상옥 조직으로 말미암아 대응에 혼선을 빚었다. 한국이 경제살리기에 매달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임기응변으로 조정하는 실수를 범한 것과 비교된다. 입국자 ‘14일 자가격리제’도 한국보다 먼저 시행했다.

                                                                  


 강력한 방역수칙 위반 처벌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지만, 국민의 높은 신뢰가 뒷받침돼 저항이 없다. 초기부터 공공장소는 물론 대중교통 이용 때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실내외 사회적 거리두기도 철저하다. 자가격리를 이탈하거나 위반한 사람은 최고 1167만원의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한다. 실제로 12월 7일 외국인 노동자가 호텔 격리 중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러 복도에 잠깐 나갔다가 384만원의 벌금을 냈다. 지정된 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한국의 6배가량인 58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대만은 정책적으로 코로나19 검사에 우선순위를 두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격리에 중점을 둔 대처 방식이 주효했다고 한다. 바이러스 확산에 앞서 감염원을 차단하는 선제적 방법이다.


 ‘K-방역’이라고 자랑하던 한국이 연일 1000명 안팎의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일관성 있는 위기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정부가 전문가들의 겨울철 대유행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대비를 소홀히 한 후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대만은 코로나19 백신 확보도 한국보다 앞선다. 내년 초 1500만도즈를 공급받을 계획이라고 지난 11월 발표했다.


 장기적인 위기관리는 초기부터 일관되고 신뢰받는 정책에 따라 이뤄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대만이 보여준다. ‘두마리 토끼 잡으려다 둘 다 놓친다’는 오랜 속담이 생긴 까닭을 머릿속에만 넣고 있으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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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이 미래의 최대 먹거리라는 사실은 이미 대세다. AI와 무관한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다. 재일동포 기업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한국은 앞으로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한 얘기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교육 정책 투자예산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전폭적으로 AI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중국 화웨이가 그렇듯이 글로벌 경제전쟁의 가장 무서운 무기가 AI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세계 경제를 이끄는 두 기관차 미국과 중국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인 AI에 투자하는 돈과 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의 경쟁상대인 중국은 국가와 기업이 똘똘 뭉쳐 AI 빅데이터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같은 4차산업혁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ICT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은 상대적으로 굼뜨다.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발등의 불인 줄 깨닫지 못한다. 영국 옥스퍼드 인사이트와 국제개발연구센터가 발표한 ‘정부의 AI 준비도 지수’에서 한국은 26위 (2019년 기준)로 아랍에미리트 말레이시아에도 뒤처진다.

                                                            

  AI 분야 국가 차원 투자지원을 뜻하는 정부전략 부문의 한국 순위는 54개국 중 31위다. 한국정부는 2019년 말 ‘AI 국가전략’으로 10년간 1조3000억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중국이 2018년부터 3년간 ‘차세대 AI 발전계획’에 17조원을 투자한 것과 견주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한국은 AI 인재도 부족하다. 글로벌 AI 인덱스 인재 부문은 1위인 미국의 1/10 수준에 불과하다. 연구 수준도 22위다. 기업 주도인 미국과 국가 주도인 중국은 AI 인력 육성에 사활을 건다. 캐나다 엘리먼트 AI가 발표한 ‘글로벌 AI 인재보고서 2020’에 따르면 한국의 AI 전문인력 규모는 세계 전체의 0.5%에 불과하다. 전세계 AI 전문 기술인력 47만7000여명 중 한국 국적 인력은 2500여명에 그친다. 그나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국책기관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국가 AI 연구지수’에서 한국은 91개 나라 가운데 14위권이다. AI 선도국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도 문재인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에만 정신이 팔려 ‘토건공화국’ 건설에 여념이 없다.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10조원이라는 거액이 들어가는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여건에서 가장 뒤떨어진다’는 프랑스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의 사전타당성 검토 결과를 무시하고 추진하는 가덕도 신공항은 애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예산이 투입될 게 분명하다. 토목사업 선례를 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쏟아부어야 할지 모른다. 미래의 최대 먹거리 AI에는 가덕도 신공항 건설 투자의 1/10밖에 들이지 않는다.

