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Comfort the afflicted and afflict the comfortable). 미국 언론계의 유명한 격률 가운데 하나다. 19세기 말 시카고의 언론인이자 유머작가인 핀리 피터 던(1867~1936)이 가상인물 ‘미스터 둘리’의 이름을 빌려 ‘신문의 임무’를 이렇게 규정했다.
이 말은 언론계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실천적 잠언으로 여긴다. 기자·가톨릭 여성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1897~1980)는 이 말을 평생 실천에 옮긴 것으로 명성이 높다. 노트르담대학교는 데이에게 레테르 훈장을 수여하면서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라고 칭송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 잠언을 철학으로 삼는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서 약자를 망각하는 종교를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삼국지위지(三國志魏志)에 등장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는 사자성어와 상통한다.
사실 이 말은 정치인들이 진정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최근 장애인 단체의 시위방식을 두고 공감이나 문제해결보다 논쟁으로 비화시킨 일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정치지도자의 철학적 빈곤이 드러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의 피해가 작지 않은 방법을 택한 것을 옹호하기 어렵지만 이를 대하는 정치지도자의 모습은 단세포적으로 비친다.
약자들의 시위는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시민의 불편을 노리곤 한다. 책임 있는 정치인은 현실이 어려워도 갈등을 관리하고 해법을 도출하는 방안을 고민해야지 논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며 토론하자고 나서면 딱해진다. 이 대표가 말로는 이길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이미 졌다. 새정부가 포용과 통합을 표방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장애인을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비장애인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다.
이 문제는 대선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교통약자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보수·진보 정권 모두 풀지 못한 난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예산편성 과정에서 뒷순위로 밀리는 일이 잦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국토교통부가 요청한 ‘교통약자 이동권’ 예산도 30%나 삭감한 것으로 며칠 전 밝혀졌다.
차기 윤석열정부의 여성정책에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함께 여성·장애인 할당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했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이유를 댄다. 과연 그런가. 한국의 성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통계가 명증한다. 세계경제포럼의 성 격차지수는 세계 153개국 가운데 108위(2020년 기준)다. 109위인 유엔개발계획의 남녀평등지수도 마찬가지다.(2018년 기준)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10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7%로 OECD 평균(29%)보다 한참 낮다. 이런 유리천장을 무시하고 능력주의만 앞세우는 것이 공정과 상식을 앞세운 정부의 온당한 정책인가. 젠더 갈등이 아니라 약자·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여진다.
장애인, 여성은 아동·청소년, 노인 등과 함께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로 꼽힌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갑자기 여성 문제에 혼란이 왔다. 갈라치기 득표전략 때문에 여성은 더이상 약자가 아닌 강자로 부상했다. 여성은 아직 분명한 사회적 약자다. 장애인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약자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약자가 존재한다. 신체·정신적 약자는 신체적 결함 때문에 사회적 차별과 인권 침해에 노출되는 소수자다. 신체장애인 정신장애인·정신질환자 등이 해당한다. 권력적 약자는 열악한 권력적 지위로 말미암아 차별적 대우를 경험하는 소수자다. 외국인, 성 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이 대표적인 권력적 소수자다. 이들은 사회적 주류와 구분되는 신체적 결함이나 문화적 이질성을 가진 게 아님에도 지배 권력에 차별을 받는다.
경제적 약자는 허약한 경제적 지위 때문에 차별당한다. 비정규직, 도시 빈민,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가 이들이다. 문화적 약자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들이다. 성 소수자, 혼혈인, 종교적 소수자 등이 포함된다. 문화적 소수자는 사회적 낙인으로 권력적 소수자나 경제적 소수자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부닥치는 사례가 많다.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라는 격률은 약자에게만 퍼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자와 약자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정신적 장치다.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는 반칙과 특권을 제한한다는 것이지 강자를 고의로 못살게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류역사는 약자와 소수자 집단의 인권을 확장해 온 과정이다. 우리 사회에는 약자를 보듬는 따뜻한 가슴이 더 절실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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