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는 빈곤과 가난의 차이를 흥미롭게 풀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면 빈곤, 끼니만 해결되면 가난이란다. 프랑스 시인이자 철학자인 샤를 페기는 빈곤과 가난이 이웃임이 틀림없지만 서로 다른 땅에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빈곤과 가난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가난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은 현상적인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빈곤은 모든 게 비참으로 가득 찬 경계 내부를 전적으로 지배하지만, 가난은 그 너머에서 시작해 일찍 끝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빈곤과 가난의 경계를 이해하면 수많은 경제적·도덕적·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쉽게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
가난은 선택할 수 있으나 빈곤은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영국 사회학자 피터 타운센드는 빈곤을 ‘사회참여 불능’으로 정의한다.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도 ‘빈곤은 단순히 돈 없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는 가능성이 박탈되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 옛날 중국의 공자도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고상한 정신이 깃들기는 어렵다고 일깨웠다.
극빈과 질병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수원 세 모녀’의 사연이 전해진 데 이어 보육원 출신 청년 2명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가슴을 저민다. 앞서 일어난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2018년 충북 증평 모녀 사건, 2019년 성북 네 모녀 사건은 하나같이 극빈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이번 일과 흡사하다. 이들은 정부의 복지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해 빈곤에 허덕였다. 비극적인 뉴스에 대부분 ‘어머니’가 따라붙는 게 공통점이다.
잇단 비극은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부동의 1위라는 현실과도 맞물려 있다. 노인자살률 역시 1위다. 한국 노인 빈곤율은 2021년 기준으로 OECD 평균(15.3%)의 3배에 가까운 43.4%다.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불명예다.
반복되는 모녀 극단선택 사건은 한국의 고질적인 ‘빈곤의 여성화’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가구주인 가구의 빈곤율이 월등히 높게 나타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성이 가장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 빈곤해진다는 것을 통계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성 노인의 빈곤율은 남성보다 10%p 이상 더 높은 압도적 1위다. 장애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2.2%로 비장애인의 빈곤율보다 2.6배 정도 높다.(2020년 기준)
영국 빈곤연구학자 루스 리스터는 빈곤 자체가 성별화돼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선 여성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빈곤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뜻이다. 여성에 편파적인 빈곤이 생각보다 일상적이라는 증거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빈곤선’ 개념 창시자 시봄 라운트리는 유년기·양육기·노년기를 저점으로 하는 ‘빈곤 생애주기’ 도식을 고안했다. 유년기에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없고, 보호자인 어머니도 노동시장에서 활동하기 어려워 수입이 부족하다. 노년기에는 노동력을 잃어 수입원이 줄어들면서도 신체 쇠약에 따라 의료비 부담이 높아진다. 모두 돈이 가장 필요할 시기에 노동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나라는 점점 부자가 되고 있지만 여성·노인·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의 빈곤은 악화한다. 노인 일자리는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노인에게는 일자리가 단순히 소득이 아니라 삶의 의욕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많다.
그럼에도 새정부는 내년 예산에서 노인 일자리 부문은 줄였다. 노인 일자리 목표 인원을 지난해 84만5000명에서 82만2000명으로 낮췄다. 액수는 54억원 정도 올렸지만, 공공형에서 6만1000개 일자리를 줄이고, 불확실한 시장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 복지 예산 비율은 0.6%로 OECD 평균의 1/3 수준에 불과하다.
빈곤은 심지어 지적능력(IQ)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미국 하버드대·프린스턴대 연구팀은 빈곤한 사람들에겐 가상적인 재정적 문제를 묻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대역폭(帶域幅)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빈곤이 뇌에 인지적 부담을 주기 때문에 빈곤층 대책을 단순히 돈 문제로 바라보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빈곤이야말로 가장 나쁜 종류의 폭력"이라고 했다.
복지는 헌법 34조에 규정했을 정도로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어느 작가의 신조어 같은 ‘우아한 가난의 시대’는 없다. 모든 시민이 ‘가난’이 아닌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있는 힘을 다해 뒷받침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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