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의 평균 재산은 일반 국민보다 10배가량 많다. 재산이 5억 원 이상인 국민은 10%에 불과하지만 국회의원은 80%가 넘는다. 19억 원 이상인 국회의원은 30%가 넘지만 국민은 1%밖에 안 된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대 국회의원의 지난해 평균 재산은 23억9767만원으로 나타났다. 500억 원 이상인 국회의원 3명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정당별로는 자유한국당 의원이 31억7784만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자영업자를 포함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핍진해졌으나, 국회의원들은 지난해 평균 1억1521만원의 재산을 늘렸다.


 이런 부자 국회는 경제적으로 국민의 대표성을 지닌다고 보기 어렵다. 국회의원들은 서민을 대표한다면서 입만 열면 서민경제를 걱정한다.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서민경제와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입법이나 정책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국회의원의 대다수는 재벌 총수 일가의 재산상황, 취득경위, 상속증여세 납부실적 등을 조사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세금 감면과 규제완화로 부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긴다. 소상공인·자영업 기본법, 공정거래법 개정안 같은 입법 과제도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이 막고 있는 실정이다. 38년 만에 전면 개편하자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전속고발권 일부를 폐지해 공정위의 고발 없이도 검찰이 수사할 수 있도록 하면 기업의 부담이 커진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추가경정 예산안만 해도 그렇다. 보수야당 의원들은 서민 생각보다 내년 총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추경은 정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민생과 직결된 부분이 많다. ‘고용위기와 산업위기 지역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적기에 긴급 경영안정 자금이 지원되지 않으면 도산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 강원도 산불 피해지역은 사방공사가 지연돼 집중 호우가 내리면 산사태 같은 2차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 청년 추가고용 장려금이 이미 소진돼버려 추경이 없으면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을 도와줄 수 없다. 추경이 더 늦어지면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투자도 늦어져 국민의 일상을 더 오래 위협하게 된다.’


 역설적인 건 강원도 산불 발생 후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피해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정부를 공격하는 보수야당 국회의원의 말이다. 주민들의 불만이 엄청나다면서 예산 뒷받침은 하지 않는 모순적인 언행이다.


 주택시장안정 대책의 종합부동산세 인상을 세금폭탄론으로 몰고 가는 것도 서민경제에 반한다. 종합부동산세가 늘어나는 비서민(非庶民)은 22만 명으로, 전체 주택 보유자(1331만 명)의 1.6%에 불과하다. 100만 원 이상 늘어나는 사람도 2만5504명뿐이다. ‘폭탄’이라는 낱말을 붙여 많은 서민이 치명적 타격을 입는 세금을 내야하는 것처럼 호도한다. 국회 공직자 재산등록 현황에 따르면 집값이 수억 원씩 올라간 서울 강남 3구에 집을 가진 국회의원이 74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55%인 41명이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지옥고’(지하방·옥탑방·고시원)의 처지에 비유되는 청년 주거 문제에도 국회의원들은 소극적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선거 운동 기간에는 청년 행복주택, 셰어하우스 임대주택, 연합기숙사 등을 건립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어느 것 하나 법안으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서민 코스프레하기에만 바쁜 국회의원들이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아이러니하다. 생활수준이 높은 유권자일수록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고 가난할수록 자유한국당을 더 지지한다. 외국에서도 저소득층은 보수 정치인을 더 지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 세력도 저소득층이 다수다.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은 세금 감면, 복지 확대 경계 같은 부유층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펴고, 진보 정당은 서민 지원, 복지 확대 등 저소득층에 초점을 맞춘다.


 미국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을 분석해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경제적 약자와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진보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투표 결과는 정반대였다. 보수 정치인들의 언행 불일치에 서민들이 낚이고 있다는 게 프랭크의 결론이지만, 이해하기 쉬운 현상은 아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스포츠계 명장(名將)들의 선수 시절 이력서를 보면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유난히 많다. 축구 역사상 최고 명장으로 꼽히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박지성을 키운 퍼거슨은 맨유에서 프리미어리그 정상만 13번, 영국 프로축구팀 사상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을 비롯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선수 퍼거슨은 감독 퍼거슨에 비해 보잘것없다. 스코틀랜드의 수준 낮은 퀸스파크팀에서 데뷔한 그는 글래스고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밀려났다. 끊임없는 공부와 특유의 지도력으로 세계적인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파리목숨 같다는 감독으로 맨유에서만 무려 27년 간 명성을 이어가다 72세에 용퇴했다. 한국을 사상 최초로 월드컵축구대회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도 스타선수 출신이 아니다.


