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의 디딤돌을 놓은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있었던 일화다.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대사로 간 비스마르크는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부름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 여름 별장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환담을 나누며 한 초소를 지날 때였다. 총을 든 군인을 본 비스마르크는 왜 이곳에 경비가 있느냐고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와 경호원도 그 까닭을 몰라 그곳 경비 병사들에게 물었다. 경비병 역시 이유를 모르자, 황제가 알아오라고 명했다.
며칠 뒤 황제는 만찬 자리를 만들어 알아낸 사실을 비스마르크에게 한참 동안 설명했다. “최고 사령부를 방문해 서류를 검색한 결과, 어렵게 연유를 알아냈답니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어느 해 이른 봄 이곳을 산책하다가 눈 속에 핀 예쁜 꽃 갈란투스를 발견한 뒤 그 꽃을 꺾지 못하도록 경계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갈란투스 꽃을 보호하기 위해 경비초소를 만들고 밤낮 없이 보초를 서게 되었다네요. 그 뒤 누구도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꽃이 사라진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의 시간이 흐른 겁니다.” 이유도 모른 채 타성에 젖어 기존의 선택을 무조건 추종하는 현상인 ‘집단적 타성(collective inertia)’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미국이 거의 모든 나라가 사용하는 미터법을 쓰지 않는 것도 집단적 타성의 본보기에 속한다. 미국은 인치, 피트, 야드, 마일, 에이커, 온스, 갤런 같은 도량형 단위가 복잡하기 그지없는 데다 세계화 시대와 걸맞지 않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미터법을 쓰지 않는 나라는 미국, 미얀마, 라이베리아 세 곳 뿐이다.
대한민국 국회도 집단적 타성에 젖은 조직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것도 정해진 규칙을 무시하고 나쁜 관행을 바꾸려 들지 않는 독특한 조직이다. 첫 손에 꼽히는 것이 일하지 않는 타성이다. 일하지 않는 한국 국회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드높다. 미국 의회가 연평균 150일 본회의를 여는 데 비해 한국 국회의 본회의 개최 일수는 50일에도 못 미친다. 국회사무처 조사결과, 2017년 42일, 2018년 37일, 2019년 현재 29일에 불과하다. 스스로 약속했던 매월 2회 법안소위원회 개최 규칙 역시 지키지 않는다. 법안처리율은 자연스레 30%를 밑돌았다. 2만2000개가 넘는 법안이 넘어왔음에도 10개중 3개도 처리하지 못한 셈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20대 국회에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상습적인 국회 보이콧은 여야가 바뀔 때마다 나타나는 집단적 타성이다. 집단적 타성에 젖은 느림보 일처리 악명은 국회 개원 이래 변함이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부 의원들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내세워 세비 삭감이나 반납을 선언하거나 주장했지만, 실현된 적은 거의 없었다. 국회의장 직속 혁신자문위원회에서 ‘일하는 국회’를 제안해 법안까지 마련됐으나 벌칙조항이 없어 의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 국회의원 보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한다. 한국 국회의원 세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5.27배로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서 3위다. 반면에 국회의 생산성은 최하위 이탈리아에 이어 끝에서 두 번째다.
‘여방야공(與防野功)’이라는 집단적 타성은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국회 본래의 기능이 무뎌지게 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여야의 공방은 전형적인 이중 잣대와 ‘내로남불’ 그대로다. 인사청문회는 여당의 ‘검증 대신 감싸기’, 야당의 ‘발목잡기’로 예외 없이 일관하고 있음이 최근 20년간의 국회 행태에 관한 탐사보도에서도 드러났다. ‘조국 사태’ 역시 그 부작용의 산물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지난주 국회 혁신을 위한 20여 가지 아이디어를 마련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얼마나 실행력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야당과 손바닥이 마주쳐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의사일정과 안건 결정 과정 자동화, 불출석 의원 불이익 강제, 정당의 판단에 따른 국회 파행 불이익 부여, 윤리특별위원회 상설화, 국민소환제 도입, 국민참여시스템 구축 같은 게 모두 제 머리깎기여서다.
조직의 발전은 집단적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찰적 역량에 달려 있다. 타성에 젖은 조직에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결정하는 주체가 달라야 결정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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