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곧잘 시대전환을 불러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예외가 아니다. 벌써 탈냉전 이후 30년간 지속했던 세계화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분열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규모 경제블록화가 세계화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을 담고 있다.
뚜렷한 변화는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에 맞서는 대서양주의의 부활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주의는 북미와 유럽이 정치·경제·안보 문제를 통합해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법치와 같은 공통가치를 지키는 정치철학이자 전략이다. 대서양주의의 핵심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있다.
소련 해체 이후 대서양주의는 느슨해졌다. 유럽 국가들의 미국 의존도가 낮아지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런 유럽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유럽에서 수십년간 이어진 평화가 깨지자 발등의 불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잇달아 열린 긴급 나토정상회의 유럽연합(EU)정상회의에서 동유럽 지역 안보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나토정상회의에서는 특히 동유럽의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4개 전투단을 배치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동유럽 최전선 국가 폴란드까지 방문해 "우리는 (나토 헌장) 제5조를 신성한 약속으로 받아들인다"면서 "(푸틴은) 나토 영토를 1인치라도 넘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나토 헌장 제5조는 특정 회원국에 대한 공격에 회원국 전체가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 내부의 안보태세 전환은 급격하다. 유럽 국가들이 무기를 새로 사고 방위비를 증액하는 등 재무장을 서둘렀다. 전범국가 독일이 재무장을 공식선언한 것은 큰 변화다. 독일은 F-35 전투기 35대를 사들이고 미사일 방어체계(MD) 구매를 검토중이다.
앞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국방비를 전체 독일 경제 생산의 2% 이상으로 대폭 늘리고, 1000억유로(약 134조원)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전쟁 중인 나라에 인명살상용 장비를 공급하지 않는다’는 2차대전 패전 이래 70년 넘게 지켜온 원칙을 폐기했다. 숄츠는 우크라이나전쟁을 ‘시대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했다.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도 국방예산 증액을 추진하고 대다수 유럽 국가가 미국산 무기 구매 목록을 들여다보고 있다. 중립국인 핀란드와 스웨덴은 러시아의 경고에도 나토 군사훈련에 참여하고 러시아 국경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에 자국 영토를 제공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대서양주의에 맞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려는 유라시아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안보보좌관은 명저 ‘거대한 체스판’에서 "우크라이나 없는 러시아는 제국으로 부상할 수 없다"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문명이 유럽이나 아시아 범주에 속하지 않고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개념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정치운동이다. 100여년의 전통을 잇는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민족주의 지정학이론가 알렉산드르 두긴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소련 해체 이후 자존감을 상실한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이념에 목이 말랐다. 극우적 인물인 두긴은 1997년 ‘지정학의 근본: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라는 책으로 러시아 지배계층에 불을 붙였다. 러시아가 미국에 맞서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과거의 영향력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뼈대다. 두긴은 러시아의 적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 세계 전체라고 주장했다.
두긴은 동맹세력을 넓히고 일부 지역은 병합하는 것도 불사하라고 제안했다. 크림반도 침공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사실상 병합을 부추겼던 것도 두긴의 생각이다. 유럽연합에 대응해 러시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 2015년 공식적으로 출범시킨 ‘유라시아 경제연합’은 새로운 유라시아주의의 표출로 받아들여진다. 유라시아주의는 인종주의와 전통주의를 결합한 초민족주의를 추구한다. 두긴을 비롯한 신유라시아주의자들의 모델은 칭기즈칸이라고 한다.
푸틴의 전략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러시아는 앞으로 푸틴이 없더라도 또 다른 푸틴을 찾을 것이라는 주장이 유라시아주의에서 뒷받침된다. 푸틴이 현대판 스탈린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러시아 여론조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스탈린이 1위로 꼽힌 적이 있다.
앞으로 일본 호주 뉴질랜드 같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대서양주의에 순응할 개연성이 높다. 시대전환 국면에서 한국의 입지도 범대서양주의로 기울 수밖에 없는 분위기여서 국제정치와 경제에서 전략적 사고가 더 긴요해졌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세상톺아보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전과 꼭 닮은 음울한 지구촌 (0) | 2022.04.22 |
---|---|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정치 (0) | 2022.04.12 |
‘21세기 차르’ 푸틴의 야욕·오만·오판 (0) | 2022.03.11 |
MZ세대 플렉스 문화 열풍의 명암 (0) | 2022.02.18 |
국정 의제로 떠오른 ‘국민총행복’ (0) | 202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