 한국의 퍼거슨 같다고 ‘학범슨’이란 별명을 얻은 김학범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선수시절 프로 무대도 밟지 못한 무명이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을 이기고 축구 우승을 일궈내자 비로소 인정받은 철저한 비주류였다. 김학범은 “태극 마크조차 달아보지 못한 사람이 대표팀 감독이냐”는 비아냥을 들어야했다.

                                                                       

  그의 선수 경력을 보면 선입견을 가질만도 하다. 명지대 졸업 후 국민은행 팀에서 선수생활을 한 게 전부다. 서른두 살에 은퇴한 뒤 은행원으로 일하다 축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듬해 지도자로 변신했다. 43세 때 성남 일화 감독을 맡아 팀을 K리그 정상에 올렸다. 그의 힘은 부단한 공부에서 나왔다. 그는 틈만 나면 유럽과 남미로 날아가 선진축구를 공부했다.


 U-20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사상 처음 준우승이라는 전과를 올린 정정용 감독은 감학범 못지않다. 이번 대회가 있기 전까지 웬만한 축구팬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이번 대회를 통해 ‘제갈용’(삼국지 제갈량과 정정용의 합성어)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무명의 우려를 떨쳐내고 누구도 이루지 못한 큰일을 해냈다. 경일대를 졸업하고 실업축구 이랜드 푸마에 창단멤버로 참여했으나 부상으로 28살에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국가대표 경력이 없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최고 경력이 2부 리그였던 대구 FC 수석코치였다. 대학원에서 스포츠 생리학을 공부하고 지도자 수업을 통해 ‘선수 조련사’로 거듭 났다. 학구파 ‘제갈용’의 마법 노트가 한국 축구 역사를 바꿨다고 할 만큼 치밀한 지략가가 됐다. 경기마다 상대에 맞춰 변화하는 용병술과 특정 선수에 의존하지 않는 작전으로 ‘팔색조 전술’을 펼쳤다. 무엇보다 시대 흐름에 맞는 따뜻한 지도방식과 소통의 승리였다.

                                                                  


 정정용 감독을 비롯한 무명 선수의 명장 변신이 던지는 메시지는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조직에 맞춤한 리더십의 중요성이다. 주목받지 못한 선수생활을 거친 감독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춘 지도력을 발휘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다.


 반면에 스타 선수였던 감독은 타고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 평범한 선수들의 상황이나 심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진단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부의 요직 인사에서도 어렵잖게 눈에 띈다. 이름값과 이미지만 믿고 임명한 요인 가운데 무능의 상징으로 드러난 사례는 숱하다.

 

  명문 대학의 지명도 높은 교수라는 이유로 장관이 됐지만, 업무평가 최하위 수준임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참신함으로 포장된 장관이 얼굴 노릇만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대개 조직관리 능력과 경험이 전무함에도 각종 인연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언론 프로필에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로 등장하는 인물이 실망감만 잔뜩 남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출직에도 그 같은 무능 모델은 허다하다. 우리는 깜냥도 되지 않는 인물이 이미지 관리 하나로 지도자가 됐다가 나라까지 망친 사례를 경험했다. 어떤 지도자든 능한 스포츠 감독처럼 조직 관리의 연금술사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조직이 수긍하는 수준의 능력은 갖춰야 한다. 이미지와 현실의 이중성을 꿰뚫어본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 갈파한 바 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이미지 만들기와 상품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문재인 정부의 현 상황에는 ‘사면초가’라는 표현이 그리 무리하지 않다. 내우외환이 겹치는 정도를 넘어 더 높이 쌓여가는 형국이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던 수출의 둔화는 7년 만에 처음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낳았다. 위기에 처한 경제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기업들이 선택을 강요받아 설상가상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세계 교역랑의 감소 추세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마저 어른거린다.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0.4% 감소세로 돌아서 10년 만에 최저수준으로 내려앉았다는 사실이 위기의식을 부추긴다. 설비투자가 21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통계는 낙관적이지 않은 경제의 미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때문에 국내 시장은 최저임금인상, 근로시간 단축 같은 소득주소성장 정책의 수정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올려 소비를 촉진하고, 생산과 기업투자를 확대하는 선순환 구조로 성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 차질을 빚은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거의 유일하게 잘한다던 남북관계와 외교안보 분야도 허공 속의 메아리 신세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물꼬를 튼 한반도 평화는 1년 만에 교착상태에 빠졌다. 북한은 새로운 남북정상회담 제의에 미사일 발사로 응답했다. ‘역사적’이란 수식어가 붙었던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모레로 1주년을 맞지만 북한 비핵화 협상의 발걸음에는 도돌이표가 찍혔다. 주변 4대 강국으로부터 외교적 따돌림을 당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정부 관료들은 집권 4년차처럼 말을 듣지 않고 복지부동이 심해졌다고 정권의 핵심실세가 실토할 정도다.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로 개혁 대상인 검찰의 수장도 반기를 들었다.


