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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어떤 좌절

2000-03-03
정치는 아무런 준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설파한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론이 한국의 정치 신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며칠전 공천을 반납한 민병철 중앙대 겸임교수와 윤방부 연세대 의대 교수의 사례는 이를 처절하게 반증한다.

"정치는 준비가 된 사람이 해야하며 섣불리 뛰어들어서는 안된다". 민교수의 비감어린 경험담이다. 4월 총선 출마 제의를 받은지 하루만에 수락한 자신의 단견과 '현실의 벽'이 그의 회한 한마디에 녹아나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결짓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면역과 이해가 부족함을 절감했다". '6일간의 외도'를 한 윤교수의 경우도 표현만 다를 뿐 좌절의 이유는 흡사하다.

존 스튜어트 밀의 영국 사례는 이들과 정반대다. 그가 이른바 '젊은 피'를 지나도 한참 지난 60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할 때의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선거구 유지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를 수락할 때 그는 4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선거운동에 돈을 쓰지 않는다. 둘째 선거운동도 하지 않는다. 셋째 당선이 되어도 지방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넷째 당의 의견에 구속받지 않는다. 가히 이상주의의 극치를 보는 듯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있게 말했다. "이런 조건으로는 전지전능한 신도 당선되기 어렵다"
선거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 것과 정반대였다. 흔히 책상물림으로 여기는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밀의 당당한 승리로 나타났던 것이다. 자신이 내세웠던 조건들을 그대로 지켰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세기 초의 영국과 정치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정치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과 사정이 사뭇 딴 판인지는 모른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인 데다 특수한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밀과 흡사하게 지명도가 높은 한국의 두 교수가 겪은 좌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무대인 정치판에 멋모르고 뛰어들었던 두 지성인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준비없는 신인의 한계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계 전문가들이 자신의 특정분야에서 곁눈을 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파도록 만들어주는 분위기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이 정치로 통하도록 돼 있는 한국사회의 풍토가 전문가들의 외도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 역시 새삼스럽지 않다. 유혹의 손길에 넘어가지 않는 것은 당사자들의 1차적인 책임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지명도를 갖춰 싹수만 보이면 온갖 당의정(糖衣錠)을 동원해 끌어들인 뒤 '1회용 반창고' 신세를 만들어 버리는 정치권의 행태가 근절되지 않는 한 윤방부.민병철교수의 전철이 되풀이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윤교수를 실망시켰던 선거브로커들의 '돈요구'라는 구태를 통탄하고 꾸짖는 시람들이 훨씬 많다. 깨끗한 정치의 꿈을 펼치려다 4각의 링위에 오르기 전에 수건을 던져버리고 마는 정치 신인들이 예상밖으로 속출하고 있는 게 이번 총선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뿐만 아니다. "바꿔. 바꿔"라는 시민단체들의 외침과는 달리 현실은 기성 정치인을 대체할 신인들이 링위에 오를 자격을 얻고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다. 애초부터 규칙이 신인에게 불리하게 돼 있는 탓이다.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신인들이 문턱부터 좌절을 맛보지 않도록 선거브로커와 유권자들의 구태를 막는 것을 선거관리위원회와 사법당국에만 맡겨 놓을 수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합리한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도 화급하지만 정부와 기성 정치권에는 기대를 걸 수 없는 형편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이들을 압박해 나갈 책무를 시민단체들에 지우고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실정도 유감스럽지만 현상(現狀)이다. 시민단체들이 부담이 많지만 더욱 힘을 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김학순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