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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팬텀세대의 익명성

  지금의 20대 별칭 가운데 하나는 ‘팬텀세대’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팬텀처럼 소통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팬텀세대는 강한 목소리로 자기 의견을 드러내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익명성을 선호한다. 시위 때 마스크나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게 이 때문이다.


 최근 고려대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학과정 진상규명 촉구 촛불집회를 열었을 때 다수가 마스크를 쓰고 참가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들의 상당수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소통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은 팬텀세대인 대학생들의 시위 양태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는 유 이사장은 “조국 욕한다고, 대통령 비난한다고 누가 불이익을 주는가, 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집회를 하느냐”고 비판한다. 진실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만 익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취지다. 게다가 “뒤에서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의 손길이 어른거린다”는 말을 덧붙여 정치적인 의도까지 가미했다.

                                                                           

  ‘조국 구하기’ 선봉장으로 나선 것을 감안하더라도 팬텀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애써 하지 않으려는 운동권의 진영논리가 엿보인다. 관련 기사에 동조하는 댓글이 수천, 수만 건씩 붙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막상 조국 장관은 지난날 언론 기고에서 “복면이 다양한 의사표현의 방식임을 외면하고 있다”며 집회·시위 때 마스크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에 반대한 적이 있다.

       

 20대 청년의 대부분이 자신의 사회적 의견을 온라인으로 드러내는 게 또 다른 특성으로 꼽힌다. 온라인에서도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활동을 즐긴다. ‘대학내일’ 20대연구소의 조사결과다.


 2016년 여름 이화여대 ‘평생교육 단과대학 미래라이프대학 사업’ 반대시위는 팬텀세대를 보여주는 특징적 사례의 하나다. 이대생들은 ‘‘비밀의 화원’이라는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서 학교 점거 농성 계획을 토론하고 의견을 결집했다. 모금 운동과 물품지원 같은 일들도 깡그리 익명 게시판에서 이뤄졌다. 실제 오프라인 시위 때도 마스크와 선글라스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렸다.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당시 ‘포스트잇 추모’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를 선보인 것도 팬텀세대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인 20대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 전국 9개 지역에서 모두 3만5000여 개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20대 비정규직 근로자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때도 또래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팬텀세대는 온라인상에서 해시태그 운동, 서명운동, 후원 만들기 등 직접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의사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개인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팬텀세대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 사회적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익명을 선택한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최근 모교인 고려대의 학생 시위 때 모인 200명이 전체 학생 2만 명의 1%밖에 안 된다고 깎아내렸다. 군사독재정권도 반정부 시위를 일부 학생들의 행동이라고 매도하곤 했다. 팬텀세대의 의사표현이 오프라인으로만 나타난다는 생각과 다름없다. 20대 청년들이 무언으로 강한 의견을 표출할 때가 많다는 점을 간과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직후 한 여론조사 결과, 박 전 대통령 지지율은 20대에서 0%를 기록했다. 전체 세대 중 가장 낮았고, 유일하게 통일됐다.


 팬텀세대는 허위조작정보(가짜뉴스)가 범람하는 가운데에서도 ‘사실(fact)’을 스스로 찾아내고 사실로 소통하려는 세대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들은 1970~80년대 집회·시위 같은 사회적 의견 표출에 대해 ‘폭력(71.0%)’, ‘혁명(67.8%)’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한다. 20대는 자신들의 의사 표현방식을 ‘촛불(88.2%)’, ‘자율성(81.8%)’ 같은 긍정적 이미지로 인식한다.


 팬텀세대의 특성인 익명성에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대의 특성을 진지하게 이해하려 들지 않고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정치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은 20대 지지층의 이탈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