 경기 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협조가 필수불가결하지만, 발목을 잡고 있는 보수 야당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대치 정국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실종되고 국회는 식물로 변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보수 야당의 경제위기론 공세는 한층 거세질 게 분명하다. 마치 국내외의 구조적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득주도성장 하나 때문에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경제위기가 닥친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문 대통령의 중간평가 성격으로 치러질 내년 총선이 점점 가까워 오면서 정부와 여당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국면은 녹록치 않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어가는 형세다.


 여기서 떠올려야할 게 ‘우생마사(牛生馬死)’의 교훈이다. 헤엄을 잘 치기로는 소가 말을 당할 수 없다. 널따란 호수나 저수지에 소와 말을 동시에 몰아넣으면 웬만큼 먼 거리에서도 모두 헤엄쳐 나온다. 이때 말의 헤엄 속도는 소의 두 배에 가깝다. 하지만 홍수가 져 물살이 센 강물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소는 살아서 나오지만, 말은 익사할 확률이 높다. 헤엄을 잘 치는 말은 자기 실력만 믿고 강한 물살을 이겨내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친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다 물살에 떠밀려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다 끝내 지쳐서 익사하고 만다. 자기 헤엄 실력을 아는 소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물살을 등지고 떠내려가면서 아주 조금씩 강가로 나간다. 그러다 강가의 얕은 곳에 발이 닿는 느낌이 들면 뭍으로 걸어 나온다. 물살에 편승하는 소는 살고 헤엄을 잘 치는 말은 고집 때문에 죽는다는 ‘우생마사’ 이야기는 이렇게 생겨났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진정한 실력은 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면초가인 문재인 정부는 위기 타개를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같은 유혹은 말이 물살을 이기려는 기질과 같다. 경제문제에서는 구조적 문제를 감안할 때 당분간 저성장은 불가피한 흐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부문도 거센 흐름을 넘는 게 살길이라고 여기다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보다 우선 생명을 건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해 국가균형발전을 명목으로 내건 예비타당성 면제 사업을 남발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낭비와 자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의 4대강 사업에 들인 돈보다 많다는 쓴소리를 외면해선 안 된다. 수십조 원의 예산은 4차 산업혁명 분야에 투자해도 부족할지 모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최선진국으로 손꼽히는 노르웨이와 싱가포르의 공통점은 독립할 때 국토 대부분이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만 해도 북유럽에서 가장 살기 힘든 나라였다. 노르웨이 국가(國歌)에도 이를 상징하는 가사가 담겼다. ‘그래,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 땅을. 바위가 많고 파도 속에 깎여 나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집이 되는 이곳을~’. 전 국토의 5%만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이어서 1905년 독립 직후엔 임업과 어업이 중심이었다.

 

  지금이야 정보통신기술(IT), 종이, 가구, 실리콘 합금, 기술제품들이 주요 산업인데다 산유국을 자랑하게 됐지만, 지도자와 온 국민의 각고면려(刻苦勉勵)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마침내 여러 면에서 스웨덴을 역전하기에 이르렀다.


 싱가포르는 노르웨이보다 훨씬 열악했다. 싱가포르가 종주국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받은 땅은 마실 물조차 부족한 열대우림의 늪지대 섬에 불과했다. 그들은 좁고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인종적 차이를 극복하고 각별한 정체성과 가치관을 더해 금융과 국제 교통의 허브 국가로 우뚝 섰다. 이제 말레이시아는 물론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보다 더 잘살게 됐다.

                                                                   


 두 나라는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나와 세계’라는 책에서 밝힌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기준에도 대부분 적용된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기준은 네 가지다. 첫째, 열대 지방은 못 살고 온대지방은 잘 산다. 둘째,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가 잘 산다. 셋째, 좋은 제도가 있는 나라가 잘 산다. 마지막은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가 잘산다. 열대 지방인 싱가포르와 한대 지방인 노르웨이는 첫째 기준에서만 사실상 예외 국가였다.


  반면에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풍요로운 석유 자원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외려 ‘자원의 저주’가 된 대표적인 국가다. ‘자원의 저주’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적은 국가보다 경제성장, 민주주의 같은 사회발전 수준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빗대 랭커스터대 리처드 오티 교수가 처음 붙인 용어다. 지도자와 사회지도층이 정치·경제적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풍부한 자원을 산업과 인적 자원 등에 효율적으로 투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인 베네수엘라는 망해버린 경제 때문에 ‘한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기이한 사태를 맞았을 정도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급진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이어받은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과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어서다.

