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으로 여겨온 반칙과 특권이 청년들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2019년 6월20일 반부패정책협의회) “촛불 민심이 명한대로 국정농단, 반칙과 특권이라는 적폐 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2019년 5월9일 취임2주년 KBS 특집 대담) “국민의 평범한 삶에 좌절과 상처를 주는 특권과 반칙의 시대는 반드시 끝내야 합니다.”(2019년 4월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앞둔 국무회의)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2017년 5월10일 대통령 취임사)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특권과 반칙 없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했다. 그 실천의 선봉장은 ‘문재인 아바타’로 불리는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진보의 아이콘’이기도 한 조 전 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상황이 홀변했다.
조 후보자의 인사청문요청 사유서에는 ‘특권과 반칙 없는 사법정의 실현을 위해 법학자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적혀 있다. ‘공정’ 같은 따뜻한 낱말도 눈에 띈다. 실제로 그는 정의와 공정성을 오랫동안 설파해 개혁과 적폐청산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무엇보다 특권의식과 불공정이 용이 되지 못한 개천의 개구리·붕어·가재 같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가를 열변해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의 언행과 쌓아온 이미지가 부메랑이 된 건 개인을 넘어서 국가적 비극이다. 각종 개인 의혹과 더불어 딸의 명문대학 입학과정, 대학원 장학금 특혜 의혹이 촛불 혁명 때의 최순실과 정유라까지 소환할 정도니 말이다.
외고 2학년생이던 딸이 같은 학교 학부모가 교수로 있던 단국대 의대 연구소에서 2주간 인턴생활을 한 뒤 병리학 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된 건 누가 봐도 명백한 반칙이자 특혜다. 고3 학생이 학기 중에 서울도 아닌 충남의 공주대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연구실 인턴활동을 하고 그해 도쿄 국제조류학회 공동 발표자로 추천된 것도 상식을 초월한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배려하는 장학금을 2학기 연속해서 받은 것과,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옮겨 낙제 성적임에도 6학기 내리 1200만원의 격려장학금을 수령한 것도 특혜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 후보자는 당초 명백한 가짜뉴스라고 했다가 어제(25일) “아이 문제에 불철저하고 안이한 아버지였다”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뿔난 20대 젊은이들은 ‘이게 특권과 반칙 아니면 뭐냐’고 따진다. ‘촛불정부’의 탄생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촛불정부를 성토하는 촛불을 든 것이 무엇보다 아프게 다가온다.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사실과 다른 의혹이 부풀려지고 있다”며 청문회 개최를 촉구한 것은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 조 후보자의 위상 추락을 안타까워하며 옹호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외려 화를 더 돋운다는 비판이 많다. 대학총장과 장관을 지낸 한 진보교육감은 2주간 인턴생활을 한 고교생이 논문 1저자가 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다.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청와대 1부속비서관은 장관 후보자가 아닌 딸의 사생활을 파헤칠 권리는 국회의원도, 언론도 없다고 일갈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은 조 후보자가 아닌 입시제도와 교육, 직업 귀천, 사회 현실의 문제라고 돌라댄다. 진보 인사들이 개인의 잘못이나 비극을 이따금 사회 문제로 치환하는 습성과 흡사해 놀랍다. 대통령이 지명했으니 무조건 지지한다는 유명 작가는 그나마 애교에 가깝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민초들은 조 후보자의 불법이나 위법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그와 가족에게도 기회는 평등한가, 과정은 공정한가, 결과는 정의로운가를 묻는다. 그래서 ‘공정과 정의를 대변할 수 있는가’ ‘사법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도덕성을 지녔는가’를 묻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물해 청와대 비서실마다 걸린 액자 ‘춘풍추상(春風秋霜·남에겐 봄바람 같이 나에겐 가을서리 같이)’처럼 하라는 것도 아니다. 남에게 하는 만큼 내편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충분하다. 여론은 조 후보자를 장관으로 임명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을 넘어 특권과 반칙만은 없애겠다는 촛불정부의 정당성을 묻는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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