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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빛의 정치, 물감의 정치

  세상의 모든 빛을 섞으면 흰색이 나온다고 한다. 흰빛은 세상의 모든 색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오랜 옛날부터 유난스레 사랑하는 게 흰색이다. 빛은 서로 섞일수록 밝아지고, 물감색은 섞일수록 어두워진다. 빛은 섞일수록 밝아져 가산(덧셈) 혼합이라고 부르고, 물감색은 섞일수록 탁해진다고 해서 감산(뺄셈) 혼합이라고 일컫는다.

 빛처럼 더할수록 좋은 것으로는 사랑 이타심 평화 인류애가 꼽힌다. 물감색의 성질을 지닌 것으로는 권력 돈 전쟁 이기심 따위가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도 빛의 성질을 띤다.

 윤석열정권 출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을 어렵잖게 체감할 수 있다. 객관적 국제지표까지 지난주 발표됐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해마다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2022’에서 한국은 전세계 167개국 가운데 전년보다 8계단이나 떨어진 24위에 그쳤다. 그동안 한국보다 아래였던 일본이 16위로 올라섰으며 대만은 세계 9위, 아시아 1위가 됐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아시아 민주주의 선도국이라는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 기관이 꼽은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 이유는 뼈아프게 다가온다. ‘수년간의 대립적인 정당 정치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타격을 줬다. 정치에 대한 이분법적 해석이 합의와 타협의 공간을 위축시키고 정책 입안을 마비시켰다. 정치인들은 합의를 모색하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다. 이러한 형태의 대결적 정치는 한국의 정치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대중은 갈수록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공직자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말 야당 정치인들을 ‘종북주사파’라고 사실상 규정하고 "이들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원론적인 언급이라고 측근들이 주워담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취임 이후 제1야당 대표와 한번도 만나지 않고 야당과 협치하지 않는 명분의 하나로 보수진영의 전형적인 색깔론인 ’종북주사파‘를 들이댄 것이나 다름없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민주인사 탄압 명분이 ‘종북주사파’였다. 그렇다면 ‘종북주사파 정권의 수괴’가 박근혜정권에서 탄압받던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발탁해 대통령까지 만든 셈이 아닌가. 이런 자가당착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 상대 당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새해 연하장에 ‘칠곡할매글꼴’을 쓰고 그 할머니들을 대통령실에 초청하자, 보수진영에서는 문재인과 민주당의 ‘간첩 신영복체’에 맞서는 위업이라고 치켜세웠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고 신영복 교수의 독보적이고 예술성 있는 글씨체까지 할매글꼴과 비교해 폄훼하나. 그게 자신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걸맞은 일인가.

 자유민주주의를 지고지선의 가치라고 받드는 보수의 모순된 사고와 행동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업적 찬양과 박근혜 부활에 안간힘을 쏟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윤 대통령은 정치참여 선언 이후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박정희 생가를 세번이나 찾았다. 새해 초 방문은 더 각별했다. 박정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탄압한 장본인이 아닌가.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것은 산업화와 더불어 피의 대가로 이뤄낸 민주화 덕분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피눈물과 목숨까지 바쳐 이뤄낸 숭고한 민주화의 가치를 애써 외면하는 보수진영과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윤 대통령은 ‘자유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선출된 권력과 비선출 권력의 남용이나 선택적 행사 같은 비민주성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후진 기어를 넣는 모습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집권당 관리에서 두드러진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노골적으로 제거하는 행태가 그것이다. 자기를 당선시키는 데 일정 부분 이바지한 젊은 당 대표를 교묘하게 지워버렸다. 민주적이어야 할 새로운 당 대표 선출 과정에 유력주자를 표 나게 찍어내는 모습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 가운데 최악으로 꼽힌다.
                                                                                         

 축구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골대를 옮겨 이기려는 꼼수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민심을 반영하기 위해 18년 동안 시행해 왔던 여론조사 30% 반영 당헌·당규를 100% 당원 투표로 바꾸는 정당 민주주의 퇴보를 선택했다. 당명처럼 ‘국민의힘’이 아니라 ‘윤심의힘’ 마음대로 하는 행태는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는 공존과 타협, 견제와 균형이 없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물감 색깔 정치는 전형적인 뺄셈정치다. 덧셈 혼합은 빛으로만 가능하다. 덧셈정치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