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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빅블러’와 ‘붉은 여왕’을 동시에 보는 시대

  빵집 파리바게뜨에서는 ‘정통 자장면’을 가정간편식으로 판다. 세계 최대 커피체인 스타벅스에는 은행보다 많은 돈이 예치된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은 업종과 온라인·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포식한다. 올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는 임파서블 버거(식물성 버거)가 출품됐다. 네이버 카카오 같은 포털 빅테크기업은 금융업에 손을 뻗쳤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가속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데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빅블러’(경계융화)를 촉매한다. 미국 미래학자 스탠 데이비스와 크리스토퍼 메이어는 ‘블러: 연결경제에서의 변화 속도’라는 공저(1999년)에서 혁신적인 기술발전에 따라 기존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의미로 ‘블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빅블러’라는 용어는 ‘당신이 알던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조용호 저, 2013년)’는 책에 처음 제시됐다.


 ‘빅블러’는 4차산업혁명이 속도를 내면서 비즈니스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지만 문화 교육 일상생활에까지 돌풍을 몰고 온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를 헐어버린 데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빅블러’는 쇼핑의 개념을 오프라인 유인(有人) 매장 방문에서 스마트 배달서비스 대세로 바꿔놓았다. 제조업과 소매 서비스업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TV홈쇼핑과 유튜브의 경계 또한 사라져간다.

                                                                                     

  ‘빅블러’가 가장 돋보이는 곳은 빅테크 세계다.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알파벳) 메타(페이스북) 같은 미국 빅테크기업과 네이버 카카오 같은 한국 빅테크기업은 소프트웨어 분야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분야에도 눈독을 들인다. ‘빅블러’ 현상이 산업 전반에 ‘아마존 경계령’ 같은 빅테크 독과점 경종이 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즈니스에서 기술·산업·기업 간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크게 네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기술혁신으로 기존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융합-가치창출’ 유형이다. 최초로 개발된 화이자와 모더나의 mRNA 코로나 백신이 좋은 사례다. mRNA 백신은 창조적 기술융합인 극저온 콜드체인 유통기술로 역사상 가장 빠르게 실용화됐다.


 반도체 분야의 강자인 인텔이 미세공정(微細工程) 경쟁에서 밀려 자체 생산이 아닌 삼성전자와 TSMC(대만)에 위탁생산하게 된 일은 ‘기술융합-가치추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영화관 CGV가 서울랜드와 합작해 국내 테마파크 최초로 자동차 극장을 운영하는 것은 ‘산업융합-가치창출’ 유형에 해당한다. ‘산업융합-가치추가’ 유형으로는 기존 도소매업 요식업이 배달업과 융합해 온라인 유통산업의 가치를 한단계 끌어올린 범례를 꼽을 수 있겠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도 급격히 허물어진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자기 아바타를 매개로 다양한 삶을 즐기는 MZ세대가 최대 수혜자다. 장애인들이 메타버스에서 장애 없는 스포츠 선수가 될 수 있는 것도 ‘빅블러’ 덕분이다. 심지어 시장과 비시장 환경의 경계도 누그러지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개념의 확산으로 기업이 영리활동만 하는 시대가 저물어간다. 빅데이터 인공지능(AI)에서도 ‘빅블러’가 키워드의 하나로 떠오른다.


 한류에까지 ‘빅블러’ 현상이 보인다.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은 경계를 허문 파격과 무한변신으로 지구촌 음악팬의 사랑을 받는다. 따분하다는 통념을 깨고 ‘힙’한 매력을 발산하는 ‘빅블러’가 바탕이 됐다.


 ‘빅블러’ 시대에는 특정 분야만 아니라 모든 기업이 경쟁자다. 뜻밖의 경쟁자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초경쟁 시대로 변했다. 플랫폼시장 점유율 경쟁에 몰두하는 밥그릇 싸움을 하다가는 도태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됐다.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치열한 경쟁의 무대에는 ‘빅블러’뿐만 아니라 ‘붉은여왕’까지 도사리고 있다. 내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주변 환경과 경쟁 상대 역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붉은여왕 효과’라고 부른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여왕이 주인공인 앨리스에게 한 말에서 나왔다.


 앨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붉은여왕에게 묻는다. "(제가) 계속 뛰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붉은여왕이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자신이 움직일 때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달려야 겨우 앞지를 수 있다는 의미다. 진화학자인 리 반 베일른 시카고대 교수가 생태계의 평형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붉은여왕 효과’라고 부르면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새로운 경쟁자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빅블러’와 ‘붉은여왕’을 동시에 보아야 하는 시대에는 상상력이 부족하면 생존하기조차 어렵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