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사를 세 갈래로 흥미롭게 정리한다. ‘기념비적 역사’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 역사’가 그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의 위대한 사건, 위대한 인물을 현재의 전범(典範)으로 삼는 방식이다. ‘골동품적 역사’는 과거가 물려준 것을 골동품을 대하듯 보존하면서 전승한다. ‘비판적 역사’는 과거를 비판하고 극복 대상으로 여긴다.


 ‘역사는 과거의 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다’라는 영국 역사가 존 실리의 말을 빌리면 한국의 집권 핵심세력은 자신들의 ‘기념비적 역사’를 존숭한다.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룬 업적을 오랫동안 정치적 핵심 자산으로 삼고 있다. 보수 야당은 산업화라는 나름의 ‘기념비적 역사’에다 ‘골동품적 역사’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소비한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집권계층은 재보궐선거에서 민심의 심판을 호되게 받았지만,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차기 정권을 재창출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젊은 초선의원들이 재보선 참패 원인의 하나인 조 국 사태 대응을 반성하고 비판하자 은근슬쩍 눌러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친문이자 86운동권 출신 대표주자가 어김없이 차지했다. 확정된 당 대표 후보 3명도 하나같이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어서 예외를 기대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민주화운동 주역들은 이명박·박근혜정부 ‘적폐청산’과 21대 총선 이후 보여준 무능과 오만의 후과를 면하기 쉽지 않다. 재보궐 선거 도중 불거진 ‘운동권 셀프 특혜’ 논란은 이들이 민심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상징하는 일이었다. 역사를 이용해 사익을 꾀하고, 민주화 열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공정·자유·평등의 가치를 훼손하는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질책이 나왔다. 

 

  대표발의자인 설 훈 의원은 선거 도중 여론이 나빠지자 ‘민주화운동 특별법’으로 불린 ‘민주유공자 예우법 제정안’을 전격 철회했다. 73명이나 이름을 올린 이 법안은 유신반대 투쟁, 6월 항쟁에 참여한 민주화 유공자와 그 가족에게 학비 면제, 취업 지원, 의료 지원, 주택 구입, 임차 대부 같은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뼈대였다. 재보궐선거가 없었다면 180석을 무기로 강행처리했을 개연성이 있는 법안이었다.


 젊은 민주당 의원 5명이 재보궐선거 참패에 자성의 목소리를 냈으나 친문 진영 권리당원들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집중포화를 맞았다. 조광한 남양주시장 같은 이는 지난 주말 “그들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봤다”며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들어오면 물정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성장해서 간부가 됐을 때 신입사원 시절 얘기를 못한다”는 비유를 들어 맹폭했다. 

                                                                               

   그러자 민주당 초선들 가운데 원점 회귀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조 국 키즈’로 불리는 김용민 의원은 아예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했다. 재보선 참패 후 확장성을 고민하기보다는 열혈 지지층의 입맛에 맞추겠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당 지도부는 더욱 확실한 검찰·언론개혁이 촛불민심의 지지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 듯하다.

                                                         
 재보선에서 표출된 민심은 민생 현안에서 집권당이 유능함을 보이라는 것이다. 민주화 세대에는 격렬한 ‘투쟁’이 미덕이었지만 2030세대엔 공정한 ‘경쟁’이 덕목이 됐다. 가장 중시하는 시대정신인 공정한 경쟁을 배신하고선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보수 야당 역시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에 매몰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 초선의원이 용감하게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여전히 기득권 중진 인사들이 대세를 좌우하는 분위기다. 당내 최다선 중 한명인 서병수 의원이 불출마선언과 함께 세대교체를 촉구한 게 그나마 신선해 보인다. 그는 “산업화 민주화라는 낡아빠진 패러다임에 갇힌 정치인들은 공정, 생태, 인공지능(AI)과 같은 가치들을 시대정신으로 이끌기엔 힘이 달린다”며 “산업화 시대정신을 대표했던 세대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 하면 젊은 세대들이 두걸음 앞서가라”라고 독려했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의 위대성을 회상하고 소환해 새로운 위대성을 창출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기념비적 역사’를 우상숭배처럼 받들고 발전적 변혁이 미흡하다면 맹신주의만 남는다. 이것이 ’기념비적 역사’가 지닌 함정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골동품적 역사’는 찬란한 과거에 대한 숭배 탓에 관습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니체는 ‘골동품적 역사’를 특별히 비판한다. ‘비판적 역사’에는 ‘과거청산’과 ‘생성적 역사’가 뒤따라야 한다. ‘비판적 역사’의 목표에는 새로운 역사 생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모두를 기득권 세력이라고 부른지 오래 됐다. 2030 MZ세대는 기득권 세대를 기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한다. 그럼에도 ‘기념비적 역사’를 믿는 민주화 세대는 어느새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이 됐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라고 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