                                                                          


 세계 10위 석유매장량 국가 나이지리아도 경제 난국에다 치안마저 불안해 무장괴한들이 고속도로에서 활개를 친다. 종교, 부족 갈등으로 산유지대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랜 내전 탓에 차라리 석유가 없었더라면 좋겠다는 한탄이 나온다고 한다.


 한국은 다이아몬드 교수가 잘 사는 나라의 기준으로 제시한 네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국가다. 무엇보다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라 가운데 인구 5000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정보통신기술은 최선진국 수준이나 다름없다. 한국경제의 70%를 차지하는 IT, 반도체, 자동차, 철강·화학 소재는 공급과잉을 걱정할 만큼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여기서 ‘풍요의 역설’이 출현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일자리는 사라진다. 기술 진보,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생활이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졌지만 일자리는 빠르게 줄어든다. 10~20년 내에 AI나 로봇으로 대체돼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직업이 순위별로 나온 연구결과도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청년 실업의 냉혹한 현실이 담긴 정규직 게임이 유행하는 걸 보면 안쓰럽게 느껴진다. ‘내 꿈은 정규직’이라는 제목의 인기 게임이 그것이다. 이는 사회현상을 투사한 거울인 셈이다.


 ‘풍요의 역설’은 거부한다고 쉽게 제어되지 않는 것이어서 더 큰 문제다. 우리에게 복지국가 개념과 사고방식을 재고하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노르웨이 청소년들은 축복받은 경제적 풍요와 자연환경을 두고 숲과 순록 똥밖에 없는 심심한 나라라고 투덜거린다고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비둘기가 국민적 애물단지로 변한 일은 정부 정책의 낭만적 단견을 보여주는 상징의 하나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들뜬 정부는 평화와 희망의 의미를 가득 담아 외래종 비둘기를 전국으로 날려 보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때 각각 3000마리의 비둘기가 방사됐다. 당시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숫자를 생각해냈다는 얘기도 들린다. 비둘기를 날리는 행사는 1985년부터 2000년 사이 모두 90차례나 열렸다.


 그러자 비둘기의 개체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도심 속은 물론 제주도까지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는 급기야 2009년에는 ‘야생동물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유해야생동물로 낙인이 찍혔다. 이 같은 정책의 결과는 통합적 사고의 결여에서 비롯됐다.


 통합적 사고는 선택 사안에서 단조롭고 이분법적인 생각을 벗어나 복합적인 요소를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통합적 사고는 돌출적인 요인에 한층 폭넓은 관점을 지녀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상반되는 요소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이 요구된다. 조직의 리더는 단순한 가정에 집착하기 쉽다. 모범답안이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문재인정부의 다양한 정책 실패 사례도 통합적 사고 빈곤과 직결된다. 문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아 9일 KBS와 가진 ‘대통령에게 묻는다’ 대담 프로그램에서 최저임금 정책 실패를 고백한 것은 정부의 통합적 사고 부족 자인과 다름없다. 문 대통령은 최저임금 급격한 인상에 앞서 정부 차원에서 자영업자 대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함께 고려하지 못한 점이 송구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한국 자영업자가 전체 취업자의 2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네 번째로 많다는 사실을 정책입안 때 감안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최저임금의 다급한 인상이 최우선 과제인 일자리 창출에 상당한 타격을 주는 요인임을 계산에 넣지 않은 점도 정책 검토과정에서 통합적 사고를 하지 못한 후과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일자리가 감소한다는 내용은 대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과목인 경제학 원론에도 나온다. 뒤늦게 대통령까지 속도 조절 의지를 밝힌 것은 부작용의 심각성이 생각보다 큰 탓이다.

 

  최저임금을 2년 연속해서 급격하게 인상한 것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인 소득주도성장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하나였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시행에 앞서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임금 삭감, 업종 간 노동시간 균형 같은 문제의 보완책이 동반됐어야 한다. 버스업계의 전국적인 파업 예고도 이와 맞물려 있는 사안이다.

                                                                     


 탈원전 논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 역시 통합적 사고의 빈약과 연관된다. 탈원전 부작용이 잇따르자 여권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 여론에서도 밀린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원전의 유지·확대 찬성 비율이 61%인 반면 축소 의견은 27%에 그쳤다. 대통령의 선거공약과 친환경 에너지정책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탈원전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까닭은 급격한 정책전환이 부를 부작용 때문이다.

