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호르무즈 파병과 광해군의 지혜

 국가의 딜레마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게 동맹안보 딜레마다. 최악의 경우 나라의 존망까지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맹안보 딜레마는 동맹 의존성이 높은 나라가 처하게 되는 안보상의 딜레마를 일컫는다. 방기(放棄)와 연루(連累)라는 상반된 위험에 맞닥뜨려 한쪽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 다른 위험을 불러오는 상황이다. 동맹을 맺지 않으면 동맹국의 도움이 절실할 때 방치될지 모른다는 것이 방기의 위험이고, 동맹국을 지원해 원하지 않는 분쟁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게 연루의 위험이다.


 대부분의 딜레마는 합리적 판단을 허용하지 않아 진퇴양난의 상황을 초래한다. 연초부터 한층 첨예해진 미국과 이란의 갈등 국면에서 미국이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강하게, 그것도 공개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모습이 예사로운 건 아니다.

 

  그렇지않아도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과 북한 관광 문제로 한미 동맹 마찰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위 관리들과 주한 미국대사까지 나서 불편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을 정도다. 중동의 맹주 이란은 석유·건설·사회간접자본 같은 경제 분야와 한류를 비롯한 문화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관한 국내 여론은 반대가 우세하다. 가장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 정부의 지지층을 이루고 있는 진보진영에서는 파병반대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들은 미국의 요구에 응해 파병하면 상당 수준의 국익이 걸려 있는 이란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한미동맹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걸프 지역을 통과하는 한국 선박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파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이럴 때를 비추어 주는 역사의 거울이 하나 있다. 곡예 같은 줄타기 외교술로 타개책을 찾아낸 조선조 광해군의 지혜는 단연 빛난다. 광해군은 선대의 어느 왕도 마주친 적이 없던 국제외교 과제를 떠안았다. 떠오르는 해였던 후금(훗날 청나라)이 조선이 하늘처럼 섬기던 명나라를 거칠게 밀어붙일 때였다.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이 거부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하지만 후금의 힘이 워낙 강해져 명나라 편만 들었다가는 후환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나라의 여러 사정과 왜구가 다시 침입할 조짐이 있다는 핑계로 파병을 몇 차례 미뤘다. 명나라의 파병 요구가 점차 강경해지고, 사대주의에 찌든 조정 대신들의 채근도 거세지자 광해군은 고심 끝에 묘책을 찾아낸다. 지원군을 보내지만 싸우지는 않는다는 계략이다.

                                                                            

   광해군은 1만3000명의 병력을 파견하면서 측근들도 모르게 도원수 강홍립에게 후금군과 가급적 싸우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다. 중국어를 잘하는 강홍립은 일단 랴오둥 명나라 진영에 가서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후금 지도자 누르하치에게 ‘명나라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일 뿐 당신들과 싸울 뜻이 없다’는 편지를 보내고 투항했다. 후금은 강홍립을 볼모로 잡아놓고 조선 군대를 귀국시켰다.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빛이 바래긴 했으나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성공작이었다.


 광해군의 예지는 한국의 호르무즈 파병에도 원용할 수 있다. 여러 방면에서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는 문재인 정부로서는 파병을 거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파병을 하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해양안보구상(호르무즈 호위연합) 참여가 아니라 한국군의 독자활동 형태로 하는 구상이 무난해 보인다.

 

  미국 측에도 모양새 좋게 이해시키는 작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강홍립이 후금에 ‘전투의사 없음’을 보여줬듯이 이란에도 파병이 두 나라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면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을 듯하다. 파병 한국군의 실제 활동도 사려 깊게 진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진보진영의 파병반대 여론은 남북관계 해법 같은 더 ‘큰 국익’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들어 돌파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 국민의 생명과 기업을 보호하고 한국 선박의 안전한 자유항행을 확보한다는 대의 명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