        
 거기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재인정부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사업 규모가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공항 철도 도로 건설사업이다. 대선을 코앞에 둔 내년에 더 늘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명분은 한결같이 ‘국가균형발전’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집계를 보면 현재까지 문재인정부의 예타면제사업은 88조1000억원에 달한다. 이명박·박근혜정부를 합한 것보다 많다. 두 보수정부의 예타면제사업 합계는 83조9000억원이다.

                                                               

 
 이명박정부의 22조원짜리 4대강사업을 ‘토건공화국’이라고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비판했던 게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다. 또 다른 내로남불의 전범을 보는 듯하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진보진영이 개발 규제 차원에서 추진했던 제도다. 1999년 김대중정부 때 처음 만들어졌다.

 

  사실 예타면제여서 비판받는 것보다 나라 재정의 기조와 지향점이 더 큰 문제다. 그렇지않아도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빚을 내야 할 판이다. 선택과 집중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수조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은 시작하면 잘못돼도 되돌리기가 불가능하다. 물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고추 말리는 데만 쓴다’는 비아냥을 듣는 공항이 좁은 땅덩어리에 널려 있는데도 새 공항을 몇개나 더 짓겠단다. 코로나19와 4.15 총선 압승 이후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이 몇조원쯤은 가볍게 여기는 듯한 모습이어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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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의사들은 ‘체 게바라의 자존심’으로 통한다. 카리브해 섬나라 쿠바의 의료수준이 세계적으로 정평이 난 역사적 배경에는 체 게바라를 빼놓을 수 없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쿠바가 의료강국이 된 것은 1959년 혁명 이후 교육·농업·의료 3대 개혁이 거둔 열매다.

 

 피델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한 체 게바라는 한 연설에서 의료 접근성을 역설했다. “의사는 씨를 뿌리고 가꾸는 농부와 같다.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의사는 환자와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쿠바혁명 직후 “학교와 병원은 부자들만 가는 것이 아니다. 쿠바 인민 모두를 무지와 질병으로부터 해방하겠다”고 다짐한 뒤 은퇴할 때까지 실천했다.


 쿠바의 전면 무상 의료제도는 세계 최상급으로 인정받는다. 쿠바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8.4명으로 세계 최고다.(2018년 세계은행 통계) 세계 평균 1.5명, 한국 2.4명에 비하면 독보적이다. 이처럼 풍부한 의료인력은 연간 65억달러 안팎을 벌어들인다. 의사 해외파견은 쿠바 외화벌이의 절반에 이른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에서는 해외 파견의사 월급의 80~90%가 국가수입으로 잡힌다. 1963년부터 시작된 쿠바의 해외파견 의사 누적 인원은 40만명에 이른다.

                                                                     

                                                                    

  쿠바는 전 세계적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로 관광수입이 격감한 대신 의료 붕괴를 맞은 나라로 파견 의사수를 늘렸다. 올 초까지 3만명 선을 유지하던 파견 의사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남아공 등 27개국에 3000여명이 추가로 나갔다. 쿠바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따뜻하기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 퇴치에 힘쓴 쿠바의 해외지원의료진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을 정도다.


 14개 의과대학은 쿠바의 의료인력 확보를 뒷받침한다. 쿠바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대도 무상교육이다. 인구 1120만 명의 쿠바는 넉넉한 의료 자원에 힘입어 코로나19 방역도 선방하고 있다. 21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집계 기준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7763명, 사망자는 131명이다. 쿠바 정부는 수만명의 가정 주치의, 간호사, 의대생들이 날마다 모든 가정을 돌며 주민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한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쿠바가 자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후보 2개가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두번째 코로나19 백신 후보 ‘소베라나2’가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이미 지난 8월 시작한 후보물질 ‘소베라나1’ 임상시험은 큰 부작용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핀라이백신연구소를 비롯해 20개 연구기관이 참여한 개발연구팀은 올 연말까지 2가지의 새로운 후보물질도 임상시험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쿠바는 내년에 자신들이 개발한 백신을 국민에게 보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모더나의 백신이 뜨는 바람에 관심밖에 있지만, 쿠바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에는 희소식이 될 게 틀림없다. 쿠바의 코로나19 백신은 수십년간 축적한 기술력 덕분이다. 쿠바는 항수막염 백신, B형 간염 백신을 비롯해 8가지 백신을 자체 개발해 40여 나라에 수출한다. 쿠바산 B형 간염백신은 미국산보다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1980년대부터 생명공학·생물의학에 집중투자한 결과물이다.