 

 원전 정책은 국민적 관심사인 미세먼지·기후변화 대책과도 상관관계가 많다.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대신 2017년 중단된 원전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해 미세먼지를 피하면서도 안정적 전력수급을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장을 공론에 붙여 최종 결정하는 아이디어도 고려해 봄직하다. 장기적인 탈원전 정책을 지키더라도 속도조절은 필요해 보인다. 민주당 정권이 연장되더라도 탈원전 정책이 뒤집힐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책 추진과정에서 국정의 모든 분야를 복합적으로 분석하고 통찰하는 기능이 떨어져 보인다. 통합적 사고에 바탕을 둔 정책은 취임 2주년을 맞은 문재인정부가 진지하게 복기해 봐야할 숙제다. 사회구조가 복잡다기할수록 통합적 사고능력은 필수다. 주식을 손해 보고 팔 수 있는 용기가 손해를 줄이듯 문제가 드러난 정책은 과감하게 손절매(損切賣)를 하는 결단이 국가와 정권의 장래를 위해서도 득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지혜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실패는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꼽힌다. 그의 성공은 번성기를 누렸던 외양만 보면 나무랄 데가 없다. 아이의 진짜 엄마 찾아주기 판결 일화에서 보듯이 그는 출중한 슬기로 나라의 기초 질서를 세웠다. 빼어난 경영 마인드로는 막대한 국부를 쌓았다. 전국을 요새화해 외침의 공포를 차단했다. 탁월한 외교적 수완과 리더십으로 국제 질서까지 다졌다. 이만하면 뭘 더 바랄 게 있을까 싶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권력과 웅장하고 화려한 왕궁은 실패의 지름길이었다. 위대한 치적이 외려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원흉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솔로몬의 실패 원인을 우상 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목하지만, 세속에서 보면 자기 문제에 대한 판단력 결핍이 첫 손가락에 든다. 과다한 부역과 조세 부담은 국가 분열로 가는 길을 닦았다. 그에겐 1000명에 달하는 이교도 첩과 후궁들로 북적였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캐나다 워털루대의 이고르 그로스먼 심리학 교수 연구팀은 자기 일과 남의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대학생 실험을 통해 관찰했다. 연구팀은 상당 기간 연인 관계인 학생 집단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에는 자기 애인이 몰래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알게 된 상황을 제시했다. 다른 그룹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이 친구를 속인 채 바람을 피워온 일을 인지한 상황을 과제로 주었다. 연구팀은 그 뒤 참가자들에게 똑같이 바람피운 파트너들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고, 지혜롭게 처리하는 지 살펴봤다.

                                                                          


 그 결과, 내 일이 아닌 친구의 일로 생각한 참가자들이 더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습해 나갔다. 자기 애인이 바람을 피운 상황에 있던 학생들은 전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다. 또 자기 애인이 다른 사람과 바람피운 상황이 제시된 학생들 가운데 일부에게 ‘나’ 대신 ‘그’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생각하도록 해 봤다. 이처럼 ‘거리 두기’를 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에 비해 더 지혜롭게 해결책을 찾았다. 슬기로운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제3자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험결과 밝혀졌다. 연구팀은 자기 일이 아닌 타인의 문제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현상을 ‘솔로몬의 역설’이라고 명명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은 서울대 교수 시절 족집게 예측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평이 났다. 2016년 총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공천 개입에 대해 ‘내가 김무성(당시 새누리당 대표)이라면 항의 시늉에 그치는 게 아니라, 대표 직인 들고 최소 1주일 사라진다.’라고 글을 올리자 실제 상황이 벌어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MB(이명박)를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글에서도 소름이 돋았다는 평이 뒤따랐다. 2010년 출판한 ‘진보집권플랜’은 진보진영 필독 지혜가 담겼다는 평판을 얻었다. 문재인 후보를 비롯한 ‘정치권의 멘토’로 불리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조 수석이 청와대에 입성하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에 맞닥뜨리자 ‘솔로몬의 역설’을 떠올리게 할 때가 적지 않다. 야당의 공격 표적임을 감안하더라도 재야 시절의 판단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부실한 인사검증, 조직관리 실패, SNS를 통한 과도한 국정 참견, 개혁 과제의 지지부진이 비판의 대상이다.

                                                                        


 부실 인사검증 논란은 문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감을 안겨준다. 최근 개각과 헌법재판관 임명 때 비판의 정점에 이르렀다. 두 명의 장관 후보자가 낙마하고, 이미선 헌법재판관은 현 정부 들어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한 15번째 고위공직자가 됐다.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청문회 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한 고위직은 9명이었다. ‘진보정권이 보수정권보다 더 나은 게 뭐냐’는 비판이 나오는 데는 고위공직자 도덕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사법 개혁,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같은 개혁안도 국회에서 막혀 버리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민정수석실 내부 기강 문제는 역대 정권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이다.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의 폭로사태 등을 처리하는 정무 감각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드러났다. 대통령의 의중보다 ‘국민의 눈높이’이라는 제3자의 관점에서 국정을 보면 ‘솔로몬의 역설’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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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외교 협상에서도 사업가의 주특기를 영리하게 써 먹는다. 그 가운데 ‘정박효과(anchoring effect)’는 값을 흥정할 때 무시로 등장한다.


