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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체리피킹 정치의 유혹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우뚝 선 데에는 통계의 비결이 숨어있다. 당시만 해도 통계·조사기법이 발달하지 않아 대부분 정책이 주먹구구식이었다.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쏟아지는 실업자가 100만명인지, 1000만명인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실업자수는 심지어 2500만명까지 추정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 연방의회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조사를 정부에 권고했다. 미국 인구가 1억3000만명이나 돼 전수조사를 하더라도 빅데이터를 집계하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통계학자들이 24.9%라는 실업률을 근접하게 알아낸 방법은 표본조사였다. 통계학자들은 임의로 뽑은 전체인구의 0.5%를 대상으로 조사하고 분석했다. 세계 역사에 남은 뉴딜정책의 성공은 이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그에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최대 위기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석탄 탄광 노동자 파업 사태를 객관적인 통계와 정보를 바탕삼아 지혜롭게 극복했다. 정부가 전통적으로 파업에 개입하지 않은 시대였지만, 워낙 심각한 상황이라 루스벨트는 파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동청장이자 통계학자인 캐럴 라이트에게 문제의 모든 실상을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루스벨트는 노사 양측을 백악관으로 불러 중립적으로 중재하면서 군을 탄광에 투입할 수 있다는 최후통첩을 날려 타협을 끌어냈다. (도리스 컨스 굿윈,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정확히 120년 전의 일임에도 현명한 방법으로 난제를 풀어낸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지도자와 정권은 통계를 왜곡하거나 유리하게 해석해 여론을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체리피킹’(cherry picking)으로 불리는 눈속임 정치가 그것이다. 체리피킹은 자기에게 불리한 사례를 숨기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는 태도를 일컫는다. 체리를 수확하면서 잘 익고 싱싱한 것만 따서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윤석열정부에서도 체리피킹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주무부처가 문재인정부의 똑같은 통계자료로 180도 다른 논리를 편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부동산 부자들의 종합부동산세(종부세)를 줄여주려는 개정안을 ‘종부세 정상화’라고 주장한다. 기재부는 과세표준에서 빼주는 기본공제액을 11억원에서 12억원(1주택자 기준)으로 올리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1년 전만 해도 강화된 종부세를 지키느라 갖은 애를 썼다. 지금은 서울에 집중된 종부세가 전국화되고 있어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지만 1년 전엔 전국화 지적을 반박했다.


 기재부는 1가구 1주택자이면서 종부세를 내야 하는 납세자 23만여명 가운데 연 소득 5000만원 이하인 사람이 52.2%라며 종부세를 완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렇지만 보유세인 종부세의 적정성을 따지면서 소득통계를 들이댄 것은 억지라는 비판을 받는다. 재산이 명목소득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화물연대 총파업에 따른 산업계 피해가 3조5000억원대라는 주장도 체리피킹 정치의 하나다. 법제처가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신설 논리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논리가 충돌할 수 있는 핵심 내용을 삭제한 것도 전형적인 체리피킹 사례에 속한다. 국가경찰위원회가 자문기구에 불과하다는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견해를 엄호하기 위해 법제처가 의도적으로 국회 제출 자료를 왜곡했다는 의혹을 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국민의힘은 야당 시절 문재인정부의 ‘통계 체리피킹’을 맹렬하게 비판한 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펴면서 소득분배가 되레 악화한 것으로 나오자 통계청장을 갑자기 바꾸기까지 했다. 최저임금 과속인상으로 저소득층 소득이 외려 줄었다는 통계가 나오자 문 대통령은 최저임금정책의 긍정효과가 90% 늘어났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전·월세 물량이 급감했음에도 전년보다 늘었다고 호도하자 국민의힘은 국가승인통계가 아닌 자료를 바탕으로 정부 입맛에 맞는 통계만 인용한다고 질책한 적이 있다.


 정치의 체리피킹 행태는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양극화가 체리피킹을 낳는 악순환을 조장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이 그랬다. 정부 정책과 노선에 반대되는 통계와 정보는 채택되지 않는다.


 ‘좋은 정치를 하려면 좋은 통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통계’(statistics)의 어원이 이탈리아어 ‘정치 지도자’(statista)에서 나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싶었고, 어떤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 왜곡되지 않은 통계와 정보를 원했다. 왜곡 통계를 만들고, 제멋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 않다. 통계조작의 유혹에 빠진 정권의 끝은 늘 아름답지 않았다고 역사가 증언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