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정치권에서 ‘서민 코스프레’란 낯선 조어가 부쩍 뜨기 시작했다. ‘친서민 이벤트’ 정치를 비판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곤 한다. 최저임금도 모르고 고용복지를 운운 하는 새누리당 대선후보 박근혜 의원을 겨냥한 민주통합당의 논평에 등장한다.
이언주 원내 대변인은 지난주 현안브리핑에서 “최저임금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세대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노력하는 서민들의 노력과 일치하는 문제”라는 전제 아래 “박 후보의 서민 코스프레는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매우 분노할 일”이라고 일침을 놨다.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 캠프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앞두고 한 브리핑에서도 ‘서민 코스프레’가 동원됐다. 김 후보 캠프의 전현희 대변인은 “그동안 시장에서 떡볶이나 어묵을 먹으면서 ‘서민 코스프레’하던 이벤트정치를 떠올리게 한다”고 일갈했다.
‘코스프레’는 원래 연극용어로 쓰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를 줄여 만든 일본식 용어다. 유명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모방해 그들과 같은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며 행동을 흉내 내는 놀이를 뜻한다. 영국에서 죽은 영웅들을 추모하는 예식에서 시작된 코스튬 플레이는 미국으로 넘어가 ‘만화 캐릭터들의 의상을 입는 축제’로 유행하게 됐다.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여러 장르에서 캐릭터들의 의상을 만들어 입는 것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왜 지금 정치권에서 ‘서민 코스프레’란 말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얼마 전 종영된 인기 드라마 ‘추적자’가 용의자임에 틀림없다. 드라마는 묘한 기시감에 빠지도록 현실적인 정치인들의 실상을 그렸다.
여당 대통령 후보 강동윤은 투표일을 앞두고 재래시장을 찾아간다. 굴지의 재벌 둘째 딸인 대선후보 부인은 시장에서 물건을 집어 들고 “죽은 시장 저희가 살릴게요. 재래시장도, 경제도”라며 살인미소를 날린다. 강동윤은 “꿈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지지를 호소한다. 두 사람은 떡볶이를 먹고 국밥을 먹는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앞에서 완벽한 ‘서민 코스프레’에 들어간다. 강동윤의 가짜 서민행보에 지지율은 급상승한다. 하지만 이 여당 후보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선거 막판에 폭로돼 몰락한다는 게 줄거리다.
지난주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주자들의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시내버스 요금과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을 묻는 질문에 후보들이 정답을 맞히지 못한 것은 ‘서민 코스프레’의 실상을 웅변한다.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몽준 의원이 “시내 버스요금이 70원”이라고 답변한 것과 흡사한 풍경화다. 지역구의 민생현장을 찾아갈 때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 봤으면 망신은 당하지 않을 일이다. 차라리 버스 탈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편이 떳떳하다. 그에 앞서 이회창 대선 후보가 ‘옥탑방’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도 마찬가지다.
‘서민 마케팅’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 선진국 정치현장에서 ‘서민 마케팅’ 전략이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정착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여론조사나 선거 결과를 보면 서민층에서 새누리당과 박근혜 의원의 지지가 야당이나 야당 후보보다 더 높다는 점이다. ‘1%가 아니라 99%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야당이 서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아이러니다.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란 저서에서 밝혀낸 것에 해답이 있을 듯하다. 미국 상황과 똑같지는 않지만 보수진영의 교묘하고 집요한 정치 조작술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점이 많다.
여기서 야당의 숙제가 드러난다. 말로만 정부 여당을 비판할 게 아니라 진정으로 서민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서민들이 왜 야당을 찍어야 하는지 정책 대안을 구체성과 일관성, 설득력 있는 메시지로 만들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행여 선의의 당의정을 입힌 야당의 정책이 도리어 서민의 삶을 옥죄는 모순을 보이지 않는지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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