 부동산 재벌이기도 한 트럼프는 돈 많이 버는 비결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건축 의뢰를 받으면 언제나 가격에 5000만 달러나 6000만 달러 정도를 더 붙입니다. 고객이 7500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나는 1억2500만 달러 정도 들 것이라고 하곤 실제로는 1억 달러에 짓습니다. 치사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박효과’는 닻을 내린 배가 많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맨 처음 제시된 숫자가 기준점 역할을 해 이후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있었던 실험은 정박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학생 40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똑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임무를 줬다. 조건은 같았다. 첫 제안을 어떻게 하느냐는 게 유일하게 다르다. A 그룹에겐 ‘첫 제안을 700달러 이상으로 하라’고 주문했다. B 그룹에게는 ‘700달러 이하로 첫 제안을 하라’고 했다. 그 결과, A 그룹 학생들은 평균 625달러에 물건을 팔았다. B 그룹 학생들의 평균 판매 가격은 425달러에 불과했다. 첫 제안이 달랐을 뿐인데 200달러의 차이가 났다.

                                                  

                      
 이렇듯 사람들은 처음 제시된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녔다. 이는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과 동료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가 공동 실험을 통해 증명한 효과다.


 트럼프는 다른 나라와의 주요 협상에서 정박효과를 동원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계약파기 의중을 내비친 뒤 선심 쓰듯 양보하는 패턴이 이어진다. 트럼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때 한국 측을 정박효과로 윽박질렀음이 드러났다. 트럼프는 미국이 적자를 너무 많이 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한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넘어 파기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백악관 참모들에게 협상을 깨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최종 협상 결과, 미국의 최대 관심사였던 자동차 분야에서 일정 부분 권리를 한국이 양보하는 선에서 타결됐다. 미국이 한국에 무기를 대량으로 판매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간 뒤였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앞두고서도 주한미군 철수론을 흘리며 위협했다. 한국은 최종적으로 미국이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던 1조1300억 원(10억 달러)보다 약간 낮은 수준인 1조300억 원을 ‘유효기간 1년’과 함께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 멕시코에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철회를 위협하면서 자동차 부품 등의 원산지 기준을 강화하는 협정을 이끌어냈다. 트럼프 정부는 무역 부문에서 이를 대표적인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을 정도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도 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을 비롯한 전통적인 동맹국들에게도 미군 주둔비용 인상을 압박했다.


 트럼프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서도 정박효과를 기대하는 듯하다. 최근 로이터통신의 보도 내용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완전 항복에 가까운 요구사항 문서를 제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핵 시설과 생화학 무기, 탄도미사일 등과 관련 시설의 완전한 해체,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 미국 반출, 핵 프로그램에 대한 포괄적 신고, 미국과 국제 사찰단에 완전한 접근 허용, 관련 활동과 새 시설물 건축 중지, 모든 핵 프로그램 과학자·기술자들의 상업적 활동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트럼프는 어느 수준이면 타협할지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을 게다.


 트럼프와 같은 전략을 먼저 구사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힘의 우위라는 조건이 맞을 때 가능하다. 값을 무조건 세게 부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만큼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논거가 필요하다. 워싱턴을 방문해 오는 11일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비핵화 조율에 나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최저 양보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북한과의 중재에 나서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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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이탈리아 혁명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투쟁 정신인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이 지금이야말로 절실해 보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여전히 접점이 잘 보이지 않는 북한 비핵화 협상에 대한 절망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맞서 감옥에서 싸운 그람시는 동생 카를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란다. 어떤 상황이건 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내가 비축해놓은 의지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단다. 나는 절대로 환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없어. 나는 언제나 끝없는 인내심으로 무장되어 있단다. ”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그람시 석방운동에 앞장선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롤랑은 ‘안토니오 그람시: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내면서 이 말을 썼다. 그람시가 애용하게 된 이 말은 세월이 흘러 쿠바 혁명의 아이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도 즐겨 쓰고,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과 투쟁하는 조국을 향해 주문(呪文)처럼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으로부터 간단없이 들려오는 소식은 대부분 희망적이지 않거나 혼란스럽다. 먼저 판을 깨면 위험부담이 커 북한과 미국 모두 파국을 원하지는 않는 듯하나, 북미 양측 고위 관계자들 언설은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각오가 다부지다.

