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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경기 도중 규칙 바꾼 트럼프

 요즘 세계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퍼즐 게임의 하나가 ‘바바 이즈 유(Baba is you)’다. ‘바바 이즈 유’의 인기는 ‘퍼즐 게임의 신기원’이라고 불릴 만큼 폭발적이다. 2017년 당시 23살이던 핀란드 대학생 아비 타케아리가 개발한 뒤 올해 초 완성도를 더욱 높여 극찬받는 분위기다. 인디 게임계를 강타한 비결은 플레이어가 경기 도중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묘미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난도가 급상승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라고 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일찍이 “게임을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세계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친다.”라고 했다. 불리하면 룰을 바꾸라는 역발상과 같다. 경기 규칙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면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사회든 자신이 불리하면 룰을 바꾸는 규칙파괴자가 등장하곤 한다. 그렇지만 사이버 게임이 아닌 현실 경기 도중 규칙을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차원을 넘어 독재적인 발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같은 동맹국에 느닷없이 방위비를 몇 배씩 더 내라고 강박하는 행태는 경기 도중 룰을 바꾸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에 현재보다 5배를 올려달라는 트럼프의 요구에는 미국 내에서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다.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에서 한국의 부담 범위는 주한미군 한국인 고용원 임금, 군사 건설비, 군수 지원비까지다. 그런데도 트럼프행정부는 이 규칙을 한참 벗어나 주한미군 인건비, 미군의 한반도 순환배치 비용, 역외 훈련비용까지 포함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현재 연간 10억 달러를 50억 달러(6조 원)로 늘려달라는 것은 생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지가 반 벌충’이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방위비분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역 관세 보복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을 최근 나토 창설 70주년 정상회의 때 놓은 바 있어 한국에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은 주한미군 감축으로 8.9% 삭감된 2005년 6차 협정을 제외하고 해마다 2.5~25.7% 범위 안에서 증액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중에도 같은 규칙을 적용해 왔던 것은 미국 측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1991년 1차 협정을 시작으로 2019년까지 모두 10차례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을 개정했다.

                                                                  

  
 지난 4일 영국 런던에서 막을 내린 나토 70주년 정상회의 때 트럼프는 29개 회원국 가운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2% 이상을 방위비로 쓰고 있는 8개국 정상들만 초청해 별도의 오찬 행사를 여는 협량을 드러냈다. 게다가 나토 동맹국들이 이미 GDP 대비 방위비 비율을 2024년까지 2%대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상황에서 “4%는 돼야 한다”며 터무니없는 증액을 요구했다. 미국의 방위비 인상 압박이 70주년이라는 뜻깊은 나토 정상회의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은 경기 도중 규칙을 바꾼 트럼프 탓이다.


 트럼프 특유의 협상술이 녹아 있는 방위비 압박으로 ‘정박(닻내림)효과’의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한다. 처음에 비싼 값을 부른 뒤 소액을 깎아주는 정박효과 협상술은 같은 상대가 첫 번째 협상일 때는 유용한 수단이 될지 모르나 두 번째부터는 잘 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 간 외교에서는 중장기적인 신뢰를 훼손할 여지가 크다.


 무리한 방위비 요구에 미국 의회와 언론이 동맹을 방어하는 주한미군을 마치 돈을 받고 파견하는 용병 같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트럼프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다. 한국으로서는 막무가내 압박에 쉽사리 굴복하기보다 과잉 청구의 불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가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GDP의 2.5% 수준인 한국의 국방비 지출은 이미 미국 동맹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 부자이기 때문에 주한미군 주둔비를 대폭 올려야 한다는 트럼프의 수사학은 설득력이 없다. 트럼프가 싫어하는 뉴욕타임스의 충고처럼 동맹을 돈으로만 바라보면 미국의 안보와 번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칫 미군 장갑차의 중학생 효순·미선 압사 사건 이후 거셌던 반미 감정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인기 사이버 게임이 아닌 현실 외교에서 경기 도중 규칙을 바꾸는 것은 반칙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