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세계에서 마라톤 경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1974년 테헤란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을 때 개최국 이란은 마라톤 종목을 제외해 버렸다. 이란이 마라톤을 금기시하는 데는 뼈저린 역사가 깔려 있다. 마라톤이 올림픽과 국제경기 종목으로 채택되는 연원에 아테네 마라톤 평원 전투에서 고대 이란의 페르시아 제국이 참패한 악몽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병사가 약 40㎞를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뒀다는 일화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창설할 때 한 지인이 감동적인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무적의 정예부대로 불리던 페르시아군이 치욕적인 첫 패배를 당한 마라톤 전투는 지금의 이란인들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마라톤 전투는 동서양 간의 최초 전쟁에서 동양이 패배한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제국을 경영한 경험을 지닌 이란의 자존심은 지금도 중동 지역의 맹주로 성이 차지 않는다. 중동 최초의 민중 혁명인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세계 최강 미국과 맞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라는 자긍이 작용하고 있어서다.

                                                                               


 이란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의 영웅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사건은 이란과 미국 간의 정면충돌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란이 남부 시아파 성지 쿰의 주요 사원에 붉은 깃발을 내건 것은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상징이다.

 

  이란이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복수를 끝낼 때까지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중동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누가 우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느냐”는 솔레이마니 장군 딸의 질문에 “이란 모든 국민이 선친의 복수를 할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답했으니 보복이 불가피해 보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정신은 이란인들에게도 흐른다.


 트럼프는 이란이 보복에 나서면 중요한 목표물 52개를 선정해 놓았다면서 더 강경한 공격을 경고했지만, 이란이 당하고만 있을 리 없다. 52곳을 설정한 이유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444일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인질로 잡혔던 미국인 숫자가 52명이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는 신년 전야 파티에서 “나는 평화를 원한다. 이란이 누구보다 평화를 원해야 한다”라고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대표로 나서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중동의 미국 관련 시설을 겨냥한 공격을 모의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다는 이유로 제거 작전의 정당성을 내세웠지만, 주권 침해와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제거하는 전쟁을 개시할 때도 은닉한 대량살상무기로 테러를 지원한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으나, 전쟁 후 조사결과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트럼프에게 국제법은 큰 의미가 없다. 힘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그의 참모였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에게 국제법은 없다”고 공언하곤 했다.


 트럼프의 솔레이마니 폭살 작전은 오는 11월 재선을 위한 카드의 하나라는 데 초점이 모인다. 이란과 북한에 대한 외교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반전 카드로 꺼내 들었다는 의미다. 앞으로 국면이 트럼프의 의도대로 흘러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40년 전 지미 카터 대통령도 재선을 위해 무리한 인질 구출에 나섰다가 참혹하게 실패하고 재선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내 여론은 전쟁 반대가 대세인 듯하다. ‘세계 3차 대전 발발을 막자’ ‘전쟁을 재선 전략으로 삼지 말라’는 구호까지 나왔다. 미국 전역 80여 곳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지고,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뉴욕시민들은 걱정이 태산 같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미국과 이란이 사실상의 전쟁상태라고 우려했다.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인들이 애송하던 시가 새삼 떠오른다. 영국 출신 미국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의 ‘1939년 9월1일’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폴란드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날을 제목으로 쓴 시다. 오든은 히틀러를 ‘정신병을 앓는 신’으로 묘사하고 평화를 갈구한다.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사로잡으며/ 분노와 공포의 물결이/ 밤낮없이/ 온 세상을 휘감는다/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냄새는/ 9월의 밤을 범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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