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야말로 진정한 ‘애정남’이다. 다툼과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하고 소송으로 비화하면 사법부가 ‘마지막 애정남’(물론 여성판사도 포함한다)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그 콘서트의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애정남)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일까지 명쾌하게 판결해줘야하는 의무를 지닌 게 판사다.
그런 판사들의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 ‘부러진 화살’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면서 ‘종결 애정남’의 권위와 신뢰가 화살처럼 부러지고 있다. ‘부러진 화살’의 실화인 ‘석궁 테러사건’뿐만 아니라 앞서 상영된 영화 ‘도가니’의 실제 사건, 일련의 최근 판결들이 겹쳐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다급해진 ‘부러진 화살’의 주심 판사가 위법을 무릅쓰고 선고 전 합의 내용을 공개하는가 하면, 지난주 말엔 사법부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이 발끈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 발표만으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정의의 여신상--자료 사진>
인기 영화를 통해 ‘왜곡된 사법 정의’를 고발한 사례는 6년 전에도 있었다. 2006년 초 개봉한 영화 ‘홀리데이’는 ‘법은 강자의 정의’라는 등식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1988년 교도소에서 탈주한 뒤 경찰과 대치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강헌의 마지막 절규는 ‘무전유죄·유전무죄’(無錢有罪·有錢無罪)라는 세간의 속설이었다. 그가 남긴 ‘돈 없으면 죄가 있고 돈만 많으면 죄가 없다’는 말은 당시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를 꼬집는 유행어가 됐다. 탈주범 지강헌은 인질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 “전경환이 나보다 죄가 가볍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이 556만원을 훔친 죄로 7년 징역형에 10년 보호감호형을 선고받은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는 70억 원의 공금을 횡령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2년3개월 만에 풀려나는 걸 보면서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후 사반세기가 가까워오지만 우리 사법부는 수천·수만 번이나 회자되었을 ‘무전유죄·유전무죄’라는 불신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유전무죄·무전유죄’와 동행하는 건 ‘권력이 있으면 무죄이고 권력이 없으면 유죄’(有權無罪·無權有罪)라는 말이다. 사법부에는 정치·이념적 편향에다 무례와 불성실한 재판행태까지 덧붙여져 사법 불신의 담장이 높아만 간다. 돈이나 권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법의 저울대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식에 젖어 있는 국민들이 여론조사 때마다 열 사람가운데 여덟·아홉 명에 이르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남는다.
‘소액을 횡령한 서민의 죄’는 엄중하게 처벌되는 반면,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고액을 횡령한 재벌의 범죄’는 적발되는 순간부터 집행유예나 조기 석방을 예단하는 것이 오늘의 국민정서다. ‘사회적 지탄을 이미 받았음을 감안해 형을 낮췄다’는 어떤 재벌범죄의 판결문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단순히 해당 공판 기록의 진실과 객관성만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안일한 관행을 겨누고 있는 것임에도 반성과 구체적인 개선의 기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모르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얼마나 많을까.
물론 진실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진실은 여러 얼굴을 지닐 때도 있다. 법은 ‘얼마나 억울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럴 권리가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 실체적 진실과 법적 진실이 달라 법적 관점이 진실 발견 과정에서 맹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신 판결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사법 정의’를 입에 올리기 어렵다. 법원 청사에 정의의 여신상을 세운 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법치국가 최후의 보루이자 진정한 ‘애정남’인 사법부의 판결마저 개그 프로그램 ‘애정남’의 결정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웃을 일이 아니라 눈물이 흐르는 비극임에 분명하다. 사법부가 불신 해소를 위해 추진 중인 국민과의 소통계획도 신뢰성이 바탕에 깔려야 약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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