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환상은 소련의 부활이다. ‘21세기의 차르’ 푸틴은 소련 영토 일부만이라도 영향권에 두거나 사실상 되찾고 싶은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런 야욕에서 비롯됐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탈군사화·탈나치화하려는 목적일 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댄다.
이는 우크라이나군의 무력화와 우크라이나 현 정권 축출을 의미한다. 닷새 만에 거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낸 조지아 침공, 크름(크림) 반도 강제 병합 등으로 야금야금 재미를 본 푸틴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그러자 푸틴이 ‘오만 증후군’(hubris syndrome)에 빠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늦어도 일주일 정도면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축출하겠다던 푸틴의 계획은 2주일이 가까워져 오지만 교착상태에 빠졌다. 사실 미국 정보기관조차 러시아군의 이틀 내 키이우 장악이 가능하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푸틴의 오만과 오판이 곳곳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결정적인 오산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지도부를 너무나 얕잡아 본데서 비롯됐다. 우크라이나 시민의 애국심과 결사항전은 놀라울 정도로 강인하다. 자원 입대자는 물론 무장투쟁하는 민간인들이 나날이 늘어나 민병대만 13만 명에 이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여성들도 총을 들고, 화염병을 대량으로 만들어 러시아군 탱크와 맞서고 있다.
더욱 대담한 일은 해외에 체류하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귀국한 우크라이나인이 6만600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 중인 우크라이나 연주자들도 포함돼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러시아, 친자유유럽 정신은 이미 2013~2014년 유로마이단 시민혁명에서 명확하게 입증됐다. 친러시아 정권의 유혈 진압에 맞서 승리한 결과물이 현 젤렌스키 대통령 정권이다. 당시 친러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경찰 특공대(베르쿠트), 범죄자 출신 용병부대(티투쉬키)까지 동원했으나 장장 93일 동안 죽음을 무릅쓴 우크라이나 시민의 투쟁에 끝내 항복하고 러시아로 도망쳤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Winter on Fire): 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을 보면 사망자 125명 실종자 65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유로마이단 시민혁명의 지향점이 생생하게 우러난다. 푸틴은 유로마이단 시민혁명이 쿠데타였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의 탈출 제안을 거부하고 남아 병사를 독려하면서 국민을 단결하게 만든 것도 유로마이단 시민혁명 정신이 바탕에 깔렸다. 우크라이나 여론조사 기관의 이달 초 발표를 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도가 93%,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격퇴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88%에 달한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각각 86%와 76%로 높아졌다.
푸틴이 우크라이나군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드웨어 수치만 보고 막상 중요한 군의 지도력과 단결력, 신뢰 같은 질적 요소는 간과했다는 뜻이다. 자국 군사력 역시 과대평가한 징조가 여실히 드러났다. 러시아군은 연료가 바닥나 탱크가 움직이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병참에서 실패한 증거가 노출됐다.
푸틴은 전례 없는 국제사회의 연대를 상상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다소 느슨해졌던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스스로 놀랄 만큼 단결했다. 러시아와 악연이 많은 중립국 핀란드, 스웨덴까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는 일이 벌어졌다. 안보에 위협을 느낀 두 나라는 나토 가입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영세중립국 스위스는 200년 금기를 깨고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결정적인 것은 독일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다.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예상을 깨고 대전차 로켓 발사기 1천 개,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 500기를 공급한 데 이어 지대공 미사일 2천700기를 추가로 주기로 했다. 독일은 분쟁 지역에 무기 수출을 금지해 온 오랜 정책을 뒤집었다.
푸틴 제재에 앞장서고 있는 미국의 힘과 의지가 약해졌다고 믿은 것도 오판이다.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국제 결제망 퇴출, 푸틴 대통령의 개인 자산 동결 같은 강력한 금융 제재 카드는 ‘금융핵폭탄’이라고 할 만큼 위력적이다.
침공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등장한 러시아군의 잔학무도한 민간인 폭격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전쟁범죄 조사에 몰렸다. 사용이 금지된 대량살상무기 ‘진공폭탄’, 원자력 발전소 공격, 병원 포격, 어린이와 민간인 수천 명 살상은 ‘21세기의 히틀러’라는 별명을 낳았다. 한국인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지원 성금과 구호물자, 외부 전투 인력까지 밀려들고 있는 현상은 푸틴의 ‘국제 왕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전 세계인의 실시간 연대와 결속은 사상 초유의 양상을 띤다.
혹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잠시 점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배는 실패할 게 자명해 보인다. 푸틴의 오판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종 승패와 상관없이 세계질서의 흐름을 바꿔놓을 게 분명하다. 군비 증강과 동맹 강화로 물줄기를 틀 개연성이 높아졌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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