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고승덕 의원이 달구치고 싶을 정도로 미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당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시각이 대다수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대세론에 안주해 있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진영은 그로기 상태에서 급소에 마지막 결정타를 얻어맞은 기분일수 밖에 없을 듯하다.
오세훈에 대해선 순항하던 당의 미래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대종을 이룬다. 정치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질 게 뻔한 무모한 싸움을 벌였다는 분석이 바탕에 깔렸다. 본인과 참모들의 정치판을 읽는 시력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느냐는 개탄이 곁들여진 것은 물론이다. 지난해를 되돌아보면서 오세훈의 행보를 복기해 보면 화가 치민다는 사람들이 한나라당 내에선 여전히 많다. 무상급식문제를 시의회와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못하고 주민투표에 부친 것은 자신의 향후 대권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탓이 크다는 것이다.
<고승덕 기자회견 자료 사진>
한나라당 입장에서만 보면 오세훈의 헛발질이 정치판의 판도라 상자를 연 것이나 다름없어 두고두고 아쉬울 게다. 오세훈의 오판이 없었더라면 안철수·박원순 현상도, 변혁과 쇄신 바람도, 한나라당의 급격한 추락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명타가 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사건도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없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고승덕 의원의 ‘전당대회 돈 봉투’사건 폭로도 당내에선 ‘자기 살려다 당 전체를 죽이는 꼴’이라는 비판의 화살이 뒷담화 형태로 빗발친다. 광적인 한나라당 지지자들도 혀를 차기는 마찬가지다. 현재로선 4월 총선의 초대형 악재라는 평가에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2003년 말 한나라당을 벼랑으로 몰아넣었던 ‘차떼기 사건’에 버금간다는 우려도 들려온다.
고승덕의 폭로 사건에는 대부분의 정치적인 사건이 그렇듯이 음모설이 난무한다. 고승덕의 폭로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게 주류다. 자신의 지역구에 문제의 인물인 박희태 국회의장의 친척이 유력한 총선 예비 후보로 등록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나돈다. 여기에다 공천 작업을 눈앞에 두고 고승덕이 지난날의 나쁜 관행을 타파하는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까지 노려 철저하게 계산한 행보라는 설도 흘러나온다. 한술 더 떠 공천 경쟁에서 특정 계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려는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설까지 있고 보면 점입가경이다.
<오세훈 자료 사진>
하지만 오세훈·고승덕 모두 소속 당에 누를 끼쳤을지 몰라도 대한민국 정치판의 변혁에 다이너마이트가 된 것만은 분명해 매우 역설적이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더구나 고승덕의 경우 공개과정을 보면 처음부터 이기적인 목적이 개입됐던 것은 아니라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미 지난해 12월 한 신문 칼럼에서 전당대회를 다시 여는 것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이번 돈 봉투 사건을 이유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격변이 바람직한 결실을 맺는다면 두 사람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정치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하는 셈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자충수를 둔 일이라고 벌레 씹은 듯 한 모습으로 다투고 분열할 게 아니라 후진 정치와 정당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럴 경우 당장은 고통스럽고 치명상이 두렵다고 여길지 모르나 유권자들은 경종과 더불어 응원가를 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정 세력의 물갈이 전략이나 계파싸움 쯤으로 전개되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다. 진실규명이 선행돼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한나라당은 낙타의 지혜를 배움직하다. 낙타는 위기를 맞으면 절대로 꼼수를 쓰지 않고 정공법으로 승부수를 던진다고 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쉴만한 그늘도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낙타는 오히려 얼굴을 햇볕 쪽으로 마주 향한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등을 돌리면 몸통의 넓은 부위가 뜨거워지지만, 마주 보면 얼굴은 햇볕을 받더라도 몸통 부위에는 그늘이 져 오히려 뜨거움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정당이든 참모습은 분열될 때 보인다는 헤겔의 통찰도 함께 새겨둘 만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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