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비주류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며 백악관의 주인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두 젊은 피가 끓는 비주류 40대였다.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가 주류인 미국에서 비주류 가톨릭신자였던 존 F. 케네디가 40대 초반에 대통령이 된 것도 비슷한 예다.
내년 대선의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 대항마 선출 경선과정에서도 70대 민주당 후보 3강 구도를 깨트리고 돌풍을 예고한 30대 성소수자 후보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내년 2월 초 공식적으로 막이 오르는 민주당 예비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77) 전 부통령, 버니 샌더스(78)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70) 상원의원의 3강 후보가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첫 경선지이자 ‘대선 풍향계’로 불리는 아이오와주와 다음 경선지인 뉴햄프셔주에서 37살에 불과한 피트 부티지지 후보가 지난주 여론조사 선두로 치고 나갔다. 아이오와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여론조사에서 부티지지는 25% 지지율로 ‘3강 후보’를 모두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 경선지 뉴햄프셔주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그는 역시 25% 지지율로 3강 후보를 꺾었다.
부티지지가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는 것은 트럼프를 꺾을 대안찾기 고민에 빠진 민주당 유권자들의 심경 변화로 읽힌다. 미국 주요 언론들은 민주당 지지 유권자들 가운데 좌파 선명성 경쟁에 몰두하는 고령 후보 3명이 본선에서 트럼프를 꺾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표의 확장성을 지닌 온건진보 후보를 원한다는 뜻이다.
부티지지는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정책을 내걸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최근 좌편향 전략으로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 연설 능력이 탁월한 부티지지는 ‘진보적 가치를 보수적 언사로 설파한다’는 호평을 받는다.
3강 후보들과 다른 점은 현안에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부티지지는 오바마의 유산인 전국민건강보험제도(오바마케어)를 선호하지만 점진적인 확대 적용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법인세 인상과 자사주 매입 금지 등을 내세운 과격한 샌더스와, ‘오바마케어’보다 한발 더 나아간 ‘중산층 증세 없는 전국민의료보험’과 징벌적 부유세 도입을 공약으로 내놓은 워런과 차별화한 정책이다.
부티지지는 인디애나주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인 사우스벤드 재선 시장이 경력의 거의 전부인 데다 동성애자라는 약점을 지녔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애국적 밀레니얼 세대로 평가받는다. 명문 하버드대(역사·문학)를 거쳐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학사 학위(정치·경제·철학)를 받았다.
어학에도 천재적인 소질을 지녀 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노르웨이어·몰타어·아랍어·다리어 등 7개 외국어를 구사한다. 해군 예비군 정보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7개월간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 생활도 했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일부 주류 신문은 ‘게이인데 게이스럽진 않다’는 표현을 쓴다.
그가 시장을 맡은 뒤 실업률을 11.8%에서 4.4%로 낮추는 성과를 냈다. 부티지지는 후보 토론회에서 ‘경험 부족’에 집중 공격이 가해지자 “지금 이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의 워싱턴 경력만 합쳐도 100년이 넘지만, 그래서 지금 이 나라가 어떻게 됐느냐”고 받아쳤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는 ‘정치인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을 가져다가 실험실에서 적절히 배합하면 부티지지가 나올 것 같다’고 극찬한다.
부티지지는 2015년 사우스벤드 시장에 출마하면서 동성애 정체성을 밝혔다. 2018년 현 남편인 교사 채스턴 글래즈맨과 결혼했다. 미국은 2015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나라에 합류했다.
그는 소수자들을 대표하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으나, 소수자 정체성이 극복해야 할 역설적인 관건의 하나다. 역시 소수자인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의 마음을 사는데 고전하고 있어서다. 전국 지지도에서 4위에 머무는 것도 이런 영향이 어느 정도 미쳤다. 부티지지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초의 동성애자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쓴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긴 하지만,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에 이은 성소수자 정치인의 용기 있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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