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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선택적 정직’이 낳는 지도자의 위기

  네덜란드 국민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은 남달리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캔버스에 그린 것만 50~60점, 종이 판화 데생까지 더하면 100여점에 달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숫자나 작품성보다 정직성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자화상의 교과서’로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실 그의 외모는 잘생긴 게 아니다.

 

 렘브란트가 20대 때 그린 ‘황금 고리줄을 두른 자화상’에는 젊음의 패기와 자신감이 넘쳐난다. 이와 달리 말년의 자화상들은 초라한 노인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잃고 희망마저 포기한 듯한 얼굴은 안쓰럽다. 한 미술평론가는 렘브란트가 쉰네 살 때 그린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을 보고 ‘무자비할 정도로 너무나 무정한 기록’이라고 평했다. ‘예술은 거짓이다’라고 했던 철학자 플라톤을 빈정댄,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은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다"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정치인과 거짓말은 곧잘 어깨동무하고 다닌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잘도 하는 정치인을 일쑤 보면서 유권자들은 때론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정치인에게 치명적일 때가 적지 않다. 정치는 국민의 위임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선택적 정직’과 ‘선택적 분노’에 능한 부류로 꼽힌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정직하고, 불리할 때는 부정직한 것을 ‘선택적 정직’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도 진실을 말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정치적 정직성이다. ‘선택적 분노’보다 ‘선택적 정직’의 폐해가 더 크다. 인상 깊고, 감동을 줄 정도로 정직해 보이는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두달 가까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선택적 정직’ 의혹 탓이다. 윤 대통령은 사과없이 참모들의 불투명한 해명만으로 특정 언론사에 강공을 펼치다가 이를 ‘언론탄압’ 논란으로 비화시켰다. 정직하게 털어놓고 사과했더라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윤 대통령이 한·아세안 정상회의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면서 MBC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한 것은 헌법에 명시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이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없던 언론탄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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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실은 MBC가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을 맨 먼저 보도하고 ‘PD수첩’에서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의혹 관련 대역 출연 장면을 ‘대역’ 고지없이 내보낸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 XX들이"로 불거진 비속어 논란은 MBC뿐 아니라 148개 국내 언론사가 똑같이 보도했던 사안이다. 김 여사의 논문 표절의혹을 다룬 프로그램은 외교 문제와 무관하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취재하는 기자단의 전용기 탑승은 대통령이 기자들의 ‘취재편의’를 위해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순방 취재에 참여하는 언론사가 비용을 스스로 부담한다. 나토 방문 때는 민간인 신분인 이원모 인사비서관 배우자를 전용기에 태우더니 이번에는 특정 언론사 기자를 태우지 않아 윤 대통령이 전용기를 사유재산쯤으로 여기는 게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렘브란트 57세 자화상>

 

 대통령의 오판은 그가 입에 달고 다니는 ‘자유’에도 상당한 흠집을 냈다.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한 8개 언론 현업단체와 서울외신기자클럽 이사회, 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 등 거의 모든 언론단체가 철회를 요구하는 사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MBC 전용기 탑승거부 사건은 윤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낙인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정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평생 검사로 살아온 그는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법적으로 접근하면서 ‘선택적 정직’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듯하다.


 제1야당을 이끄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치적 위기에 몰린 것도 ‘선택적 정직’ 의혹이 작용했다. 이 대표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본인이 성남시장이던 때 고 김문기 전 성남도개공 개발사업1처장을 몰랐다고 여러차례 언급했다. 검찰은 이 대표의 이런 말이 거짓이라고 공소장에서 밝혔다.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정직은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생색을 드러낼 수 있는 약간의 사실이나 편집된 사실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이 믿는 것은 유권자의 건망증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짓말 때문이었다. 닉슨은 줄곧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발뺌하고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만 해도 당시 공화당 관련자들이 워터게이트건물의 민주당 선거본부에 침입해 자료를 훔쳐본 게 고작이다. ‘선택적 정직’의 치명적 위험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역사적인 사례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