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이후 박근혜 대통령만큼 유리한 정치지형을 지닌 대통령은 없었다. 박 대통령에겐 우선 가장 약체의 야당이 존재한다. 원내의석수에서도 소수지만 제1야당은 구심점이 없는 상태다. 진보정당들은 지난해 경선비리와 종북논란으로 분열된 데다 힘이 현격하게 떨어져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여당 내에 견제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에다, 야권엔 정치9단이라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모두 버티고 있었다. 견디다 못해 ‘야합’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3당 합당으로 난국을 돌파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이라는 숙적이 잠시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곧 돌아왔다. 당내의 구 민정당계 중진들도 만만한 건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합정권에 성공했지만, 대선 라이벌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막강한 야당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공동정권의 지분을 가진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무려 167일간 ‘총리서리’로 둘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권을 출범시켰다. 게다가 여당 내에서도 호남권의 친 김대중 계와 끝없는 갈등을 겪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출범 당시엔 여소야대였다. 곧바로 여대야소 국면을 형성했으나, 야당보다 더 강력한 여당내 친박 세력과 맞서 거의 5년 내내 싸워야 했다.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정치구조도 그렇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그동안 정치행로나 대선과정에서 빚진 사람도 없다. 6명의 대통령 가운데 가장 홀가분한 권력지형 속에서 임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중요한 선거도 한참 남았다. 지방선거는 1년 이상, 총선거는 3년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땅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다. 이런 환경에선 자책골을 넣지 않으면 지는 게임을 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의 진가는 늘 적이 강하거나, 아군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빛났다. 하지만 견제세력이 없거나 약하면 긴장감이 느슨해지기 십상이다. 그래선지 벌써부터 우려하는 목소리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박 대통령의 취임 직전 지지율이 44%로 급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그 징표다. 취임 전부터 대통령선거 득표율 51.6% 보다 지지율이 7.6%포인트나 낮은 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취임을 앞둔 대통령 당선인은 대부분 국민의 기대감 때문에 대선 득표율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여준다.
이는 수없이 지적된 대로 박 대통령의 용인(用人) 철학과 인사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각료와 청와대 고위직 지명자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위법, 편법, 비리, 도덕성, 품위, 자질 같은 포괄적인 논란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안이한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 며칠 사이엔 핵심 대선공약 후퇴를 부정적 평가의 이유로 꼽는 비율이 늘어난 것도 좋은 조짐이 아니다.
국정운영의 3대 요소로 인사, 조직·시스템, 정책이 꼽힌다. 새 정부 초기의 가장 중요한 두 바퀴인 인사와 정책이 국민의 눈높이와 멀어진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과 사뭇 다른 이미지를 주고 있는 건 답답한 일이다.
대선 직전 박 대통령의 한 측근은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이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 박 후보는 반드시 고치는 스타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대통령의 인사 철학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언론은 국민의 마음을 대변한다. 모든 언론이 예외 없이 문제가 있다고 보면 엄중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이 너무 일찍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건 모두 박 대통령의 자책골 때문이다. 그럼에도 향후 국정 수행 전망을 묻는 질문에 ‘잘할 것’이라는 응답이 71%로 높게 나타난 것은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좌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운영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국민의 기대는 낙담으로 변할 것이다. 원칙, 신뢰, 약속 지키기라는 등록상표가 훼손되면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포말이 될지 모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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