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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낡은 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영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몽타주 기법’의 거장으로 불린다. 구소련 영화 황금기의 전령사인 예이젠시테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투쟁’을 내세운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임도 알토란처럼 받았다. 예이젠시테인이 몽타주로 러시아혁명 열기를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낸 덕분이다. 몽타주 기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둘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이 그것이다. 예이젠시테인은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 원리를 몽타주에서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위기론’도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과도기에서 나온다.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 그것이 위기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상황을 그람시의 위기론에 대입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적폐청산과 개혁의 사명을 띠고 출범한 촛불정부 집권세력은 무능과 위선에다 오만과 독선까지 더해 시대정신의 수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재보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사태의 후폭풍으로 말미암아 민주화 세대의 소명은 황혼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LH 사태가 티핑포인트이긴 하지만, 폭발의 임계점에는 벌써 도달해 있었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론’은 익살맞은 그림 신세나 다름없다. 정권이 바뀌어 윗사람들은 달라졌는데 아랫사람들은 여전히 잘못된 문화적 풍토에 젖어 있다는 그의 언설은 현실인식의 괴리감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86세대 기득권론’을 일축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정치주류교체 시기상조론 역시 자기 세계에 갇힌 개혁세력의 안주(安住)를 반영하는 듯하다. 유 이사장은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도 한국 정치의 주도성이 6월항쟁의 흐름 안에 있으며, 새로운 단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촛불정부 들어 민주화 세대가 내세울 만한 성과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외려 무능으로 꼽을 게 더 많다. 경제 부동산 일자리 같은 생활정치는 무능과 위선이 겹치는 부정적 이중상황이다. 임대차 3법 개정을 주도한 인물들의 위선과 반칙은 대표상품의 하나가 됐다.


 무능과 위선은 ‘조국사태’ 때부터 드러났다. 조 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조국백서’를 펴내는가 하면, 그를 비판하는 ‘조국흑서’ 100권을 내도 여론 40%는 ‘조국린치’라고 생각한다는 철옹성은 문재인정부의 핵심 철학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취임사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방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았다. ‘반조국’ 세력에 대해 “누구든 조 국처럼 기득권에 도전한 사람 중에 먼지 안날 사람만 하라”고 일갈하는 인사도 있었다.


 86세대 출신 진보 주류는 자신들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청년세대에게 ‘전 정부에서 교육을 제대로 못받은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20대에 대한 86세대의 생각을 응축한 상징적 단면이다. ‘우리 편 감싸기’와 ‘남 탓’의 전형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적폐청산의 하나로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검찰개혁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인식을 심어놨다. 조용히 제도개혁으로 마무리하면 박수받을 검찰개혁을 ‘우리 편 수사 막기’라는 나쁜 프레임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자신들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정치호랑이로 키워놓고선 처음부터 정치검사였다고 두들겨댄다. 자신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스스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는 의심까지 사고 있다. ‘귀족 진보’라는 수군거림을 자초했다.


 재보궐선거 이후 차기 지도자를 꿈꾸는 86세대 정치인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돌고 있기도 하다. 여권 내 대표적인 86세대 인사들은 이미 재보궐선거 기간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소환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지지층의 간을 보기 시작했다.


 집권세력의 오만과 독선은 지난해 총선에서 180석에 이르는 거대의석이 발판을 마련해줬다. 민주주의에서 중시해야 할 다원성이 결여된 ‘질적인 후진’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졌다. 1987년 체제 이후 최대 승리가 역설적으로 ‘꼰대 진보시대’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새로운 대안이 뚜렷하지 않아 실질적 민주주의의 위기처럼 느껴진다. 적폐세력의 몰락과 제3세력의 부재가 도드라져 보인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전직 검찰총장을 느닷없이 차기 지도자로 떠올리는 현실이라 한결 당혹스럽다.


 돌이켜 보면 문재인정부의 가장 큰 시대적 사명은 87년 체제의 종식이었다. 적폐청산과 기득권의 자아에 도취해 제대로 된 개헌을 면피성 시늉으로 시도하다 말았다. 87년 체제는 군사정권 체제를 끝내기 위한 임시체제 성격이 짙다. 진보진영은 첨단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87년 체제의 산물인 ‘민주 대 반민주’의 이분법 틀에 갇힌 모습이다. 30년을 훌쩍 넘겨 시효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데도 말이다.


 집권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보다 87년 체제의 종식을 마지막 역사적 책무로 삼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대의 숨통을 터주는 것만도 미래세대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정치권 밖의 민주화 세대 응원단도 그 길을 권면해야 옳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