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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태생적 보수' 일본의 한계

2000-06-28
엊그제 실시된 일본의 총선결과를 보면서 불현듯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한 대학연구소가 주요 국가 국민들의 유전자(DNA)에 관해 연구한 결과 일본은 속된 표현으로 '튀는 사람'이 나타나기 힘든 나라라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l형과 s형이라는 유전자와 성격의 상관관계를 밝혀준다. l형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다소 특이한 타입이며, s형은 신중.성실하고 신뢰성이 높은 유형이다. 일본인을 조사해 보면 l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1.8%에 불과하다. l형과 s형을 혼합한 유형이 28%안팎이며, s형은 70%에 이른다. 압도적으로 다수인 70%정도는 선천적으로 보수적인 셈이다. 좀더 넓게 보면 약 98%에 달하는 일본인이 어느 정도 또는 매우 보수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결론에 이른다.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회장은 이같은 유전자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일본에서 벤처기업이 융성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진단한다. 때마침 '인간 유전자 지도'로 불리는 인간게놈의 판독결과가 발표된 것을 보면 국민 유전자 연구결과는 호사가들의 흥미에 그칠 일만은 아닌 듯하다.이 연구결과는 '새 천년의 가늠자'라는 거창한 의미가 부여된 첫 총선에서 일본국민이 불만스럽지만 정권교체보다 안정을 선택한 까닭을 원초적 국민성에서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일본 국민의 보수성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조심성과 외국 불신감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있긴 하다. 어쨌든 다소의 세대교체와 야당인 민주당의 약진이 있긴 했지만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국민 특유의 심리가 이번 선거에서도 작용했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같은 선거결과 잇단 국수주의적 망언으로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은 모리 요시로(森喜明) 총리가 이끄는 연립정권이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1990년대의 불과 몇년을 제외하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의 거의 전부를 보수적인 자민당에 국정을 맡겨온 게 일본 국민이다. 한국의 4.13총선을 본받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도 일본에서는 그리 먹혀들지 않았다.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실 자체는 일본 국민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사항이지만, 문제는 그 결과가 이웃나라들에 걱정을 파급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보수우익 개헌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지 않을까 주변국들은 염려하고 있다. 총선 직전 '신(神)의 나라', 천황중심의 국가운영체제를 일컫는 '국체(國體)', 제국주의 시대의 용어인 '총후(銃後)' 등 주목할 만한 발언을 일삼은 모리총리가 국민의 보수성향을 등에 업고 이웃에 우려를 심어줄 개연성이 큰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거 럭비선수였던 모리총리의 행보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러잖아도 오는 9월 도쿄에서는 대표적인 극우인물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지사의 각본아래 '방재훈련'을 빙자한 대규모 '자위대 쇼'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까지 나와 있다. 게다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일본이 안보전략을 한층 보수적으로 재검토할 것이라는 관측도 대두했다. 이미 일본정부는 방위청의 성(省)승격, 자위대의 다국적군 참가, 국기(히노마루)와 국가(기미가요)의 복원, 유사시 법제 정비,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주도면밀하게 군사대국화를 추진중이다. 그들은 이를 군사적 '보통국가'로의 복귀라고 우기고 있지만 이웃나라들이 보기엔 맹목적인 애국심과 협량(狹量)한 군국주의의 부활이나 다름없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로서는 위험하다는 차원을 넘어 차라리 안쓰런 심정이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공동개최, 대중문화개방, 합동군사훈련 실시 등으로 끊임없이 우의를 다지고 있는 두나라가 얼굴을 붉힐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일본정부와 국민이 미국의 한 연구결과처럼 그것을 생래적 한계로 돌린다면 더 할말이 없겠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변화의 에너지를 충전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지구촌'을 흔쾌히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풍요로워졌지만 행복하지 못한 일본'이라는 비아냥도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친구나라 국민의 진솔한 마음이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