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더없이 흐뭇해했다. 필생의 숙원이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첫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문 대통령은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공정하고 부패없는 사회로 이끄는 견인차로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중요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공수처장도 화답했다. “인권친화적 수사기구가 되는데 초석을 놓아 국민 신뢰를 받는다면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도 변화할 것이다.”
1년 후 공수처는 "이러려고 공수처 만들었나"하는 비판에 직면했다. 검찰개혁의 핵심 치적이라던 공수처가 어쩌다 존재이유를 찾기 어려운 애물이 됐나 싶다.
탁월한 수사능력, 정치적 중립, 인권친화적 수사는 공수처가 갖춰야 할 3박자다. 공수처 1년 성적은 세가지 모두 과락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본질적인 수사능력은 공수처를 만든 주체들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다. 검찰 견제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처장·차장 모두 검찰 출신을 제쳐놓고 판사 출신으로 구성할 때부터 예견된 터였다. 여운국 차장은 판사 앞에서 “우리 공수처는 아마추어”라고 고백해 조롱거리가 됐다. 그는 사석에서 수사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고위공직자범죄 특성에 비춰보면 권력형 부정부패범죄 수사 경험은 필요충분조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공수처·차장을 포함한 검사 대부분이 수사실무 경험이 없거나 얕다. 실제로 수사현장에서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후일담을 들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들은 법원이 발급한 영장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해 위법 무효판정을 받을 만큼 기본기가 부족하다.
그 결과, 1년 동안 고위공직자 범죄를 독자적으로 적발하는 인지 수사 0건, 구속·기소 0건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겼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피의자로 입건한 ‘고발사주’ 의혹은 실력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무기력했다. 핵심 피의자인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 체포·구속영장이 세차례나 기각돼 망신살을 샀다. ‘윗선’으로 지목된 윤 후보에 닿지도 못한 채 수사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공수처는 정치적 중립이 무엇보다 민감한 과제지만 야당으로부터 ‘윤(석열)수처’라는 힐난을 받는다. 공수처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입건한 사건이 24건, 묶어서 12건에 불과한데, 이 가운데 4건이 윤석열 관련 사건이기 때문이다. 윤 후보 측근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 80여명을 무더기로 통신조회를 해 정치편향 논란을 자초했다.
반면 친정권 성향인 피의자 이성윤 서울고검장을 공수처 관용차로 태워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조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정권 편으로 알려진 인물은 작은 부분 하나라도 봐주려 한다는 인상을 심어놨다.
수사 실력이 태부족이고 정치적 중립을 의심받는 것도 문제지만 인권의식까지 바닥이어서 더욱 치명적이다. 공수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뜨는 문구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인권친화적 수사기구’다.
공수처는 사건과 관련 없는 언론인과 그 가족, 기자들이 가입한 단체대화방, 외국 언론소속 기자, 비판적인 대자보를 쓴 대학생 조직까지 광범위한 민간인 통신조회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자신들을 비판한 기사를 쓴 기자와 가족들을 콕 집어 사찰한 흔적도 남겼다. 민주화 이후 기자들을 대상으로 이처럼 무차별적 통신자료수집을 한 사례는 없었다.
"왜 저희만 가지고 사찰이라 하느냐"는 공수처장의 항변은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사죄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신들이 욕했던 검찰과 경찰의 잘못된 관행을 되레 방패막이로 삼는 건 몰염치하다.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진술을 왜곡하거나 악의적으로 유도신문을 하는 부적절한 사례도 탄로가 났다.
쏟아지는 비판에 공수처를 일방통행으로 만든 민주당은 엉뚱한 대책을 내놨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지난 주말 검찰의 일개 지청보다 못한 인력 숫자가 문제라고 초점 흐리기 전략을 썼다. 그래서 공수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무조건 인력과 예산을 대폭 보강해서 수사 능력을 갖추도록 키워주겠단다. 경험이 없고 수사능력이 떨어지는 인물들로 공수처 수뇌부와 수사진을 짜놓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투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검·경과 달리 7200명의 고위공직자만 수사대상인 공수처를 또 다른 공룡으로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꺼내서는 안되는 처방이다.
공수처의 1년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넘치는 의욕과 충성, 민망한 실력과 영혼’쯤이 될 것 같다. 새해 초여서 작은 덕담거리라도 찾아보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공수처가 스스로 환골탈태해 존재이유를 이른 시일 안에 증명하지 못하면 해체론까지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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