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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중국 견제 고삐 쥔 앵글로스피어

 미국은 식민지 시절 영국에 이긴 뒤 독립하는 과정부터 어쩐지 수상했다.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영국이 미국에 많이 양보할 각오를 굳히자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가 먼저 놀랐다. 영국이 줄곧 궁지에 몰렸던 사실은 누가 봐도 뻔했다. 어느 순간부터 극적인 관계 역전의 소문이 나돌았다. 영국이 미국 주권을 인정한 후 두 나라가 연합해 그동안 미국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웠던 프랑스와 스페인을 공격해 북아메리카에서 완전히 추방한다는 얘기였다.


 1782년 11월 30일 평화조약 서명 후 파리의 뉴욕호텔에서 열린 축하파티에서 있었던 영국 대표 캘브 화이트포드와 프랑스인 초청객의 대화가 흥미로운 일화로 전해온다. 이 프랑스인은 미국의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연합한 13개 주는 훗날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화이트포드가 응수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미국인은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어를 쓸 겁니다."(폴 존슨, ‘미국인의 역사’)


 이들의 예언은 200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미·영 두 나라는 군사·외교적으로 더없이 속 깊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1, 2차세계대전에서 두 나라는 연합군의 중심으로 독일과 맞서 싸웠다. 냉전시대에 서방세력을 대표해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과의 대결에 앞장섰다. 냉전종식 이후에도 중동전쟁을 비롯한 국제갈등 현장에 대부분 함께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다른 어떤 나라에도 지원한 적이 없는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1958년 영국에만 줬다.

                                                                   


 이와는 달리 프랑스는 미국 독립에 크게 이바지하고도 미국으로부터 냉대를 숱하게 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하는 애정을 보였다. 9.11테러 이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영국과 대등한 핵무기 기술지원을 바랐지만 냉정하게 거부당했다.


 미국이 15일 영국과 호주를 축으로 삼는 중국견제용 새 안보 파트너십 ‘오커스’(AUKUS)를 출범시킨 것은 국제정세의 적지 않은 변화를 예고한다. 중국 포위망의 큰 그림을 ‘앵글로스피어’(Anglosphere)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앵글로스피어’는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면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뭉치는 영어권 국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 과학소설가 닐 스티븐슨이 1995년 발표한 소설 ‘다이아몬드 시대’에서 처음 썼던 용어다. 그후 미국 허드슨연구소 연구원 제임스 베넷이 2004년 ‘앵글로스피어의 도전’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널리 자리잡았다. 베넷은 21세기를 앵글로스피어가 지배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오커스’를 출범시키면서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호주에 극히 예외적으로 지원하기로 한 게 핵심이다. 미국은 한국이 지난해 잠수함용 핵연료공급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핵잠수함 건조 기술은 우주선 기술보다 첨단이라고 알려진다. 결정적인 중국견제 군사카드다.


 1년반 뒤 이 계획이 완성되면 호주는 핵추진 잠수함으로 중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이라고 주장하는 남중국해 지역을 거쳐 대만까지 순찰활동을 할 수 있다. 오커스는 핵추진 잠수함 외에 인공지능(AI), 사이버 안보, 양자기술 등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의 핵심 기술과 정보까지 공유한다.

                                                                             


 ‘앵글로스피어’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하는 기밀정보 동맹체 ‘파이브아이즈’(5개의 눈)가 냉전 시절인 1956년 결성돼 가동되고 있다. 미국 하원 국방위원회에서는 한국 일본 인도 독일을 파이브아이즈에 추가하는 법안이 통과된 상태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 영 연방 네 나라의 첫 글자를 딴 ‘칸죽(CANZUK)그룹’도 슈퍼파워급에 이른다. 미국과 각종 첨단 군사정보와 기술을 공유하는 영국은 최근 최신예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호를 아시아에 파견해 인도·태평양 지역 관여 수위를 높였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는 태평양안보조약(ANZUS)을 체결한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인도태평양지역에는 미국 호주 인도 일본이 참가한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도 결성됐다. 이들은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대면 정상회담을 연다.


 미국과 호주가 프랑스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강수를 둔 것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결단과 호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호주에 디젤 잠수함 12척을 공급하는 77조원 규모의 계약이 날아가자 프랑스는 자국 대사들을 본국으로 소환할 정도였다. 프랑스가 영국군을 무찔러 미국 독립전쟁을 결정적으로 도운 체사피크만 전투 240주년 기념행사도 전격 취소했다.


 ‘앵글로스피어’의 중국 포위망은 사실상 완성됐다. 한국은 ‘쿼드’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압박 속에 중국의 견제까지 받는다. 최근 왕이 외교부장의 방한에서도 드러났다. 베넷이 ‘앵글로스피어’ 주변국으로 지목한 한국의 과제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