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유럽의 부활

1998-12-18


”90년대 초반 세계의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아시아·태평양시대의 도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순간에도 미국 MIT대의 석학 레스터 서로 교수는 21세기를 유럽이 주도할 것이라고 우기다시피했다.

그는 특히 미국, 일본, 유럽의 경제전쟁에서 승산은 유럽에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했다. 서로는 문명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아시아 대륙으로 옮겨 간다는 이른바 「문명서진설(文明西進說)」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는 「세계경제전쟁」이라는 명저를 펴낸 직후인 92년 10월 기자와 인터뷰할 때도 아시아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여러 각도에서 진단하면서 특유의 탁견을 펼쳐 보였다.

유럽의 경제적 통합에 대한 회의론이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을 당시 그가 유럽의 저력을 그처럼 높이 산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21세기의 승자로 유럽을 꼽는 이유로 미국과 견줄 수 있는 거대한 인구,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첫번째로 들었다.

둘째는 수많은 호조건을 지닌 나라들이 하모니를 이루면 이상적인 상호보완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생산 측면에서 세계 최강이며, 이탈리아는 세계의 디자인을 선도하는 나라이고, 프랑스는 패션과 기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영국은 세계자본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좋은 예다. 경쟁력의 핵심인 과학기술적 측면에서도 독일은 산업기술, 프랑스는 대형복합기술, 영국은 기초과학이 강한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유럽이 자랑할 만한 또하나의 장점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경제적 통합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앞서는 이유로 서로는 이 통합을 내세웠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그의 선견지명은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유럽의 기업들이 지난 수년간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구조개편과 경영쇄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적 통합작업과 경쟁력을 가속화할 단일통화 유로의 공식출범을 눈앞에 둔 유럽은 지난날의 고질적인 「유럽병」을 치유해 나가면서 한층 자신감을 갖고 용틀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유로화는 국제통화질서를 독주하다시피 주도해온 미국의 달러에 대한 결정적인 견제세력으로 떠올랐다고 누구나 인정하게 됐다.

그 뿐만 아니다. 이른바 「제3의 길」로 일컬어지는 유럽의 사회적 자본주의 모델은 미국의 순수시장적 자본주의에 바탕한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항마로 나섰다. 유럽 자본주의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 자본주의에 비해 휴머니즘이 담겨 있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라고도 불린다. 유럽은 이밖에 여러 분야에서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미, 일, 유럽이 펼치는 세계 경제 삼국지에서 한때 미국과 일본의 싸움으로 좁혀졌다고 여겨지던 경제전쟁은 확실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유럽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는 심각성과 진지성이 부족한 듯하다. 정부나 민간 모두 말로는 유로화 출범에 대비한다면서도 행동은 주도면밀하지 않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경제위기라는 불끄기에 여념이 없다는 점을 민·관이 공통적으로 실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더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경제는 유럽과는 상대적으로 덜 친숙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 때가 늦었다.

이제 우리는 유로화에만 대비할 게 아니라 「유럽의 부활」이라는 한 차원 높은 곳에 초점을 맞춰 접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정부의 외교와 기업의 투자·교역전략에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물론 연구기관과 인력의 확충 등 종합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할것 같다.

온갖 회의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른 민족끼리 통합을 이뤄가는 유럽은 남북통일을 일궈내야 하는 우리에게 또다른 측면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