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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죽음이 낳는 정치적 숙제

 ‘죽을 때는 괴테처럼.’ 독일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1832년 3월 22일 오후 1시 반쯤, 여든세살이던 괴테는 바이마르에 있는 저택 집필실에서 글을 쓰다가 피곤을 느꼈다. 그러자 지팡이를 짚고선 집필실 옆 작은 침실의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른손으로 허공에다 W자를 그렸다. 곧이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괴테의 만년 비서이자 절친한 동료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남겼다. ‘평안한 기색이 고귀한 얼굴 전면에 깊이 어려 있었다. 시원한 그 이마는 여전히 사색에 잠긴 듯했다.’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은 죽음에도 무게가 있다고 했다. ‘태산 같은 무게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기러기 깃털의 무게밖에 안되는 죽음도 있다.’ 2021년 한해 동안 나라 안의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사마천의 말을 떠올린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나란한 죽음은 한 시대를 명실공히 마감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중항쟁 유혈진압으로 권력을 잡은 두 사람은 각각 10월 26일(노태우)과 11월 23일(전두환) 불과 28일 간격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두 사람은 삶의 궤적이 비슷했으나 정치·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두 사람은 5·18 이후 단 한 차례도 직접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병석에서 거동을 제대로 못한 노 전 대통령은 그나마 가족을 내세워 용서를 구했다. 신군부 지도자의 직계가족 가운데 처음으로 아들 재헌씨가 국립 5.18민주묘역을 몇차례 참배하면서 사죄의 뜻을 표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과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반면, 전씨는 마지막까지 사죄는커녕 책임을 부인했다. 5·18 유혈진압 명령과 헬기 사격을 인정하지 않고 사망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5·18에 대한 다른 행보만큼이나 달랐다. 똑같이 내란죄 등으로 복역해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음에도 노씨의 장례는 국가장, 전 씨의 장례는 가족장이었다.


 주요 대선 후보들의 정치적 평가도 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녀가 5.18 사과를 한 것은 평가받을 일"이라고 했다. 전씨 사망에 대해선 "용서할 수 없는 중대범죄를 저질렀다"며 흔쾌히 애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랬던 이 후보는 경북 지역 방문 때 전두환의 경제성과를 인정해 논란을 낳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을 제외하면 정치는 잘했다는 사람이 많다는 취지로 얘기했다가 끝내 사과했다.

                                                           

  올해 생을 마감한 주요 인물 가운데는 두 전직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분들도 많았다. 민중운동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치열했던 삶으로 기억된다.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진 그의 일생을 진보·보수 진영이 한목소리로 추앙한 것에서도 참모습이 드러난다. 민주화 운동과 5·18 진상규명에 헌신했던 소설가이자 대학교수 송기숙 선생도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 그대로 삶을 마무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지역 향토방위사단장으로서 강경 진압을 거부한 정 웅 전 의원 역시 정치적 평가를 남긴 채 영면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숱한 안타까운 죽음은 정치의 직무유기를 꾸짖는다. 청년노동자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지 3년이 지났지만 산업현장의 산재사망은 오히려 늘었다. 김씨 사망 이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일명 김용균법)이 통과됐으나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에도 허점이 많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여성·아동 같은 약자들이 범죄로 생때같은 죽음을 맞는 일이 잇달아 발생해 공동체를 경악하게 한다. 서울 송파구에서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의 가족이 스토킹 가해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서울 중구에서 경찰 신변보호 대상자였던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됐고, 서울 노원구에서는 한 여성을 스토킹하던 20대 남성이 집까지 쫓아가 여동생과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20년 만에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됐으나 사각지대는 많다.


 국내 코로나19로 인한 누적 사망자 5300명(12월 27일 0시 기준)도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으로 생을 끝냈다. 의정부 을지대병원에 올해 3월 입사한 신규 간호사가 병원 내 기숙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사회적 타살’로 꼽힌다. 간호사 1인당 환자수 법제화 같은 정치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천문학적인 특혜 의혹을 받는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 실무자 2명이 검찰수사 도중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 역시 정치가 만든 죽음이나 다름없다. 민주당이 이재명 후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특검을 결단하면 된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