 똑같이 미국의 경제봉쇄를 겪고 있는 북한과 쿠바를 비교 연구하다 보면 국가 목표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한명도 없다는 북한의 보건·의료는 외부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열악하다. 아직 완공하지 못한 평양종합병원이 북한 주민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북한 해커 단체가 코로나19 백신 개발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글로벌 제약사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장도 믿거나 말거나 안타깝다. 쿠바의 친환경 유기농산물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북한은 여전히 식량난으로 허덕인다. 북한이 동병상련의 우방국 쿠바에 진정으로 본받을 게 뭔지 확연하지 않은가.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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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모범국인 미국이 반면교사로 전락한 것은 이율배반의 비극이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 교과서는커녕 세계적 조롱거리가 됐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와 별개로 수렁에 빠진 민주주의를 건져내는 게 급선무처럼 보인다. 대선 부정 논란으로 3개월째 정국 혼란에 빠진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미국을 비웃을 정도니 말이다.


 뉴욕타임스의 개탄이 뼈저리다. ‘이번 대선에서 미국 정치·사회의 추악한 이면이 낱낱이 폭로됨에 따라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외적 국가이미지가 이미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가치들이 반민주적 세력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미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올 미국 대선이 드러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며 인종차별의 역사를 치유했던 미국 정치시스템이 불과 몇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낳았다.


 투표 전부터 부정선거 음모론을 들고 나온 현직 대통령 트럼프는 기어이 무더기 소송을 제기하고 불복을 선언했다. 바이든 후보측이 표를 도둑질했다는 게 이유다. 근거도 대지 못했다. 야당이 부정 투개표를 했다는 주장은 정치 후진국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억지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충돌했다.

                                                                                 


 미국 대선에서 패자의 승복문화는 1896년 이후 한번도 깨지지 않은 120년 전통이다. 1896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민주당 후보가 윌리엄 매킨리 공화당 당선인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게 시초였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 후보도 경쟁자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화와 연설로 축하했다.


 트럼프가 부정행위라고 비난한 부재자 우편투표는 1812년 이래 200년 이상 미국 민주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었다. 미국의 우편투표는 고향이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파견된 군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마련된 제도다. 어느 쪽의 몰표를 위해 조작할 수 있는 투표 방법이 아니다. 올해 선거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우편투표 선택권이 늘어났을 뿐이다.


 미국의 선거관리는 참담할 정도로 허술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당선이 확정된 2000년 대선 때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그리 개선되지 않았다. 주 정부와 지방정부들이 예산을 핑계로 투표소를 줄여 주민의 선거참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과 소수 인종의 참정권이 제한된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그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4년간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죄과는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다. 인종차별, 성차별, 뻔뻔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 절차 무시, 내로남불, 억지 같은 행태는 한숨이 절로 나오게 했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나라의 추락을 동반한다. 세계 민주주의 수준이 미국 때문에 덩달아 떨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지지 후보나 정당이 다르면 얼굴을 맞대기조차 싫어하는 현상이 유난스러워졌다. 가족 간에도 정파 갈등이 끓어 넘쳤다. 바이든 당선인이 찢어진 미국 사회의 통합과 단결을 다짐하고 호소했지만, 정치적 양극화를 단시간에 치유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인기영합주의에 매몰된 미국 정치의 적대적 정치구조는 앞으로 10년간 혼란 상황을 정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분석까지 나온다.


 취임 초에는 누구든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한 대통령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공화당 못지않게 고루한 민주당 주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기 어렵다는 얘기도 들린다. 갈등해소 역할을 해야 할 언론 지형 역시 정파성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졌지만, ‘트럼피즘(Trumpism)의 패배’라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온갖 악재에도 트럼프의 득표가 4년 전보다 700만여 표 늘어난 데다,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의석수를 외려 늘렸다. 백인 유권자와 농촌 지역에서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안타까워했듯이 미국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쇠퇴와 붕괴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저급 정치 탓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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