 

 지난 주말 북측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에서 느닷없이 일방적으로 철수해 조짐이 좋지 않다. 이보다 하루 앞서 미국 재무부가 유엔의 대북 제재를 피해 북한을 도운 중국 해운회사 두 곳에 대한 제재를 전격 단행해 긴장감이 높아졌다. 미국 정부가 북한과 관련해 독자 제재를 한 것은 올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 추가제재에 대한 철회를 전격 지시해 악화를 막은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징조의 하나다.

 

 미국과 한국의 분위기도 비관론이 더 짙다. 한국 고위인사가 워싱턴에 들러 체감한 미국 내 대북협상 분위기는 한결같이 회의적이라고 한다. 비관주의자·냉소주의자·회의주의자를 합치면 80%에 이르고, 낙관과 모르겠다는 각각 10%에 불과하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 국민의 64%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여론 조사결과도 밝은 소식이 아니다.

                                                                      

 북한이 북미협상에 대한 불만을 남북관계와 연계하는 모습을 또 다시 보여준 것도 실망스럽다. 과거와 조금은 달라진 언행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마당에 구습을 재현하면 앞으로 어떤 합의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 미국 국내정치 상황이 비핵화 협상의 주요 변수 가운데 하나라는 게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이 변수에 관해 북한이나 한국에서 유념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지성의 비관주의’를 간과한 결과는 참담하다.

 

 한국 정부도 희망사항에 치우쳐 지나치게 앞서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추상적 지혜이지만, 결국 냉철한 분석과 차분한 행동만이 해답이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는 미묘한 변수에도 돌발적인 장애물이 나타나곤 했던 역사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이제 북미 양측이 모두 솔직하게 카드를 내보인 단계에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미 간의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복잡한 셈법이 얽혀 있어 일괄타결이 말처럼 쉽지 않다. 미국이 비핵화 해법으로 ‘일괄타결’을 거듭 강조하면서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는 북한과 접점 찾기가 매우 까다로워서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처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책도 내놓지 않고 북한의 비핵화가 불가능하다고 비판만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무작정 제재만이 능사라며 손놓고 있는 건 ‘전략적 인내’로 포장했던 과거 미국 행정부와 다를 바 없다.

 

 비관적인 상황을 지성을 통해 치밀하게 분석하되, 낙관적인 의지를 끝까지 꺾어서는 안된다. 한반도보다 더 절망적일 수 있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람시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생전에 역설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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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영국 출신 유럽의회 의원이 2010년 3월 유럽의회 본회의장에서 유럽연합(EU)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막말을 퍼부었다가 3000유로(약40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벌금 액수는 의정활동비 열흘치였다. 의회 정치의 선진국인 영국의 국회의원 막말금지 규정은 오래 전부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나지르 아프매드 노동당 소속 상원의원은 2012년 파키스탄 테러범에 대해 1000만달러 현상금을 내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오바마에게 1000만 파운드 현상금을 걸겠다”고 말했다가 정직 처분을 받았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가 자신을 공격하는 야당 의원에게 영국 정치사상 가장 모욕적인 발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수위로 반격해 화제가 된 걸 한국인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다. “존경하는 의원님께서 내가 낸 세금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한국 정치인 기준으로 판단하면 너무나 평범한 공격임에도 영국에서는 대표적인 ‘정치모욕’ 사례로 회자된다.

                                                                                 

     
 최근엔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문제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이던 도중 ‘멍청한 여자’라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 입모양만으로 ‘막말 논란’이 일었다. 영국 의회는 ‘거짓말쟁이’ ‘위선자’ ‘비겁자’ ‘반역자’ ‘악한’ ‘깡패’ ‘한 입으로 두말하기’와 같은 인격모독성 표현을 금지했다. 돼지, 개, 당나귀 등 짐승의 명칭은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발언 수위에 따라 주의, 발언 중지, 퇴장 명령, 직무 정지까지 가능하다.


 프랑스와 독일도 흡사하다. 프랑스는 막말하는 국회의원에게 발언 금지, 회의록에 기록되는 주의, 자격정지를 포함한 견책이 뒤따른다. 독일에서도 퇴장명령, 30일간 출석 정지 같은 엄벌을 각오해야 한다.


