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유연성의 시대

2000-05-03
"살아남는 종(種)은 강한 것도,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오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 뿐이다". 찰스 다윈이 140여년 전 진화론을 제기하면서 한 얘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유연성을 가진 생물만이 오늘날 지구상에 상존한다. 덩치가 크고 힘센 종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공룡은 뼈와 화석으로만 남아 있다.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새 밀레니엄을 주도할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떠오른다. 격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유연성이 비교우위를 점한다는 학설이 21세기에는 더욱 주목받을 만한 조짐을 보여준다.

명망있는 문명사학자들은 이미 이를 예견하고 있다. 클린턴 미 행정부 1기 내각에서 국방차관보를 지낸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박사같은 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한 '경성국가'가 아니라 학문.사상.예술이 중심이 되는 '연성국가'가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어떤 이들은 부드러움과 유연성의 상징인 여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 패러다임의 시험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대표주자는 요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한창 '뜨고 있는' 3종목이다. 386세대로 표상되는 젊은 정치개혁 세력,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벤처기업, 제5의 권력으로 일컬어지는 시민운동단체(NGO)가 그것이다.

너도나도 뛰어들고 보는 벤처기업들 가운데서는 기껏해야 10% 내외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나라 안팎에서 경보음이 쏟아진다. 심지어 1%에도 못미칠 것이라는 극단론도 나온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생존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예상밖으로 낮다는 노란불 신호는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 수없이 명멸해간 생물들 못지않게 많은 벤처기업들이 거품처럼 사라져 갈 것이다. 힘과 규모의 논리만으로는 '노아의 홍수'와도 같은 벤처산업의 격랑에서 헤쳐나오기 어렵다. 궁극에는 급변하는 환경에 임기응변과 유연성으로 적응하는 극소수만 적자(適者)로 생존할 것이다. 마치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때처럼 뒤질세라 '묻지마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웹경제학자 에번 슈워츠는 '디지털 다위니즘'으로 경각심을 일깨운다. 시민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16대 총선과정의 성공에 고무돼 비 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늘어날 시민단체들에도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은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있는 시민운동이지만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지 못하면 멀지않아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가정(假定)을 뜨거운 가슴속에 새기는 게 좋을 듯하다.

엘리트적 교화보다 시민과 호흡을 함께 하며 그들 속으로 파고 드는 부드러움의 묘미가 비결일 수 있다. 만에 하나 선(善)의 경직성과 정의(正義)의 독선이 악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전통과 화끈함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의 유혹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386세대의 정치인들만 해도 그렇다.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기댓값은 잔뜩 부푼 풍선같다. 그들 스스로도 비상한 각오로 16대 국회의 개원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상한가를 치고 있는 '젊은 피' 정치인들이 앞으로 모두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행여 그들만의 또다른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무리수를 둘 경우 여망을 저버릴 개연성도 적지 않다. 정치의 세계야말로 원칙을 중시하되 신축성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무대다. 잘 나갈 때일수록 신중하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혜안을 필요로 한다. 민초들은 대쪽같은 강인함을 주문하곤 한다. 거기에 고의성없는 함정이 내재할 수 있다.

격변기에는 한 개인도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프로테우스형 인간'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처방전을 내놓는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조직에도 이 해법이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시키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바탕한 프로테우스형 인간이다. 프로테우스적 유연성은 자칫 기회주의로 비쳐지기 쉽다. 이 때문에 누구나 선택을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진정한 경쟁력을 갖는다.

김학순 / 편집국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