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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부족한 이들에게 충분히 주는 게 진보다

 바람직한 사회가 작동하는 데는 평등과 공정의 가치가 필수불가결하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모튼 도이치는 두 가치에다 ‘필요 충족’을 더해 좋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세 가지 기본조건이라고 규정짓는다. 평등과 공정은 성격이 비슷한 덕목이지만 차이가 난다. 평등(equality)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조건을 주는 것이다. 출발선부터 조건이 다르면 효용이 없다. 공정(equity)은 각기 다른 사람이 필요한 만큼 주는 공평함을 뜻한다.


 현실에서는 평등보다 공정이 먼저 보장돼야 이상적이다. 먹을 것에 비유하자면 세 사람에게 똑같은 빵을 하나씩 나눠주는 것이 평등이다.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두 사람은 배가 부른 상황이라면 배고픈 이에게 훨씬 많이 돌아가게 하는 게 공정이다. 정의론(justice theory)의 대가인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도 정의로운 사회구현에서 공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의 장기화에 따른 추가 재난지원금 논쟁에서도 평등과 공정을 떠올려 보면 방향을 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에다 ‘필요 충족’까지 살펴보면 한결 명쾌해진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4차 재난지원금의 선별적 지급에다 전 국민 보편지급까지 추가하지 않으려면 사퇴하라고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윽박지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민주당의 전 국민 보편지급 주장을 응원하고 나선 것은 물론 도민 한 사람 당 10만 원씩 2차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이란 명목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편 복지’를 깃발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선거를 앞두고 약발을 확인한 득표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연초에 지적한 대로 코로나 19가 주는 고통의 무게는 평등하지 않다. 지원도 고통에 어느 정도 비례해서 하는 게 공정하다. 미래세대에 엄청난 빚더미를 물려줄 수밖에 없는 재난지원금이 4차에 이어 5차도 꼭 필요하다면 코로나 피해계층에 집중적으로 두껍게 지원하는 게 정의롭고 타당하다. 정부의 방역수칙에 따라 소득감소가 큰 자영업자, 저소득층, 비정규직, 미성년 가구 같은 취약 계층이 선별 지급의 대상이 돼야 바람직스럽다.

 

  공무원, 공공기관 노동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처럼 사실상 소득감소가 없는 계층까지 또다시 위로금을 주는 것은 불평등과 불공정을 심화시킬 뿐이다. 지난해 5월 지급한 1차 재난지원금에 대해 정부가 자발적 기부를 독려했으나 전체 지급 규모의 2%에도 못 미쳤다.


 경기부양과 소비 진작을 중요한 명분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지난해 총선을 계기로 지급한 1차 전 국민 재난지원금의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난 주말(5일) 비대면으로 열린 한국경제학회 공동학술대회에서 경기연구원은 1차 재난지원금 추가 소비 효과가 29.2%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0만 원을 지급하면 실제 소비가 늘어나는 건 2만9000원에 그친다는 뜻이다.

 

  이재명 지사의 싱크탱크 격인 이 연구원은 10만 원의 재난지원금으로 18만5000원의 소비가 이뤄졌다던 이 지사의 주장과 판이한 수치를 내놨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1차 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26.2~36.1%의 매출 증대 효과만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앞으로도 보편 지원보다는 선별 지원이 더 효율적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우세하다.

                                                                       


 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보편지급이 진보정권의 의제라는 주장도 허구다.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뜨거웠던 학교 무상급식 논쟁에서 진보는 보편 복지, 보수는 선별 복지였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보편적 복지국가 담론을 선도하고 있는 진보학자 이상이 제주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보편지급’이라고 일컫는 걸 엉터리 용어 사용이라고 꼬집는다. 보편지급이 아니라 ‘획일 지급’이나 ‘무차별 지급’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다. 보편적 복지와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은 오히려 철학적으로 충돌한다고도 했다.


 전 국민 현금지급은 복지 효과도 적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득하위 50%에게 두껍게 몰아주는 것이 소득재분배 효과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다.


 모튼 도이치의 ‘필요 충족’ 조건을 보더라도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학생 급식과 달리 보편적 필요성이 약하다. 영업제한 정책 등으로 직접 피해를 보는 계층에 맞춤 지원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복지선진국 유럽국가들도 필요 충족 조건에 따라 맞춤형 선별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곳간지기’로 비하하며 돈을 아낌없이 풀라고 겁박하지만, 4차 재난지원금에도 올해 예정된 94조 원의 적자 국채 발행 규모를 훨씬 초과하는 나랏빚이 필요하다. 영업제한으로 막대한 손실을 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조차 두껍게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사정임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상위 계층에게까지 재난지원금을 줘야 할 명분은 찾기 어렵다. 모든 재난지원금은 경제적 피해가 기준이 돼야 한다.


 코로나 19 사태에 비견되는 대공황 때 ‘결핍(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개념을 도입해 미국의 사회복지를 강화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표명은 변함없이 유효하다. “진보의 시험대는 풍족한 사람들에게 더 얹어주느냐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이들에게 충분히 주느냐에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