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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허슬 컬쳐, 조용한 사직, 주52시간제 개편

 김민재 한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민첩한 허슬 플레이(hustle play)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 ‘괴물 수비수’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재빠른 뒷공간 커버와 허슬 플레이 덕분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김하성 선수도 경기 흐름을 바꾸는 허슬 플레이로 감독에게 "다른 선수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선수"라는 극찬을 받는다.


 스포츠의 허슬 플레이가 일터에서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허슬 컬쳐’로 변주된다. 개인 생활보다 회사 업무를 중시하고 열심히 일하는 생활양식과 이를 높이 사는 문화다. 이는 한국에서도 50대 이후 세대의 성공한 직장인들에게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일벌레’나 ‘워커홀릭’(일중독)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전형이 그것이다. 허슬 컬쳐는 원래 현재 사는 시간을 가장 의미있게 보내라는 뜻이었으나 점차 끊임없이 일만 해야 한다는 워커홀릭과 동의어로 쓰이게 됐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게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다. 최근 들어서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라는 신조어가 미국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회사를 진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월급 만큼만 일한다는 의미다. 진원은 자이드 펠린이라는 뉴욕 IT 엔지니어다. 지난 7월 공개된 펠린의 17초짜리 틱톡 영상에는 ‘일이 곧 삶은 아니고, 당신의 가치가 업무 성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워라밸’과 닮았지만, 그보다 좀 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방식이다. ‘조용한 사직’은 ‘월급 루팡’과도 다르다. 월급 루팡은 받는 월급만큼도 일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조용한 사직’ 상태의 노동자가 50%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왔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허슬 컬쳐에 따라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1/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코로나19 이후 광범위하게 퍼진 재택근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도 관찰된다. MZ세대(20~39세)는 과거 직장인들처럼 회사에 목숨을 걸고 일로 내 가치를 평가받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퇴근 이후 삶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소확행’(小確幸,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을 선호한다.

                                                                                         

 최근 공개된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시대흐름을 되돌리고 노동자들의 행복추구권을 제한한다는 우려가 크다. 정부 정책자문기구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발표한 개편안은 현재 주 단위인 연장근로시간 관리를 월 단위, 월·분기·반기 단위 등으로 다양화하는 게 뼈대다. 현재 주 12시간으로 규정된 연장근로시간 한도가 월 단위로만 바뀌어도 주당 근로시간이 최대 69시간으로 늘어난다. 분기·반기 단위로 연장하면 주당 노동시간은 더 늘어날 여지가 많다.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기본 근로시간 40시간을 넘는 연장 근로시간을 12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개편안은 경직된 근로시간 제도가 합리적인 인력 운용을 어렵게 해 기업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국가 경쟁력에 악영향을 준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주 52시간제 개편을 공약한 터라 개편안은 거의 그대로 최종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업무 다양성, 노동자들의 선호를 반영해 노사합의를 바탕으로 현행 제도의 경직성을 완화하겠다는 취지이지만 노동자의 휴식권과 건강권이 위협받을 게 분명하다. 노사가 사전에 합의한 노동시간보다 오래 일하면 연장 노동시간을 적립해 휴일·휴가 등으로 보상하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의 효과도 의심스럽다. 업무량 과다·대체인력 부족으로 법으로 보장된 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업장이 태반인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약한 중소기업에 장시간 노동의 물꼬를 터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윤석열정부는 올해 말 폐지될 예정이었던 30인 미만 사업장의 주 8시간 추가 연장 근로를 2년 더 연장하겠다고 밝혀 염려를 키우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은 초과근무시간이 많은 직장을 가장 싫어한다. 취업 플랫폼 ‘사람인’이 MZ세대 남녀 2708명을 대상으로 ‘가장 입사하기 싫은 기업 유형’을 조사한 결과, ‘초과 근무 많은 기업’이 41.5%로 1위다. 70%는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답했다.


 연간 근로시간은 이미 2021년 기준 1915시간이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16시간보다 200시간 가량 많다. 이런 직장인들에게 자유롭게 연장근로를 할 수 있는 선택지를 주면서 선택권을 확대했다고 보긴 어렵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근무조건의 격차가 갈수록 커져 노동시장이 둘로 나뉘는 이중구조도 심화하고 있다.


 마크 월시 미국 노동부장관은 ‘조용한 사직’ 유행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고용주들은 직원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걸 빠르게 알아채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