 유럽에 비하면 덜 엄격한 미국도 의회의원이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욕설을 하면 곧바로 사과하게 하고 주의, 견책을 준다. “대통령은 위선적이다”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 행사는 비겁하다”는 정도의 발언도 미국 의회의 금기어다. 조 윌슨 공화당 하원의원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당신 거짓말이야”하고 고함을 질렀다가 곧바로 공개 사과한 적이 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할 때였다. 비난이 쏟아지자 윌슨 의원은 자신의 논평이 부적절했고 대통령에게 예의를 잃었던 점을 겸허하게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 하원은 ‘부적절한 언어사용 행위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조 윌슨 의원 사건을 계기로 미 의회 안에서 국가원수 모독 발언 금지 가이드라인이 추가됐다. 이런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것은 대통령에 대한 예의 못지않게 문제발언으로 말미암아 여야가 충돌하거나 대치해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연설 막말 논란 때문에 올 처음으로 어렵사리 열린 국회가 또다시 공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외신보도를 인용했다 하더라도 국회의원 품위를 넘어선 정치언어다. 더불어민주당이 폐지된 국가원수모독죄를 적용해 한국당을 공격하는 것도 과잉대응이긴 하지만, 이젠 여야 정권교체 때마다 대통령에 대한 막말 공격으로 국회가 공전하는 일이 벌어지는 악순환을 끊을 때가 됐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생경한 단어인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로 표현해 국회를 마비시키고 스스로 원내대변인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악몽이 여야만 바뀌어 재현되지 않아야 한다. 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죽인 노가리” “등신외교” 등으로 희화화한 일,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겨냥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 꿰매는 게 필요하다”고 한 발언같은 막말 전력의 역사가 거울이다.


 막말 발언이 나올 때마다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해 징계를 논의하나 지금의 징계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다. 민간 전문가로 윤리특위를 구성해 막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대폭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활동 실적이 아닌 막말로 유권자에게 환심을 사는 구태는 처분할 때가 지났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강국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더구나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나라로서는 대한민국이 독보적이고 경이적이라고 자평한다. 국제사회도 인정한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면서 인구 5000만 명 이상인 나라 대열에 일곱 번째로 진입했다. 2018년 총수출액도 6000억 달러로 세계 5위다. 국내총생산(GDP)은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167나라 가운데 21위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발표한 ‘2018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미국(25위), 일본(22위)보다 앞선다.


 부끄럽지 않을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짙어졌다. 30년 넘게 곡절을 겪으면서 진전시켜온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극우 강경파의 득세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으려던 자유한국당이 새 지도부 선출 전당대회 과정에서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는 제1 보수야당이 외려 친박 수렁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다.

                                                                                     


 가장 유력한 당 대표 후보부터 자기모순에 휘말렸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박근혜 탄핵을 사실상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언행이다. 이는 명백한 자기 부정이기도 하다. 그는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자격으로 발표한 대국민담화에서 “헌재의 결정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내려진 것이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국가이다. 우리 모두가 헌재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새삼스레 제기한 탄핵의 절차적 하자도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라는 헌법 절차에 따라 이뤄진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극우 세력인 ‘태극기부대’를 껴안기 위해 민주주의 부정을 서슴지 않는 행위다. 최고지도자의 국정농단을 처단하고 민주주의를 되살린 주권자에 대한 모독이다. 최순실 태블릿PC 조작 가능성에 동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법무부 장관을 지내고, ‘법치주의’를 입에 달고 살았던 그가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태를 보인 것도 민주주의 손괴다. 박근혜 탄핵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


 5·18민주화운동 모독 발언은 한층 심각한 민주주의 위협 행위다. 5·18민주화운동은 법적으로는 물론 역사적, 정치적 평가까지 결론이 난 사안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에 따라 피해자 보상이 시작되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에 가해자를 단죄했다. 극우 논객의 끈질긴 ‘광주 북한군 투입’ 주장도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짙다. 24일 전국 시도지사들이 발표한 성명이 밝혔듯이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가장 빛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한국당 청년최고위원에 출마한 30대 청년의 극우 언행이다. 새싹까지 타락해서다. 1987년 민주화 이래 지금까지 어떤 보수정당에서도 이런 극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적 이익에 눈이 멀어 반민주주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선진국들이 모인 유럽에서 겪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도 극우 포퓰리즘의 기승 탓이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명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마음의 습관’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는다고 경고했다. 품격과 절제가 미덕인 보수 정당이 퇴행 길로 접어든 것은 허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한국당 내부 인사의 한숨 섞인 토로처럼 끊임없는 보수 혁신과 개혁을 통한 외연을 확대해도 모자랄 판에 퇴행적 급진 우경화 현상은 보수 결집은커녕 보수 환멸을 조장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다.


 민주주의 기반이 튼튼한 사회에서는 극우세력이 일부에 지나지 않으면 그리 큰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렇지만 제1 보수야당이 지난날 찾아볼 수 없었던 극우로 기우는 것은 지금까지 이룩한 민주주의를 위협할만하다. 합리적 보수가 극우와 결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보수주의는 중도·실용·현실주의에 입각했을 땐 융성했지만 보복주의에 집착함으로써 스스로 변방으로 밀려나고 만다’고 갈파한 뉴욕 타임스 서평편집자 샘 태넌하우스의 경구를 흘려들어선 안 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