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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최고·최악이 혼재하는 디킨스적 현상

  영미권에서는 최고의 시기이자 최악의 시기가 혼재할 때 ‘디킨스적 현상’(Dickensian quality)이란 표현을 즐겨 쓴다. 미국 투자전문 주간지 배런스가 구글 모기업 알파벳의 2019년 상반기를 평가하면서 ‘디킨스적 현상을 겪었다. 최고의 시기이자 최악의 시기였다’고 형용했다.

 ‘디킨스적 현상’은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불리는 디킨스의 작품 세계를 표징하는 말이다. 자기 이름이 그가 살던 시대와 작품으로 표현한 시대의 형용사로 쓰이는 영예를 누리는 작가는 드물다. 영국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쌍벽을 이루는 찰스 디킨스는 그런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디킨스가 살던 시절,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이었지만 그곳에도 가난에 신음하는 서민과 온기 없는 그늘이 많았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노동자들이 술집에서 "친구가 죽었다"며 함께 울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디킨스적 세계는 산업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생긴 빈곤 서민층을 대변한다. ‘가장 디킨스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빅토리아 여왕부터 노동자까지 모든 세대와 계급이 사랑한 소설가’는 디킨스를 수식하는 수많은 문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다.

 지금 한국 사회도 ‘디킨스적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국민은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경제력은 세계 최빈국 대열에서 세계 10위로 올라섰고,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 일곱번째로 들어갔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지난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식 인증했다. G7 정상회의에도 기꺼이 초대받는다. 세계 최강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3대 대기업 삼성전자 현대차 SK 총수를 모두 단독으로 만나 대규모 투자를 간곡히 요청하는 나라가 됐다.

한국 군사력도 세계 6위다.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성공으로 일곱번째로 위성을 우주궤도에 쏘아 올린 우주강국으로 우뚝 섰다. 한국형 발사체의 성공은 한국 과학의 실력을 공인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선진국 요건 가운데 하나인 소프트파워 역시 경제력과 군사력이 결합한 하드파워 못지않은 수준으로 도약했다. 한류를 앞세운 문화 예술은 여러 분야에서 세계를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는 아카데미 시상식, 칸 영화제, 베네치아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같은 세계 정상급 경쟁 무대에서 최고상을 받는 수준에 도달했다.

 

 클래식 음악 같은 순수 예술 또한 최정상급 연주자를 잇달아 배출하는 나라로 호명된다. 지덕체(智德體)의 한 축인 스포츠는 어느 분야에서든 한국 선수를 세계 정상 명단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나. 빨리빨리 문화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긍정·부정 요인이 극단으로 치닫는 특이한 현상이 목격된다. 지난주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 보건통계에 따르면 기대수명은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긴 83.5년으로 측정돼 최장수국가 반열을 유지했다.

축복할만한 최장수국가의 이면에는 오랫동안 변함없는 자살률 1위가 똬리를 틀고 있다. 신체적 건강이 두드러진 것과는 달리 마음의 병은 심각하다는 증거다.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단연 1위다. 같은 노인들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아주 크다. 청년실업률도 세계 정상급이다. 한국의 청년실업률 상승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고 전체 실업률에 견준 배율도 높아 OECD 10위권에 든다.

인구감소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지난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국내 총인구(외국인 포함)까지 감소했다는 씁쓸한 소식이 전해졌지만 정부나 정치지도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세계 꼴찌의 저출생이 이어지면서 인구절벽 경고등은 진작 켜져 있었다. 지난해 국내 합계출산율은 0.81명이었다. 한국의 인구붕괴 예상 세계 1위에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걱정할 정도다.


 한국은 양육비가 가장 많이 드는 나라 1위로 조사됐다. 높은 양육비 부담이 초저출생 원인임을 뒷받침한다. 대학진학률이 OECD 회원국 1위지만 대졸자 취업률은 60%대에 불과하다. 청년들의 경제적 삶의 질을 측정하는 청년고통지수가 최악일 수밖에 없다. 

 

  양성평등지표인 ’성 격차지수‘ 순위에서 세계 146개국 중 99위인 한국은 지금 추세대로라면 남녀평등을 이루는 데 132년이나 걸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런데도 윤석열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서둘러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어두운 곳을 살펴 밝히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역할을 하는 게 정치다. 한국 정치인들은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디킨스적 현상‘을 진정으로 염려하기보다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자신과 자기 진영의 이익을 챙기는 데 더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