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세의 등반가가 알프스에서 폭설로 길을 잃었다. 13일 만에 가까스로 구조된 그는 산을 내려오기 위해 매일 12시간씩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고작 반경 6km 안에서 빙빙 돌았을 뿐이었다.
눈을 가리고 걸으면 누구도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걷지 못 한다. 20m정도 걸으면 목표방향과 4m정도의 차이가 생기며, 100m 정도를 가게 되면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게 드러난다. 이런 현상을 환상방황(環狀彷徨), 또는 윤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부른다. 등산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독일어 ‘링반데룽’(Ring Wanderung)이 바로 이것이다. 환상방황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링반데룽’에서도 매우 상징적으로 그려졌다.
환상방황은 과학적 실험으로도 입증됐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잔 소우만 박사팀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숲속과 사막에서 목표지점을 찾아보라고 했다. 연구팀은 먼저 위성항법장치(GPS)를 몸에 부착한 참가자 6명을 숲속에 떨어뜨려 놓았다. 이들은 해가 보일 때는 똑바로 나아갔지만, 태양이 구름 뒤로 숨어 버리거나 어두운 밤에는 곧바로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며 걷던 사람들은 출구를 지나치기도 했다. 실험은 사하라 사막에서도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사막에서도 해나 달이 보일 때는 똑바로 걸었지만 구름 뒤로 숨으면 곧 방향감각을 잃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숲과 사막에서 원을 그리며 걷고 있으면서도 목표방향을 향해 똑바로 걷고 있다고 하나같이 착각했다.
<뉴시스 자료 사진>
환상방황 현상을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들은 안철수 ‘폭풍한설’을 만나 방향감각을 상실한 기성 정치권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변화와 혁신을 외쳐대며 새판 짜기에 분주하지만 결국 원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도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계가 보이는 집권 한나라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권탈환을 노리는 야권이 제대로 된 혁신을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토대를 어연번듯하게 건축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를 한다면서 많이 보던 인물에다 기시감(데자뷔)이 느껴지는 콘텐츠로 포장만 바꾼다면 지난날 열린우리당이나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을 만들 때와 다를 게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게다. 찢어졌던 사람들이 선거에 앞서 정치공학적으로 합치는 모양새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지금까지만 보면 얼마나 달라질지 시야가 불투명하다.
스스로는 환골탈태를 외치며 변화와 개혁을 위해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고정관념이나 과거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언저리에 머물러 있기 십상이다. 정강·정책은 물론 당 체질의 상전벽해 같은 변혁이 절실하다. 선명하면서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을 적실하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내장식을 좀 고치고, 종업원 몇 명과 간판을 바꿔 신장개업했다고 고객들이 감동하기 어려울 터이다. 수준 높은 주방장 교체를 통한 음식의 질 개선에다 서비스정신에 이르기까지 획기적인 변화가 요긴하다.
눈을 가리고도 똑바로 가기 위해서는 30보쯤 걷고 난 뒤 잠깐 멈추고 새로 출발하는 기분으로 30보쯤 걷기를 반복해 나가는 것이 비결이라고 한다. 새판짜기에 골몰해 앞뒤를 돌아볼 새가 없는 정치권이 새겨볼 말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환상방황을 하지 않는 방법은 나침반을 보며 가거나 북극성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 두 가지다. 당초 정한 목표대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멈춰 점검하면서 링반데룽에 빠지지 않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호를 이끌고 남극대륙 탐험에 나섰다가 조난을 당했다. 다들 죽었으리라고 포기했지만 섀클턴은 1년 여 만에 극적으로 살아나왔다. 탐험대를 이끌고 극한의 상황을 헤쳐 나온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라’였다. 총선과 대선 승리라는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할 중·장기적인 구조변혁까지 염두에 두고 당의 혁신을 채비해야 또다시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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